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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르네상스, 역설의 문화운동 그리고 불안 속에서 피어난 처연한 꽃
르네상스를 읽는 것은 재미있으면서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굳이 역사를 공부하지 않더라도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천재들이 등장해 놀라운 재기를 뽐낸 ‘멋진’ 시대, 그것이 나의 첫 인상이었다. 그런 까닭에 르네상스인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경험이 내겐 즐거움이었고, 또 지금까지도 계속 그런 마음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될수록 고민과 불편함도 함께 자라났다. 너무나 다양하고 너무도 모순적인 르네상스인들의 이런저런 일면들이 이곳저곳에서 고개를 들었던 탓이다. 내게 르네상스는 어디선가 무엇을 읽으면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오는 고통스러울 만큼 ‘희한한’ 세계다. 이 책은 이 멋지고 희한한 세계를 빛낸 지식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르네상스를 ‘역설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자기 시대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르네상스인들의 시선을 먼 과거에 이르게 했고,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뒤를 돌아보면서도 그들이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아마도 독자들이 그들에게서 여러 혼란과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독자들이 아니라 그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맥락에서일 테지만, 흔히 회자되는 르네상스 문명이라는 ‘찬란함’의 이면에는 그것을 추동한 당대인의 불안한 기운과 불편한 속내가 자리 잡고 있었다.
👨🏫 저자 소개
임병철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레오나르도 브루니의 공화주의를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사학과에서 근대 초 유럽 지성사와 문화사를 전공해 르네상스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고, 그 결실로 2004년 포조 브라치올리니의 자아-재현과 르네상스 개인주의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어릴 적부터 신화나 옛이야기에 유독 호기심이 많았으며, 학부 시절 근대 유럽의 형성과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별개의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현재까지 르네상스에 천착하고 있다. 전인적 교양인을 강조한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프리즘 삼아 현대 유럽 사회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통해 물질만능의 기치 아래 인간성이 쇠락하는 오늘날의 문제를 성찰하고 싶은 이유에서다. 주요 연구 분야는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지성사와 사회·문화사이며, 미술사와 역사이론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21세기 역사학 길잡이??(공저), ??서양문화사 깊이 읽기??(공저), ??역사 속의 소수자들??(공편),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인들의 자아와 타자를 찾아서?? 등의 책을 썼고, 레오나르도 브루니의 ??피렌체 찬가??, 주디스 브라운의 ??수녀원 스캔들??, 니콜라스 터프스트라의 ??르네상스 뒷골목을 가다??, 한스 바론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기??, 리사 자딘과 제리 브로턴이 함께 쓴 ??글로벌 르네상스??를 우리말로 옮겼다. 2005년부터 2019년 여름까지 부산 신라대학교에서 재직했으며, 이후 현재까지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공부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 목차
머리말
근대 유럽을 수놓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인들’
단테를 흠모한 문인, 페트라르카에게 도전하다
휴머니스트 서기장, 공화국의 의미를 묻다
피렌체의 ‘리비우스’, 공화국의 역사를 예찬하다
전투적 고전주의자, 르네상스의 문을 열다
격동의 시대, 조숙한 역사주의자를 낳다
키케로주의자, 인문 교육의 가치를 제시하다
밀라노의 지식인, 마키아벨리즘을 선점하다
반메디치 지식인, ‘세계시민’을 꿈꾸다
피렌체의 상인, 인간의 세속적 존엄을 노래하다
르네상스 ‘만능인’, 인간의 행위규범에 대해 성찰하다
반항적 수사학자, 역사적 비판의식을 일깨우다
최고의 고고학자, 로마에서 유럽 정체성의 고향을 찾다
약관의 천재, 철학에서 ‘인간다움’의 길을 구하다
궁정 휴머니스트, 군주의 ‘위엄’에 딴죽을 걸다
방랑 지식인, 르네상스 공화국의 진실을 폭로하다
현실주의 정치인, 법과 법률가의 위선을 벗겨내다
좌절한 정치사상가, 시대의 철창을 열다
최고의 궁정인, ‘문명화 과정’의 길을 열다
누가 르네상스를 두려워하는가?
