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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담보 대출의 남발에서 시작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 '빅 숏(Big Short)'. 금융시장 붕괴를 감지하고 반대로 움직인 월가의 괴짜 4명의 이야기다. [중앙포토]
[투자은행의 세계] 탈진실(Post Truth) 시대의 금융시장
“우린 ‘사기의 시대(era of fraud)’를 살고 있어. 월스트리트·기업·정부 모두 사기야.”
2006년 모기지 시장 붕괴에 베팅해 천문학적 수익을 거둔 헤지펀드 매니저 마크 바움은 허탈하게 말한다. 2015년 개봉한 영화 ‘빅 숏(Big Short)’의 마지막 대사다.
이 영화는 사상누각이던 모기지 채권의 실상을 간파하고 시장의 집단 심리에 반하는 투자를 한 헤지펀드 매니저들의 이야기다. 바움의 말처럼 세상에 만연한 ‘탈진실(post-truth)’을 비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지난해 6월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그리고 11월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객관적·합리적 사실이 아닌 주관적 감정·신념에 호소하는 것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 상황’을 의미하는 탈진실이 주목을 받았다.
최근에는 ‘양방 간에 경합하는 사실(competing facts)’이라는 법률 용어인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1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모인 인파를 놓고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역대 최다 인파”라고 주장했다. 주류 언론이 사진 등을 근거로 “거짓말”이라고 반박하자 캘리언 콘웨이 백악관 선임고문은 “스파이서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대안적 사실을 제시한 것”이라고 두둔했다.
객관적 사실은 말 그대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면 대안적 사실은 주관적 해석에 기초한 주관적 사실이다. 양방의 관점이 달라 생기기 때문에 단칼에 참과 거짓을 나눌 수 없다. 모든 사람은 객관적 사실을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준거 틀에 맞춰 해석해 주관적 사실을 만든다. 다양한 대안적 사실이 생겨나는 것이다.
금융시장에서 객관적 사실은 대부분 데이터 형태를 띤다. 주기적으로 발표되는 경제·금융 지표가 대표적 예다. 전문가들은 이를 바탕으로 경제와 금융시장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해석한 다음, 미래를 예측하는 대안적 사실을 내놓는다.
2006년 연준·투자은행 모두 위기 징후 무시
문제는 지표들이 서로 상반된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고, 분석자의 주관적 해석이 개입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최근 소비를 비롯해 확연히 침체된 내수 지표를 보면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를 예측할 수 있는 반면, 미국 금리 인상 그리고 고공비행 중인 가계 부채의 양적 관리 필요성을 감안하면 금리 인상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어느 지표에 더 무게를 두고 결론을 낼 것인지는 분석자의 주관적 판단에 달려 있다.
금융시장은 ‘펀더멘털(경제 또는 기업의 기초 체력)’과 ‘시장 심리’로 움직인다. 효율적 시장 이론에 따르면 펀더멘털이 항상 이기는 시장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 제한으로 시장 가격은 상당 기간 펀더멘털과 동떨어진 움직임을 보일 수 있고, 그 틈을 시장 심리가 비집고 들어온다. 그 와중에 일부 전문가는 탈진실을 목적으로 시장 심리를 조작하기 위해 객관적 사실을 왜곡한다. 반면에 시장 심리에 반하는 의견은 객관적 사실을 기반으로 내린 합리적 판단일지라도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006년 미국 20개 주요 도시의 주택 가격 수준을 나타내는 케이스-실러(Case-Shiller) 지수는 2000년 100에서 출발해 206을 찍었고, 2000년 60% 수준이었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95%에 달했다. 그렇지만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연준)를 포함한 대다수 전문가 집단은 “주택 가격 상승은 탄탄한 경제 기초 여건을 반영하며 전국적인 동반 급락은 역사적 전례가 없다”는 의견을 내놨다. 1990년대 후반 닷컴 버블 당시 “산업혁명과도 같은 기술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주가는 계속 오른다”며 기술주 투자에 비이성적으로 뛰어들게 했던 악습을 반복한 것이다.
최고 금융전문가인 월스트리트 투자은행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찰스 프린스 씨티은행 최고경영자는 “음악이 연주되는 한 당신은 일어나서 춤춰야 한다”며 고위험 투자를 이어갔다. 투자은행들은 시장의 광기에 취해 ‘이번에는 다르다’며 위기의 징후를 무시했다. 그 후 탈진실 금융이 어떻게 패닉(panic)과 붕괴(crash)로 이어졌는가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닥터 둠, 최근 “눈사태처럼 무너질 것” 경고도
탈진실을 노린 루머와 가짜 뉴스는 금융시장에서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허구가 꼬리를 물다 보면 위기를 부르고, 허구에 속아 거래하면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바로 뒤따른다. 금융 감독기관이 눈에 불을 켜서 감시하고, 모든 시장 참여자가 팩트 체크에 열심인 이유다.
최근 우려되는 점은 그동안 의심치 않던 성역인 객관적 사실, 즉 데이터 자체에 대한 도전의 기미가 보인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식 실업률 4.8%는 거짓이고 진짜 실업률은 35%, 아니 42%까지 달한다”며 ‘대안적 데이터’를 언급한다. 또 “무역적자 규모도 거짓”이라며 산출 방식을 수정할 뜻을 비치고 있다. 실업률은 높이고 무역 적자는 부풀리는 방식으로 지지층의 감정에 호소해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의도가 다분한 탈진실의 극단이라 할 수 있다.
탈진실의 금융시장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시장 심리에 반하는 역발상(contrarian)의 관점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모두가 같은 배에 타고 있는 건 아닌지 늘 경계하고, 강한 확신을 의심해야 한다. 물론 시장에서 다수와 반대의 길을 가는 것은 여러 모로 불편한 일이다. 영화 ‘빅 숏’의 또 다른 헤지펀드 매니저 베리 박사도 투자자들의 불만이 쏟아지고 손실이 불어나던 상황을 고려할 때 모기지 시장의 거품이 조금만 늦게 꺼졌다면 파산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늘 함께 있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은 첫 번째 경계 대상이다. 지난 금융위기를 통해 부동산 불패의 환상이 깨졌다. 이제는 금융위기 이후 상수로 여겼던 저금리가 변수로 다가올지 모른다. 워렌 버핏은 “물이 빠지면 누가 발가벗고 수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저금리의 거품이 빠지면 펀더멘털의 민낯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정보를 습득하는 것도 중요하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이 사는 세상처럼 내가 접하지 못했던 측면이 존재하고, 그 세상의 사실은 내가 아는 사실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주식이 대세인 지금, 이 시대 최고의 비관론자 ‘닥터 둠’ 마크 파버 박사에게도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다우지수가 최고점을 거듭 경신하던 지난 2월 마지막 주 파버 박사는 “미국 주식은 눈사태처럼 무너질 것”이라고 역설했다.
첫댓글 저금리의 거품이 빠지면 펀더멘탈의 민낯이 드러난다 는 대목에 오싹하네요.
그런데 그것이 세상 이치이기도 하네요. 꼼수는 언젠가는 밝혀지게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