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을 오르며 최 건 차
올해로 6·25전쟁 발발이 어느덧 74주년이 되었다. 그리고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간 자주 내렸던 비가 뜸해지는가 싶더니 일찍부터 찾아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우리 서수원신협 일반산악회에서는 매월 셋째 주 화요일에 실시하는 6월 정기산행에 나섰다. 지난 4, 5월은 남녘 청산도와 가까운 괴산 산막이옛길을 트레킹했기에 하이킹이 그리워지는 것 같다. 이에 산행의 밸런스를 조절할 필요를 느껴 경기도 일원에서 상당히 높고 산세가 대단하다고 알려진 용문산을 오르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국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인민군과 중공군을 물리치느라 혈전을 벌렸던 전적지가 많다. 오늘 우리가 오르고 있는 용문산도 그런 곳 중의 한 곳이다. 미군이 주력이었던 인천 상륙작전과 낙동강 전투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국군 6사단은 서울을 지켜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보다 더한 것은 중공군에게 풍비박살 되어 형편없는 약체로 여겨져 6사단이 아이러니하게도 강군이 된 것이다. 사창리에서 지지 멸렬 퇴각했던 6사단 1개 연대병력으로 용문산을 지켜내고, 지원군과 함께 계속 밀고 올라가 우리 국군은 물론 참전군 전체에 사기를 진작시키는 마중물이 되었다.
나는 6·25전쟁을 심하게 겪고 베트남 정글에서도 싸웠기에 6월이 되면 가슴 아린 회상에 젖는다. 용문산을 한여름과 한겨울에 몇 차례 등반하면서 가을에는 문학기행으로 찾았다. 특히 용문산 전투에 대하여 익히 들은 바가 있어 이곳에 올 때마다 가슴이 저려 머리를 숙이게 된다.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중공군을 물리치려는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선배 용사들의 넋을 추모하는 기도를 드린다. 당시 국군 6사단은 사창리에서 중공군에게 마구 밀리면서 병사들끼리 산발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사단 마크가 육각형의 푸른별인 6사단은 비참하게 패배했다. 미군이 준 무기와 장비를 몽땅 잃어버리고 사단이 무너진 채로 용문산으로 피해 들었다. 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사단 규모는 무너졌지만, 병사들 대부분이 생명을 부지한 상태여서 모아진 병력으로 중공군과 맞서 싸워보기로 했다. 중공군은 3개 사단으로 국군 6사단을 쉽게 처리했기에 여세를 몰아 5월 춘계 대공세로 서울을 점령하려는데 생각지 않았던 걸림돌이 생겼다. 사창리에서 대패하고 흩어졌던 국군 6사단이 용문산에서 재집결하여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일전을 불사할 각오를 불태우며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6사단 장병들은 철모에 ‘決死’라고 써 붙이고 더는 물러나지 않고 용문산에서 중공군을 쳐부수고 죽겠다는 결의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미군이 무기와 탄약 장비를 아낌없이 지원해주고 있었다. 중공군은 자기들에게 패배한 국군 6사단이라는 걸 알고 용문산을 공략했는데, 오히려 죽기를 각오한 국군에게 패배를 당하고 아예 북으로 쫓기게 되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계속 추격하고 밀어붙여 중공군 3개 사단 병력을 파로호에 수장시켜버리게 된 것이다. 비겁할 정도로 겁장이었던 6사단이 탈골 쇄신하여 최강의 부대가 되었고, 중공군은 기세가 꺾여 휴전을 서둘러야 할 형편이었다.
조금 앞서 서부전선에서도 승전보를 올렸다. 미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군의 분전으로 중공군을 물리치고 지평리를 지켜냈다. 그리고 임진강을 방어하던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가 괴멸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3일간 설마리 고개를 막아내어 적이 서울로 진입하려는 것을 지연시켰다. 나는 연전에 파주에 갔다가 설마리 계곡에 있는 영국군 전적지를 찾아가 그곳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영국군을 추모하고 기행문을 썼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남침전략이 급반전되고 있었다. 낙동강 전투와 역사적인 인천 상륙전의 승리 이후, 용문산과 지평리에서 승세를 잡고 설마리에서 용전분투한 영국군을 거울삼아 밀리기만 했던 국군과 유엔군의 사기가 상승하게 되었다. 아군은 계속 치고 올라가 태극기의 중간선처럼 그어진 휴전선까지의 국토를 확보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연전에 지평리 전적지도 찾아 전사한 미군과 프랑스군을 추모하는 글을 썼다. 이번에는 용문산에서 국군 6사단 1개 연대가 중공군을 격파하고 계속 몰아붙여 ‘파로호’에 몽땅 수장시켜 버린, 전사에 빛나는 엄청난 역사를 되새겨 보고 있다.
오늘은 날씨가 어지간히 무덥다. 가파른 계곡 험한 너덜 암반지대를 가상의 적지로 여겨 돌파하겠다는 각오로 오른다. 이곳에서 목숨을 버린 용사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두어 시간 만에 ‘마당바위’에 도착했다. 1951년 5월 중순 이곳에서 우리 국군들이 작전 회의를 하고, 중공군을 물리치고서는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참모들이 모여 승전 회식을 가졌었지 않았겠나 싶다. 우리 일행도 정상을 꼭 점령하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하고서 전진을 계속한다. 무더운 날씨에 숨이 턱밑에 찬 것을 이겨내며 드디어 용문산 꼭대기에 올라, 파로호 쪽을 바라보며 인증사진을 찍고 하산을 재촉했다. 202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