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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의 딸과 예수의 옷을 만진 자
마 9:18-26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마 9:18-26 / [하혈증 여자와 회당장의 딸;막5:21-43,눅8:40-56]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이 와서 절하며 말하였다. `제 어린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오셔서 딸에게 손만 얹어 주신다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19) 예수께서 일어나 그를 따라가시자 제자들도 뒤따랐다. 20) 마침 그때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로 고생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가만히 옷을 만졌다. 21) 그 여자는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기 병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는 병이 나았다. 23) 예수께서 그 회당장의 집에 닿으니 사람들이 피리를 불며 떠들썩하게 곡을 하고 있었다. 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러들 가라.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모두 코웃음을 쳤다. 25)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간 뒤에 예수께서는 아이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가서 그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는 다시 살아났다. 26) 이 이적의 소문이 온 지방에 두루 퍼졌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깨끗해지고, 죽은 소녀는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무기력한 인간과 대비되는 예수님의 능력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18-21) 혈루증은 한자로 血(피 혈), 漏(흐를 누)입니다. 여기서 흐르다는 뜻의 ‘누’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누전, 누수라는 단어로 흔히 사용됩니다. 전기가 흐르고 물이 흐르듯 피가 흘러내리는 병이 혈루증(유출병)입니다. 여인은 12년간 절망적 세월을 보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공동체에서 격리되는 병이 두 가지가 있는데 나병과 혈루증입니다. 회당이나 성전 출입, 타인과의 접촉이 금지되었습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결단했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이라도 만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22) 예수님은 여인에게 "안심하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치료해주셨습니다. 여인의 부정함이 예수님의 정결함을 훼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함이 여인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리시면 죄인처럼 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의인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작은 인간의 손짓에 멈추어 서셨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의식적인 접촉이 아닙니다(막 5:24). 자신의 마음을 다한 진심을 담은 접촉입니다.
죽은 소녀를 살리시다(23-26) 예수님이 죽은 소녀를 접촉하셔서 치료의 권능을 행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피와 시체를 부정한 것으로 여겨 이런 것들을 피했고, 부정한 것에 접촉한 사람은 부정하게 여겨 그들까지도 멀리했습니다(레 15:19-33; 민 19:11-22).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죽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요 11:43). 하지만 본 단락에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셔서 생명을 다시 허락해 주셨습니다. 주검이 예수님을 부정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요 인간의 부정결을 정결로 바꾸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나를 만지시면 내 영혼은 다시 소생하게 됩니다.
적용: 당신을 힘들게 하는 문제가 있습니까? 군중을 뚫고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실패했으면 실패한 대로 나오십시오. 다 끝난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다시 생명과 회복을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어린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세 가지 모습을 합니다. "울고, 잡고, 발버둥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사람들이 일생동안 반복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살아감에는 슬퍼도, 기뻐도, 눈물이 있고 성취하려고 발버둥치고 소유욕에 붙잡으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정신없이 이 땅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 살아가며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우리를 알고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시는 주님을 알았을 때 비로소 나의 사명을 알고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 설 교 >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는 곳
마 9:23-26 / 이정선 목사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잃습니다. 친구를 잃기도 하고, 직장을 잃기도 하고, 건강을 잃기도 합니다. 이러한 손실이나 상실의 결과는 슬픔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큰 손실은 목숨, 즉 생명입니다. 우리가 재산을 잃을 수도 있고 명예나 건강을 잃기도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나중에 다시 되찾을 수도 있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인한 손실은 회복이나 대체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게 목숨은 단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서 최고의 예의를 표시하게 됩니다. 헐리웃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장면 중 하나는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군인의 장례식입니다. 관은 국기로 덮이고 그 죽음 앞에 모든 사람들이 거수경례를 합니다. 죽은 사람이 계급 낮은 사람일지라도, 높은 계급장을 단 사람들이 그의 죽음 앞에 경례를 합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문제 앞에서 계급의 높고 낮은 것은 문젯거리가 되지도 않습니다. 장례식에 리무진을 사용하는 이유도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장례식에서 사용되는 상여는 꽃으로 장식된 가마입니다. 왕의 가마보다 더 화려하고 더 많은 장식이 달린 가마가 망자의 가마입니다. 가장 큰 손실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그런 식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장례식 모습이 잠깐 비칩니다. 예수께서 그 직원, 즉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시니까 이미 아이는 죽었고 죽음을 애도하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훤화하는 사람은 곡하는 사람입니다. 일종의 장례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의 장례식에는 이처럼 피리를 불고 애곡하는 사람들이 고용됩니다. 율법을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한 규범에 보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장례식에는 최소한 한 사람의 피리 부는 사람과 두 사람의 곡하는 사람을 고용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회당장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아마 이런 사람들을 많이 고용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예수께서 도착하셨을 때 그 집은 이미 죽음이 가져오는 어둠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죽음의 능력을 거부하거나 그것에 도전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아무리 힘이 센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그 힘이 무용지물입니다. 천하를 호령할 만한 기개나 권력도 죽음을 피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이 열두 살 먹은 소녀가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지만,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재판을 청구하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억울하고 슬프지만 그렇게 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죽음 앞에서 우리 인간은 너무나 무력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죽음을 당해야 하는지, 그리고 죽음의 본질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먼저 우리 인간의 생명과 죽음의 기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 즉 살아 있는 영적 존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창 2:7). 그러니까 굳이 우리 인간의 구성요소라고 말한다면 흙으로부터 온 부분과 하나님이 불어 넣으신 생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자신을 분석해서 어느 부분이 흙이고 어디서부터 하나님이 불어 넣으신 생기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육체와 정신,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구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요. 예를 들면 우리의 정신적 활동은 육체와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고하는 것은 정신적 활동이라고 하겠는데, 이 사고가 이루어지는 곳은 두뇌입니다. 두뇌는 육체의 한 부분이란 말이지요. 그럼 사고는 정신적 활동입니까, 육체적 활동입니까? 또 우리의 영혼은 정신과 어떻게 구별되고 인식됩니까? 복잡하지요? 어쨌든 우리가 죽으면 그때는 확실히 육체, 즉 흙에서 온 부분이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죽음을 영혼과 육신의 분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생명이 이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생령, 즉 살아 있는 영적 존재로 만드신 조건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종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소위 선악과였지요. 그런데 인간이 그만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 말씀대로 반드시 죽어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처럼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존재인 인간은 죽음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허무해져버립니다. 죽음은 생명을 가장 초라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슈바이처 박사는 생명외경사상을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슈바이처 하면 밀림의 성자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 분은 신학자였고, 음악가였고, 철학자였고, 의사였습니다. 그는 철학자로서 인간이 올바로 사색한다면 궁극적으로 생명을 중시하는 데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들은 모두 생명을 경시하는 데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전쟁과 폭력, 기타 모든 범죄가 그렇습니다. 이처럼 생명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는 존중하고 경외심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 소중한 것이 됩니다.
아무리 하찮은 생물이라도 그 생명은 신비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여름철이면 우리를 지겹도록 귀찮게 하는 파리 한 마리를 생각해 보세요. 파리 목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이 파리가 잽싸게 날아다니기도 하고 암컷과 수컷이 교미해서 알을 낳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돌아다니다가 에프킬라를 맞았다거나 파리채에 맞거나 해서 죽었다고 합시다. 파리 한 마리 죽었다고 마음 언짢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파리 목숨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이 죽은 파리와 아까 살아서 왱왱 날아다니던 파리 사이에는 측량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 차이가 바로 생명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측량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장난감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장난감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 배터리를 갈아 끼우면 다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나 죽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파리를 다시 움직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배터리 갈아 끼우듯이 가게에 가서 파리 목숨 천원어치 사다가 다시 끼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생명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생명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은 그 생명을 앗아가는 죽음이 그만큼 두렵고 강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죽음의 권능이 지배하는 곳에 예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합니다(요 1:4).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요 6). 또 스스로를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요 14:6)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권능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 생명이시며 또 생명을 나누어주러 오신 예수께서 들어오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집에 들어오셔서 예수께서 처음 하신 일은 그 죽음의 굿판을 걷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들, 피리를 불고 곡하는 사람들을 내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 물러가라고 하시면서 주님은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을 상징하는 행위들이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씀은 죽음의 자리에 오셔서 생명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죽음을 몰아내시고 생명을 가져오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둠으로 가득찬 방에 빛이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빛이 들어오는 순간 어둠은 순식간에 물러갑니다. 어둠으로는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어둠이 있는 곳에 생명의 빛이신 예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어오시는 순간 사망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물러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기 전에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나의 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시면서 가져오는 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범죄해서 그 결과로 무기력하게 사망의 종노릇해야 했던 우리가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면서 피리 부는 사람들과 곡하는 사람들에게 물러가라고 하시자 그들이 비웃었습니다. 뻔히 죽은 아이를 두고 잔다고 하면서 장례식을 못하게 하니까 별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네, 이 아이는 죽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죽음은 개체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의 기능정지입니다. 심장의 고동과 호흡활동이 정지되면 몸의 모든 세포가 기능을 멈추게 됩니다. 이 소녀의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고 호흡도 멈추어 있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이 아이는 죽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십니다. 죽은 것과 자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릅니다. 잠귀가 아주 밝은 사람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금방 깹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한번 잠이 들면 업어 가도 모릅니다. 옛날 학창시절에 수학여행을 가거나 MT에 갔을 때 아침에 일어나보면 얼굴에 가면이 그려져 있는 수가 있습니다. 죽음처럼 잠을 자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일을 당합니다. 그래서 자고 있을 때는 별짓을 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런 감각이나 의식도 없이 죽은 것처럼 자던 사람도 아침이 되면 깨어납니다. 죽은 사람과 자는 사람의 차이는 다시 깨어나느냐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목숨이 끊어져 죽은 아이를 보고 예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절대로 깨어날 수 없는 죽음인데, 예수께서는 언제라도 흔들기만 하면 깨어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예수께서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죽음은 절대적인 두려움인데,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 보시기에는 잠깐 잠을 자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 것은 자신이 바로 그 생명의 창조자이며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각종 질병을 고치심으로 사람들을 불행과 고통으로부터 구해주셨는데, 이제 더 나아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루시고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하셨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 그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죽음은 잠자는 것에 비유됩니다.
