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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중국을 둘러싼 여러 나라의 상황을 일거에 변화시켰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세계 자본주의는 이미 독점 단계로 접어들었고, 국내에서 더 이상 시장을 확대할 수 없었던 자본주의는 해외로 진출해 식민지를 개척하는 등 제국주의로 변화했다. 하지만 19세기 말 이미 전 지구상의 영토가 모두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분할이 완료된 상태에서 자본주의가 뒤늦게 발달한 후발 국가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가운데 독일의 경우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그 발전 속도가 훨씬 앞서갔는데, 이를테면 1870년에 영국과 독일의 공업 생산액이 전세계의 총 생산액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각각 32퍼센트와 13퍼센트였지만 1913년에 접어들면 영국은 13퍼센트로 떨어지고 독일은 16퍼센트에 달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는 서구 열강들이 서로 동맹을 맺고 반대편 진영에서 식민지를 빼앗아 오는 것 이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결국 인류 역사상 최초로 치러진 세계대전의 결과 유럽은 초토화되어 승전국, 패전국 가릴 것 없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에 반해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5년)의 승리로 새롭게 제국주의 세력의 반열에 오른 일본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국력을 떨치고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1914년 8월 4일 영국과 독일 사이에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고 전쟁이 시작된 지 나흘 만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공신으로 정계의 원로였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당시 수상이던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서를 보냈다.
이번 유럽의 대전란은 다이쇼(大正) 신시대의 하늘의 도움이다. 일본은 당장 이 하늘의 도움을 이용하기 위해 거국 일치의 풍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쟁은 그만두고 감세 · 폐세 등 당리당략을 거두어야 하며, 국가 재정의 바탕을 공고히 하고 영국 · 프랑스 · 러시아와 손을 잡아 동양에서의 일본의 이권을 확보하면서 중국의 통일자(統一者)를 손아귀에 휘어잡아야 한다.
이때 위안스카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 여러 나라의 차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황제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라 안팎을 제대로 장악해야 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자금을 주로 외국의 차관에 의지해왔던 것이다.
1840년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거듭된 외세의 침탈로 만청정부의 재정은 고갈될 대로 고갈되었다. 이렇게 곳간이 거덜난 나라를 인수한 위안스카이로서도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어쩔 수 없이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와 눈앞에 닥친 급한 불을 꺼나가야만 했다. 1913년 위안스카이는 국회의 승인도 없이 일본과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5개국으로 이루어진 은행단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약 1억 달러)라는 거액의 차관을 들여왔다. 이른바 중국을 돕기 위한 선의에서 제공한 것이라는 명목 하에 선후차관(善後借款)으로 불리는 이 자금은 중국의 염세와 관세를 담보로 한 것이었다. 웃기는 것은 돈을 빌려준 입장에서 빌려간 측에게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돈을 지출하라고 미리 규정했다는 사실이다.각주2)
위안스카이
이 차관의 용도로 기한이 임박한 외국 차관의 원리금 1,000여만 파운드를 변제할 것, ‘군대의 삭감 · 이동’(실제로는 위안스카이의 무력을 확충하고 내전을 진행시키기 위해 쓰여졌다) 및 임시 군정비(軍政費)로 700여만 파운드를 쓰고 염무(鹽務)의 정리(금번 차관의 상환을 보증하기 위해)에 200여만 파운드를 지출할 것이 규정되었다.
