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사 연구의 전체적 흐름은...
현 동북삼성은 강단사학에서도 당연 고조선의 강역이라 증명됀 상식이니...
이를 넘어 중원...더 넘어 중앙아까지가 역사왜곡전의 고조선과 고구려등의 영토일 가능성 많단데에 집중됀다.
그러다 보니...
대륙조선의 동쪽강역보다는...계속해서 서북강역의 최대 관경에 연구가 집중돼는 고로...
상대적 안정적인 조선 내륙 동부의 영토에 대한 연구와 고증은 거의 전무하단 점이 약점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서북관경은 평안도...북쪽이나 동북쪽은 두만강 이나 삭주(朔州) 어디라는데...
동쪽 끝은 근세의 지리지등에 열동성...아님, 대개가 바다(東海)에 연접한단 구절밖엔 없다.
이는 뭐를 의미하는 것일까..?
조선의 동쪽은 연접한 대륙이 없고...현 황해가 조선의 동해(東海)란 얘기고...
단지 그 북쪽의 현 북경성 일대가 조선직할영토의 동북쪽 최대 관경 요지란 얘기로 해석됀다.
현 동북삼성과 한반도는...동국조선의 상대적 또다른 동국(東國)개념의 번방조선이란 예상이다.
대륙조선사가님들 전체는...
대륙조선의 최대 관경이 중앙아를 넘어...간혹 동유럽까지 미친 여러 정황들이 있음에 고무돼어...
늘상 연구의 초점은 서북관경에 집중돼다 보니...
모든 지명의 해석에서...거대한 대륙조선 북방의 경계지명들 전체를...
모두 신장성과 감숙성등지...더하면 알타이 서쪽까지로 무조건 집중해서 해석하는데...
어찌해서 역사서내의 모든 북방 영토와 지명은...한결같이 조선 서북도에 관한 지명들만이 기록돼고...
동북지역의 지명은 거의 존재치 않느냐는 의문들은 없으신듯하다.
차후 천천히 연구해도...어짜피 동쪽은 조선의 내지강토니 큰 문제가 없단 심리이긴 하나...
왜 대륙조선연구자들의 조선 북방영토지명 해석엔...항시 서북경계만 나오고...
동쪽의 국경선 끝에 관한 구절이 전무하냔댄...스스로들께서도 반문치 않는게 관행이 돼어 버렸다.
일부는 엄연한 동북국경얘기 조차도 모두 서북쪽에 대입했을 수도 있단 것이다.
이러다 보니...
조선이 접한 북방의 몽고란 나라와 그 종족들에 대한 해석에서도...
몽골과 접했다면 무조건 신장성과 알타이지역으로 해석함이 또 관행같이 돼어 버렸단데 약점이 발견됀다.
상식으로 한 번 생각해 보자...
몽고제국은...중국기준 동북쪽...사막과 산맥으로 고립돼어 독자적으로 문명을 유지한 숙신의 지역에서 발원했단다.
내 보기엔 현 외몽골이 거의 확실하다.
그 몽골이...서쪽 내만(나이만)부를 병합하여 몽골제국의 기초를 연다.
내만(나이만)은 현 외몽골 서부 알타이 동부지역이다.
다시 서쪽으로 타타르와 서하(카라키타이)지역을 정벌한다.
신장성과 현 카자흐스탄이다.
이후 송나라에게서 금나라가 탈취한 북경(연경)을 차지하고...후빌라이는 여기에 대도를 두고 대원제국을 선포한다.
이때부터 고려사와 중국사는 몽골을 천자국으로 명기한다.
천산지역으로 유력시됀다.
몽골은 여기까지가 동부영토자 대원제국 직할지다.
동남으론 현 중원의 고려를 부마국으로 간접통치하고...
타클라마칸 남부 티벳일대...그 서부 파미르일대는 무칼리 자손들의 무굴(명나라의 전신?)에 대리통치시킨다.
파미르 서역...알타이 서역은...이미 그 이전부터...
칭기스칸의 씨다른 아들 주치가 우랄산맥 중심 아라사 전역을 깊착크한국으로 다스리고...
카라키타이지역인 카자흐스탄과 중앙아를 둘째아들 차가태에게 분봉한다.
현 아라비아반도들의 서남부 땅은...일한국...훌레그한국에 분봉한다.
알타이 산맥 주위들과 외몽골 서부...신장성일대를 세째아들 오구태에게 맞낀다.
오스만의 서부 비잔틴제국은...몽골에 조공을 바치는 속령으로 굴복한다...동아시아의 고려와 매 한가지였다.
사하라사막의 이집트만이 정복당하지 않은 유라시아 주요 제국중의 하나일 뿐이였다.
인도양& 중원남부의 왜놈들도 그 지리적 요건으로 점령당하지 않은 요행을 획득했을 뿐이다.
유라시아 대륙 전역의 주요 영토와 나라들이...모두가 몽골제국의 직간접 통치를 받았던게 당대의 엄연한 역사이다.
그런 몽골제국이...
유독 동쪽이라고 못 먹었을까...?
몽고 역사엔 몽고의 발원지 동부영토는...징기스칸의 동생자손에게 분봉한 지역이란다.
동부영토 분봉지들이 더이상 없음은...거기까지가 유라시아대륙 극동이란 얘기다.
후대의 원조 몽골족이란 현재의 할흐(할랔)족을 얘기한다.
그 동부영토는...현 외몽골 경계를 넘어...내몽골 넘어 오츠크해까지 속령으로 했을게 뻔하다.
전 유라시아들 휘젓던 나라가 왜 극동이라곤 못 왔겠는가...?
현 동북삼성은...중아아보다 더 농사와 목축여건이 좋은 땅이다.
뭔 불모지라고 차지하질 않았겠나...?
아니면 뭔 에어리언 같은 괴물들이 사는 나라라 무서워서 접근치를 못했나...?
그런 역사는 몽골 점령기의 기록엔 한 줄도 없다.
전체 몽골제국과 후대 타타리민족의 간접통치관경은...
현 러시아부터 중앙아 내외몽골과 중원 북부...시베리아 전체였던 것이다.
이건 역사왜곡의 주범인 서양인들도 인정하는 정사다.
그들이 왜 지들의 원수인 몽골과 타타르의 관경을 극동쪽까지라 거짓으로 넓혀줄 이유가 있겠나..?
그러므로...조선 북방의 몽골족이나 타타르족이라 하면...
무조건 서북 신장성 근처의 족속으로만 속단할게 아니라...조선 동북도를 얘기할땐 동북 현 내외몽골로도 해석해야 한다.
특히, 서쪽 영토를 급격히 상실했다 보이는...태평천국의 난 전후기의 구한말기 조선영토에선...
몽고과 접경이라 하면...현 내외몽골이 더 비중이 크다고 봐야 객관적이다.
대륙조선사...
이성계 조선의 그 윗대 기자조선과 그 윗대 단군조선 배달국까지를 다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 경우의 대륙조선 문명은...분명 배달국의 발원지라 예상돼는 카자흐와 뻔히 그 문명에 예속됐을 지중해유역도
배달국 조선의 속령 문화권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그러나 삼황오제니 뭐니의 중원역사기에는...
환국과 그 중심지역(천산)을 점령한 배달국조선의 여러 계파들이 분립한 시기로...