우리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은 심판과 멸망을 향한 죽음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난 성도의 잠자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잠시 잠들었다가 우리의 본향인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관문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 들어오실 때 이처럼 죽음의 권세가 물러가고 생명이 주어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지만, 때로는 지치고 낙심해서 우리 마음이 죽음에 이를 듯이 고통스럽고 힘든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어둠의 순간에서 벗어나는 것도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또 우리가 영적 어둠에 빠져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나태해지고 마음이 교만해지기도 하고, 범죄의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 때 역시 생명이신 예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야 그 영적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조금이라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여 그 어둠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하늘의 생명으로 가득차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룬 십자가
마 9:21-23 / 김남준 목사
I.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사도 베드로에게 그 유명한 신앙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받은 사건,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으신 이후로 이 시점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예수님이 그냥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을 뿐이었지만 이 시점을 계기로 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점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공적인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시작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부터 시작해서 신약을 천천히 읽어보면 성경의 압도적인 주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의 약 사분의일 이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사건들로 채워져 있고, 이후에 기록된 사도행전과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어떻게 전해졌고, 어떻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교회 안에서 어떻게 그것들이 받아들여지고 거절되었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라는 이 주제는 신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이 짐승을 희생하여 그 가죽을 벗겨 아담과 하와의 겉옷을 삼으신 그때로부터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지정하신 희생의 제물이 필요하고 그것은 제사 속에 구체적인 형태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II. 최고의 신앙고백
본문에는 최고의 신앙고백이 등장합니다. 원래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는 장소는 수많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와서 제사를 드리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던 다신 숭배로 유명한 장소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에게 역사상 최고의 신앙고백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최소한 세 가지의 중요한 신학적인 개념들을 내포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A.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첫째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는 원래 희랍어로 ‘크리스토스’라고 하는 말을 그냥 우리말로 음역을 한 것입니다. ‘크리스토스’라고 하는 이 명사는 ‘크리오’라고 하는 동사 즉, ‘붓다’라는 동사에서 온 피동 남성 단수명사입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마태가 이것을 기록하였을 때 이것을 말하거나 듣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림은 구약의 메시아의 그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라는 말을 당시 통용어인 희랍어로 옮긴 것이 그리스도스였기 때문입니다. ‘붓다’라는 의미를 가진 ‘맛사’의 피동 남성 분사 단수가 바로 메시야입니다.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나라에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답게 운영해 나가기 위한 하나님의 정하신 직임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왕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하기 위해서 주님이 세우신 직분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말씀의 전달자인 선지자입니다. 셋째는 죄 있는 백성들이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주고 그 일을 도와주는 제사장입니다. 각각 다른 일들을 위해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귀한 통치 방법입니다. 이 삼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에 대한 그림 안에서 통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기대하고 있는 메시아도 바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모든 기능들을 통합한 신적인 존재로서의 메시야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에서 우리에게 예언하였던 이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를 신봉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방의 모든 침략을 막아줄 것이고, 탁월한 지혜와 지도력 그리고 기적을 베푸는 놀라운 신적인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최강의 나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하는 왜곡된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예수님을 핍박한 이유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꿈꾸던 메시아처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라고 고백을 했을 때도 그 고백은 참 맞는 고백이었고 아름다운 고백이었지만 고백하는 베드로 속에도 이미 잘못된 메시야 사상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는 그리스도시라’고 하는 이 신앙의 고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멸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만 하시고 상관하지 않으시는 단절된 신도 아니시고 법칙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철학적인 신도 아닌 오히려 지금도 살아계셔서 인간의 삶속에 오시어 당신의 은혜와 아름다운 모든 속성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역사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사람의 인격이 아닌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본질상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연약한 그리스도의 육신 너머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고 하는 것은 아주 놀라운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기뻐하셨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바로 이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신앙의 고백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이 지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신약의 교회를 세우기로 한 예언이 바로 베드로의 이 훌륭한 신앙 고백이 있은 직후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가 영영토록 그들의 마음에 새겨야 할 기본 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B. 십자가의 죽음을 가르치심
예수님은 이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이 있은 직후에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구체적으로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전에도 고난에 관해 가르치셨지만 구체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미움을 당하여 모함을 받으실 것과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배반을 당하고 죽을 것을 말씀하심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그려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일들을 이루시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며 이것의 증인이 되어서 대대에 전하는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그리하신 것입니다.
III. 최고의 책망 받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간절히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님에게 미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 죽으시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 한 몸 던져 당신을 보호해 드릴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A. 사단아 물러가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함으로써 막아설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책망을 내리셨습니다. 최고의 신앙고백 이후에 그는 즉시 최고의 책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외치셨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실제로 사단이 베드로에게 역사하였다기보다는 오히려 베드로가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위하는 생각이 사단에게 도움을 주는 생각이었다고 해석을 합니다. 이 해석이 어울리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의 차이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고 책망하셨을 때 이렇게 듣기를 원하셨던 대상은 사단이라기보다는 사실 베드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하는 사람의 일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내가 대신 고난을 받더라고 주님은 오래 사셔야 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어떤 일보다도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세상의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고 있는 때였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사단에게 도움을 주는 생각이었기에 준엄하게 책망을 하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기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도대체 기독교에 있어서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자신이 대가를 치를 수 없는 무한한 죄책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창조세계에 가득했던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영적인 모든 생명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내버려 두셨더라면 인간은 영원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비참한 존재들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눈뜨게 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지, 왜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더욱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살아나신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 위에 기독교의 터를 세우기를 원했는지를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신앙의 고백을 기뻐하셨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을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실현하도록 부름을 받은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더 많이 사랑하고 알고 그리스도를 위해 더 많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IV. 결론
그러므로 오늘 기억하십시요. 십자가가 작아 보이면 이미 여러분 마음속에 세상이 아주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들에게 크게 보일 때 세상은 작아 보이기 시작할 것이고 여러분들은 예수님처럼 이 세상을 이긴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감격에 다시 한 번 굳게 붙들려 그 십자가 아래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고 피투성이가 된 체 죽어 가시는 그리스도를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몹쓸 죄인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보면서 그 몹쓸 죄인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용서하고 자기의 아들은 징계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우리의 가슴에 묻고 우리에게 지워주신 우리의 삶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 끝 날까지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겉 옷만 만져도 구원을 얻으리라
마 9:20-22 / 김영규목사
12년간의 긴 고통과 인내
사람마다 큰 고통의 시기가 있습니다. 이 고통과 괴로움이 오래 계속되면 사람들은 自嘲에 빠집니다. “나 같은 인생 살아서 뭐하나!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또 있을까?” 오늘 그런 사람이 있다면 오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이라는 고질병에 시달려 왔습니다. 혈루증이라고 했는데 헬라어로는 aiJmorroou'sa(하이모루사)입니다. 피를 흘린다는 뜻인데, 70인경에 보면 여인들의 월경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레15:33) 아마 이 여인은 계속되는 하혈로 말미암아 상당히 불행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첫째는, 가정생활의 불행입니다. 연령으로 보아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의 남편이나 자녀 얘기가 없습니다. 아마도 남편에게 배척을 당했거나 이혼 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자녀도 없었을 겁니다. 둘째는, 가산을 탕진한 일입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치료를 받다 보니 재산이 다 날아갔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 여인의 형편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5:26) 불치의 병일수록 각종 秘方이 많습니다. 대부분은 거짓이고, 돌팔이 의사들의 처방입니다. 현대 의학으로도 잘 낫지 않는 병이, 2000년 전의 의술로 제대로 되겠습니까? 당시 혈루증에 대한 처방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은전 하나 무게의 알렉산드리아 나무 진과 명반을 갈아 포도주에 섞어 마시울 것. 파사의 마늘 한 되를 포도주에 넣어 끓여서 마시울 것. 환자를 두 길이 갈라지는 곳에 세우고 오른 손에 컵을 들게 한 후에 누군가 뒤로 와서 깜짝 놀라게 하며, “너의 혈루에서 일어서라” 하고 외칠 것. 일곱 도랑을 파고 매 도랑에 4년 미만의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태우고는 환자에게 포도 잔을 들고 도랑 위에 앉게 한다. 그리고 도랑을 옮겨 앉을 때마다 “너희 혈루에서 일어서라”고 외친다. 한심한 처방들입니다. 이런 처방은 오래 할수록 고통입니다. 병은 낫지 않고 심신만 피곤해집니다. 셋째는, 사회적으로 철저히 외면당하는 일입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여인이 피를 흘리는 병을 매우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환자가 부정한 것은 물론, 환자가 앉았던 의자나 침상, 환자가 만졌던 그릇도 부정하고, 환자가 뱉은 침이 튀긴 자도 부정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환자가 앉았던 의자에 앉은 자도 부정하고, 환자가 만진 물건에 접촉한 자도 부정합니다. 성전 출입도 할 수 없습니다. 공중이 모이는 자리에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까지 금지 당했다면 죽은 인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고통의 날이 무려 12년입니다. 12란 숫자는 성경에서 충분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의 12아들, 12 지파, 12 사도, 12방백 등등. 야이로의 딸이 태어나던 해부터 시작된 병이, 자라서 12살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충분하고도 긴 불행입니다. 이 여인에게 훌륭한 점은 바로 인내심입니다. 그녀는 기나긴 불행을 참고 견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인내심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힘든 것을 참지 못합니다. 돈 없는 것 참지 못합니다. 자존심 상하는 것 참지 못하고, 남에게 지는 것 참지 못합니다. 병드는 것 참지 못하고, 자신의 약점이나 결점을 견디지 못합니다. 실패하는 것 참지 못합니다. 조금만 힘들면 삶을 포기하거나,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오늘 이 여인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사람의 일생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편을 잘 만나면 팔자를 고쳤다고 말합니다. 오늘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12년 간의 불행이 끝났습니다. 세상 말로 하면 팔자를 고친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님만 만나면 불행이 끝납니다. 오늘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셔서 모든 불행이 끝장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열의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여인은 어떻게 하든지 꼭 예수님을 만나려는 결의로 다가왔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여인의 모습을 보시고,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았다기보다는 예수님이 이 여인이 다가오기까지 기다리시고 만나주셨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얼마든지 문을 열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닙니다. 절차가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아무 조건도 제약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권세 깨나 있는 사람 좀 만나려면 절차가 복잡합니다. 비서실을 거쳐서, 신원 파악을 하고 날과 시간을 맞춰야만 겨우 만날까 말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비서실도 없고 경호원도 없습니다. 아무 제한이 없습니다. 오늘 이 여인은 주님을 만나기 힘든 상황에서 만났습니다. 주님 또한 이 여인을 만나주실 수 없는 상황에서 만나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첫째로, 주님은 이 여인의 외적 조건을 따지지 않고 만나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이 불결하게 여기는 유출병 환자였습니다. 더구나 바리새인들이 꺼리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조건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이 만나 주신 사람들의 면면을 보세요. 앞 못 보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나병환자, 혈루증 환자, 중풍병자, 귀신 들린 사람,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사마리아 여인, 심지어는 살인 강도까지도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차별 없이 만나주십니다. 부자도 좋고, 거지도 좋습니다. 남자든지 여자든지, 노인이든지 아이든지 상관없습니다. 부정한 자도 상관없고, 죄인도 상관없습니다.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다 만나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둘째로, 주님은 야이로의 외동딸이 죽어가는 급박한 상황의 用務를 중단하고 이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초청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그 초청은 너무나 긴급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길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누구도 주님을 가로채서 만날 수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기꺼이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이 불쌍하고 가련한 여인과 충분히 긴 시간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나주십니다. 니고데모는 한 밤중에 찾아와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한낮의 뙤약볕 아래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주님을 만날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주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셋째로, 수 많은 군중들이 밀고 당기는 길 한복판에서 이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응접실이 있고, 음식을 차려 놓은 집에서만 만나주시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로 장식하고 잘 꾸며 놓은 예배당에서만 만나주시는 게 아닙니다. 어디서나 좋습니다. 산이나 들도 좋습니다. 회당도 좋고 집 골방도 좋습니다. 길거리도 좋고 시장 바닥도 좋습니다. 우물가도 좋고 공동묘지도 좋습니다. 이 여인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주님을 만나는 자리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려는 열의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제가 교회에 출석한지 3개월쯤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폐결핵 3기가 지나서 초췌한 모습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주일하교 교사를 하기 전에 물 떠다 주고 청소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시장 공터에 커다란 천막을 치고 전도 집회를 열었습니다. 저는 몇몇 청년들과 함께 밤새워 천막 지키는 일을 하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천막이 가득하도록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몇 년씩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병고침을 받았다고 기뻐하는 사람, 귀신이 나갔다고 좋아하는 사람, 물질의 문제가 해결됐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을 받았다는 사람과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청년 두세 명과 함께 밤새워 그 천막을 지키면서 은사 받는 사람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신앙경력이 쌓여서 저 사람들처럼 은사를 받을 수 있을까?” 부흥회가 중반쯤 이르렀을 때, 전도사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깜짝 놀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김 선생, 은사 받는데 신앙 경력이 무슨 필요가 있어? 오늘 저녁부터 당장 매달려 기도하세요. 틀림 없이 응답 받아요.” 저는 그날 저녁부터 밤새도록 이틀 밤을 꼼짝 않고 기도했습니다. 이틀째 새벽 세 시쯤 되는 시간에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큰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 구원의 확신이 저를 목사가 되게 했고, 병을 이기는 것은 물론 인생의 모든 고난을 이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주님을 초청할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날 자격이 있습니다. 나는 초신자니까, 나는 죄가 많아서, 나는 나이롱 신자니까, 나는 교회 일을 안했으니까, 나는 가난하고 비천하니까, 나는 무명의 사람이니까...주님은 나같은 사람은 안 만나주시겠지? 이런 모든 생각을 버리세요. 제가 터득한 신앙에 두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첫 번째, 신앙의 제일법칙은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받는 진리입니다. 두 번째, 신앙의 제2법칙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는 “早期 昇進”의 법칙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나 충분히 주님을 만날 자격이 있습니다. 혈루증 여인이 길 가에서 만난 주님을 오늘 여러분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인정하심
