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22:42-44)
이 말씀을 얼른 들을 때 하나님 아버지 뜻이 따로 있고 예수님 뜻이 따로 있는 것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이 기도는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데 있어서 ‘만일 아버지 뜻어어든 이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주시던가, 아니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는 싫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지도록 그냥 두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도성인신으로 오실 때에 십자가를 질 것을 계획을 하고 온 것인가? 즉 영원 전서부터 십자가를 질 계획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이런 계획이 없이 와서 보니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져서 할 수 없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십자가를 질 것을 계획을 하고 이 세상에 오긴 했으나 막상 십자가를 질 상황에 닥치고 보니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도 크고 두려워서 그 고통을 안 겪어보려고 이런 기도를 하신 것인가? 그런데 아무리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하나님께 호소해 보아도 응답이 없자 할 수 없이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를 마친 것인가?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신 주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전제할 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를 먼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사건은 갑자기 된 게 아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영원 전에 당신의 의지세계에서부터 이미 계획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이 사건은 영원 전, 인간을 짓기 전,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기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이미 계획이 된 것이고, 그 계획대로 진행이 되는 것이지 계획에 없던 일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계획이 앞당겨지거나 늦춰지거나 추가되어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와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짓기 전 영원 전서부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천국에서 당신과 함께 영원히 누리며 쾌락하며 살기로 하신 주님의 이 마음을 인간의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주님의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그 애정성은 당신에게 ‘고통스런 십자가를 지지 말고 천국에서 그냥 편히 지내라’고 한다면 그것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겪는 것보다도 더 괴로우신 분입니다.
이런 주님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은 우리 주님의 속성이나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에 비춰 생각해 볼 때 십자가에서 고통으로 죽지 않도록 십자가의 사건을 치워달라고 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십자가라는 사건은 일종의 주님이 마실 잔이요 그릇인데, 그 사건 즉 그 잔 속에는 무슨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거기에는 거짓 종들 로마군인들 율법사 서기관들이 다 들어있고, 성경 가지고 외식운동 껍데기 운동하는 사람이 거기 다 들어있고, 사람 많이 모이고 헌금 많고 기도도 남이 쳐다보는 곳에서 긴 옷을 입고 하는 외모 모양 껍데기 가지고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는 사람이 거기 다 들어있고, 이들로부터 오는 멸시와 조롱과 고통과 비아냥거림 등이 거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 지는 사건을 치워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실 때 그 십자가를 지게 하는 많은 무리들의 증오와 조롱과 멸시와 천대와 고통이 십자가를 지는 과정에서 예수님께 복합적으로 몰아닥칠 것이니 바로 이러한 것들로 인해 당신께서 영원 전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계획했던 그 마음을 순간이라도 잊거나 버리거나 후회하거나 원망하거나 하지 않고 모두 이기고 능히 십자가를 지고 승리케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십자가를 인간 대신 져준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 인간과 신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신인양성 일위의 존재여야 하고, 또한 이런 인간으로서 원죄나 자범죄가 일체 없어야 하는 것인데,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고통과 두려움에 그 십자가를 지기 싫어한다거나 하나님을 원망한다거나 후회한다거나 십자가를 지우는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는다거나 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서부터 가지셨던 당신의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구원코자 하는 그 마음과는 대립이 되는 것이니, 이는 곧 하나님과 의사단일성의 마음이 아니므로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 된 마음이요, 이는 곧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이니 예수님이 이런 죄인이라면 우리 인간을 구원할 자격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면서 당신의 손목에 못을 박는 자를 향해 욕을 하면서 ‘금방 내려가서 너희 목을 비튼다’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예수님은 그 사건에서 이긴 건가, 진 건가? 