지역적 중심지인 신장성 일대룰 중국이라 하고...그 상대적 동부를 기자에게 분봉한 은나라지역 기자조선이라 하는 것이며...
기자조선 이후 상대적 서부인 서토의 중원왕조들 개념에서의 조선은...
기원후의 역사시대 이후부턴 대개가 신장성 동부부터 산정해야 객관적이라 하겠다.
그 중국(천산)과 기자조선의 강역은...
다시 북방에서 내려온 색국(사카국?)출신 북부여계들에게 천자권이 넘어가니...
현 천산유역과 감숙성 동부 북부 모두가 부여의 속령이자...후대 고구려의 속령이라 봐야 하고...
고구려의 경우는 광개토대왕 전후는...더 나가 카자흐등지의 중앙아까지 다 서토속지로 뒀음의 정황도 보인다.
이때까진 고구려가 유라시아의 천자국인게 맞다.
그러나 고구려 양원왕기 전후...
고구려는 동서로 나뉘어...서토는 돌궐이 됌도 역사에 흔적을 남긴다.
서돌궐이 동돌궐에 복종했었단 서양사는...그 동돌궐을 고구려로 보았을 때의 구도이다.
이 당시 고구려는 그 중심을 동부로 옮겨 장안(長安)인 섬서성 서안부근에 중심지를 옮겼단 정황도 있다.
물론, 현 섬서성 장안이라기 보단.. 감숙성 란주나...청해성 서녕지구가 원조 평양성이자 장안성 아닐까란 예상도 해 본다.
섬서성 서안은...기자에게 밀린 단군의 왕검성일 확률이 더 많다.
후대가 평양성이 동쪽으로 옮겨지면서 다 합처서 해석한게 아닐지 싶다.
결정적으론 서쪽 조선인 선비족들에 잠시밀려 동으로 이동하며...후대엔 다시 회복하긴하나...
중가르(중국)자리만 회복했지...그 서쪽의 서돌궐 자리는 회복하지 못했단 얘기다.
이때 부터를 중국(천산)지역 왕조들은...고구려가 동쪽으로 가서...동이(東夷)의 나라가 됐다 기록한다.
고구려의 최대관경은...서역은 중앙아까지이다가...돌궐과 분리됀후 신장성부터 동부전역이다 보이며...
수당과 한족들의 그 상대적 서토인 중국은...
연경(북경)을 제외하면 타클라마칸사막 서남부 티벳과 파미르산맥 아프칸과 파키등이라 보인다.
백제는 초기엔 ...
대체적으로 황하나 고비사막을 경계로 남부이며...현 티벳 동부와 중원대륙 중남부 전체인데...
동부를 신라에게 고구려가 분봉했다니...
그럼, 신라는 어디였을까...?
밑의 해동역사 부분을 보면...신라는 백제의 동쪽으로 동해를 끼고 있단다...
현 중원의 황해를 동쪽 경계로 하고...남쪽도 바다라니...복건성,광동성일대를 남쪽 경계로 하고...
동정호등지를 경계로 백제와 동서로 대치한 정황이 보인다.
신라의 시작은 미천했으나...
이미 삼국통일 이전부터...고구려에게 동남부지역을 분봉받은 이후엔...자리를 잡기 시작해...
그 영토의 북방한계가 함경도까지임이 역사에 자주 나온다.
이걸 한반도로 상정하니 그걸 오류기록일 것이라 주목하지 않은 주류학계의 해석이 나온 것이고...
반대로 고구려의 서토에만 집중한 대륙조선연구가들의 심리로...
신라가 고구려 동부영토이자 조선의 영토 북방한계선인 함경도까지 진출했음을 무시한것 뿐이다.
못 본척 했다 보기보단...일단 서토에 집중하기 위해 동부는 연구보류중이였다 보는게 더 정확하겠다.
밑의 해동역사만 봐도...
신라는 한수를 경계로 고구려나 발해와 대치했단다.
더 나가선 대동강을 경계로 했던 시절도 있다한다.
잘 보면...당나라가 망하곤...당나라영토까지 신라가...신라가 병합했다고 틀림없이 명기됐다.
티벳지역도 통일신라가 한때 잠시 지배했단 얘기같다.
잘 보면...신라의 서북경계는...한나라의 낙랑군으로...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낀 땅이란다.
현 섬서성 서부 감숙성 란주일대가 낙랑군 남부영토 임둔이나 대방이라 봐야 하며...거기가 원조 임진강 어귀라 보이고...
백제가 신라에게 동북을 빼앗끼면선...
현 섬서성 서안지역은 신라에게 들어오고...
백제는 한수(한중)지역인...현 삼각산(화산 서부)등을 경계로 했고...
그러니 당연 고구려남부와... 백제 동북경계 사이에 신라서북영토가 끼어 있는 구조가 됐다 보인다.
당서를 보면...신라 전성기의 영토는 실로 컷다 한다.
고구려를 이은 당나라같은 대륙의 천자국이...영토가 컷다 표현함은...최소한 현 중원 동부 전체로 산정해야 상식이라 보인다.
그러면 신라가 차지해 진지를 뒀단 함경도는 어디일까...?
고구려땅을 함경도로 보면...감숙성 북단 고비알타이사막정도 내몽골 중서부로 봐야 하나...
그 동남부의 신라가 차지했을 함경도땅은...당연 상대적 동부인 내몽골 동남부로 봐야 객관적이다.
그럼, 신라의 북방영토 한계선은...현 북경 북쪽의 만리장성일대라 봐야 한다.
태행산맥을 중간으로...산서성은 고구려...하북과 산동은 신라였다 봐야한다.
신라가 강할땐 산서성도 넘어간 것이다.
온달장군은 산서성에서 이를 토벌하다가 죽은 정황인 것이다.
그럼, 현 북경 동부 산해관의 엄청난 성곽들은...최초엔 신라가 동부여진들을 막으려 만든 관문이며...
북경 북부의 겹겹의 관문들은...현재는 청나라 거용관이니 뭐니로 왜곡됐으나...
신라가 동북여진들을 막기 위해 처음 쌓기 시작한 겹성이며...신라 최고 전성기의 동북방영토한계선이고...
이후 고려와 조선이 더 보강했던 성곽들로 봐야한다.
대륙조선 함경도의 직접통치 최 동북영토한계선이라 봐야 한다.
물론, 동부 여진이란...금나라유민과 그 이전 발해유민...고려패망후 망명인들...일부 거란족들...이리 봐야 정상이다.
본인이 먼저 사과해야 할게 있습니다.
저는 이전에...그저 서토의 강역에만 집중하다 보니...
역사서에 나오는 신장 3장(7M)의 장인국(長人國)이...신라의 동쪽에 있었고...
신라는 이 관문을 지키기 위해 몇 천의 쇠뇌병들...즉, 대형 석궁수들을 두어 철관(鐵關)을 지켰단 구절을...
당연, 고지도상의 라포박 서쪽 총령부근으로 산정했던 우를 범했습니다.
그럼 상대적 서토인 고구려는 동이족이라면서도 중심이 중앙아시아가 돼어 버린단 모순도 생각치 못하고...
현 중원영토를 거인들의 나라라 말한격의 실수를 했습니다.
신라가 고구려에 동쪽 영토를 받기 이전 진나라 유민이던 이전에 거기에 있었던 것이라 자의적 해석을 했던점...
너무나 경솔했습니다.