그리하여 그 가운데 “내정비(內政費)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겨우 957만 파운드였음에도 불구하고 담보로 설정된 염세 · 관세 수입에서 지불된 액수는 47년 동안 이자만으로도 약 4,300만 파운드에 달했고, 더욱이 담보 확보를 구실로 관세 · 염세 제도 역시 제국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차관의 담보로 제공한 염세와 관세로 인해 중국 정부는 경제적으로 서구 열강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는 데 있었다. 이후로 관세와 염세는 열강이 직접 받아 일단 부채와 배상금 등을 공제한 뒤 중국 정부에 돌려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관세와 염세, 우편 사업 등은 중국 정부의 지배를 벗어나 하나의 자율적 기관이 되어버리고 그 관리자들 역시 외국인으로 채워졌다. 그 결과 중국 정부의 권위는 극도로 약화되어 외교적인 문제뿐 아니라 중국 내에서 일어나는 반정부 사태나 쿠데타와 같은 국내 문제들마저도 베이징에 주재하는 열강들의 공사관의 승인을 얻어야만 했다. 이제 중국 정부가 열강들에 지고 있는 재정적 부담은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거미줄처럼 중국 정부를 옥죄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1913년 선후차관 협상은 중국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새로운 단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영국과 러시아 등으로부터의 자금과 무기의 원조가 끊어지게 되자 다급해진 위안스카이는 그를 대신해 일본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안스카이와 일본의 관계는 본래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다. 양자의 악연은 멀리 임오군란(1882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위안스카이는 우창칭(吳長慶, 오장경)을 수행해 조선에 들어왔다가 1884년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위안스카이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개화파에게 구금되어 있던 고종을 구출하는 등 공을 세운다. 이후 잠시 귀국했다가 1885년에 리훙장(李鴻章)의 명을 받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總理交涉通商大臣)에 취임하여 서울에 주재하면서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는 와중에 일본, 러시아 등과 경쟁했던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지사일 뿐, 곤경에 빠진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지원을 요구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그 무렵 일본은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 가운데 가장 급속히 성장한 나라였으며, 이렇게 등장한 새로운 제국주의 강국은 세계대전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대륙 진출을 꾀하였던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외교부 차장 차오루린(曹汝霖, 조여림)과 주일 공사 루쭝위(陸宗輿, 육종여) 등에게 교섭을 진행시켰다. 그 결과 일본 측이 원조에 대한 반대급부로 중국에 요구한 것은 위안스카이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흔히 대중국 21개조 요구(21개조로 약칭)라 불리는 일본 측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다.
제1호 산둥 성의 독일 권익 양도와 철도 부설권 요구 등 4개조
제2호 뤼순(旅順, 여순)과 다롄(大連, 대련)을 포함한 관둥저우(關東州, 관동주)의 조차 기간을 99년으로 연장하는 것을 포함한 남 만저우와 동부 네이멍구(內蒙古, 내몽골)에서의 일본의 특수 권익의 승인 등 7개조
제3호 한양(漢陽, 한양), 다예(大冶, 대야), 핑샹(萍鄕, 평향) 석탄 제철회사(漢冶萍煤鐵公司)의 철 · 석탄 사업에 관한 이권 이양 등 2개조
제4호 중국 연안과 도서 지역을 외국에 할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1개조
제5호 중국 중앙정부의 정치 · 재정 · 군사 분야에 일본인 고문 초빙, 경찰의 공동 관리, 병기 구입과 철도 부설에 관한 요구 등 7개조
이것은 대륙 침략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 내 각계 각층의 요구 사항을 모두 종합한 것으로, 당시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으로 곤경에 빠져 있던 일본 내각이 국내의 불만을 중국 침략으로 무마하려는 의도에서 획책한 것이었다. 이 가운데 제5호의 조항들은 중국의 주권을 무시하고 중국의 정치와 재정 · 군사 부문을 일본인 마음대로 오로지하겠다는 것으로 당사자인 중국은 물론 열강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일본은 제5호 7개 조항을 삭제하고 다른 항목들도 내용상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1915년 5월 7일에 최후통첩을 보내는데 그것도 50시간 내에 회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위안스카이는 마음이 급했다. 하루속히 정권을 공고히 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욕심에 눈이 멀었던 위안스카이는 국회의 동의도 얻지 않고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같은 해 5월 25일 정식으로 중일조약이 체결되고 6월 8일에는 양국 간에 비준서가 교환되었다. 위안스카이가 일본 측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인 것은 결국 일본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그의 야욕을 눈감아주고 나아가 적극 지지하겠다고 암묵적으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위안스카이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나라의 문호를 이리떼와 같은 제국주의 세력에게 활짝 열어준 셈이니 중국 인민으로서는 얼마나 통탄할 일이었겠는가.