주요 등장인물
르네상스기 연표
도판 출처
📖 책 속으로
15세기의 르네상스인들은 단테와 페트라르카 그리고 보카치오를 이탈리아 문학계의 ‘3대 왕관tre corone’으로 일컬으며, 그들의 문학적 위상에 관한 크고 작은 논쟁을 벌이곤 했다. (중략) 단테와 페트라르카가 비교의 핵심이었다. 단테는 일찍부터 현실정치에 뛰어든 능동적인 시민의 전형이었고, 결국 정쟁에 휘말려 고국에서 추방되어 망명객으로 삶을 마감한 불운한 천재였다. 이와 달리 페트라르카는 마치 세파에 초연한 듯 파도바, 아비뇽, 밀라노 등의 여러 도시를 제 집처럼 오가며 ‘세계시민’의 삶을 추구한 방랑 지식인이었다. (중략) 한마디로 그[보카치오]에게 단테는 모방할 만한 근대 작가의 본보기였다. 하지만 이와 달리 페트라르카는 단테에게 의도적인 냉담이나 무관심 이상을 표출하지 않았다. 단테가 “선술집이나 저잣거리의 무지한 이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저속한 언어를 구사한 통속 작가에 지나지 않고, 그렇기에 그의 책들은 한낱 “생선 가게의 포장지”로나 쓰일 수 있을 뿐이라고 냉소할 정도였다.
--- p.32~35
르네상스기의 지식인들은 고전고대의 부활을 염원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책이라는 타임캡슐의 도움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고상한 꿈에 불과했다. 이를 고려하면 빛바랜 고서들의 가치를 깨닫고 그것들을 어둠 속에서 구출했으며, 또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니콜리는 분명 르네상스의 이상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한 초기 르네상스의 주인공이었다. 르네상스가 다른 무엇보다 책과 함께 시작했고 고전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전개된 글과 말의 향연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분명 르네상스 지성의 역사에서 니콜리를 빼놓을 수 없다.
--- p.85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스트들은 흔히 ‘자유교양학문liberal studies’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교과를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능동적인 시민을 기르려고 했다. 살루타티가 환호했듯이 베르제리오는 이런 휴머니즘 교육의 이상을 명확한 논고의 형식으로 제시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사회적 유용성에서 교육의 가치가 구해져야 하며, 따라서 교육과 학문의 목적이 그저 개인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 p.106~107
15세기에 명멸해간 수많은 지성 가운데 데쳄브리오는 남다른 영욕의 부침을 겪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120권이 넘는 다양한 저작을 집필하고 번역한 당대 최고의 다산적인 저술가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그는 거의 르네상스기 최초로 플라톤의 『국가』를 번역할 만큼 탁월한 고전 지식을 자랑했고, 그 결과 그의 유명세는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알프스 이북의 잉글랜드와 스페인 등지에서까지 뚜렷이 감지되었다. (중략) 오랜 기간 밀라노 궁정에서 공작의 비서이자 조신으로 활동한 탓에, 오늘날의 역사가들에게도 그는 지적·정치적 차원 모두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때 최고로 인정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잊힌 불운한 지식인이었던 셈이다.
--- p.118~119
“그는 매우 다재다능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가치 있는 기예 가운데 그가 통달하지 못한 그 어떤 분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1430년대 후반 3인칭 서술자의 목소리로 쓴 자서전에서, 알베르티는 이렇듯 자부심 넘치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문학은 물론이고 음악과 조형예술, 심지어 마장술과 군사 분야에까지 능통한 다재다능한 인물로 포장했던 셈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알베르티의 이미지는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회자되며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 자전적 기록에 환호한 부르크하르트가 그를 모든 문화적 요소에 통달한 ‘만능인uomo universale’으로 손꼽은 탓이다. 19세기의 이 스위스 역사가에게 15세기 이탈리아는 집단주의라는 미몽 아래 인간의 정신이 지배되던 중세적 질서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였다. 주체적이고 천재적인 인간들이 자유롭게 경합하면서 자신들의 재능을 분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알베르티는 단연 그 선두주자였다.