신당서에 나오는 구절이니...이미 신라가 고구려 동남부에 정착하고 난 연후의 역사임을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서쪽에만 집중하다 보니...엄청난 기본 방향모순적 해석오류를 저지른 겁니다.
이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역사서를 보면...
신라가 철관(鐵關)에 쇠뇌수들 몇 천 명을 두어 거인들을 막았다는 그 관문은...
분명 신라의 동쪽에 있다 했고...큰 산악지대에 그 장인국(長人國)이 있었다 했으니...
신라의 동쪽이면 대부분은 다 현 황해바다이니...중남부 동쪽 얘기가 아닌...신라영토의 최 동북단을 얘기하니...
산정해 보건데...현재의 북경 북서부 태행산맥 동북쪽 줄기에서...그 동북부 대흥안령산맥을 이른 것이라 봅니다.
신라와 고구려는 태행산맥을 중심으로....산서성은 고구려...동쪽인 하북성과 북경일대는 신라 최동북단 진지가 있었다 보이고...
현 북경의 만리장성 북단을 막는 여러 겹성들은...신라가 서북쪽 고구려나...
그 동북의 대흥안령산맥 거인들을 막기 위해 거의 최초로 본격적으로 설치한 그 철관의 후보지라 보입니다.
고려시기엔...
금나라 동북변방과 동거란(발해)의 극동지역 잔류야인들을 막던...
고려의 직접통치 최 동북방 국경지대가 북경(베이징)였다 보입니다.
금나라가 몽골에 패망한 연후 고려 전성기엔 현 요녕성 해변을 따라...한반도 까지는 고려가 간접지배했을 것이고여...
고려의 몽골조공품에 분명 한반도에서만 제대로 나는 황칠(黃漆)이 중요 품목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고지도들에도...
철문관은 신장성에도 있으나...북경 북쪽으로도 철관들이 보이는 이유가 그것같습니다.
철관(鐵關)이란...
그 관문의 중요성으로...성문을 철로 만들고....철옹성같이 방비한 주요 방어진지를 이르는 용어로...
꼭히 한 지역의 고유지명이 아니란 제 생각입니다.
그럼, 이런 의문들이 제기됄 겁니다.
엄연한 역사시대인 신라중기에...어떻게 신라가 7m의 거인들과 대치하고 있을 수 있는가...?
어디에 그 유골과 역사서의 흔적이 있는가...?... 이럴 겁니다.
엄연히 당서(唐西)에 명기돼지 않않습니까...?
신라 동쪽 철관 밖 산악지대에 키 3장(丈)의 거인국이 있다고여...
왜 그 구절만 환타지니 믿지 말아야 할 까요...?
생물학적 이치론 이런 겁니다.
종의 순수 다양성이 보존됐던 상고대에는...
각종 교배로 인한 돌연변이의 폭이 아주 커서...파충류들의 경우만 하여도...거대한 공룡들 부터 작은 도바뱀류가...
그 형태와 유전자는 동일하면서도...그 크기는 실로 다양했고...현재는 기후적응성과 여러 요인으로...
커 봐야 악어종류나 아나콘다종류 외엔...대부분 고만 고만한 이유와 동일하게...
포유류 중 인간종도...
인종의 순수 유전자 다양성이 확실했던...빙하기로 남북이 고립돼어 독자 종들이 유지돼다가 해빙됀 어느 시기엔...
혼혈로 인한 돌연변이의 폭이 커지고...7m...아님 그 이상의 인종도 있을 수 있었고...
공룡의 경우와 마찬가지로...기후여건과 생존적합성 문제로 점차 도퇴돼고...현재는 고만고만한 인종들만 생존했고...
이미 다 이뤄진 혼혈로... 그 돌연변이의 폭도 크지 않은 이치라 비유하겠습니다.
그리고...
구한말기 연행사들의 분명한 증언에도...
청나라의 동북 영토의 밖에서...5년에 한번 얼어 붙는다는 북해의 바다를 넘어 털복숭이 거인이 넘어왔는데...
그를 따라 보낸 청나라 여인이 5년후 돌아와 증언하기론...
그 땅엔...키가 아주 작은 인종도...큰 인종들도 있는데...
큰 이는 3장(7m)요...거인들 중 작은이는 1장(2m40cm)입니다.
거기엔 땅속을 다니는 쥐가 있어...그 털이 길어 옷감도 만들고...그 이빨은 코끼리의 상아같이 사용하며...
현재 북경에 나도는 물건들이라 명기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옛 일이고 우리가 현재 확일할 수 없다 하여...무조건 과장됀 환타지를 역사가들이 썼다 볼 수 없습니다.
당대 사가들도...현재 사가들에 못잖게...
허황됀 이야기는 철저히 배제하고 기록에 남기려 애썼단 정황들이 여기 저기 보이는 고로....
명색이 나라를 대표할 사신단에 따라간 대표적 사가들이...
누가봐도 허황됀 소릴 믿으라 역사로 명기했다곤 볼 수 없습니다.
구한말기 이전만 하여도...
연경(천산)에서 동북으로 2만 5천리 됀단 악라사라면...현 베링해 넘어의 알류사(알라스카)를 이름인데...
거기에 분명 거인들이 있고...메머드가 일부 존재했단 사실을 역사가들이 기술한 겁니다.
실제로도...
시베리아와 알라스카에선...지금도 온전한 상태의 맘머스가 심심찮게 나오고...
아직도 설인과 메머드의 사진이 나돌아...가짜다 진짜다 말까지 많을 정도이고 보면...
구한말기에도 시베리아나 베링해 극한지에는...메머드와 거인들이 일부 존재했을 수 있다 보는게 맞다 봅니다.
그 당대에만도...양이들은 그 지역을 완전 점령치 못했던 때입니다.
그 지역을 흑룡강부에서 극동영토로 간접통치했던 청나라 역사만이 가장 근접한 기록이라 봐야 합니다.
다른 기록들이 없는한...믿으면 그만입니다.
고지도들에도...
현 아메리카 대륙은...버젖이 신장 3장(7m) 장인국(長人國)이 표기됍니다.
믿어야 합니다.
조선 기록에도...청나라인들이나 조선인들 중...4m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기록됍니다.
지금 없다하여 옛기록을 뻥이라 할 순 없는 겁니다.
카나다 북부와...알래스카(악라사)에...틀림없이 일부의 거인족과 메머드가 구한말 이전까지 존재했고...
현재 멸종했거나 어딘가에 일부 작은 종들만 숨어살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치 말아야 합니다.
그 거인종들이...
신라나 금나라...발해(동거란)등의 강력한 쇠뇌(석궁)에 밀려 도퇴돼기 이전엔...
엄연히 현 대흥안령산맥에도 존재했을 수 있고...
이들이 점점 밀려 동북 오지인 베링해를 넘어 알래스카로 그 생존지가 축소됐다 봄이 맞다 봅니다.
현재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여...
분명 기록됀 과거 선현들의 기록이 무조건 뻥이라 무시하는건...그 분들에 대한 모함일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성경에도 나오고...현재도 중앙아등 염분많은 건조지대에서 발견됀단 거인들의 유골은...
엄연히 유라시아 대륙전체에도 존재하다가...사라진 종들로...
종의 희박성 때문에 번식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도퇴돼고...숙신과 신라의 쇠뇌같은 현생인류의 신무기에 도퇴돼고...