누구에게 지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는 거짓 종들 이단자들이 다 동원돼 있고, 그 배후에는 사단 마귀가 버티고 있으면서 이 마귀가 그들을 잡고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고난과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육신에 자극을 줘서 고통을 느끼고 아프게 하고 화가 나게 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빼앗아 죄를 짓게 하려고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마귀의 그 수법에 넘어가서 십자가의 고통과 주변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한 자들의 모습을 보고 잠시라도 그들에게 보복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다거나, 십자가의 고통이 두려워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는다거나 하는 등의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 영원 전서부터 무형의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부터 가지셨던 당신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예정된 그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이는 곧 당신의 백성의 구원의 성업이 실패를 하게 되는 것이고, 이는 곧 당신의 백성들을 모두 지옥에 떨어뜨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주님에게 있어서는 실패의 쓴 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33년의 삶의 걸음걸이가 그랬듯이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에도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순간적으로도 끊어지지 않았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성도의 한 손과 하나님의 한 손을 주님의 양손으로 잡고 중보자로서 화목을 시키는 건데 지금 사단 마귀는 십자가라는 사건을 동원해서 예수님의 그 정신이 잠시라도 끊어지게 하려는 것인데 그런 가운데서 주님은 그 손을 절대로 놓지를 않으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기도한 이 잔 속에 들어있는 주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알아서 우리 역시도 이 세상에서의 삶 가운데서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 전서부터 나에게 가지셨던 그 궁극적 목적적 결과적 영원적 구원을 잡고 살아서 사단 마귀의 계략에 넘어가는 실패의 쓴 잔을 마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중보완성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 서서 하나님 아버지의 손과 우리의 손을 영원히 서로 맞잡게 해주는 일인데, 이 일을 위해서는 마귀의 그 어떤 시험에도 예수님은 중보의 그 손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연유로건 예수님께서 그 손을 놓으면 우리의 구원은 실패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당신의 전 인격이 우리의 구원에 총 집중입니다. 마귀가 아무리 십자가의 고통의 방편으로 이 집중성을 끊어놓으려고 해도 주님의 우리를 사랑하는 그 애정성은 그 마귀의 계략을 능가하니 그 집중성이 흐트러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지극한 사랑을 인간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어도 인간 나를 사랑하는 그 애성으로 육신은 고통이 없었다’ 라고 하기보다는 ‘인간 나를 사랑하는 애성의 그 크기가 십자가로 통해서 오는 육체의 고통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크고 극치였다’고 표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
사단 마귀가 예수님께 십자가의 고통을 줘서 그로 인해 예수님의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을 끊으려고 할 때 만일 주님의 영원 전서부터 우리를 향해 가지셨던 그 사랑의 마음이 십자가의 고통 앞에서 잠시라도 끊어졌다면 설령 그 상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고 해도 이미 그 마음은 사단 마귀의 시험에 진 것이므로 우리의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육신도 죽고, 마음 정신도 사단 마귀에게 빼앗겨 죽고, 결국 깡그리 망한 것이고 우리를 구원할 자격은 상실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앞에서도 우리에게 향하신 무한하신 그 애정성으로 인해 당신이 겪는 모든 고통과 수치를 모두 초월하고 승리의 잔을 마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능의 능력자이시니 당신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안 질 수도 있고, 혹 진다고 해도 아무런 고통이 없이 달려 죽을 수도 있고, 십자가에 매다는 자들을 당장이라고 처단을 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나를 위해 하나님 앞에 만족을 이뤄드리는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만능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인간 내가 당할 고통을 당신이 고스란히 당하고 그 속에서 영적 면에서 이기고 나왔습니다.