오늘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내용은 바로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주님이 이 여인을 기꺼이 만나주신 이유도 바로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의 겉옷을 만지려고 군중 속을 헤치고 들어왔습니다. “예수님 겉옷만 난져도 병이 나으리라” 마음으로 다짐하면서 왔어요. 원문에 보면 e[legen(엘레겐)이란 단어를 썼습니다. 時制로 보면 미완료 과거형입니다. 반복해서 말했다는 뜻입니다. “겉옷만 만지면 된다. 겉옷만 만지면 된다.” 되 뇌이면서 왔습니다. 주님 곁으로 군중을 헤치고 악착같이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 곁에 서게 되니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만일 율법이 지극히 부정하게 여기는 유출병자가 발각이라도 되면 큰일입니다. 더구나 여자를 멀리하는 것이 율법사들의 관습인데 어떻게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접근할 수 있을까? 수치심과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남의 눈을 피해 예수님 뒤편으로 돌아섰습니다. 몰래 주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겉옷에 달린 술을 만진 겁니다. 유대인들은 민수기15:38-39의 말씀을 따라서 겉옷자락에 푸른 실로 술을 드리웠습니다. 히브리말로 “지이짙”이라고 하는데, 율법을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해서 달고 다니는 물건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서 술이 달린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옷 술을 만지는 순간 이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온 몸이 개운하고 가뿐해졌습니다. 12년 동안이나 혈루에 시달려왔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에 일어난 일을 민감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주님의 음성입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막5:30)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짜증을 냈습니다. “주여 수많은 무리들이 에워싸고 밀치고 있는 것을 보시면서 그까짓 옷에 손 댄 것을 가지고 따지십니까?” 제자들은 주님께서 옷을 스치고 접촉하는 것이 싫어서 하신 말씀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시종일관 이 여인의 행동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 많은 무리 앞에서 이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고자 하신 겁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순전한 고백과 간증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여인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몰래 주님을 만진 것이 발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정이 드러나게 된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여인은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고백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책망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런데 뜻 밖에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22절)
주님은 이 여인의 열심을 보고 만나주신 것이 아닙니다. 동정심 때문에 만나주신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이 여인의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다가오는 자만이 주님과 만납니다. 믿음 없는 만남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본문의 현장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몸과 부딪쳤습니다. 주님과 밀착되고, 주님의 몸을 만졌습니다. 그러나 오직 이 여인 한 사람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믿음 없는 접촉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 없는 열심, 믿음 없는 기도, 믿음 없는 봉사, 믿음 없는 예배, 다 별다른 결과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주님은 오늘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아십니다. 마가복음 5:30에 보면, 주님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다고 했습니다. 밧데리에서 전기가 나가듯이 치료하는 능력만 빠져나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여인이 옷 가를 만지기 전에 먼저 이 여인의 마음이 다가오는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시종일관 이 여인을 지켜보셨습니다. 주님의 바로 곁에 있던 제자들도 이러한 마음과 마음의 교통을 몰랐습니다. 아무도 몰랐지만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아셨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 여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평안을 선언하셨습니다. 건강을 선언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5:34) 이 여인은 세 가지 복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육체의 병을 고쳤습니다. 둘째로 영혼 구원을 받았습니다. 셋째로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이 여인의 이름을 베로니카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PANEAS 출신이었는데, 그의 출생지에 그녀의 동상과 예수님의 동상이 주후 300년 경까지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여인은 주님게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에 울면서 따라갔고, 자기의 수건으로 주님의 얼굴을 닦아드렸다는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VIA DOLOROSA(고난의 길) 중간에 베로니카를 기념하는 예배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주 예수를 만난 믿음이 이 여인의 생애를 새롭고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아무리 인생이 고달프고 괴로워도 낙심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괴롭고, 내가 제일 암담하고, 내가 제일 슬프고, 내가 제일 불행한 것 같지만 사실은 나보다 다 불행한 사람도 수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불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끈질기게 참고 인내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세요. 우리 신앙의 핵심은 바로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으로 말미암아 모든 불행은 끝입니다. 오늘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면서 죽지 못해 살아가던 한 여인도 주님을 만나서 새롭게 되었습니다. 병을 고쳤습니다. 평안을 얻었습니다. 성전 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보다 더 값진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영접함으로 새로운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누구나 만나주십니다. 언제든지 만나주십니다. 어디서든지 만나주십니다. 여기 계신 우리는 누구나 다 주님을 만날 자격이 있습니다. 초신자든지 수 십 년을 믿었든지 똑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처음 나오신 분도 마찬가집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믿음을 보십니다. 외적 조건이나 열심만 보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의 믿음과 신뢰를 통해서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다 주님을 만나셔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절망을 이긴 믿음
마 9:20-22 / 김남준 목사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0-22)
I. 본문해설
본문에는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인생이 변화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여자도 예수님께 나아올 때에 믿음으로 나아왔기 때문에 주님이 그를 어여삐 여기시고 고쳐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우리는 그 속에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좋은 것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뿐 아니라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이 절망적인 질병에 걸린 여인에게도 찾아오셔서 오히려 이 절망이 주님께 소망을 듣는 계기가 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II. 혈루증을 앓는 여인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등장합니다. 혈루증은 아마다 시도 때도 없이 하혈을 하는 질병일 것이라고 봅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그런 하혈을 경험하면서 이 여자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마가복음에도 같은 기록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여기보다도 상세한 설명이 여러 곳에 부가되어 있습니다. 이 여자가 혈루병에 걸려 열두 해 동안 고생을 하는 동안 많은 의원을 찾았고, 그 의원들에게 치료를 받기 위하여 가산을 허비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무런 효험이 없고 오히려 고통만 당하고 병세는 중하여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이 여자는 대단히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2년 동안 질병에 걸려서 많은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포기할만한데 이 여자는 끊임없이 이 의원에서 저 의원으로 찾아다녔으며 그러는 동안에 가산을 모두 허비하게 되었고, 병세는 더 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절망 중에 찾은 예수님
이 여자는 질병과 괴로움 속에 고통을 당하며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치료를 받으려고 해도 더 이상 돈이 없었기 때문에 치료행위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만나게 하기 위하여 허락하신 절망이었습니다.
A.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옴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여자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문이라고 해봐야 예수님의 행적과 인품에 대한 조각난 지식들 한 두 개씩 전달해 주는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무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절망 속에 있는 여자가 붙들만한 복음의 요소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거절당해 본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의기소침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예수님이 제일 먼저 실패한 복음 전도자가 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당신이 복음을 전할 때 모든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복음을 들을 때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복음이 전해짐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어둠에 속한 사람들인지 빛에 속한 사람들인지, 구원을 얻을 때가 이른 사람들인지 아직 익지 않은 곡식인지를 스스로 드러내 주는 시금석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임무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러면 가장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전혀 사람들이 믿을 가능성이 없다 생각되는 그곳에 복음의 씨를 뿌릴 때 그때 놀랍게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절대 의존의 믿음
이 여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뜻으로 주님께 나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는 절대 의존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한 쪼가리 소문 속에서 복음이 묻어있었고 그것을 가슴에 품자 이 여자의 마음속에 믿음의 불꽃이 일어났습니다. 이 믿음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다른 모든 길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제는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보았고 그의 병은 더 깊어졌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의 능력으로 자기는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여자의 마음속에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뜻을 세우고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당당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대면하여 나의 혈루병을 고쳐달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너무 위대하신 분이고 자기는 아주 더럽고 불결한 여인이라고 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렇게 혈루가 나오는 여자는 불결한 여자로 정죄됩니다. 죄인인 한 여자가 그러했듯이 예수님 뒤로 다가가서는 살며시 예수님의 겉옷 자락을 만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말할 수 없는 겸손의 표현이었습니다. 비록 예수께 나아가는 그의 태도는 두려움과 겸손에 가득 차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굳센 믿음이 고동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내가 나음을 얻으리라’고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능력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 하나님이 자기 같은 인간을 불쌍히 여겨서 고쳐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 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예수께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열두 해 동안이나 자기를 지겹게 따라다녔던 이 질병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기적적인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내 인생의 문제가 아무리 깊고 멀어도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 만나면 고쳐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있습니까? 우리의 목숨을 우리의 신앙에 걸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근원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신앙의 원리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닥친 문제가 너무나 크고 어렵기 때문에 우리를 천천히 구해주시거나 구원해 주시지 못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 불행과 절망 속에 끊임없이 불러도 이 여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소문이라도 붙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자를 보십시오. 열 두 해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했습니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모든 기술은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께 걸어가는 그 순간에도 다리 사이에 흐르는 피를 닦으면서 예수님께 다가갔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들은 그날부터 이 여자에게 예수님은 한 희망이 아니라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입니다. 이 여자가 열두 해 동안 혈루에 걸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에 그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했지만 여전히 그의 몸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어떠한 변화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했습니다. 주님이 그 마음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고쳐주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혈루의 근원이 즉시 말랐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의 근원은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치료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면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복음적인 변화가 아니면 고쳐질 수 없습니다.
IV.결론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신앙의 이치가 있습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사모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 주님이 여러분들을 주님 앞에 세우시려고 하는 12년 동안이나 계속된 그 혈루병은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주님 앞에 간절히 매달립시다.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은 언제나 부르셨지만 주님의 그 목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쪼가리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붙들고 인생을 걸 수 있었던 여자가 있었다면 복음을 아는 지식을 듣고도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주님 앞에 걸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다음에 주님 앞에 가서 무엇이라고 우리의 불신앙을 변명하겠습니까? 낙심과 절망 가운데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어쩌면 여러분들이 오늘 주신 이 절망적인 상황은 나태했던 여러분들의 믿음을 다시 한 번 확 뒤집어 주님을 향해 불타는 믿음으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이 주신 은혜의 기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매달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살리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마 8:18-38 / 김동호 목사
성경을 보면 도저히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 속에서도 그와 같은 말씀들을 쉽게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오늘에 본문의 말씀을 보니 예수님은 혈류병자와 보지 못하는 자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말씀을 사실로 믿으실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실제로 그와 같은 일들을 행하셨다고 믿으실 수 있으십니까?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면 친구들이 어떻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으며 어떻게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이야기하면 한 발 빠지기 전에 또 한 발을 넣고, 한 발 빠지기 전에 또 한 발을 넣었느냐며 비아냥거리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 친구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습니다.
'너희들이 말하는 것은 사람이고 내가 너희들에게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사람이 물 위를 걷는다는 물론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말이 되지 않는 소리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물에 빠지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이 무엇이 그렇게 이상하다는 말이냐? 없는 사람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죽은 사람 하나 살리신 것이 무엇이 그렇게 이상하다는 말이냐?'
모든 문제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면 모든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믿으면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모든 것이 다 믿어집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 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말씀도 이해되고,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모든 병든 자들을 고치셨다는 말씀도 다 이해가 됩니다.
예수는 믿으면 있고 믿지 못하면 없습니다. 최근에 어떤 종교학자 한 사람이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써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데 그가 예수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까닭은 그가 결국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냥 훌륭한 삶을 사신 성인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유치해 보이고 불쌍해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교수는 예수의 의미를 그가 하나님 이셨다는 데 두지 아니하고, 그냥 그의 훌륭하신 말씀과 삶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만 훌륭한 말씀과 삶을 산 사람이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어리석고 편협한 생각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 우리들이 아무리 편협하고 유치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들은 저와 달리 예수님을 그냥 단순히 훌륭한 말씀과 삶을 사신 사람으로 보지 아니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물론 예수님의 훌륭하신 말씀과 삶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포함하여 예수님을 사람이 되신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 종교학자와 같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만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저의 신앙은 어떻게,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주 분명하게 단순히 예수님의 훌륭하신 말씀과 삶을 본 받으려고 하는 차원을 벗어나 예수님을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저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을 행하신 것을 의심 없이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어떤 가감과 해석 없이 그대로 믿습니다.