시베리아 오지에만..다시 동쪽 극동영토에만...다시 베링해 넘어 알래스카에만 집중돼다 멸종한 종인데...
그 거인종들이...
신라시기만 해도...현 북경 북동부인 대흥안령 산맥에도 일부는 실재했고...
그를 신라인들이 철저하게 방어하려 만든게 신라의 철관이고...이건 신라의 동북쪽 최변방이라 보면 됍니다.
현 북경의 신라 철관은...그 동부지역이 뭔 대단한 문명의 강국들이 있어 강력하게 방비한게 아니라...
거인족이란 공포의 종족이 간혹 잔존하고있기에...
무서워서 철저히 막았던게 신라가 만들었단 시초의 철문관(북경성?) 축성유래일까 봅니다.
고로, 철문관(鐵門關)은...
꼭히 서역에만 있는게 아니라...극동에도 있었고...그건 동이(東夷) 조선땅 중에 가장 동쪽에 있었단 신라의 극동 진지로...
아무리 봐도...현재의 북경성 일대가 맞을듯 합니다.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이게 저의 예상입니다.
신라...
고구려를 당나라와 함께 멸망시킨 배신자나라...이런 이미지 때문에...
그 영토에 대해 관심이 없는게 현실이긴 하나...
역사서들 보건데...그 전성기의 영토는 제법 컷다고 명기됐고...
당나라 망하곤 다는 아니겠지만 당나라의 영토까지 병합했단 나라니...
당나라의 주 영토인 사라센지역 페르샤에...잠시 신라군들이 진지를 뒀을 수 있단 가능성도 배제키 어려우니...
사로신라 지명에 연유한 사라센이란 가설도...모두 허황됀 가설이라 무시하긴 어렵다 보겠습니다.
송나라의 전신이란 왕망의 신나라(新國)가...
아마 당나라 망하고 잠시 그 지역에 진출했던 사로(신라) 극서 변방진지에 연유했을 가능성도 배제치 못한다 주장하겠습니다.
신라는 생각했던것 보다...훨신 더 컷던 겁니다.
그리고 대륙조선의 강역 비정시 항상 문제가 돼는 인종관계...
대륙조선의 서북변경엔...분명 백인 혼혈종이 있을 수 있었고...
그건 대개 신장성이나...알타이 서부 조선 서북의 경계지역을 말한다..이런 해석이 주류이나...
전 아니라 봅니다.
천해(알알해)의 동부엔 이미 5개 인종의 환국이 있었다 했습니다.
그 이전의 다른 역사서가 없으니...이는 유일한 상고대 역사서인 환단고기를 믿어야 합니다.
그게 후대의 구한말기 구전설화 수준이라 하더라도여...
알타이 유역이 서쪽 경계인 그 환국의 최대 영토가 동쪽으로 2만리 지역까지 입니다.
사백력(시베리아)이란 북방 오지에서 환인이 득도해서 내려와 만든 나라랍니다.
사백력(시베리아의 중심지)는 현 바이칼이 유력합니다...거기 키르키스란 백인종들이 구한말기까지 기록됍니다.
현 파미르의 키르키스족들도 분명 바이칼이 지들 고향이라 우깁니다.
본인들이 그러면...믿으면 됍니다.
서양사가 말하는 스키타이는...
동양사가 말하는 서흉로이며...그 지배국인 동흉로는...알타이 동부가 중심인 것이고...
이는 북부여의 강역이라 봐야 합니다.
고구려가 북부여출신이자...흉로들의 제왕이라 표기됐으니...고구려 최북단 강역엔...이미 키르키스등의 백인종들도 실제했고...
특히 북쪽에 그들이 많았고...이를 부여의 백민(白民)들이라 역사가 명기했던 겁니다.
역사서를 믿으면 됍니다.
고구려나 북부여같은 대륙중북의 지배자들이...
그 영토가 서쪽에만 있었고...동아시아엔 없었다 볼 수 있을까요...?
당연 동쪽에도 있었고...최소한 현 내외몽골 동부까지는 고구려 동북영토였을 겁니다.
단지 서토의 중원사서는...고구려와 대립한 고구려 서부영토에 관한 기록만 남겼을 뿐인 겁니다.
그 동부 흥안령에 거인국이 있어고...
그 남부엔 신라의 철관(현 거용관등)이 있었고...그 남부가 하북성과 북경지대고...
그 동부의 현 산해관이..신라가 동부여진인들과 통하는 관문였지 않았나 예상해 봅니다.
신라도 망하곤...
또 이 관문을 넘어 현 동북삼성과 한반도로 일부가 이동했을건 당연하다 보이고여...
고로, 부여의 백민들은....
동족들이 많은 서역으로 많이 집중돼긴 했어도...
적잖은 수들이 동부의 황인들과 혼혈돼어 현 외몽골과 내몽골...산서성과 하북성등지에도 혼혈종들이 있었고...
동북삼성과 한반도에도 그 혼혈종들이 있었다 보는게 상식이고...
단지 현재상은 황인들과의 오랜기관 거듭됀 재 혼혈로인해 그 백인의 유전자가 희미해 진것 뿐이란게 제 생각입니다.
이 백인 황인의 혼혈종들은...
대대로 유라시아 북방에 많았기에...
잡종 돌연변이(좋은말로 진화)를 거친 이들의 키는 크고...이 키가 큰 종족을 적(狄)이라 이르고...
이들의 통상적 키는 최초는 보통이 1장(2m40cm)이니...
그 변종들이나...상고대 돌연변이종들은...능히 3~4m의 인종들도 있었다 봐야 하고...
고대 삼황오제와 석가등이 대개가 거인들이라 하고...대개의 북부계가 차지한 중원의 지배계급들을 대인(大人)이라 하는 연유도...
인격과 학식의 큼을 이르는 후대의 용어이긴하나...최초엔 북방계출신 중원지배계급 대부분이...
이 북방계 거인들이라 그리 표현했다 생각합니다.
서남방 지중해 원주민들은...이 동북방에서 도래한 거인족들을...신(神)이라 했던 것이고여...
고대에 순수 원종의 환인족 인종들이...
바이칼에 고립됐다가 남하하며 5색인종들과 혼혈이 일어날 당시엔...
순수 원종들의 다양한 유전자들의 잡종교배로 인한 거대한 변종들도 틀림없이 있을 수 있었다 보입니다.
일르 성격에선...골리앗등의 거인족은...천사들과 혼혈로 생긴 ㅈ족속들이라 기록했던 겁니다.
환인족이 지중해인들에겐 천사(天使)들였던 겁니다.
현재의 인류는 이미 이 순종들간의 혼혈이 다 이뤄진 후...
너무 큰 종은 다 도태돼고...대개가 다 공통유전자를 가진 혼혈종들이기에...
그 잡종교배의 싸이클이 큰 돌연변이 확률이 낮아지고...신체크기가 일정해진 것 뿐이라 봅니다.
대개 북방족이 키가 컷다함은 동서양이 공통이고...
이를 중국&조선사는 북적(北狄)이라 했고...이들이 동이족지역에 있을땐...이적(夷狄)이라 했던 것이고...
이들중 백인유전자가 많은 이들은...서역으로 가서 스키타이가 돼고...동쪽에선 황인종 우열의 동흉노라 불리웠으며...
이들의 자손이 중원의 삼황오제고...배달국인들인데... 크게 보면 부여와 고구려가 더 순종들이고...