그 시험에서 이기고 나오니 육신은 죽더라도 나중에 그것까지 부활 승천으로 소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해타산은 결과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을 자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기의 이해타산을 어디에 두고 삽니까? 늘 임시성, 불에 탈 세상 것이 아닙니까? 믿는 사람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이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거짓적인 믿음을 가진 자들은 늘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하고 삽니다. 그러니 안 믿는 사람의 속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안 믿는 사람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 것을 구하고, 세상 것 이뤄놓은 걸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른 복음이요 저주받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날로 와서 바로 그날로 십자가를 지지 않고 33년간 사시면서 사역을 하신 것은 인간의 구원이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만 구원의 효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일만이 아니라 당신의 33년의 그 삶 전체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가격을 갖춘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100% 만족을 드린 무흠의 삶이셨습니다. 죄만 짓고 세상만 구하는 나에게 천국 것을 주고 세상 끝 날에 천국에 데려가서 당신처럼 그 천국을 통치하고 누리게 해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나대신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 삶을 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믿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생명과를 먹으라는 것이고, 부활 승천하신 것은 우리로 생명과를 먹여서 주님처럼 닮게 해서 하늘나라에 데려간다는 소원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믿지 않는 자가 많으니 믿는 우리와는 의사적으로 마찰 충돌 대립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이런 가운데서 굴려지면서 사람 속에서 사람을 배우고,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이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서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원 전서부터 나를 향해 가지셨던 그 소원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삶의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 인격 전 삶이 우리의 구원에 총 집중이신데 이 집중성이 순간적으로라도 끊어지면 우리를 위한 중보역할은 무효가 됩니다. 예수님의 한 손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또 한 손은 우리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과의 연결을 시키는 게 중보인데 마귀는 예수님에게 갖은 수욕과 고통과 아픔을 줘서 우리의 한 손을 잡은 예수님의 손을 한 순간이라도 끊게 하려고 십자가상에서 최대의 발악을 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애정성으로 그것을 모두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이 싸움에서 예수님에게 패배한 마귀는 이제는 성도가 ‘안 믿으련다’하면 ‘그래, 믿지 말라’ 하고, 성도가 ‘잘 믿으련다’ 하면 ‘그래, 잘 믿어라’ 하면서 이질적인 길로 밀어버리는 수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 예수 잘 믿어라. 내가 월급주고 호강시켜준다’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이 어디로 빼앗기겠습니까? 물질 잘 해주는 쪽으로 뺏기게 됩니다. 마귀가 보낸 종은 인조사랑으로 성도를 다독거려서 성도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모르는 사람은 그게 그만 하나님 사랑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게 됩니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시험을 이기기 위한 기도에는 주의 사자가 돕습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한 기도,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 위한 기도는 그냥 땅에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이 기도가 얼마나 간절한 기도인가? 이 기도의 땀이 땅에 떨어져 스며들듯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그 사랑에 감화 감동을 입는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하늘로부터 오셨으니 하늘의 것을 주러 오신 것입니다. 썩고 불에 타질 땅의 것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물질을 많이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복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존귀 영광자로 지혜지식적인 면에서 고상한 자로 하나님의 옳은 것으로 뭉쳐진 자로 만들어 주려고 하늘로부터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면서 ‘신령과 진정한 예배는 이 때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때 교인 몇 명이 있었습니까? 교인은 사마리아 여자 하나요, 가르치는 분은 예수님 한 분, 장소적으로는 우물가.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이 신령과 진정한 예배라고 합니다. 세상적인 눈과 마음을 가지고 건물 크고 교인 많고 학박사 많고 한 이런 곳이 진짜로 생각하면 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그 때 그 우물가에서 예배순서가 있었습니까? 헌금시간이 있었습니까? 찬양순서가 있었습니까?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신령과 진정한 예배라고 하십니다. 삶 전반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져 가고 하면 그게 곧 신령과 진정의 예배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모르면, 예수 믿는 본질을 모르면 참을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참이라 하게 됩니다. 