제 신앙에 있어서 기사와 이적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극렬히 타는 풀무 불 앞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능히 건져내시겠지만 그렇게 아니 하실찌라도 왕이 만든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고백한 '그렇게 아니하실찌라도'의 신앙을 좋아합니다.
제 신앙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에 치우쳐 있지 않습니다. 제 신앙의 대부분의 예수님의 훌륭하신 말씀과 그 분의 훌륭하신 삶입니다. 제 설교의 대부분은 그의 말씀과 삶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고 지금까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지만 그 동안 한 번도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에 포커스를 맞춘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제껏 설교를 해 오면서 저는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에 대하여 거의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너무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에만 포커스를 맞춘 설교를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는 까닭은 제가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렇게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할 수 있으면 그것을 말하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본문 30절에 보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신 후에 엄히 경고까지 하시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까닭은 기독교 신앙의 포커스가 말씀에 맞추어지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에만 맞추어 질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는 그와 같으신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에 포커스를 맞춘 설교를 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가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하지 말라 하시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뿐이지 저는 그 누구 못지 않게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그냥 훌륭한 말씀과 삶을 사신 사람으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와 같은 이사와 기적을 믿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이해한 진리를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해하고 듣기는 쉬우나 그대로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말씀대로 살려고 나름대로는 노력합니다.
어버이날 큰 아이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제 아이는 그 메일에서 제가 부족하지만 설교한 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존경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저의 삶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선물을 받은 것보다 기뻤습니다. 부끄러웠지만 그러나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은 평을 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말씀은 곧 삶이었습니다. 성경은 세례요한에 대하여 '광야에서 웨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에게서는 소리가 났습니다. 물론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를 소리라고 하신 까닭은 그는 그냥 가만있어도 그의 몸과 삶에서 소리가 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를 쓸 줄 모르지만 만일 세례요한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쓴다면 한 줄만 쓰겠습니다.
'그에게서는 소리가 났다'
제 최고의 욕심은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소리 같은 삶을 살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말씀을 이해하는데서 벗어나 그 말씀과 진리를 사는 것입니다. 소리는 이해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하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은 합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고 깨달은 진리를 사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부족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려고 노력할 수 있는 힘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제 삶은 진리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고 그 진리를 말씀해 주신 살아 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부족하지만, 정말 부족하지만 발버둥치는 힘은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그냥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말씀대로 살다가는 죽을 것도 같고, 망할 것도 같습니다. 죽고 망하는 것까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손해를 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용기를 내 보는 까닭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능히 나를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서 건져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 삶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나름대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저에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대로 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혜라고 이야기한다면 진리를 살 수 있는 능력을 저는 믿음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제가 성경을 통하여 정말로 욕심을 내는 것은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욕심을 내는 것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믿음입니다.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쓴 교수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기록한 성경을 사실을 기록한 말씀으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지혜와 교훈을 주기 위하여 기록한 말씀으로만 이해합니다. 성경을 fact로 보지 아니하고 meaning으로만 봅니다. 그는 성경이 fact에 대한 information을 주기 위하여 쓴 책이 아니라 meaning을 통한 transformation을 주기 위하여 쓴 책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우리에게 어떤 사실에 대한 information이 아닌 변화에 대한 transformation을 목적으로 기록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말씀 속에서 fact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시집(詩集)을 가지고 역사를 공부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와 말씀 속에서 무조건 fact에 대한 information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저도 그와 같은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 교수의 그와 같은 지적은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 교수나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속에는 transformation을 위한 meaning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information을 위한 fact도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무조건 tranformation을 위한 meaning으로만 이해하여 정확한 fact에 대한 information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meaning이 아니라 fact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믿음을 주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훌륭한 삶의 교훈과 지혜를 주시는 단순한 랍비가 아닌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사실로 믿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내가 믿는 예수님이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믿음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신앙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이성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이성을 포함하지만 초월합니다. 이성으로 신앙을 이해하고 재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열두 해 동안이나 혈류병으로 앓던 여인의 병을 낫게 하셨다는 말씀을 사실로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살리셨다는 말씀을 사실로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맹인을 보게 하셨다는 말씀도 사실로 믿고 귀신들려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다는 말씀도 사실 그대로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어떻게 하든지 깨끗게 하시고 온전케 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자리에 빠져 있다고 할찌라도 능히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수님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 표현이 오늘 말씀 속에도 나타납니다. 그것은 29절에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믿음대로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교훈을 위한 동화로 읽지 아니하고 우리의 믿음을 위한 사실로 읽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가지실 수 있다면 성경에 나타난 모든 기사와 이적의 주인공이 되실 줄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우리가 오늘 본문의 맹인과 같이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말씀해 주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한 랍비가 아닌 사람이 되신 하나님으로 믿어 단순한 지혜와 교훈만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에서도 체험하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치유
마 9:18-34 / 박세갑 목사
본문은 생명과 빛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여러 가지 독특한 방법으로 자기에게 나와 청원하는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주님의 주위에는 온갖 상황에 처한 온갖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거리의 거지와 부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큰 관심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 왔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 도시에 몰려나온 시골 사람들과 지위가 있는 관료, 학식이 높은 사람들 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오랫동안 방관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사람들을 무대의 전면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들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가난과 질병으로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만나는 사람 중에는 부유한 관리도 있었고 질병에 걸려 걸인이 된 여인도 있고 거리에서 구걸하다가 갈급한 심령으로 주님께 나온 두 명의 거지와 귀신들려 벙어리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호기심에 차서 이리 저리로 밀리던 가운데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9장 전체의 장면을 그려보면 많은 군중과 그 속에서 특별히 부각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갈급한 필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그런 문제들은 주님을 만남으로 해결됩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 산상 수훈을 설명하시면서 천국의 윤리를 선언하신 것처럼 사람들에게 위대한 이상을 선언하시며 동시에 실제적인 힘을 전해 주시고, 그들의 처한 곤경의 한 가운데서 무능력한 사람들을 강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확인 하게 됩니다.
각각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처음의 인물은 “한 관리”입니다. 마태는 이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좀더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회당 장 야이로”입니다. 야이로의 열 두 살 된 딸이 병들어 집에 누워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릴 만큼 위독한 상태입니다. 그는 딸을 위하여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평생의 회한이 남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께로 나아왔습니다. 그는 너무나 슬퍼 주님께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다음 장면은 질병과 삶의 고달픔으로 슬픔에 가득 찬 여인의 이야기입니다(20~22). 마태는 이 여인을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 라고 표현합니다. 당시의 유대의 율법으로 이런 병에 걸린 여인은 예배 의식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성전이나 회당에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법에 의하여 남편에게도 이혼 당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녀는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것입니다. 오늘 날에는 그런 법이 없어진 것을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자기의 병을 고치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마가와 누가의 기록을 보면 그녀는 병을 고치려고 재산을 탕진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력이 없고 오히려 더 중하여 졌습니다. 그녀가 살아온 이제까지의 12년은 죽지 못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고 주님께서 지나심을 알아 주님께로 나아 온 것입니다.
다음은 두 소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들을 수 있었지만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감각이 있었지만 사물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주님께로 나아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소문이 자자한 치료자 예수에 대한 것이나 그분의 얼굴도 모르고 그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주님께로 나아왔습니다.
끝으로 귀신들려 벙어리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32~34). 귀신이 그를 벙어리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그렇게 주님께로 나아온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궁핍에 처한 사람들이 주님의 주위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 앞에 계시며 자기에게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 살 소망이 끊어진 사람, 낙심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주님께 나아온 사람들의 방법을 살펴봅시다. 야이로는 어린 딸 때문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절하며 “내 어린 딸이 지금 거의 죽어갑니다.” 그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소망이 없습니다. 야이로의 간청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셔서 그의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의 딸에게 손을 얹어 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그것도 한 방법입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야이로와 다른 방법으로 나옵니다. 야이로가 직접적이고 공개적 이였다면 이 여인은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주님께 자신을 만져 주시기를 요청하지 않고 자신이 주님을 직접 만졌습니다. 전혀 다른 방법입니다.
소경들은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 떠들고 시끄럽게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른 복음서에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고 그들은 더욱더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들어가신 집으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들을 막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릅쓰고 끝까지 예수께 나아갔습니다.
마지막으로 귀신 들린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를 모르기에 도무지 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끌려 나아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필요가 다양한 것같이 예수께 나오는 방법도 역시 다양함을 발견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예수께 나왔고, 그들이 모두 힘을 다하여 주님께 호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 절실한 필요를 주님께서 해결하시고 채워주실 것을 믿고 주님께로 나아왔고 그 결과로 그들의 필요는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사망이 정복되었고, 질병이 치료되고, 시력이 회복되고, 귀신이 물러갔습니다.
이제 주님의 모습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야이로가 와서 말하자 주님은 “일어나 따라가셨다.”라고 성경에는 기록되었습니다. 주님은 거절하시거나 주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혈루증 여인의 경우에도 주님의 옷 가를 만지자 치료의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두 소경도 예수의 도우심을 계속하여 부르짖고 예수를 따라 집에까지 들어가자 예수는 그들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의 경우를 보아도 주님께서 지체하시거나 주저하신 경우는 없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시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이 모습을 조금 더 구체화하기 위하여 세 공관복음을 모두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막5;21~43, 눅8;40~56)을 집에 가셔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는 이미 아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하셨을 때 그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내어보내시고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하셨습니다.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이것으로 주님께 나와 도움을 구한 야이로의 간구는 해결 되었습니다.
혈루병 여인의 경우를 봅시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주님은 여인이 치유받은 즉시 이 일을 아셨고 돌아보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셨고 여인이 나아와 자초지종을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이 가득 찬 말씀입니다.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버림받은 한 여인을 받아들여 하늘나라의 일원으로 삼으셨음입니다. 단 한 마디의 말씀으로 그 여인의 인생을 덮고 있는 먹구름을 걷어내고 찬란한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 녀는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줄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여러 경우에 언제나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절실한 필요를 가지고 주님의 능력에 호소하였습니다. 직접으로나 혹은 간접으로라도 사람들의 믿음이 드러나는 곳에 사망과 질병과 흑암과 귀신이 정복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능력은 우리가 설명할 수조차 없습니다. 주님은 힘들여 노력하시거나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이지도 아니하셨습니다. 단지 말씀하시거나 손을 잡으심으로 그들의 필요와 간구는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일들을 크게 떠벌리고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30절을 보면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이 이런 치유를 통하여 알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요14;11)에 이르신 것처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하신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날에도 우리의 주변에 많은 영적인 각성과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로 나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역사들입니다. 믿음으로 주님께로 나아가시고 순종함으로 주님의 주시는 복을 누리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자들과 교만한 자들이 주님의 역사를 바라보고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며 34절에 기록된 시기와 질투의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그들은 주님의 적이요, 동시에 우리의 적입니다. 주님의 능력에 대하여 참된 경외심을 갖지 못하면 이런 편견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에게도 약점이 있다
마 9:18-26 / 이정선 목사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썩 반갑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고 합시다. 예를 들면 한번 말을 시작하면 끝낼 줄을 모르는 사람이나 또는 안면이 있는 세일즈맨을 만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한번 붙잡히면 고생 좀 하게 되지요?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이 궁지에서 탈출할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한 친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잘 만났다며 어디를 급히 좀 같이 가자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연스럽게 그 궁지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지요?
딱 예수님이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물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된다는 귀한 교훈을 말씀하고 계셨지만, 요한의 제자들과 논쟁하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급히 좀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Excuse me."라고 말씀하시고는 이 사람을 따라가십니다.