그 이전엔 기자조선 지역의 여러 선우국(鮮于)들이라 보이며...
동흉로인 이들은...
외양은 엄연한 황인종 몽골로이드들이긴 하지만...
백인혼혈로 인해..그 피부색이 햇빛만 차단돼면 유독 흰 종족이고...키도 남방계들보다 훨씬 큰 것이였다 보이며...
동이족들이 몸이 크다 했던 연유를 보면...
꼭히 유라시아 서북의 백인우성 스키타이들만이 그런게 아니라...동부의 황인우성 흉로(동스키타이)들도...
최초엔 만만치않게 신체가 컷음의 증거라 보입니다.
이 종족들은...서역으로만 간게 아니라...극동의 베링해까지도 넘고...
당연 그 중간의 한반도와 일본열도에도 있었을 수 있고...그 단적인 예가...구한말에도 존재했던 북해도에 있었단
빨간머리 백인 혼혈종이란 하이(蝦夷)족의 존재라 봅니다.
한반도에서도...중원대륙 남부완 다르게...
오히려 더 시베리아적인 스키타이유물이 심심찮게 발견됌은...
중원조선의 통치는 받았어도...
그 혈통은 오히려 시베리아 동스키타이들과 유사한 이적(夷狄)계의 동이족들이 한반도에 많았던 이유로 보입니다.
구한말기 서양인들이...아마도 우리 백인들과 먼 조상이 같은 종족 아닌가 의심했던 잘생겼단 극동의 고려인들은...
상식적으로...중앙아가 구한말기 고려변방이라면...
당연 혼혈인종들이 중앙아인들인데...그걸 신기하다 기록치 않았을 겁니다.
중원의 대륙조선인들이라기 보단...한반도나 동북삼성의 고려(코리아)인들였을 가능성이 많다 봅니다.
이젠 모두 대륙조선 남방이주민들과 혼혈돼어 좀더 완전한 황인종을 유지했을 뿐...
구한말기 까지만 해도...완연한 백인혼혈인자가 유지됀 분들도 꽤 남아있었다 보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인종구도상으로 봐도...
외몽골인들은...햇빛에 노출이 않 됀단 전재만 하면...
도심지 여자들은...틀림없이 현 한반도인들 보다 희고 쭉쭉빵빵입니다.
단지 나이 먹으면 돼지들이 돼서 그렇져...
대부분의 중국이나 한반도인종들 같으면...
현재의 몽골유목민들이 들판 누비듯 다니면...아주 1년이면... 동남아 깜둥이들같이 새까맣게 탈 겁니다.
순수 외몽골인종(할락족)들 상당수는...하루죙을 들판을 쏘다녀도...상당수는 구릿빛 정도지 완전한 깜둥이는 않돼며...
도심지 사람들은...현재 한반도나 중국인들보다...틀림없이 크고 하얗습니다.
대부분 까만 이들은 카샄크족이라 멸시합니다.
국가별 평균키는 우리 젊은이들이 크다 하지만...그건 기록상 키를 부풀린 뻥이고...
실제로 가서 보면...제가 대부분 올려다 봐야 합니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음에도...
도심지엔 피부는 백옥같고...몸매는 러시아여인들같이...키가 늘신한 여인들도 꾀 많습니다.
애 낳고 나이 먹으면 돼지가 됀단 것 빼곤여...
그 흔적이 희박해지긴 했어도...
백인혼혈의 인종은...흔적이 미미하나마...극동에도 현존하고...
크게 봐선 중국 동북의 동이족이니...이적(夷狄)이니는...
원래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중심족이자...지금보다 더 백인혼혈에 가까운...동부 스키타이인종이였다고 전 봅니다.
고로 조선(고려) 인종에 대한 역사기록중에...백인혼혈적 요소들이 있다하여...
그걸 무조건 알타이 서부 파미르 서역 현 중앙아인들이나 유럽인종들이라 일괄대입해서 봄은...
좀 단순한 역사연구법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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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역총론(疆域總論)○ 신라는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1년(기원전 57)에 경주(慶州)에 나라를 세웠으니, 바로 진한(辰韓)의
사로국(斯盧國)이다.
《양서(梁書)》 신라열전(新羅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본디 진한의 종족이다.
《북사(北史)》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전한(前漢) 오봉 1년에 개국하고는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고 하였으며,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라고도 하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金城) -지금의 경주이다.- 에 거처하였다.
○ 그 뒤에 신라는 진한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그 사방 경계가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낙동강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바, 대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신라국은 지금 조선의 경상도로, 신라의 땅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이르기를, “신라는 북쪽으로 계립령에 이르른다.” 하였는데, 이는 상대(上代) 때의 지역을 말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계립령은 바로 조령(鳥嶺) 근처의 지역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진한 12국은 지금의 경상좌도 지역이며, 신라는 바로 그 12국 가운데 한나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거하면, 탈해왕(脫解王) 이후로 10여 개의 작은 나라를 병탄하여 북쪽으로는 조령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는 가야(伽倻)와 이웃하여 경상좌도 지역을 전부 차지하였다. 그런즉 진한의 여러 나라가 신라에 병탄된 것은 분명하다.
○ 조위(曹魏) 때부터 신라는 점차 조령 북쪽 지역을 차지하기 시작해서 진(陳)나라 때에는 북쪽 경계가 함흥(咸興)까지 이르렀다.
《수서(隋書)》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으며, 한나라 때에는 낙랑(樂浪) 지역을 차지하였다. 혹 사라(斯羅)라고도 칭하며, 옥저(沃沮),
불내예(不耐濊), 한(韓)의 지역을 차지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注)에 이르기를, “수나라 때에는 옥저 지역이 이미 신라에 편입되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조령 북쪽은 바로 한나라 때 낙랑군의 남쪽 경계이다. 동한(東漢) 이후로 신라가 그 지역을 침입하였는바, ‘낙랑 지역을 차지하였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그 뒤에는 또 북쪽으로 국경을 넓혀서 양(梁)나라와 진(陳)나라 때에는 동북쪽으로 함흥 등지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삼각산(三角山)까지 경계로 삼았다. 함흥 북쪽은 옛 옥저이며, 함흥 남쪽은 바로 불내예인바, ‘옥저와 불내예 지역을 차지하였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북계조(北界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양(梁)나라와 진(陳)나라 사이에는 신라가 가야(伽倻)의 여러 나라를 병합해서, 동쪽과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지리산(智異山)을 경계로 하였다.
《양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국은 백제에서 동남쪽으로 50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통전(通典)》에는 500리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맞다.- 그 땅은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고, 남쪽과 북쪽은 고구려, 백제와 접하고 있다. 그 나라의 풍속에 성(城)을
‘건모라(健牟羅)’라 하고, 성안에 있는 읍(邑)을
‘탁평(啄評)’이라 하고, 성 밖에 있는 읍을
‘읍륵(邑勒)’이라 하는데, 이는 중국 말로 군현(郡縣)을 뜻한다. 나라 안에는 6개의 탁평이 있고, 52개의 읍륵이 있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이르기를, “신라에서는 성안에 있는 읍을 ‘탁평’이라 하고, 성 밖에 있는 읍을 ‘읍륵’이라 하는데, 6개의 탁평과 52개의 읍륵이 있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6개의 탁평은 바로 신라의 6부(部)이다. 6부 가운데 양부(梁部)와 사량부(沙梁部)가 황초령신라비(黃草嶺新羅碑)에는 ‘탁부(啄部)’와 ‘사탁부(沙啄部)’로 되어 있는데, 탁평(啄評)은 탁부(啄部)의 오기(誤記)인 듯하고, 탁평(啄評)은 또 탁평(啄評)의 오기인 듯하다. 6부는 모두 경주(慶州)의 경내에 있으므로 ‘안에 있는 것은 탁평이라고 한다’ 한 것이다.