--- p.156~157
발라는 무언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것을 곱씹고 재해석하는 비판적인 태도야말로 학자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라고 강조했다. 고대인들의 권위와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오만과 독선의 소유자라는 비판이 종종 그에게 가해지곤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를 염두에 두면 『위작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에 대한 연설』을 쓴 그해 여름, 그가 한 친구에게 던진 질문은 더할 나위 없이 인상적이다. “어떤 분야가 되었든 학문 세계에서 앞선 이들을 비판하지 않고 글을 쓴 이들이 누가 있었는가? 다른 이들의 오류, 그들이 누락하거나 과도하게 진술한 무언가를 날카롭게 지적하지 않는다면, 글을 쓰는 다른 어떤 이유가 있겠는가?”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그의 성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비판의식을 놓친다면 어쩌면 발라를 한낱 고집불통의 싸움닭으로만 치부하게 될지도 모른다. 깊이 있는 ‘역사의식’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 p.184
특히 인간의 관점에서 변주된 새로운 창조 신화를 내놓으면서 피코는 이른바 ‘르네상스 인간학’의 정초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인간은 가변적인 본성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영위하는 자기 삶의 ‘조형자’요 ‘조각가’라는 주장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매력적인 공명을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 p.200~201
우리의 시선을 더욱 사로잡는 것은 브란돌리니가 공화정의 한계를 보여주는 실례로 당대 피렌체를 논쟁의 도마 위에 올렸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그 꽃의 도시는 물적 탐욕으로 가득 찬 상인들의 국가이며, 따라서 그곳에서는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그 결과 누구도 평등할 수 없었다. 통제되지 못한 사적 소유가 정의와 절제라는 공동체의 근본 원리를 훼손한다는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리스의 정치가 솔론을 인용해 법은 한낱 ‘거미줄’과 같다고 조소하는 브란돌리니의 모습을 진부한 수사가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중략) 자신보다 약한 존재만을 가두어둘 수 있을 뿐 강자라면 언제고 쉽게 끊어내는 거미줄처럼 “부유한 이들은 법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반면 “가난한 이들은 법의 그물 속에 갇혀버린다”는 생생한 묘사의 호소력 때문이다.
--- p.232~233
스칼라는 르네상스기의 역동적인 사회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르네상스기를 통틀어도 그만큼 극적인 신분상승을 경험한 이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1430년 토스카나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보잘것없는 방앗간 임차인의 아들로 태어난 스칼라는 서른다섯 즈음 피렌체의 제1서기장이 되었고, 이후 도시의 최고 정무관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와 걸핏하면 다툰 당대의 시인 폴리치아노나 16세기 피렌체의 역사가 귀차르디니 등이 스칼라에게 퍼부은 냉소마저 당연해 보일 정도로 그의 성공은 남달랐다. (중략) 특히 피렌체의 국부로 칭송되던 코시모에 이어 피렌체 정치계의 주역으로 성장한 ‘대인’ 로렌초에게 스칼라는 최고의 조력자였다. 그가 권력을 장악하고 안정시키는 데 스칼라가 기여한 바가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스칼라는 메디치 정권을 지탱해준 중요한 지식인 관료이자 메디치 가문의 이해를 현실정치 세계에서 대변한 ‘얼굴 마담’ 같은 인물이었다.