여기서는 갑자기 나타난 이 사람을 직원이라고 했는데, 원문에서는 지배자 또는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이 사람의 신분을 자세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마가와 누가의 기록을 통해서 이 사람이 회당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당장은 바리새인이고 마태가 지배자라고 표현할 만큼 지도층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동료 바리새인들은 이 예수라는 사람과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닙니다.
회당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동료들로부터 왕따 당할 것을 각오하고 예수라는 젊은이 앞에 절을 하며 간절히 부탁해야 할 만큼 급하고 절박한 사정이 있었는데, 바로 어린 딸의 죽음이었습니다. 딸내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데 체면 지키겠다고 앉아 있기만 할 비정한 아버지가 어디 있겠어요? 회당장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딸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 아닙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만약에 이 회당장의 딸이 죽게 되는 그 절박한 위기가 없었더라면 이 사람이 예수를 만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모든 여건과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 회당장이 예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게 되었을 확률이 매우 낮습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슬픔이 왜 생기는지 명쾌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고난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괴로운 일도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엎드리며 기도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겠어요? 우리가 시편을 읽어보면 다윗의 영성이 가장 뛰어났을 때가 언제인가 하면 극심한 고난 중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다가 일이 잘 풀리고 평안하게 되면 오히려 나태해지고 범죄하게 됩니다. 고난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고통스럽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게 되는 유익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고난 자체는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그 고통보다 훨씬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슬픔과 고통이 찾아올 때, 그것 때문에 불평하고 화를 내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그 은혜를 사모하는 유익한 기회로 삼는 성숙한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 회당장은 딸이 금방 죽었다고 하면서 가서 살려달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 역시 마가와 누가의 기록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와 누가는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마태의 기록에 실수가 있다고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마태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해서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의 능력에 포커스를 맞춰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회당장이 예수님께 왔을 때 아이가 아직 살아 있었는지 이미 죽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예수께서 죽은 아이를 살리셨다는 것이 포인트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딸을 살려달라는 이 회당장의 요청을 즉시 수락하시고 그를 따라나서십니다. 제가 농담으로 말했습니다만,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과 논쟁하는 데서 빠져나가기 위해 회당장의 요청을 받아들이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병자를 고쳐오신 그 관성 때문에라도 예수께서는 당연히 아이를 살려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셨을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각종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제는 병을 고치고 자연을 주관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그분의 능력과 권위의 정점의 순간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하여금 회당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여기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무엇에 약한가 하는 것이 각자 다릅니다. 눈물에 약한 사람 있지요? 이런 사람에게 무슨 중요한 부탁을 하려면 눈물 연기가 필요합니다. 미소에 약한 사람에게는 마음을 홀릴 만큼 예쁜 미소를 많이 연습해야겠지요. 선물에 약한 사람도 있고, 인정에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에 약하실 것 같습니까? 예수님 앞에 무엇을 보여드리면 예수님이 거절하지 못하고 부탁을 들어주실 것 같습니까?
헌금을 많이 하면 예수님이 우리 기도를 더 잘 들어 주실까요? 예수께서는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 과부가 드린 엽전 두 개가 더 큰 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몸을 아끼지 않는 열심과 충성으로 교회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예수님께 뭔가를 요구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모습으로 예수님의 동정심을 끌어내는 것이 효과적일까요? 예수님은 무엇에 약하실 것 같습니까? 정답을 가르쳐 드릴까요? 예수님은 바로 믿음에 약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히 11:6).
이 회당장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예수님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는 정말 딸을 사랑하는 자상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예수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부족했습니다. 다짜고짜로 와서 떼를 쓴다고 예수님이 따라가실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움직이게 한 것은 바로 그의 믿음, 즉 예수께서 오셔서 만져주시면 죽은 아이가 살아나겠다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께서는 회당장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가십니다.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아이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숨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회당장으로서는 1초가 급한 상태입니다. 그 장면이 상상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 또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길을 가시는데, 앞장선 회당장은 마음이 급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길을 재촉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119 구급차라도 타고 사이렌을 울리면서 달려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방해꾼을 만났습니다. 예수께서 그만 걸음을 멈추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웬 여자가 끼어들어서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그 여자를 무시하고 그냥 갈 길을 재촉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마태는 회당장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중간에 끼어든 여인에게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이 여자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환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혈루증이란 여자가 계속 하혈을 하는 병입니다. 현대 의학용어로 말한다면 출혈성 자궁내막염쯤 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 사회에서 여인의 출혈이 특별하게 취급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레위기 15장) 여자가 월경 중일 때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 기간 중에 그 여자의 몸에 닿는 것은 모두 부정하게 됩니다. 침대에 누우면 침대가 부정해지고 의자에 앉으면 의자가 부정해집니다. 심지어는 그 여자가 앉았던 의자를 만지는 사람도 부정해져서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이다스는 만지는 것이 무엇이든지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만지는 것이 무엇이든지 부정하게 되는 저주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사회로부터 격리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 여인은 유대 사회에서 가장 무가치한 인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인이 어떠한 병이라도 고치신다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때, 그것은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를 만나 병을 고침 받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예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여인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 있는 데 가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께 나가 자기 병을 고쳐달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몰래 예수의 병 고치는 능력을 몰래 훔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급히 길을 가는 그 예수의 옷자락을 살짝만 만져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에 대한 보답이 무엇인지 보세요. 감히 예수님 앞에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도 없었던 여인, 부끄러운 병에 걸려 무가치한 인생으로 전락해버린 이 여인을 돌아보시며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여인은 종교적 규율에 따라 사회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가족들도 이 여인을 만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이 여인을 안아줄 수 없었고, 손도 잡아줄 수 없었습니다. 모두에게 버림받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이 여인을 예수께서 "딸아!" 이렇게 불러주셨습니다. 비록 사람들 보기에는 부정하고 무가치할지 모르지만, 그 여인의 창조주 되신 주님 눈에는 사랑스러운 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 여인은 자신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고, 잃어버렸던 가치를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인정받고 사랑받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출세를 하고 돈을 모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렇게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그 인생이 행복하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도 불행하게 살아가는 일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아!" 또는 "딸아!" 이렇게 불러주실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인정되고 그렇게 불릴 때, 거기에 우리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12년 동안 가슴에 맺힌 한이 봄눈 녹듯 녹아내렸을 것입니다. 남들 앞에 나설 수도 없고 늘 불안과 걱정 속에 살아야 했던 이 여인에게 안심하라는 말씀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군중 속에 있던 이 여인이 출혈중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마치 폭탄이 터진 것처럼 사람들이 동요하게 될 것입니다. 부딪치고 밟히고 난리가 나겠지요. 그리고 이 여인은 돌에 맞아 죽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 여인을 향해서 예수께서는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피 흘리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불결한 여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살지 않아도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딸아, 안심하라." 는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큰 위로와 감사할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낙심하고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우리들이 걱정하고 불안 속에 떨고 있을 때, 우리 주님 찾아오셔서, "아들아, 안심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은 그 여인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건강 회복과 영혼의 구원을 분리해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베푸시는 구원, 그분이 가져오신 천국은 육신만의 천국도 아니고 영혼만 들어가는 천국도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지으신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께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러 가시는 바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여인의 방해를 용납하셨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요. 그 여인의 고통이 너무 커서 불쌍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율법의 규율이라는 사슬에 얽매어 파괴당하고 있는 한 여인의 인격과 삶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여인의 믿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행동하시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왕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데, 그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는 다름 아닌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천국을, 구원을 내주시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제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만나러 오신 예수님 앞에 내놓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세상의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내 영혼의 목마름이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져서 구원받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런 믿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아 풍성한 삶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사람들!
마 9:18-26 / 전순기 목사
체감 실업자 수가 317만 명이라는 통계를 보았습니다. 금융 위기가 이제 본격적인 실물 경제 침체로 이어져서 대기업의 65%가 내년도 채용 계획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취업이 더 힘들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실업 문제입니다. 특히 대학 졸업생들의 실업이 심각합니다. 온 라인 잡 코리아의 조사 결과를 보면 93%의 20대들이 구직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습니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우울증·거식증·대인기피증․탈모증에 걸리고, 게임중독․도박 등에 빠져듭니다.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젊은이들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경기가 회복될지, 섣불리 바닥을 예측하기도 힘들어서 ‘그야말로 확실한 것은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뿐’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경기 침체만이 절망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그밖에도 우리의 삶에는 나름대로의 절박하고 절실한 문젯거리들이 있습니다.
꼭 해결되어야 하는데, 방법이 보이지 않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 낙망 되고 낙심이 됩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절망적인 상황이 닥쳐올 때에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아주 대조적인 태도 두 가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예화) 약 100여 년 전 미국에 헨리 콤스톡(Henry Comstock)이란 땅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무와 엉겅퀴가 무성한 척박한 산을 1만 달러에 팔았습니다. 그는 손에 지폐다발을 들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그 산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척박해보이기만 하던 산에서 미국 최대 규모의 금광이 발견된 것입니다. 매장량이 무려 5억 달러를 상회했습니다. 콤스톡씨는 땅을 치며 후회했고, 그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한탄하며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한 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914년 한 발명가의 집과 연구실이 전소되는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200만 달러가 넘는 전 재산을 날린 그의 인생은 잿더미처럼 공허했습니다. 이 발명가의 나이는 67세였습니다. 사람들은 재기하기에는 너무 늙어 보이는 그를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위대한 발명가는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낡은 건물과 시설에 연연하는 내 좁은 소견을 깨우치시려고 하나님이 깨끗하게 청소를 해주신 것입니다. 이 화재는 하나님이 내게 새 것을 주시기 위한 방법이랍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면, 그 이름도 유명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입니다. 그는 화재를 딛고 일어서 예전보다 더욱 훌륭한 연구실을 지었고, 예전보다 더욱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여러분! 콤스톡이란 사람과 에디슨은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상반된 선택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 ‘실패한 인생’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엄청난 상실의 고통과 위기를 오히려 새 출발의 기회로 삼은 ‘성공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에디슨은 절망의 골짜기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낸 복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절망의 골짜기에서 새로운 희망이라는 보석을 캐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묵상해 보면서,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닥쳐온 그 바닥을 가늠하기 어려운 경제적 난국이라는 골짜기에서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삶이라는 보석을 캐낼 수 있는 성공적인 인생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절망을 넘어 희망을 붙잡은 사람들
오늘 말씀에 보면 두 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한 가지 기적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고, 하나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고침을 받은 사건입니다. 두 가지 사건이 함께 얽혀 있습니다. 이제 이 두 가지 기적의 내용을 좀 면밀히 살펴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나, 두 사람 다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는 공통점이 보입니다. 먼저 회당장이 처한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회당장이라는 신분은 유대교 신자들의 삶의 중심인 회당을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세워진 직분입니다. 평신도 가운데서 선출되었고, 한 회당에 한 사람 이상의 회당장이나 직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회당장이 하는 일은 예배의식을 감독하고, 또 율법 두루마리를 예배 때에 꺼내 왔다가 예배가 끝나면 다시 보관하는 장소에 가져다 두는 일을 했습니다. 또 회당에서 학교를 운영했고, 회당 건물을 관리하는 일도 했습니다. 그리고 매 안식일마다 말씀을 가르칠 랍비를 초청하는 일을 했습니다.
회당장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고,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에게는 명예가 있고, 권세도 있었습니다. 또 그 직분에 합당한 충분한 보수를 받았기에 먹고 사는 걱정하지 않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뭐 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의 사랑스런 딸이 병들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는 병든 딸을 고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병세에 차도가 없고, 점점 더 악화되어갑니다. 이제는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한 길만이 남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회당장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나사렛 시골뜨기 목수인 예수님께로 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딸을 고치기 위해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5장 21절 이하 본문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구원을 얻어 살게 해 달라.”고 “많이 간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요구대로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길은 수많은 인파들로 인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초급한 마음으로 야이로는 종종 걸음을 치는데,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길이 더디기 짝이 없습니다. 설상가상이라고 주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인이 예수님께로 와서 고침을 받으려고 하는 바람에 시간은 더 지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야이로의 딸은 죽고 말았습니다. 야이로의 집에서는 사람을 보내 이미 딸이 죽었으니 선생님을 모시고 올 필요가 없다고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이때에 야이로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완전히 절망하고 낙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낙망하는 야이로를 주님께서 붙잡아 주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하시고는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셨습니다.