《구당서(舊唐書)》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국은 한나라 때에는 낙랑 지역에 있었는데,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접하였고, 북쪽은 고구려와 이웃하였다. 동서 간의 거리는 1000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는 2000리이며, 성읍(城邑)과 촌락(村落)이 있다.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동서가 1000리이고 남북이 3000리이다. 동쪽은 장인국(
長人國)에 닿았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 북쪽은 고구려에 닿았다.
-또 이르기를, “장인(長人)은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키가 3장(丈)이고 톱니 치아에 갈퀴 손톱을 하였으며, 검은 털이 온몸을 덮고 있다. 화식(火食)을 하지 않고, 새와 짐승을 날로 씹어 먹으며, 간혹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 부인(婦人)을 얻으면 의복(衣服)을 만들게 한다. 그 나라는 산이 수십 리에 이어지는데, 입구의 골짜기에 튼튼한 쇠문짝을 만들어 달고는 관문(關門)이라고 한다. 신라는 그곳에 항상 쇠뇌를 잘 쏘는 군사 수천 명을 주둔시켜 지킨다.” 하였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지리산에 이르고, 북쪽은 한수(漢水)에 닿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라는 법흥왕(法興王) 때부터 6가야의 지역을 모두 병합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변진조(弁辰條)에 나온다.- 서쪽으로는 지리산을 경계로 삼았다. 지금 조령 남쪽에서 뻗어내려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1000여 리 산맥이 동서를 나누어서 동쪽은 경상도로 바로 신라 지역이고, 서쪽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바로 백제 지역이다. 이것이 신라의 대개이다. 그러나 충청도의 영동(永同), 황간(黃澗), 청산(靑山), 보은(報恩), 옥천(沃川) 다섯 고을 및 전라도의 운봉(雲峯), 무주(茂朱) 두 고을은 본디 신라에 속하였다.
○ 당나라 중종(中宗) 때 신라는 백제 지역 및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병합하여 9개 주를 나누어 설치하였다. 이때 사방의 경계는, 삼면은 모두 바다까지 닿았고, 북쪽으로는 대동강(大同江)을 경계로 삼았다.
《구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경(顯慶) 5년(660) -신라 태종왕(太宗王) 7년- 에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토평(討平)하였다. 이때부터 신라가 점차 고구려와 백제 지역을 소유하여 그 경계가 점차 넓어져서 서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차지하고 드디어는 고구려의 남쪽 경계까지 이르러 상주(尙州), 양주(良州), 강주(康州),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 등 9개 주를 설치한 다음, 주에는 도독(都督)을 두어 10개 혹은 20개의 군을 통솔하게 하였으며, 군에는 태수(太守)를 두고, 현에는
소수(小守)를 두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고는 드디어 9개 주를 두었다. 본국의 경계 안에 3개의 주를 두었으니 상주(尙州) -지금의 상주(尙州)이다-, 양주(良州) -지금의 양산현(梁山縣)이다-,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晉州)이다.- 이고, 옛 백제국의 경계 안에 3개의 주를 두었으니, 웅주(熊州) -지금의 공주(公州)이다-, 전주(全州) -지금의 전주이다-,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光州)이다.- 이고, 옛 고구려의 경계 안에 3개의 주를 두었으니, 한주(漢州) -지금의 광주(廣州)이다.-, 삭주(朔州) -지금의 춘천부(春川府)이다-,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부(江陵府)이다- 이다. 9개 주가 관할하는 군현(郡縣)은 무려 450개였는바, 신라의 지리적 범위가 이렇듯 넓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라 태종왕 7년(660)에 백제가 망하였고, 문무왕(文武王) 8년(668)에 고구려가 망하였다. 신문왕(神文王) 5년(685) -당나라 중종 2년- 에 이르러서 세 나라의 땅을 합하여 9개 주를 설치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 때에 군현(郡縣)의 이름을 고쳤다. 아홉 주가 관할하는 바는 소경(小京)이 6개, 군(郡)이 120개, 현(縣)이 298개였다.
또 살펴보건대, 한주, 삭주, 명주가 고구려 지역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를 두루 상고해 보면, 삭주는 혹 고구려의 옛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한주의 경우에는 본디 백제에 속해 있었고, 명주는 본디 신라에 속해 있었다. 간혹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잠시 잃기는 하였으나 곧바로 수복하였는바, 고구려의 강역은 일찍이 한수(漢水) 남쪽, 대관령(大關嶺) 동쪽 지역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즉 강릉(江陵) -바로 명주(溟州)이다.- 과 광주(廣州) -바로 한주(漢州)이다.- 를 어떻게 고구려 지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개 신라가 9개 주를 나누어 설치하고서는 세 주가 관할하는 바가 대부분 고구려의 남쪽 경계 지역임을 범범하게 말한 것인데, 김부식(金富軾)이 이를 제대로 고찰하지 않고서 마침내 세 주의 관내를 모두 고구려 지역이라고 한 것이다. 이에 영남의 순흥(順興) 등 9개 고을이 명주에 예속되어 있자, 이곳을 그대로 고구려 지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수 남쪽의 수원(水原) 등 10개 고을이 한주에 예속되어 있자, 이곳을 그대로 고구려 지역이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경계는 본디 한수 남쪽을 넘어오지 않았는데, 더구나 조령의 남쪽이겠는가.
○ 신라 말기에는 8개 주를 모두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차지하여 단지 양주(良州)만이 남아 있었으며, 그 뒤에는 고려(高麗)에 병합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경순왕(敬順王) 9년(935) -후당(後唐) 노왕(潞王) 2년- 에 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으므로 왕이 온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太祖)에게 항복하니, 태조가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고 하였다.
북계(北界)의 연혁(沿革)○ 후한(後漢) 때 신라는 동해 가를 따라 낙랑의 영동(嶺東) 7개 현을 모두 차지하고 북쪽으로 철령(鐵嶺)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남해왕(南解王) 16년(19)
-왕망(王莽) 11년- 에
북명(北溟) -지금의 강릉(江陵)이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발견해 바쳤다. ○ 파사왕(婆娑王) 때
-한나라 장제(章帝) 때이다.- 실직국(悉直國) -지금의 삼척(三陟)이다.- 이 와서 투항하였다. ○ 일성왕(逸聖王) 4년(137)
-한나라 순제(順帝) 12년- 에 말갈(靺鞨)이 변경에 들어와
장령(長嶺)의 5책(柵)을 불살랐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나라 때에는 말갈이란 칭호가 없었다. 혹자는 불내예(不耐濊)라고도 한다.- ○ 아달라왕(阿達羅王) 4년(157)
-한나라 환제(桓帝) 11년- 에 장령진(長嶺鎭)을 순행하여 수졸(戍卒)들을 위로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척이나 강릉 등지는 본디 낙랑의 영동 7개 현이다. 후한(後漢) 초기에는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 두 고개의 길을 열지 못하였으므로 신라가 동해 가를 따라서 그곳 7개 현의 지역을 차지하고는 북쪽으로 장령(長嶺)까지를 경계로 삼은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지지(地志)를 근거로 보면, 지금의 영흥부(永興府)를 고구려 때에는 장령진(長嶺鎭)이라고 칭하였는바, 여기에서 이른 장령은 철령(鐵嶺)을 지칭하는 듯하다.