--- p.242~244
마키아벨리야말로 냉혹한 힘의 정치를 현란한 언어로 대변한 새로운 정치사상가라고 평해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중략)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관통하는 주제는 ‘정치권력’ 그 자체였고, 그는 그것의 실상을 대담하면서도 위험한, 심지어는 불경스러워 보이는 언어로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무엇보다 그는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문제에만 천착할 뿐,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라는 전통적인 정치사상의 주제와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몇몇 사람이 마키아벨리를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은 반도덕주의자, 더 나아가 현실적인 이해에 따라 정치적 신념을 이리저리 뒤바꾼 기회주의자로 폄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이름(니콜로)을 빗댄 ‘올드 닉Old Nick’이라는 표현이 오늘날까지도 악마라는 뜻으로 누군가를 지칭하기 위해 쓰일 만큼 여전히 마키아벨리는 우리에게 반도덕의 교사이자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군주론』에서 종종 발견되는 과장이나 비약, 여러 모순적인 주장, 날카로운 분석 뒤에 은밀히 몸을 감춘 아이러니 등을 고려하면, 그를 한마디로 단정 짓는 것은 마키아벨리라는 거대한 빙산을 마주하고 그저 그 일각만 바라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 p.255~258
카스틸리오네는 고전적 덕의 이상이 정치 세계의 엄정한 현실 속에서 새롭게 변모하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연기자 같은 인간’이라는 관념을 빚어냈다. 길들여진 동의, 권력이 강제한 예절, 외부 시선을 의식한 통제적인 자기연출, 이것이 바로 카스틸리오네가 그려낸 궁정인의 모습이다. 예절과 에티켓을 강조하는 유럽의 문명화 과정은 그렇듯 권력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서 시작했고, 좋든 싫든 르네상스는 그렇게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 p.282
🖋 출판사 서평
◆ 르네상스란 무엇이고, 왜 휴머니즘/휴머니스트인가?
흔히 ‘문예부흥’이라고 일컬어지는 ‘르네상스Renaissance’는 어원상 ‘부활’이나 ‘재생’을 뜻하는데,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개념이다. 첫째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15세기 이후 알프스 이북의 유럽으로 확산된 일련의 문화적 변동을 지칭하고, 둘째는 정치·경제·종교·사회 등 당시 유럽의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이 문화적 변동이 사회의 지배적 조류로 작용한 역사상의 특정 시대를 가리킨다.
르네상스 연구자인 한국교원대 역사학과 임병철 교수는 이번 신간에서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예술가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말과 글을 통해 고대 세계를 부활시키려 한 지적 운동’인 르네상스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어 르네상스사를 가장 올곧게 전달하기 위해 지성인들의 열전 형식을 따랐다. 단테, 마키아벨리, 보카치오, 페트라르카처럼 널리 알려진 인물은 물론 일반인에게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브루니, 카스틸리오네, 브란돌리니, 귀차르디니 등을 망라해 당시의 시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직조해냈다. 그러면서 임 교수는 ‘humanism’과 ‘humanist’를 ‘인문주의’(또는 인본주의)와 ‘인문주의자’라는 번역어로 옮기지 않고 ‘휴머니즘’과 ‘휴머니스트’라고 쓴 이유를 「머리말」에서 이렇게 밝힌다.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즘은 오늘날의 인문주의라는 의미보다는 ‘고전을 고전 그대로 읽고 고전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지적 태도’라는 뜻에 더 가까웠다. (중략) 따라서 휴머니즘에 경도된 당대의 지식인들은 오늘날의 인문주의자라기보다 오히려 라틴 고전주의자에 더 가깝다.
19세기 이후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박애 등의 의미를 담게 되는 인본주의나 박애주의 같은 보편적인 개념 역시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본질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나는 인문주의와 인문주의자라는 번역어가 의도치 않은 시대착오적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르네상스기의 성격을 곡해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고전에 기초한 르네상스기의 지적 풍토를 휴머니즘으로, 그리고 그것을 강조하고 실천한 지식인을 휴머니스트로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 다채로운 천재들이 수놓은 백가쟁명의 지적 쟁투기