이제 또 한 사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살펴봅시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혈루증이라는 병은 하혈을 하는 여성질환의 일종입니다. 12년 동안이나 이 병을 앓았다면, 이 병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였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나 효험이 없이 점점 더 병세가 중하여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12년 동안이나 병을 앓으면서,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는 것은 그녀가 상당한 재산가였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가 보았고, 좋다는 약은 다 써 봤으나 소용이 없었으니 절망적입니다.
혈루증이라는 병은 유대교 의식법에 의하면 부정한 병입니다(레15:25-33절). 율법에서는 피를 흘리는 것은 다 부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이 정상적인 월경을 해도 그 기간 동안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출혈이 멈추고 난 후 7일이 지나야 정결해진다고 레위기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리중인 여인은 최소한 두 주간 이상은 부정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셈이 됩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여인이 만지는 것은 다 부정해지기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남편과의 부부생활은 물론이고 손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도 안아줄 수 없습니다. 여간 힘든 삶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 유대교 랍비들은 이 정결법을 더 잘 지켜보려고, 더 엄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두 주간 앞뒤로 더 기간을 두어 실제로는 세 주간을 부정한 기간으로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세 주간 동안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지 연구를 하러 갔을 때에 가이드를 해 주신 정연호 선교사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정 선교사님이 아는 어떤 정통 유대교 여성이 갱년기를 맞아 생리가 끊어졌을 때에 “아, 드디어 나는 이제 해방이다.”라고 기뻐하더라는 겁니다. 여성이 생리가 끊어지면, 여성으로서의 역할이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대체로 서운해 하고, 우울해 하는 게 정상입니다. 그리고 갱년기 후유증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갱년기가 온 것을 그렇게 기뻐했다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까?
정상적인 여자도 이렇게 얽매인 삶을 살아야 했는데, 병적으로 피를 흘리는 혈루증에 걸린 이 여인이 그 동안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았을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겁니다. 혈루증은 거의 문둥병자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혈루증 환자는 모든 관계가 단절된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그런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 바로 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부정한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담대하게 나서지 못하고 뒤로 와서 살짝 옷자락만 만졌습니다. 그래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었습니다.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에 그녀의 혈루 근원이 말라버렸고,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며 떠는 여인에게 주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나 두 사람 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의 끈을 붙잡았고, 그들이 붙잡은 희망의 끈에는 자신들이 원하던 축복이 매달려 있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절망의 골짜기에서 찾아낸 새 희망의 보석으로 인하여 기뻐 뛰며 즐거워했다는 사실이 공통점입니다.
죽었던 딸을 다시 품에 안은 야이로의 기쁨을 누가 가늠할 수나 있겠습니까? 또 혈루증을 고침 받은 여인의 기쁨과 행복은 어떠했겠습니까? 열두 해 만에 비로소 찾아온 몸과 마음의 안식과 평화, 가족들과의 단란한 행복! 친구들과 친지들과의 행복한 만남과 교제! 이 모든 것이 그녀를 한없이 행복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절망의 골짜기에 선포되는 희소식
오늘 마태가 전해주는 소식은 무엇입니까? 마태가 이 복음서를 쓸 당시의 성도들은 하루하루가 오늘의 우리들보다도 훨씬 더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성도들에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옆에 계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전해 줌으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마태복음 8장-9장에서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고, 중풍병자를 고치고, 열병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 온전케 하시고, 뿐만 아니라 풍랑이 휘몰아치는 갈릴리 바다는 잠잠케 하셔서 물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했던 제자들을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을 묵상해 보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있는 본문에서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치시고, 죽은 여자 아이를 살려내신 사건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들은 마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일들이고 또 우리 중에서 일어날 일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고 건강을 회복한 간증을 이야기하려고 한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예화) 지난 주 목요일 신문을 읽다가 오혜령씨가 ‘신에게 바치는 시’라는 간증 시집을 냈다는 기사와 함께 아주 건강한 모습의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 “아니 이 분이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를지 모르나, 제 나이 이상 되는 분들은 오혜령씨를 아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60년대 70년대에 가장 인기 있는 극작가였고, 당시 젊은이들을 잠 못들게 했던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 프로그램 DJ로 최고 인기를 누리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습니다(이화여고 졸업,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 64,65년 중앙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 연극영화예술상 신인상, 연극대상도 수상, 76년에는 36살의 나이로 세계 언론인작가대회 사무총장에 선임).
그러나 그렇게 잘 나가던 그녀에게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77년도에 그녀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72시간 후에야 겨우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소생은 했지만, 그 때에 얻은 관상대동맥경련증은 하루에 한 번씩 그녀를 생사의 경계로 떠밀곤 했습니다. 조금만 과로해도 숨이 멎고 졸도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 78년 2월에는 말기 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때 나이 38세였습니다. 암세포는 이미 십이지장과 임파선까지 온 몸으로 전이되어 있어서 수술도 불가했습니다.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병치레를 많이 한 그녀는 숱한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용케 살아왔는데, 그것도 모자라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고 욥처럼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추구해 온 제게 왜 매를 드십니까. 당신이 살아 계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이 고통 중에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전 당신을 믿지 못하겠나이다.” 통증은 24시간 동안 단말마로 다가오는데,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며 달력의 숫자판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쳐 나갔다고 합니다. 예정된 죽음의 날짜인 6월 26일에 빗금이 쳐 진지 며칠이 더 지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물만 먹어도 토했고 혈변을 보는 고통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때 그녀에게 매주 꽃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백합 50송이를 보내왔습니다. 그녀는 반시간 가까이 꽃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고, 그때 어디선가 그녀의 목덜미를 강하게 낚아채는 손길을 느꼈고, 그 순간 그녀는 정신없이 방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살아 계신 주님께서 자기를 찾아오셨음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왜 죽음의 한복판에까지 따라오시는 겁니까?” 그 말을 내뱉고 나자, 그 동안 주님을 외면하고, 마음대로 살았던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어디서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아졌습니다. 며칠 동안 화선지에 붓글씨로 자기 죄를 쓰면서 회개를 하게 되었는데, 수 십 개의 양초가 녹아내릴 때까지 회개하고 또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회개하기를 반년 가까이 된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기도와 찬양을 하며 혼자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온몸에 오한이 덮쳐 왔습니다. ‘이제 죽는 시간이 다가왔구나!’ 그녀는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너무 추워서 이불깃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깨에 나 있던 복숭아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버렸고, 복수로 차올랐던 배도 완전히 꺼져 있었습니다. 그는 살아 계신 주님께서 두 번째로 자기를 찾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덤으로 얻은 생명을 주님께 드리며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인생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약 21년 전인 87년 7월 17일 남편 권오정 목사와 함께 화성군 비봉면에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는 평화의 집을 개원하고 지금까지도 헌신적인 사역을 펼쳐오고 있습니다.
그녀는 암에서 고침을 받았지만, 여전히 몸에는 여러 가지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근경색에다 좌골신경통, 신우염, 방광염, 통풍관절염, 저혈압(60-40)등, 그녀의 삶은 암에서는 고침을 받았지만 여전히 난치병과의 싸움으로 점철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만난 후부터 하루 종일토록 기도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 요즘도 그녀는 여전히 하루에 아홉 시간씩 기도하면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전에는 무의탁 노인들을 섬겼는데, 지금은 27명의 의지가지없는 아이들을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의 사진을 보니까 40여 가지가 넘는 난치병을 앓았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건강한 얼굴이었습니다. 한 2년 전에 성지 여행을 갔다가 주님의 기적적인 은혜를 경험하면서 이렇게 건강해졌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간증을 읽으면서 제 마음속에 나도 그녀처럼 더 깊이 주님을 만나고 싶고, 더 깊이 교제하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났습니다.
믿음! 희망의 보석을 캐내는 도구
어떻게 하면 야이로처럼,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처럼, 오혜령씨처럼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절망의 골짜기에서 희망의 보석을 캐낼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이야기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었던 소녀의 아버지와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가졌던 믿음입니다. 죽었던 소녀의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은 딸의 몸에 손을 얹기만 하면 살아나리라고 믿었습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들 모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게 하는 통로가 되고 수단이 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화) 이 예배당을 환하게 밝히는 전등을 보십시오. 무엇이 빛을 내게 합니까?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전선을 통해서 등까지 연결되어 빛을 내는 것입니다. 전선 자체가 전기를 만들어 내거나 빛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전선은 단지 전기를 통과시켜 줄 뿐입니다. 그러나 전선 없이는 아무리 좋은 전구를 달아놓아도, 또 여기 아무리 좋은 앰프 시설과 마이크를 설치해 놓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전선은 전기가 흐르는 통로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통로이며 기회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난제들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들을 절망케 하고, 낙망케 합니까? 여러분들은 그 난제들 앞에서 어떤 반응을 하고 계십니까? 혼자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원망하며, ‘왜 나만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해야 하나?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다.’며 억울해 하고 있습니까? 혹시 ‘될대로 되라!’고 자포자기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비록 연약하고 온전치 못한 믿음일지라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사용하여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를 고쳐 주십시오. 내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시오.”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란 관념이 아니며, 믿음이란 입술에 붙은 말이 아닙니다. ‘믿습니다.’가 믿음은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행동하게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신분과 체면을 다 버리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내 딸을 살려 달라.”고 많이 간구한 것처럼 주님 앞에 나와 주실 때까지, 이뤄질 때까지 끈기 있게 기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부끄러움과 수치를 무릅쓰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낫겠다고 생각하고 도전한 것이 믿음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나, 두 사람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은 아니고, 약점을 가진 믿음입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주님 자신을 귀하게 여겨서 주님께 나온 게 아니고, 자신의 필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수단으로 나온 것입니다. 또 여인의 믿음에는 거룩한 사람의 옷자락을 만지면 병이 낫는다는 미신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믿음에는 진실함이 있고,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주와 주님 되심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절망적인 상황을 변화시켜 새로운 희망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러면 그 믿음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하게 만듭니까?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생결단을 해 볼 결심으로 주님께 매달려 간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만나고 싶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의 형편과 처지를 알고 계십니다. 경제 위기도 하나님의 섭리적인 손길 안에 있고, 질병도 사고도 하나님의 섭리적인 손길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삶을 철저하게 주관하고 계심을 저는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모두가 다 힘든 시기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만이 난제는 아닙니다. 사람마다 다 나름대로 절박한 상황이 있고, 간절한 필요가 있습니다. 절망의 깊은 골짜기에 빠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둠의 터널 속에 있을 때는 이 터널이 언제 끝날까? 암담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결코 낙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망적인 상황은 새로운 삶의 기회임을 믿으십시오. 사방이 막히면 하늘이 뚫려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부르짖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으시고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게 채워주실 것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호세아서에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호2:15). 절망의 골짜기인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이 되게 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뿐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나와 전심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임하기를 기도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모르겠으나, 부디 믿음으로 절망의 골짜기에서 새 소망의 보석들을 캐낼 줄 아는 강하고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
마 9:18-26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본문이 전하는 일이 있기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련의 이적기사 중 그 절정에 해당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어린 소녀 하나를 살려 일으키신 일입니다. 그 소녀의 아버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그저 "한 관리"라고 했으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었습니다. 즉 지체가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오셔서 죽은 딸을 살려달라는 이 사람의 간청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죽은 소녀의 집에는 상가에 불려와 피리를 불거나 곡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시끌벅적했습니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아무리 가난해도 최소한 두 사람의 피리 부는 사람과 한 사람의 곡하는 사람을 부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지체 높은 회당장의 집이었으니 피리 부는 자나 곡하는 자를 많이 불러왔을 것이고 문상객도 많았을 터이니 집안이 얼마나 떠들썩했을 것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물러가라"(24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은 집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들에게 왜 "물러가라"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소녀의 죽음을 무효화하시고 그 소녀로 하여금 다시 살아나게 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그 죽음의 상황이 사라지고 피리 부는 자나 곡하는 자가 필요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리 부는 자들과 곡하는 자들에게 "물러가라" 하시며 이어서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서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죽은 소녀를 가리켜 잔다고 하셨겠습니까? 정말로 그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자는 것과 죽은 것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들이었겠습니까? 만일 그 소녀가 정말 자고 있었던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그 집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소녀는 분명 죽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끝장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조차도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자다가 깨는 것처럼 쉽게 극복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 소녀가 "잔다"고 표현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이미 죽은 그 소녀이지만 자는 아이 깨우듯이 일으켜 살리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의 표명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그 소녀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소녀를 살리시기 위하여 그 집을 향해 가고 계실 때 다른 한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는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이 걸치신 겉옷 가를 만졌는데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는 즉시 그녀를 구원해주신 일입니다.