한편 쑨원은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에게 정권을 넘긴 뒤, 위안스카이를 제거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로 일으켰던 제2혁명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재차 망명 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그는 다시 과거의 비밀결사 형태의 전통적인 조직으로 눈을 돌려 1914년 7월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결성했다. 하지만 당 지도자에 대한 충성 서약 등의 문제로 황싱(黃興, 황흥), 리례쥔(李烈鈞, 이열균) 등과 같은 핵심 구성원들이 이탈하는 등 내부가 분열되어 중화혁명당은 단지 해외 화교 사회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일에만 머물렀을 뿐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떨치지 못했다. 아울러 쑨원 자신도 ‘범아시아주의’와 일본에 대한 동경 및 우호적인 태도 등을 보여 당시 중국 대륙에 대한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에 반발해 형성된 중국 내 민족주의 운동과 멀어지게 되었다.
이 무렵 “20세기 2/4분기에 중국에서 가장 탁월한 지도자가 되었으며 서로 간의 전쟁이 중국 혁명의 형태에 영향을 미쳤던 두 사람이 폭력적 분쟁과 정치적 활동의 묘미를 맛보게” 되었다.각주5)
마오쩌둥은 후난의 공화국 군대에서 사병으로 잠시 복무했는데, 그곳에서 1911년 11월 중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을 창당한 장캉후가 쓴 문건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정치적 입장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그는 훗날 한 기자에게 쑨원을 대통령으로, 캉유웨이를 수상으로, 그리고 량치차오를 외무부 장관으로 하는 정부를 희망했었다고 말했다. 전쟁이 끝나자 마오쩌둥은 중국의 사회 개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로서 정치와 경제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독학에 몰두했다.
······
쟝졔스는······얼마간의 재산을 가진 야망 있는 중국 청년들처럼 그도 일본으로 건너가서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부터 1910년까지 머물렀다. 쟝졔스는 동맹회에 가담했고, 이를 계기로 저쟝(浙江)의 지도자인 천치메이(陳其美, 진기미)의 측근이 되었다. 1911년 11월에 천치메이가 상하이 군사령관(都督)이 되자 쟝졔스는 그의 연대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승진했다. 그는 혁명운동의 일환으로 항저우를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 참가해 용맹을 떨쳤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쟝졔스가 개인적으로 폭력을 사용하게 된 첫 계기는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천치메이와 쑨원에게 반대하는 동맹회 회원의 암살을 교사했거나 집행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결국 위안스카이의 시대착오적인 제제(帝制) 복귀는 실패로 돌아가고 얼마 안 있어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죽었다(1916년 6월). 위안스카이의 사후 그의 세력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돤치루이(段祺瑞, 단기서; 1865~1936년)를 영수로 하는 완 파[晥派, 또는 안후이 파(安徽派)], 다른 하나는 펑궈장(馮國璋, 풍국장; 1859~1919)이 이끌었던 즈리 파(直隸派, 직예파)이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할거하고 있던 크고 작은 군벌들 역시 무시 못할 세력을 형성하고 지방의 군사 · 정치 · 경제를 한 손에 몰아 쥐고는 마치 봉건영주와 같이 군림했다. 특히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진 윈난(雲南, 운남)이나 광시(廣西, 광서) 같은 지역은 거의 독립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위안스카이 한 사람의 야욕으로 인해 남은 것은 여러 나라로부터 끌어들인 나라 빚, 곧 차관(借款)과 불평등한 조약으로 인한 부담 이외에 권력의 공백으로 초래된 혼란뿐이었다.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부터 상명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한국중국소설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작으로는『조관희 교.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부터 상명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한국중국소설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작으로는『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교토, 천년의 시간을 걷다』,『세계의 수도 베이징』과 『중국소설사론』등이 있고, 루쉰의 『중국소설사』, 데이비드 롤스턴의 『중국고대소설과 소설 평점』을 비롯한 몇 권의 역서가 있으며, 다수의 연구 논문이 있다.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부터 상명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한국중국소설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작으로는『조관희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