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마지막 날 개봉하는 [동해물과 백두산이]가 단어 그대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제목도 거창하게 애국가 1절 도입부에서 따왔는데, 그래도 체면치레는 해야할 것 아닌가.
훈련하던 도중 잠깐 틈을 내 낚시하던 북한 해군 함장 최백두(정준호 분)와 말년 병장 림동해(공형진 분)가, 비바람에 떠밀려 동해안 해수욕장에 불시착해서 벌어지는 코미디 [동해물과 백두산이]는, 대충 내용 듣고 우리가 짐작하는 그대로다. 별다른거 없다. 수영복 훔쳐 입고 피서객 인파 속에서 호시탐탐 틈을 노리다가 다시 북으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는 북한 해군 2인조에, 딴지를 거는 사람들은 얼치기 형사 2인조(박철, 박상욱 분)이다.
한국 코미디의 평준화 현상은, 걸출한 몇몇 작품들 가령 [지구를 지켜라]같은 영화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슷하다. 죽이는 대사빨에 의존하거나(...ing), 배우들의 원맨쇼에 의지하거나(위대한 유산,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둘 중 하나다. 다시 말하자면 코미디의 출발인 상황의 언밸런스, 극적 구조를 갖고 정면승부하는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는 어정쩡하다. 배우들의 원맨쇼에 의지하자니, 공형진의 개인기는 괜찮지만 정준호의 연기가 못따라간다. 대사빨에 의존하는 코미디에 속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아주 뛰어난 편도 아니다.
해변가 건달들이, 반항하는 서장 딸 한나라(류현경 분)일행에게 건네는 [캐릭터 있네]라는 촌철살인의 짧은 대사, 옷도 빼앗기고 신분증도 빼앗기고 아줌마 츄리닝 훔쳐 입고 벌벌 떠는 형사 2인조에게, [네가 경찰이면 나는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라고 큰소리치는 아저씨, 기껏해야 이런 단편적 웃음에 그친다. 진짜 웃음은, 작은 웃음의 파도가 모여 해일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웃음은 몇 개의 대사로 폭발하는게 아니라, 상황의 어긋남, 독창적 캐릭터의 구축, 그리고 절묘한 대사의 삼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
거기에 못된 관습,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나 [위대한 유산]이나 [오 브라더스]나 형편없이 망가진 [낭만자객]까지 모두 그렇지만, 꼭 웃음도 주고 눈물도 주려고 억지를 부린다. 이거 정말 참을 수 없다. [..집으로]나 [선생 김봉두]를 잘못 벤치마킹 한데서 오는 영향인데, 과욕을 부리지 않았으면 한다. 고등학생 서장 딸이 집을 나와 친구들과 동해안 해변으로 가자, 경찰서장은 가출신고를 하고 경찰들을 풀어 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당연히, 서장 딸 한나라는 북한 2인조에게 정이 들어 그들과 인간적인 교류를 나눈다.
갈대밭, 그리고 반딧불, 이런 복고적 장치들, 정서를 움직이는 장치들은, 이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진우 감독은 알아야 한다. 흥행 실패한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로 데뷔한 안진우 감독은 흥행부진을 털어버리려고 작심하고 이 영화를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웃음 하나 주는 것도 힘에 벅차 헉헉거리는데, 거기에 상투적 상황 전개로 눈물과 감동까지 주려고 발버둥치니, 참 어이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관객들을 뭘로 보나. 그 정도 싸구려 극적 장치에 넘어가 눈물 질질 짜고 웃다가 울다가 정말 좋은 영화 봤다고 주변에 입소문 왕창 낼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제작자들이여, 그리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감독들이여! 제발 초심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우리가 왜 영화를 하는지, 관객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그 본질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것만이 살길이다.
(사족:그런데 북한 해군 함장이라는 사람의 머리가 왜 그렇게 길지? 압구정족 머리 위에 해군 모자 눌러쓴 형편없는 리얼리티는 정준호라는 배우에 대해, 그리고 그것도 지적 못하는 감독의 무신경에 대해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그런 사소함이 전체를 결정한다!!!! 그리고 박철은 언제 다시 살이 찐거지? 다이어트 성공했다고, 매일 일산 호수공원을 몇 바퀴 돈다고 자랑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또 등장인물 이름은 백두나 동해, 한나라, 이런 인위적인거 말고 그냥 평범하게 갔다면 훨씬 생생함이 살지 않았을까. 옛말에도 사람 이름 크게 지으면 화를 입는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