교회가 신앙한다고 하면서 그 질이 하나님의 본질에 적중성으로 흐르고 있는지, 세상 쪽으로 흐르고 있는지 잘 봐야 합니다. 모든 사건은 우리의 구원도리를 깨닫게 해주는 표면이요 껍데기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 뭐가 흐르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지를 볼 줄 모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려 했으나 막상 십자가를 질 사건이 눈앞에 닥치자 그만 두렵고 떨려서 어찌하든지 그 십자가를 피해보고자 하는 비굴한 주님으로 만들던가, 원래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도록 하려고 했는데 그만 인간이 하나님의 그 예상을 벗어나서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어 지옥에 가게 생겼으니 할 수 없이 비상수단으로 예수님을 보내서 구속사역을 통해 인간을 구원해주는 무지무능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영원 전서부터 나를 향해 품으신 그 궁극적 목적적 결과적 구원을 바로 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는 주님의 기도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기도가 아니라 빨리 십자가를 성공적으로 지게 해달라는 소원의 기도임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후에 ‘엘리엘리 사박다니’ 라고 외치신 것도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너무 두려워서 외치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의 탄식이 아니라 갖은 모욕과 고통 가운데서도 거기에 지지 않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당신의 백성의 구원을 위한 성업을 100% 완수하심에 대한 환희의 함성으로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의지세계에서부터 시작된 우리의 구원을 알고 그것에 비추어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이 이렇게 달리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의지세계 구원(궁극구원)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구원을 영원 전 하나님의 의지세계로부터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의 구원이 설정된 것으로 보지를 못하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을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깨달음에서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하신 기도를 주님께서 막상 십자가를 질 일이 현실로 닥쳐오자 십자가를 지면서 겪을 고통과 두려움에 가급적이면 그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기도를 했으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니 인간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에서 ‘그러면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라는 기도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실 때의 고통이나 머리에 쓴 가시면류관으로 인한 아픔 등 예수님의 육신의 고통을 강조하고 조고시켜서 예수님의 영원 전서부터 가지셨던 당신의 백성을 향한 궁극적인 그 마음은 모른 채 이를 듣는 이로 하여금 육신의 그 아픔과 고통을 자신이 받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 눈물 흘리게 하고 예수님께 대한 열심이나 교회에서의 충성봉사를 유도하는 것은, 이로 인해 나오는 열심이나 헌신은 단지 선악과 따먹고 인간적 육신적 마음적 감동에서 나온 하나의 타락된 이성의 감정일 뿐이지 예수님의 영원 전서부터 가지셨던 당신의 백성을 당신이 누리시는 그 세계를 당신과 함께 영원히 누리며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를 가지시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적 결과적 구원의 마음인 순 영적이고 신령적이고 천국적이고 영원적인 그 주님의 마음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런 육적 세상적 마음과 또한 그 마음에서 나오는 신앙의 열심이나 충성봉사 등은 제 아무리 올라가 봐야 육이요 세상이지 영적이고 신령적이고 천국적인 그 세계로는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신령하고 영원하고 영적인 주님의 궁극적 영원적 결과적인 그 성질 성분의 마음은 아닌고로 주님의 성품을 닮는 것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말(言)속에 말이 있습니다. 인인 간에도 말이나 행동 이면의 그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이 상대를 정확히 아는 것이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보다 더 적중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문자적 표면적으로만 알려고 해서는 안 되고 그 표면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잡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걸 아는 것이 계시를 아는 것입니다. 즉 모든 성경은 인간 나를 만들기 전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설정된 나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것이므로 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 설정된 이 구원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해석을 하고, 세상의 삶도 모두 여기에 맞춰서 해석을 하고 거기에 맞는 정신과 사상과 목적으로 살아가야 만이 주님의 성품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겉이 아닌 중심을 보는 하나님이십니다.
|
첫댓글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예수님은 모든 의사가 똑같습니다. 만일 다르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의사가 다르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곧 죄가 되며,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무형의 선재적 그리스도로 신령세계에 계시면서 그리스도로 통해서 세상만사를 지으셨고 인간의 구원을 계획 설계 하셨습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계획성취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성화는 성화고 성경으로 예수님을 보시기 바립니다. 이 방에 제가 올린 '구원의 개념' 이라는 글을 먼저 보시고 이 글을 읽으시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