[전쟁과 음악] 핀란드의 국민성을 대표하는 ‘핀란디아’
민족애 서린 ‘구국의 음악’ 조국의 독립을 노래하다
시벨리우스, 애국심 고취 위해 작곡 - 국가보다 더 애창되는 ‘국민찬가’
장 시벨리우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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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독립 역시 거저 얻어지지 않았다
독일과 소련의 지배를 받은 북유럽의 마지막 사례다. 핀란드는 국토의 75%가 숲이고 10%가 호수로 1년 중 넉 달이 눈에 덮여 있는 추운 곳이지만, 조국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이들이 사는 행복한 나라다. 힘이 없어 오랫동안 외세에 짓밟혔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고 청렴하며 깨끗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사회복지 국가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선진국이 됐다. 앞서 소개한 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폴란드 못지않게 식민지로서 오랜 시간을 끈기있게 견뎌냈다.
한때 바이킹이 유럽을 주름잡기도 했으나, 11세기 기독교가 전래됐고 13세기에는 스웨덴·덴마크·노브고로드·독일(기사단) 등 열강들이 잠식했다. 이 가운데 가장 영향력을 미친 나라는 강성했던 스웨덴으로 십자군전쟁을 빌미로 핀란드에 진군해 지배를 시작했다. 그러나 14세기 들어 내전에 휩싸이며 주도권은 덴마크로 넘어갔고, 덴마크 주도로 스웨덴·노르웨이가 하나의 연합국(칼마르연합)을 형성했다. 핀란드도 여기에 편입됐다. 16세기 들어 연합은 해체됐고, 핀란드는 다시 스웨덴의 지배권에 들어가 그들의 전초기지가 됐다. 18세기에는 많은 세금을 내야했고 스웨덴의 전쟁에 동원돼 그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19세기에 스웨덴이 물러나고 러시아가 새로운 주인이 되면서, 핀란드에서는 민족부흥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핀란드 언어와 문화를 장려하고, 첫 국회가 출범하는 등 나름의 성과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엔 독일 헤센카젤 공국의 제후국으로 전락하기도 했으나, 독일의 패배로 전후 독립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1939년 독일과 소련은 밀약을 맺어 폴란드를 중심으로 동·서 유럽을 분할 점령하는 것을 서로 묵인했고, 핀란드는 또다시 소련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핀란드인들은 더 이상 외세의 침략을 두고 보지 않았고, 소련을 상대로 두 번의 전쟁을 치른다.
후일 대통령이 된 만네르헤임 장군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1940년 끝내 ‘겨울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원래 소련의 요구보다 더 많은 영토를 잃었다. 그러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1941∼1944년에는 독일의 지원을 받아 두 번째 전쟁(‘계속전쟁’)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전세가 유리했지만 이내 소련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대전 말기인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과 함께 라플란트전쟁에 참가해 한때 우방이었던 독일군을 몰아냈다. 전후 소련은 핀란드의 주요 무역상대로, 핀란드는 소련의 서방무역 창구로 긴요했기 때문에 점차 대등한 관계를 회복했다.
겨울전쟁(Russo-Finnish War)의 핀란드군. 열세였지만 불굴의 투지와 게릴라식 모티(Motti) 전술로 러시아 대군을 분리해 각개격파함으로써 많은 전공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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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정신의 음악 : 2S=시수+시벨리우스
핀란드를 잘 설명하는 ‘3S’가 있다. 핀란드식 사우나(Sauna)와 시수(Sisu), 시벨리우스(Sibelius)다. 시수는 ‘끈질기고 악착같은’ 국민성을 일컫는 표현이고, 시벨리우스는 그런 국민성을 음악에 담은 세계적인 작곡가다. 핀란드 정신이 깃든 음악을 한마디로 ‘시수 + 시벨리우스’로 정의해도 무방한 이유다.
장 시벨리우스 또는 요한 율리우스 크리스티안 시벨리우스(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는 1865년 러시아령 핀란드공국의 스웨덴계 핀란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에선 ‘얀네(Janne)’로 불렀지만, 본인은 음악 활동을 위해 프랑스어 ‘장(Jean)’을 썼다.
5살에 피아노, 15살에 바이올린을 배웠다. 헬싱키음악원(현 시벨리우스음악원)에 입학해 작곡과 피아노를 전공한 그는 졸업 후 베를린을 거쳐 빈에서 유학하면서 브람스 등 유명 음악가들과 관계를 유지했다. 1892년 귀국해 헬싱키음악원의 작곡과 바이올린 교수를 역임하면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국민적 대서사시 ‘칼레발라’, 교향곡 ‘쿨레르보’, 교향시 ‘엔 사가’, 모음곡 ‘카렐리아’ 등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여기서는 교향시 ‘핀란디아’를 집중적으로 소개하겠다.
겨울전쟁(Russo-Finnish War)의 핀란드군. 열세였지만 불굴의 투지와 게릴라식 모티(Motti) 전술로 러시아 대군을 분리해 각개격파함으로써 많은 전공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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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검열 피해 곡명 바꿔 연주하기도
그의 작품은 아마도 ‘민족음악’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사실 핀란드 음악의 기초는 독일 음악가에 의해 처음 마련됐고, 카야누스를 거쳐 시벨리우스에 이르러 완성된다. 시벨리우스는 19세기 말 당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보다 단순화시키는 파격적인 성향을 고수해 많은 음악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핀란디아(Finlandia)’는 ‘러시아에 맞서 투쟁하라’는 선동적이고 격렬한 음률들로 가득하다. 1899년 러시아가 침공해 억압정책을 펴던 시기에 핀란드 역사를 소재로 만든 6부작 연극의 마지막 장 ‘깨어나라, 핀란드여!’에 붙인 곡이 원조다. 이후 피아노를 위한 연주곡으로 편곡(1900년)했다가, 1941년 성가풍의 선율과 가사를 붙인 ‘핀란디아 송가(Finlandia Hymn)’를 작곡, 소련과 싸우는 조국과 국민에게 바쳤으며, 1948년 이를 다시 4부작의 합창곡으로 만들었다. 워낙 저항 색깔이 강하다보니 러시아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곡명을 ‘수오미(Suomi)’ 등 여러 가명으로 바꿔 연주했다.
분노를 나타내는 듯 불안정한 서주(序奏)로 시작해 서정적인 목관악기와 클라리넷의 주제가 높아지다가 금관악기가 등장해 절규하는 클라이맥스를 표현한다. 그러고는 다시 낮은 성가풍의 선율이 점차 고조되면서 장엄하고도 힘찬 피날레로 막을 내린다. 아래는 송가의 일부다.
오, 핀란드여 보아라. 그대의 날이 밝아 오는 것을! 험난한 밤의 장막은 이제 걷히었도다.
떠오르는 태양 빛을 안고 날아가는 아침 종달새의 노래는 이날을 맞이하는 천국의 노래 같도다.
여명이 다가옴에 밤의 세력은 물러가고 우리의 조국에는 새로운 날이 밝아오는도다.
뜨겁고 격정적인 이 음악은 폭정에 시달려온 핀란드 국민들을 위로하고,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는 ‘구국(救國)의 노래’ 그 자체였다. 훗날 전 세계의 모든 합창단이 한 번쯤은 도전해 보는 명곡의 반열에 올랐고, 심지어 개사한 찬송가도 있다. 오늘날 핀란드에서는 독일인이 스웨덴어로 작곡한 국가(우리의 조국)보다도 더 애창되고 있으며, 핀란디아를 국가로 하자는 주장도 많다.
<윤동일 북극성 안보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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