오늘날 우리는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과 그들이 남긴 다양한 작품을 통해 르네상스를 바라보고 이해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종이 전쟁’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시에는 뛰어난 예술가들에 버금갈 만큼의 탁월한 지성을 갖춘 지식인들이 르네상스기를 명멸하며 풍부한 지적 향연을 벌였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인물 대부분이 항상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때론 숭고한 사상가였으나, 어떤 경우에는 논쟁적인 독설가였으며, 간혹은 성마른 싸움꾼이기도 했다. 스스로 자기모순적인 이야기를 이곳저곳에서 늘어놓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가 르네상스에서 모순적이고 복잡다기한 사고실험의 흔적들을 종종 목격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저자는 바로 이런 점에서 긴장과 갈등 혹은 모순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는 이 통일되지 못한 사고의 혼란이야말로 르네상스를 가장 르네상스답게 만드는 문화적 징후라고 진단한다. ‘르네상스의 아버지’ 페트라르카부터 16세기 교양인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당대 ‘최고의 궁정인’ 카스틸리오네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는 절실하게 새로운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 ‘호모 나란스homo narrans’(이야기하는 인간)의 폭발적인 재등장
그들은 왜 모두 중세 문화를 배격하고 르네상스라는 문화운동에 뛰어든 것일까? 도덕적 타락과 학문의 퇴조로 자기 시대를 암울하게 바라본 그들은 그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역설적이게도 고대인들의 세계로 시선을 돌렸고, 고전고대의 세계관이 시대의 폐해를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한데 묶고 있던 관심사는 고전의 부활만이 아니었다. 튀르크의 위협이 낳은 위기감과 그에 조응하는 십자군 정신 또한 그들 대부분의 삶과 사고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특히 1453년에 일어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그들을 끝없는 불안의 나락에 빠뜨린 일대 충격이었다. 이내 유럽 세계 곳곳에 세기말적인 암울한 분위기가 드리워졌고, 그 위기감이 가장 강하게 감지된 곳이 바로 교회였다. 한편 ‘꽃의 도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본향이라는 명성이 무색하리만치 볼썽사나운 정치적 파벌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혼란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특히 기존의 전통적인 가문과 새롭게 피렌체 정치계의 실세로 부상하던 메디치 가문 사이의 대립은 물리적·정신적 차원 모두에서 도시 곳곳을 암투의 그림자로 물들였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메디치가는 마치 20세기 초의 마피아처럼 은막의 뒤편에 몸을 숨긴 채 15세기 피렌체 정치극장의 모든 것을 기획한 막후의 연출자였다.
이러한 메디치 가문의 부상과 포조나 스칼라 등 여러 ‘벼락 출세자’들이 생생히 보여주듯이, 15세기의 이탈리아는 능력에 따른 신분의 이동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유동적인 사회였다. 또한 그렇기에 르네상스기는 치열한 경쟁의 시대이자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의도적인 자기포장의 시대였다. 한마디로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는 어느 누구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고 위험한 세계였다. 이 ‘정치적 카오스’의 세계에서는 정치문화와 도덕에 대한 의견 대립뿐 아니라 군주정?귀족정?공화정 같은 정치체제에 대한 논쟁, 수사학과 철학의 관계 정립을 둘러싼 끝없는 쟁론 등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들이 저마다 ‘호모 나란스’가 되어 인간의 삶과 공동체에 대한 여러 담론을 봇물 터뜨리듯 쏟아냈다.
◆ ‘리퍼블릭republic’은 ‘공공의 것res publica’
르네상스기의 지식인들은 과학적?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앎의 문제에 천착하기보다 인간의 삶의 방식 자체를 변화시켜 시민들을 올바른 삶으로 이끌고자 했다. 물적 탐욕으로 가득 차 있어 명예가 아니라 부가 삶의 기준이 되는 피렌체에서는 법적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고 일갈한 브란돌리니, 철학에 무지한 사람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고까지 강변한 피코처럼 인간 존재를 인간답게 개선하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지향점이었다. 그들은 인간과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각자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역사의식의 성장이라는 예기치 못한 변화도 일구어냈다. 살루타티의 공화사상에서 브란돌리니의 공화국 비판, 폰타노의 군주의 위엄에 관한 논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고민과 해결책은 다양한 스펙트럼 위에서 부유했다.
하지만 모두 ‘공동체’의 가치에 주목했다는 점에서는 그들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리퍼블릭’은 ‘공공의 것’이라는 생각을 모두 공유했기 때문이다. ‘다채롭다’, ‘매력적이다’라는 수식어만으로는 부족한 르네상스기에 우리가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저자의 말이 조용하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르네상스의 지성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과거라는 낯선 세계를 즐거움의 차원에서 맛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간과 사회, 역사와 학문에 대한 르네상스기의 현란한 논의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정치와 권력, 사상의 문제와도 분명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물질만능의 전문가 바보만을 양산하면서도 애써 그 부끄러움을 피하기만 하고, 마치 유행어처럼 문명의 위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인간으로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애써 말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