오늘 본문 속의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권능을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이 우리에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던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에 와서는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계십니다. 병도 바람도 파도도 귀신도 다스리시던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에 와서는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분으로 드러나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누가복음에 보면 그 혈루병 앓던 여인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8:43-44) 의사였던 누가가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여인은 불치환자로 판정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불치병이 예수님에 의해 치유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이 예수님에게서는 얼마든지 가능함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2) 했습니다. 그 자신만 부정할 뿐 아니라 그가 눕는 침상, 앉았던 자리, 그의 침상이나 앉았던 자리에 접촉하는 자, 그의 몸에 접촉하는 자, 그와 직·간접으로 접촉한 사람들이 입은 옷까지도 다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환자는 일반인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그 환자는 자신의 병뿐 아니라 사회적 소외와 이로 인한 온갖 삶의 불편과 외로움까지도 함께 앓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가를 만진 여인은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용한 의사란 의사는 다 찾아가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전하듯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절망 가운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육신의 고통뿐 아니라 한 없이 더 큰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여인임을 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딸아" 하신 것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그녀를 가장 친밀한 관계 속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안심하라" 하신 것은 그녀의 마음의 고통을 아시고 그것을 씻어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원하였다" 하신 것은 그녀를 단지 육신의 질병만이 아니라 사회적 매장과 불치의 절망과 영적 죽음으로부터 온전히 치유하셨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본문의 두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만유의 주이시며 사랑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분명히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 이야기 사이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었던 소녀의 아버지와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가졌던 믿음입니다. 죽었던 소녀의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은 딸의 몸에 손을 얹기만 하면 살아나리라고 믿었습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 모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통로이고 기회입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예수님의 옷가를 만지는 행위에 딸린 마술적 효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믿음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하겠지만, 성찬식 자체에 구원의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식에 의례적으로 참여하고 떡과 포도주를 기계적으로 받아먹고 마시는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우리 것으로 소유하는 방법이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이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는 그 믿음의 고백이 성찬식으로 하여금 은혜의 수단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 없이 떡과 포도주를 받는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도 없는 하나의 우스꽝스러운 연극행위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르고 굳건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놀랍고 한없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예수님이 믿음에 약하시다고
마 9:18-22 / 이정선 목사
저는 지난 주일 설교를 하고 나서 마음이 좀 불편했습니다. 내가 말씀을 올바로 전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설교를 준비할 때부터 그 의문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에 약하시다는 것은 약간의 과장과 해학을 담은 표현으로서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에 약하시다고 할 때, 과연 어떤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개념이 어떤 것인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믿음이라고 확신하면 예수님이 들어주셔야 하는지, 이런 부차적인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 나오는 직원, 즉 회당장의 믿음은 예수께서 죽은 딸을 살려주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능한 일,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굳이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12년 동안 어떤 의사도 고치지 못했던 자신의 병을 예수님께 가면 고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회당장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셨고, 혈루증 앓는 여인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고, 믿음이야말로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믿음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시리라는 믿음, 또는 죽은 딸을 살려주시리라는 믿음입니다. 즉 자신에게 닥친 절망적인 위기 속에서 나오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이런 것이라면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 아닙니까? 그것이 믿음이라면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로또 하나 사 놓고 그거 당첨되게 해 달라고 진짜로 절실하게 또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꼭 당첨되게 해 주실 거라고 믿으면, 그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겠지요. 야고보서에 말씀하기를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셨는데, 자기 욕심 채우려고 구하는 기도는 잘못된 것이고 그것을 아무리 확신한다 해도 믿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정당성이 확보될 수 없다고 말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또 당첨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서 모두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려고 애를 썼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궁지에 몰려서 마지막 살아날 희망을 로또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에 걸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소녀 가장이 생존하기 위한 한 가지 궁여지책일 수도 있습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로또라는 일확천금성 또는 사행성 행위를 믿음에 접목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이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과 똑같은 형편에 처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합시다.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시리라고 확신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낫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차별하시는 겁니까? 어린 딸이 죽어가는데,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살아나지 못하고 그래서 딸을 잃었다면, 예수님을 원망해야 합니까? 누구 딸은 살려주시면서 왜 내 딸은 안 살려주시냐고 따져야 합니까?
사실 우리 가운데 오직 예수님께만 희망을 걸고 병 낫기 위해 나왔던 이 여인과 똑같은 처지에서 간절히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분들이 여럿 있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우리가 이 분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지만, 기도한다고 해서 늘 응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에 약하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이 허락하신다, 이런 말을 아무렇게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은 믿음 없는 소리 한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낫지 않은 것은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하면 할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이재성 선교사님 사역하시는 선교사 훈련학교에 한 한국인 선교사 후보생 부부가 훈련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남편은 의사였고 아내는 간호사였습니다. 이분들이 선교사가 되기로 헌신하고 훈련을 받기 위해 뉴질랜드까지 온 것입니다. 저는 이분들을 만나본 적이 없지만, 다른 분들 말을 들어보면 너무나 좋은 분들이었답니다. 누구에게나 칭찬받는 성실하고 믿음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이 부부에게 어린 딸이 둘 있었는데,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에 또 딸을 하나 낳았습니다. 그래서 딸이 셋이 되었겠지요?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 몸에 이상이 느껴져 정밀검사를 받아보았더니 대장암 말기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가장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남편이 의사이고 자기도 간호사인데 암이 말기가 되도록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있을 법하지 않은 일입니다. 좋은 환경, 좋은 대우 다 포기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의술을 베풀겠다고 자신들의 젊음을 바치기로 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역시 우리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일 아닙니까? 이제 막 아이를 낳고 한창 엄마의 사랑을 먹으며 자라야 할 아이들이 셋이나 되는데, 그 엄마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이 인간적인 면에서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일입니다. 작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이 가정이 급히 한국으로 돌아가 아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 번도 넘도록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항암치료를 하려는데 백혈구 수치가 너무 떨어져서 제 때 하지 못하고 미루기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 치료의 과정에서 그 남편이 쓴 기도편지들을 보면서 저는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믿음에 감동하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서 반드시 낫게 해 주실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몸 상태는 악화되어가고, 나중에는 입술이 검게 타 들어가고 뼈 위에 가죽만 남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을 간절히 사모하다가, 결국 약 한 달 전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참 하나님이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이 젊은 남편은 죽어가는 아내를 위해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겠습니까? 여기 나오는 회당장의 심정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좋은 조건 다 버리고 일생을 주님 앞에 헌신한 이 젊은 의사의 믿음이 회당장의 믿음보다 못하다고 할 근거는 없습니다. 어린 딸들 앞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이 젊은 엄마의 고통이 혈루증 때문에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 받았던 여인의 고통보다 작다고 말할 근거도 없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가 예수님은 믿음에 약하다는 말을 할 때, 그 믿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결국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란 우리가 뭔가를 믿는 그 행위 자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병 낫게 해 주시리라고 믿어도 고침 받지 못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았다는 사실과 낫지 못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그 믿음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힘이 정의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치의 혼란에 빠진 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몰아세울 때 사용했던 논리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죄 없이 고난 당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너 고난 당하는 것 보니까 죄 지은 것이 분명해. 그러니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라... 이런 식이었단 말이지요.
그러면 믿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우선 왜 우리가 간절히 또 진심으로 믿어도 하나님께서 행동하게 하시는 믿음이 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지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우리의 일방적인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떡 가지고 있는 사람은 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아무리 김칫국물을 마셔봤자 떡을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에 약하시다고 말할 때, 이 믿음을 정의하자면 하나님의 의도와 인간의 소망이 만나는 자리,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서로 만날 때, 거기에는 많은 오해와 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스탠다드에다 인간의 의지를 맞춰나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인간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창조주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고통 당하는 것을 보시고 심히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여기 9장36절에 보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아왔던 것처럼 병자들을 만나는 대로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이 병 고쳐주기를 거부하셨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왕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하늘의 능력과 권세를 그렇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병이라도 고쳐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그 앞에서 그렇게 고쳐주시리라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의도와 인간의 소망이 일치하게 되어 병을 고쳐주시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도가 우리의 소망과 다를 때는 어떻게 될까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실 의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고생을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극심한 고통에서 건져주시지 않는 하나님의 의도에 자신들의 소망을 맞춘 것입니다. 그들의 소원이라면 당연히 그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안 건져주시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의 의도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 자신의 소망을 거기에 맞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히브리서 기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라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믿음은 기도해서 병 나은 믿음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죽어간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병 고쳐주시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젊은 의사가 아내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소망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처럼, 저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 믿음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의도가 최종적으로 확인이 된 후에는 아무런 불평이나 원망 없이 그 하나님의 의도에 저의 마음을 맞춰나갈 것입니다.
저는 예수 믿고 복 받고 예수 믿어서 부자 된다고 선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엉덩이를 발로 차버리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행위이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성도들을 모욕하는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슬픔과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한다고 믿음이 없다거나 또는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겪으며 삽니다. 왜 우리에게 고난이 있는지, 그리고 그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지 우리가 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욥의 고난을 통해서도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그러한 설명이나 교훈이 모든 것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당장 당하고 있는 고난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 고난을 십자가처럼 짊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발견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로마서 8장 18절 말씀처럼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경험하고 목격한 바에 의하면, 우리의 믿음을 가장 시험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의 믿음을 가장 강하게 하는 것도 바로 이 고난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그렇게 떠나보내야 했던 그 젊은 의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남은 자들에게는 고통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내에게 BEST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어간 아내를 그 다음날 꿈에서 보았는데, 그렇게 행복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슬픔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파라독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계 21:4). 이 믿음으로 모든 슬픔과 고난을 이겨내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방금 죽었사오니
마 9:18-19 / 김영규 목사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마9:18-19, 23-26)
회당장이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예수님 앞에 한 사람이 헐레벌떡 다가와서 엎드렸습니다.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첫째는 갑자기 예수님 앞에 다가와 엎드렸기 때문에 놀랐고, 둘째는 그 사람이 다름 아닌 가버나움에서 알만 한 회당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나 누가는 그의 이름을 “야이로”(히브리식으로 ‘야일’)라고 밝힙니다.