○ 한나라 환제(桓帝) 때 신라는 비로소 계립령과 죽령 두 고개의 길을 열고서 점차 북쪽 경계를 개척해 춘천(春川) 등지까지 이르렀다.
《삼국지(三國志)》 삼한전(三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환제와 영제(靈帝)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해져서 군현(郡縣)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군(樂浪郡)을 말한다.- 이 제압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은 바로 신라와 백제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달라왕(阿達羅王) 3년(156) -한나라 환제 10년- 에 계립령의 길을 열었다. -계립령은 문경현(聞慶縣)에서 북쪽으로 28리 되는 곳에 있으며, 속칭 마골산(麻骨山)이라고 부른다.- 5년(158)에 죽령(竹嶺)의 길을 열었다. -죽령은 풍기군(豐基郡) 북쪽에 있다.- ○ 나해왕(奈解王) 27년(222) -위(魏)나라 문제(文帝) 3년- 에 백제가 우두주(牛頭州) -지금의 춘천(春川)이다.- 에 쳐들어오자 이벌찬(伊伐湌) 충훤(忠萱)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막았다.
○ 조위(曹魏) 정시(正始) 연간에는 신라의 북쪽 경계 지역을 낙랑에게 빼앗겼다.
《삼국지》 삼한전(三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종사(部從事)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의 남부종사(南部從事)이다.- 오림(吳林)이, 낙랑이 본디 한국(韓國)을 통치하였다고 해서 진한(辰韓)의 8개 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붙였다. 그런데 역관(譯官)이 말을 전하면서 다르게 전달하여,
신지(臣智)가 한(韓)의 분노를 자극해서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에 두 군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군과 대방군이다.- 이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니, 드디어 한이 멸망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정시(正始) 7년(246)의 일이다. 진한은 신라를 가리킨다. 오림이 분할한 8개 국은 바로 조령 북쪽에 있는 춘천 등지이다. 조령 남쪽의 군현들은 오림이 분할할 수가 없었으며, 역시 낙랑이 받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그리고 한(韓)이 멸망되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조령 북쪽의 한 우두머리[渠帥]가 두 군에 의해 멸망된 것이다. 계림(鷄林)의 한을 두 군이 어떻게 멸망시킬 수 있었겠는가.
○ 서진(西晉) 이후로는 안변(安邊)의 춘천(春川) 지역을 다시 신라가 차지하였으며, 유송(劉宋) 초기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기림왕(基臨王) 3년(300)
-진(晉)나라 혜제(惠帝) 11년- 에 비열홀(比列忽)
-지금의 안변(安邊)이다.- 에 순행하였다.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니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귀복(歸服)하였다. ○ 내물왕(奈勿王) 42년(397)
-진나라 안제(安帝) 1년- 에 북쪽 변경의 하슬라(何瑟羅)
-바로 강릉이다.- 에 가뭄이 들었다. ○ 눌지왕(訥祗王) 22년(438)
-송나라 문제(文帝) 15년- 에 우두군(牛頭郡)에서 산골짜기의 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려
50여 가(家)가 떠내려갔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때 춘천은 오히려 신라에 속해 있었으므로 재상(災祥)이 사관(史官)에게 상세히 보고된 것이다. 그렇다면 진(晉)나라 때부터 송(宋)나라 때까지 춘천 동쪽, 철령 남쪽 지역은 그대로 신라의 지역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 송나라 문제(文帝) 15년(438) 이후로는 신라의 계립령과 죽령 서쪽 지역과 북쪽 지역이 모두 고구려에 함락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본기에 이르기를, “눌지왕 34년(450) -송나라 문제 27년- 에 고구려의 변장(邊將)이 실직(悉直)의 들판에 와서 사냥을 하였는데, 신라의 하슬라(何瑟羅) 성주(城主)가 군사를 내어 살해하였다. 고구려 왕이 노하여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하였다. ○ 열전(列傳)에 이르기를, “고구려 왕이 김춘추(金春秋)에게, ‘마목현(麻木峴), 죽령의 서쪽과 북쪽 지역은 본디 우리의 땅이다.’ 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의 온달(溫達)이 말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 서쪽 지역은 우리의 땅이다.” 하였다. 대개 마목현은 바로 계립현으로, 방음(方音)으로 마(麻)를 겨릅[鷄立]이라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라 눌지왕 22년(438) -송나라 문제 15년- 이전에는 춘천 등지를 매번 신라에서 관할하였는바, 고구려의 경계는 반드시 죽령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34년에 이르러서 고구려가 실직의 들판에서 사냥을 하였고, 또 고구려 왕이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고 하였는데, 실직은 지금의 삼척이고, 서쪽 변경은 삼척의 서쪽을 가리키는바, 죽령 서쪽과 북쪽 지역이 고구려에게 함락된 것이 이즈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사냥을 하면서 삼척에 이르른 것이며, 고구려가 침입한 것에 대해서도 반드시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고 한 것이다. 이 당시에 고구려는 백제의 한수 북쪽에 있는 여러 부(部)를 빼앗아 차지하여, 그 남쪽 경계가 백제의 동쪽에서 대관령의 서쪽 지역까지는 계립령과 죽령 두 고개에까지 이르렀으며, 동쪽으로는 신라의 삼척 등지와 경계를 접하였던 것이다.
○ 이 당시에 대관령 동쪽의 바닷가 지역은 여전히 신라에 속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왕(慈悲王) 11년(468)
-송나라 명제(明帝) 4년- 9월에 하슬라 사람들을 징발하여
이하(泥河)에 성을 쌓았다. ○ 소지왕(炤智王) 3년(481)
-송나라 순제(順帝) 5년- 에 비열성(比列城)
-지금의 안변(安邊)이다.- 에 순행하여 군사를 위로하고 군복을 하사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 당시에 대관령 서쪽 지역은 비록 고구려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영동의 강릉 등지는 신라가 관할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강릉이 본디 고구려의 지역이라고 하였으며, 강릉이 관할하는 순흥(順興) 등 9개 고을을 모두 고구려 지역이라고 하였으니, 매우 잘못된 것이다. 강릉이 고구려 지역이라는 형적이 본디 없는데, 더구나 강릉이 관할하는 영남의 여러 현이겠는가. 영남이 참으로 고구려 지역이었다면 고구려 왕이 김춘추(金春秋)를 꾸짖을 적에나 온달(溫達)이 군사들에게 맹서할 적에 어찌하여 영남 지역을 거론하지 않고 반드시 죽령 서쪽과 북쪽을 말하였겠는가. 영남 지역은 본디 고구려와는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2년(551)에 신라가 다시 조령 북쪽의 충주(忠州) 등지 및 한수(漢水)의 동쪽과 북쪽 지역을 빼앗아 취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흥왕(眞興王) 12년(551)
-양나라 간문제 2년- 에 왕이 거칠부(居柒夫)에게 명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백제가 먼저 공격해
평양(平壤)을 격파하자, 거칠부 등이 승세를 타고 죽령 바깥쪽,
고현(高峴) 안쪽의 10개 군을 탈취하였다. ○ 18년(557)
-진(陳)나라 무제(武帝) 1년- 에 국원성(國原城)
-지금의 충주(忠州)이다.- 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온달열전(溫達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온달이 상주하기를, “신라가 우리 한수 북쪽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원컨대 군사를 거느리고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출발에 임해서 온달이 맹서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 서쪽 지역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나가서 신라의 군사들과 싸우다가 죽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 당시에 한양(漢陽) 남쪽 지역은 백제에 속하였다. 그런즉 거칠부가 취한 바는 바로 충주 북쪽 지역 및 한수의 동북쪽 지역이다. 온달이 이른 바 ‘우리 한수 북쪽 땅을 빼앗아 갔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양나라 원제(元帝) 2년(553)에 신라가 또 지금의 한양(漢陽), 이천(利川) 등지를 취하였는바, 신라의 서쪽과 북쪽 경계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사이로 끼어들어가,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삼각산(三角山)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안산(安山)의 앞바다까지 닿았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의 서쪽과 북쪽 경계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어들어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흥왕 14년(553) -양나라 원제 2년- 에 백제의 동북쪽 변방 지역을 탈취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 16년(555)에 왕이 북한산(北漢山) -지금의 한양이다.- 을 순행하여 강역을 획정(劃定)하였다. ○ 18년(557)에 신주를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 29년(568) -진(陳)나라 임해왕(臨海王) 3년- 에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南川州) -지금의 이천(利川)이다.- 를 설치하였다.
