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를 배우며
이명희
아침저녁으로 신량(凉)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태풍이 지나가고 많
은 아픔들이 남은 자리에 가을은 선뜻 다가 왔다. 고즈넉한 달빛은 내
뺨을 어루만지고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쓸쓸함을 더해 준다.
뒷마당에 우뚝 서 있는 감나무는 채 익지도 못할 나약한 열매들을 툭
툭 떨어뜨리고, 바로 옆의 커다란 밤나무는 터질듯이 살이 오른 알밤
들을 하나 둘씩 내뱉어 놓는다.
아! 결실의 계절이구나.
바흐의 무반주 첼로) 곡을 틀었다. 우수에 젖은 이 곡을 듣고 있노
라면 추수 후 빈 들판을 지키는 허수아비처럼 외롭고 쓸쓸함을 더해주
기도 하고, 자연의 온갖 신비함을 들려주기도 하며 내 가슴에 무한한
여운을 남긴다.
집 앞에 펼쳐져 있는 논과 밭에는 누렇게 벼가 고개 숙이고, 집안에
작은 채마전에는 응달이라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붉은 고추가 제법
눈에 띄게 달려 있다. 뜨겁던 태양 빛을 견디며 온갖 비바람도 맞서
싸워 이겨낸 그것들을 보며 자신을 뒤돌아본다. 알알이 속살을 찌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할까? 순간 순간을 위해 사는
사람처럼, 조급한 마음으로 참아내지 못하는 아픔 때문에 일그러진 삶
을 산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럽다. 이것저것 배운다고 드나들며 헛
된 욕심으로 결실은커녕 마음만 어수선한 것은 아닐까? 그래도 그 점
에 대한 후회는 없다.
수필을 쓴다고, 그림을 그린다고, 악기를 다뤄
보겠다고 동분서주하는 내게 절친한 언니는 충고도 해주지만, 주어진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해보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얼마 전 내게 첼로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첼로를 산 그
날 비록 중고 악기이긴 하지만 천하를 얻은 듯이 기뻤다. 하지만 기쁨
은 잠시 악기를 다룬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현을
누르고 있어도 손가락이 아프고 팔이 저리고 엉덩이가 저려옴을 느꼈
다. 악기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것과 같다.
잘 못하는 연주(?)일 망정 나에게 무한한 마음의 평안과 여유를 준다.
내가 외롭고 쓸쓸할 적마다 나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함께 있어준
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위안이 된다.
내 친구는 집안 일을 하는 나를 지켜보다가 말없이 유혹을 한다. 옷
을 벗기고 가만히 끌어안는다. 내 품속에 쏙 들어와 안기는 감촉이 너
무나 황홀하다. 이 사랑을 이루려 얼마나 오랫동안 짝 사랑을 해왔던
가. 활을 잡고 현을 그어 본다. 묵직한 남성이 느껴진다. 어떠한 일에
도 흔들림이 없는 신뢰감을 주는 것이다.
나의 실력이 부족하여 제대로 사랑을 해주지는 못하지만, 안고 있는
순간만은 서로가 행복하다고 믿고 있다. 내노라 하는 실력가들의 연주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감히 나는 활을 잡을 수조차 없다. 그러나 그들
의 실력이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은 아닐진대, 너무 높은 곳만을 쳐
다보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하다보면 언젠가는 뛸 수
도 있겠지.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임을 느낀다. 내 생활을 연주함에 있어 아프
고 시린 일들이 어디 한두 가지일까. 가정에서 사회에서 불협화음으로
고통 당하는 일이 많이 있다.
이제는 현을 조이고 늦추는 감각이 익숙해져 가야할 사십대이다. 피
할 수 없는 외적인 운명이 신의 뜻이었다면, 내 적인 운명은 내가 만
든 것이며, 그것이 쓰든 달든 나의 것이기에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란 것을 깨닫는다.
이 가을에 나의 첼로에게 감사하고 싶다. 유명한 음악가가 아닐지라
도 나만의 피난처요, 안식 할 수 있는 음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
복한지 모른다. 나의 마음속에 있는 나쁜 모든 것을 씻어 버리고, 순
수하게 조화된 소리의 상쾌한 화음만으로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지피길
기대해 본다. 그리하여 자신 보다 남을 먼저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
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
악기가 아닌 연주 할 수 있는 자리에 선 나에게 많은 할 일들이 있다
는 것은, 나의 삶을 연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남의
손을 빌려야만 소리를 내는 수동적인 악기가 아니고, 힘차게도 감미롭
게도 내 마음을 자유자재로 표현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연주자란 것이
이렇게 행복해 보기는 처음이다. 어느 곳에서나 잘 어우러지는 화음으
로 내 삶을 좀더 풍요롭게 살찌우는 연주를 하고 싶다. 나의 첼로는
나와 동반자가 되어 인간의 희로애락을 음악으로 승화시켜 연주할 것
이다.
가을의 문턱에 서서 결실을 맺을 시기는 내게 아직 이르지만, 펼쳐진
자연에서 고개 숙일 줄 아는 겸손을 배우고 기쁨을 주는 알곡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겠다.
2001/ 10집
첫댓글 가을의 문턱에 서서 결실을 맺을 시기는 내게 아직 이르지만, 펼쳐진
자연에서 고개 숙일 줄 아는 겸손을 배우고 기쁨을 주는 알곡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겠다.
삶을 연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남의 손을 빌려야만 소리를 내는 수동적인 악기가 아니고, 힘차게도 감미롭게도 내 마음을 자유자재로 표현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연주자란 것이 이렇게 행복해 보기는 처음이다. 어느 곳에서나 잘 어우러지는 화음으로 내 삶을 좀더 풍요롭게 살찌우는 연주를 하고 싶다.
나의 삶을 연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남의
손을 빌려야만 소리를 내는 수동적인 악기가 아니고, 힘차게도 감미롭
게도 내 마음을 자유자재로 표현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연주자란 것이
이렇게 행복해 보기는 처음이다. 어느 곳에서나 잘 어우러지는 화음으
로 내 삶을 좀더 풍요롭게 살찌우는 연주를 하고 싶다. 나의 첼로는
나와 동반자가 되어 인간의 희로애락을 음악으로 승화시켜 연주할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