우선 회당장이 어떤 직책인지 잠깐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이 모인 곳이면 어디나 회당이 있습니다. 몇몇 가정이 모이는 작은 회당에서부터 수 백 명이 모이는 큰 회당도 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에게는 모든 생활의 중심입니다. 첫째는 예배당이요, 그 다음은 신앙 교육 기관이요, 시비를 가려주는 재판소요, 공동체의 일을 함께 의논하는 행정기관이기도 합니다. 큰 회당에는 보통 열 명의 관리인이 있었습니다. 예배 때에 성경을 낭독하는 사람이 한 명, 시제를 담당하는 집사가 세 명, 신학 교사 한 명, 통역자 두 명, 회당장이 세 명입니다. 회당장은 회당의 가장 유력한 지도자로서, 재판하는 일이나, 기타 중요한 업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은 갈릴리 최대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가버나움 회당은 다른 회당들보다는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이고, 회당장이란 직책도 그만큼 권위가 있었을 겁니다. 적어도 그는 율법에 상당한 식견이 있었을 것이며, 종교 지도자로서도 인정을 받았을 겁니다. 바로 그런 신분에 있는 야이로가 무명의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거두절미 하고 급한 사연을 털어놨습니다.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죽게 되었사오니”라고 했고, 누가복음에 보면 “죽어간다”고 했습니다. 야이로는 자기 딸이 분명히 죽음에 임박했음을 알고 달려왔습니다. 당시 야이로의 딸은 열 두 살입니다. 더구나 둘도 없는 외동딸입니다. 그 귀한 자식이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다급했겠습니까?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익히 아는 의원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정상적인 의술로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면서 엎드렸습니다. 야이로의 처지나, 그가 취한 행동, 그가 얻은 신앙의 경험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특히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먼저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려야 합니다
큰 문제가 생겼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을 찾으라는 신호인 줄로 아세요. 하나님은 충격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왜 그럴까요? 요즘 사람들은 웬만한 일에는 잘 놀라지도 않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소돔성 사람들을 보세요. 하나님의 심판이 코 앞에 다가왔다고 경고해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세상이 망한다고 해도 자장가 소리로 들어요. 최후의 순간까지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종로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회개하라고 외쳐 보세요. 아마 정신병자인 줄로 알겁니다. 이렇게 무감각한 사람들에게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충격 요법입니다. 깜짝 놀라게 만들어야 정신을 차립니다. 물론 깜짝 놀랄 일이 수 백 번 발생해도 끄덕도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제 불능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마음이 열린 사람이라면 이런 시기에 당연히 하나님을 찾을 겁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평소 예수님께 관심은 있었지만 믿고 의지할 일은 없었습니다. 자기 삶에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율법에 능통한 유대교입니다. 굳이 자신이 가진 종교적 신념을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메시야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율법만 지키면 되지! 그는 자신의 지위나 처지에 만족했습니다. 왜 그리스도를 믿어야 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외동딸이 다 죽게 되니까 깜짝 놀라서 예수님께 달려 왔습니다. 인간은 전능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당장 삶을 끝낼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약합니다. 병들고 죽습니다. 육체도 죽고, 영혼은 지옥에 떨어져야만 됩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좀 살만 하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 힘으로 세상을 주무를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에게 충격적 사건들을 통해서 일깨워주십니다. 인생에 돌발 사태는 무수히 많습니다. 저는 한 밤 중에 전화가 걸려 오면 바짝 긴장합니다. 또 무슨 급한 일이 생겼을까? 갑자기 몹쓸 병에 걸려서 우는 사람, 갑자기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놀랄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충격적인 일이 생겼다고 낙심하지는 마세요. 지체 말고 주님 앞에 엎드리면 됩니다. 충격적 사건은 바로 주님의 초청장입니다.
야이로는 주님을 믿고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께 나와서 죽은 딸을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살려주십시오!” 적어도 그 때까지는 단 한 번도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려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열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중풍병과 같은 병자들을 고치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죽은 사람도 살려내실 줄을 믿었습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주님께 나오는 자는 어떤 문제라도 넉넉히 해결될 줄 믿어야 합니다. 1988년 2월 2일 오전, 알라바마 주의 웨스트엔드 크리스천 스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갑자기 무장괴한 두 명이 학교로 쳐들어와서 학생 80명과 선생 네 명을 인질로 잡고 대치했습니다. 괴한들은 장총 두 자루, 권총 세 개, 탄약 200 발로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질들이 말 한 마디 하지 못하도록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떨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 때에 어린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용기 있게 말합니다. “아저씨,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렇게 한다고 아저씨의 일이 해결되나요?” “어리석은 일이예요. 포기하세요.”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왔겠습니까? 이들은 평소에 메리 앨리스 블랜턴이란 선생님에게 신앙 교육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늘 시편 56편 3절의 말씀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니 두려워 말라고 늘 가르쳤습니다. 정작 위기가 다가오니까 어른들은 두려워 떨었지만, 믿음을 가진 아이들은 용감하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시는가 봅니다. 어린아이 같이 믿어야 합니다. 이치를 따지고 경험을 따지면 이미 틀려버린 것입니다. 믿음은 지식도 경험도 초월합니다. 야이로는 前代未聞의 일을 기대하고 믿었습니다.
믿음에는 체면이나 지위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야이로를 보세요. 그는 가버나움 대회당의 회당장입니다. 유명인사요, 지방 유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사람입니다. 점잖은 체면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사슬을 다 벗어 던지고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큰 길에서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최대한의 겸손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 섰을 때, 명예나 지위나 체면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도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불신앙의 무리들을 내 보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야이로의 집에 가까이 갔을 때에 야이로의 집에서 한 사람이 쫓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회당장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정말 죽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모시고 와 봐야 소용 없습니다. 지금 장례식 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께 죽은 사람 살려내라고 해서 괴롭게 하지 마시고, 돌아가게 하십시오” 이 대화를 곁에서 듣고 계시던 주님은 오직 한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5:36) 이 말씀을 하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주님은 야이로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훼방꾼들을 쫓아 내셨습니다.
먼저 불신앙의 무리를 정리해야 됩니다.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 보니 온통 난장판입니다. 피리 부는 자들과 우는 자들의 소리가 시끄럽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먼저 피리 부는 사람과 우는 사람을 고용합니다. 피리는 갈대나 뼈나 나무줄기로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행사 때마다 사용되었습니다. 우는 자는 주로 목청이 좋은 여자를 고용했습니다. Mrs. Rogers란 사람은 유대인의 장례식에 참석한 소감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돈으로 산 울음꾼들이 만가를 부르면서 슬픈 춤을 춥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무습게 울면서 비명을 지릅니다. 정말로 슬프게 울어줍니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보면 가족들은 몸살이 나는데 이들은 말짱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리 가난한 자라도 장례식에 피리 부는 자 두 사람과 우는 여자 한 사람을 고용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울음꾼을 불러다가 장례 절차를 시작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훤화하는 자들이 시끄럽습니다. 훤화란 소란을 피운다는 뜻입니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나서서 물건들을 뒤집어 놓고 소란을 떱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초상집에서는 일부러 시끄럽게 합니다. 술을 마시고 화투를 하면서 떠들지요. 왜냐하면 소란을 피우는 동안 잠시나마 슬픔을 잊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죽음을 운명으로 알고 체념하는 사람들, 예수님은 이런 모든 사람들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곁에서 쫓아버려야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피리 부는 자, 훤화 하는 자, 우는 자, 신앙과 상관없이 떠드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야 합니다. 운명론자들, 체념론자들, 무신론자들, 우상주의자들, 다 믿음의 걸림돌이요 훼방자들입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가깝고 관계가 많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걸림돌이 되거든 일단은 기도하는 자리에서 내보내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불신앙도 쫓아내야 합니다. 운명론을 쫓아내세요. 회의론을 쫓아내세요. 참 믿음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무엇이든지 멀리하십시오.
그리고 내 믿음을 견고히 할 사람들을 가까이 두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는 자리에 믿음의 동반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가까이 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은 믿음의 동지일 뿐만 아니라, 장차 예수님을 증거해야 될 증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을 멀리 하되, 믿음의 동지들, 주님의 증거자들을 곁에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주님은 죽은 아이를 살리시기 전에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중요한 주제를 주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을 무조건 두려워 하기 이전에 죽음이 무엇인지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죽음을 바로 아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간단하게 잠자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죽은 것이 아니라 수면상태나 기절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때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모든 장례 절차가 진행중인 것을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는 자리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 주님은 사람들의 분명한 죽음을 가리켜서 잠을 자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인간의 죽음은 잠자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잠시 나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1987년 10월 어느 날 Jann Ballard라는 사람이 켄터키 루이스빌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밤중에 4차선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가다가 마주오는 차와 정면 충돌을 당했습니다. 차는 가루처럼 부서지고 이 사람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고 직후 앰블란스에 실려 응급실에 도착해 보니 심장이 멎었어요. 의사들이 사망 확인을 하고 영안실로 보내라는 꼬리표를 시체에 달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목사님이 기도하면서 시체를 한 번만 다시 보아달라고 애원합니다. 다시 살펴 보니까 죽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어요. 의학적인 죽음은 심장이 멈추거나, 뇌가 작동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죽음은 삶의 상태가 바뀌는 것 뿐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나뉘는 것이 죽음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에 먼저 흙으로 몸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 넣으니 비로소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숨결, 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표현 된 것이 바로 인간의 영혼입니다. 영혼은 육체를 집으로 삼고 거처합니다. 영혼은 육체를 지배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육체와 영혼의 관계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순종하면서부터 깨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육체의 죽음이 온 겁니다. 누구나 죽음이 다가오면 영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처소로 가게 되고, 육체는 이 땅위에 남겨집니다. 육체적 죽음이란 영혼이 떠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관점에서 본다면 자는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에게 있어서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실제로 낮잠 자는 아이를 깨우는 것과 같이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이 세 번 있습니다. 첫째는 오늘 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둘째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일이고, 셋째는 나사로를 살리신 일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죽은지 얼마 안 되어 즉시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관을 내어가는 도중에 살리셨습니다. 나사로는 무덤에 장사 된지 사흘이 지나 썩은 냄새가 날 때에 살리셨습니다. 어느 경우든지 주님은 말씀 한 마디로 명령하셨을 뿐입니다. 주님은 야이로의 딸에게 다가가셔서 손을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막5:41) 야이로의 딸은 낮잠을 자다가 깨어나듯이 부시시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명하셨습니다.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막5:43) 자다가 일어나서 식사를 하듯이 소녀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육체를 살리는 것은 말씀 한 마디면 됩니다. 그러나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오히려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지옥에서 건지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고, 자기 목숨을 버리셔야만 하셨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 그래서 지옥의 심판에 직면한 사람들을 살려 내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20:3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야이로는 열 두 살 난 딸의 육체적 죽음을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나 야이로가 받은 더 구원은 영적 죽음에서 살아난 겁니다. 바로 지옥의 파멸에서의 영생 구원, 영혼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큰 구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바라본 종말적 계시에 의하면 이 세상 끝날에 크고 두려운 심판이 이르게 됩니다. 그 때에 땅 위에 생존해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또한 창세 이후로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어서 지옥이나 천국에 있던 모든 영혼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 때에는 이 땅 위에 묻혀서 흙으로 돌아갔던 모든 육체가 부활하여 영혼과 결합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이 때에 지옥으로 가는 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지옥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들의 처소입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두려운 죽음은 바로 둘 째 사망입니다.(계20:1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받는 진정한 구원은 이 둘째 사망에서 벗어나는 구원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오늘 야이로는 딸의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믿고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야이로가 받은 구원은 딸의 육체적 생명이 아닙니다.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둘째 사망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영혼의 생명 구원! 온 가족이 하나님의 품에 살게 된 영생입니다.
결론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열 두 살 난 외동딸이 죽는 절박한 일을 당했습니다. 이 충격적인 일을 당하여 야이로는 무조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죽은 아이를 살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문제처럼 놀랄 만 한 일을 당했거든 지체 말고 주 예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절망적인 일을 당하는 것은 주님의 초청입니다.
주님은 먼저 모든 신앙의 방해꾼들을 몰아내셨습니다. 진리는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 운명론자들에게는 어떤 이적도 의미가 없습니다. 불신앙은 몰아내고 믿음으로 다가 오십시오.
주님께는 죽음은 잠자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실제로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가 나뉘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에게는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잠자는 자를 깨우는 것보다 쉬운 일입니다. 주님께는 산 자만 있고 죽은 자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죽음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육체의 구원을 위함만이 아닙니다. 실상은 하나님 없는 지옥에 떨어지지는 둘째 사망에서 구원받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들에게는 어떤 사망도 문제가 없습니다. 야이로와 그 가족들처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큰 영생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