《고려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서희(徐煕)가 말하기를, “삼각산 북쪽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제의 동북쪽 변방은 바로 한양, 이천 등지이다. 이 당시에 신라가 이미 그 지역을 차지하였으므로 진흥왕이 순행하면서 북한산주에 이르러서 강역을 획정하였던 것이다. 북한산은 지금의 삼각산으로, 삼각산의 승가사(僧伽寺)
-경성(京城)에서 북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북쪽 산봉우리 위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다. 비문은 모두 12행인데, 마멸되어서 판독할 수가 없고, 판독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제1행에는 ‘진흥태왕 및 중신들이 순수할 때 기록한 것이다[眞興太王及衆臣等巡狩時記]’란 글이 있고, 제8행에는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글이 있으며, 세운 날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생각건대 이는 진흥왕 16년에 강역을 획정할 때 세운 것이며, 이곳이 고구려와 국경을 나눈 곳이다.
또 살펴보건대, 이 당시에 신라에서 당나라와 통하는 길은 매번 당은포(唐恩浦), 당항성(棠項城) 등지를 경유하는데, 당은포는 바로 남양부(南陽府)이고, 당항성은 바로 안산군(安山郡)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성읍조(城邑條)에 나온다.- 그렇다면 신라의 서쪽과 북쪽 경계는 충주, 이천에서 안산, 남양의 바다에 이르는 지역으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 이 당시에 신라의 동북쪽 경계는 함흥(咸興)의 황초령(黃草嶺)까지 이르렀다.
《문헌비고》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흥왕순수비가 함흥부 북쪽 초방원(草坊院)에 있는데, 그 비문에 대략, “세차(歲次) 무자년(568) 가을 8월에 관내 지역을 순수하며
민심을 살폈다.” 하였다. 비문은 12행이며 행마다 35자로 전체 비문의 글자 수는 420자인데,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겨우 278자이다. 삼국(三國)이 정립해 있던 시기에는 신라 지역이 안변부를 지나지 못하였는데, 함흥은 안변에서 북쪽으로 200여 리나 되는 곳에 있다. 이 사실은 국사(國史)와 야승(野乘)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인데, 홀로 먼 지방의 한 조각 비석이 천고의 고사(故事)를 남겼다.
-삼가 살펴보건대, 무자년은 바로 진흥왕 29년이다.○ 당나라 초기에는 신라의 서북쪽 경계가 임진(臨津) 등지에 이르렀다.
《구당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상원(上元) 2년(675)
-신라 문무왕 15년- 에 유인궤(劉仁軌)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호로하(瓠蘆河)를 건너가 신라 북방의 큰 진(鎭)인
칠중성(七重城)을 격파하였다.
《자치통감》의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내가 살펴보건대, 《당서》 유인궤열전에 나오는 호로하는 마땅히 고구려의 남쪽 경계, 신라의 칠중성 북쪽에 있어야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칠중성은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이고, 호로하는 바로 임진강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선덕왕(善德王) 7년(638) -당나라 태종 12년- 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공하였다고 하였다. 그런즉 적성이 신라 지역이 된 것은 이미 당나라 초기의 일이었다.
○ 당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동북쪽 경계는 덕원군(德源郡), 서북쪽 경계는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러서 발해(渤海)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 24년(736)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칙서를 내려 패강(浿江) 남쪽 지역을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謝恩)하였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삼았다.
《문원영화(文苑英華)》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현종칙신라왕서(唐玄宗勅新羅王書)에 이르기를, “경(卿)이 패강에 방수(防戍)를 설치하고자 하는데, 이곳은 발해의 요충지에 해당되는바, 참으로 좋은 계책이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칙서는 바로 개원 26년(738)에 내린 칙서이다.
《문헌비고》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뒤로 동북쪽은 천정군(泉井郡)의 탄항관(炭項關)을 경계로 삼았는데, 지금의 덕원(德源)이고, 서북쪽은 당악현(唐嶽縣)으로 경계를 삼았는데, 지금의 중화(中和)이다. 중화에서 동쪽으로 지금의 상원(祥原), 수안(遂安), 곡산(谷山)을 거쳐 덕원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신라의 변새(邊塞)이고, 그 밖에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는 모두 발해가 차지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하(泥河)는 마땅히 덕원군(德源郡)에 있어야 하고, 패강(浿江)은 지금의 대동강이다. 당나라 현종이 내린 칙서에 의거하면 패강 북쪽은 분명히 발해 지역이었다. 대개 당나라 고종(高宗) 때 고구려를 격파하고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그 지역에 설치하였다가 개원(開元) 이후로는 안동도호부를 서쪽의 요서(遼西) 지역으로 옮겼다. 그러므로 패강 북쪽 지역은 발해에 편입되고, 남쪽 지역은 신라에 속하게 된 것이다.
○ 신라 말기에 궁예(弓裔)가 비로소 대동강 서북쪽 지역을 취하였다.
《삼국사기》 궁예열전(弓裔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궁예가 말하기를, “옛날에 신라가 당나라에 청병(請兵)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다.” 하였다. 성책(聖冊) 1년(905)
-당나라 애제(哀帝) 2년- 에
패서(浿西) 13진(鎭)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
검용(黔用)이 항복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패수의 서북쪽 지역은 바로 발해의 압록부(鴨綠府) 남쪽 경계이다. 발해가 한창 거란(契丹)과 서로 싸우고 있었으므로 궁예가 그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성읍(城邑)○
금성(金城)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은 금성(金城)에 거처하는데, 성 주위가 8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혁거세(赫居世) 21년(기원전 37)에 궁성(宮城)을 쌓고는 금성이라고 하였는데, 그 성은 지금 경주부에서 동쪽으로 4리 되는 곳에 있다.
○ 계림(鷄林)
《구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3년(663)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을 계림주 도독부(鷄林州都督府)로 삼고, 신라 왕 김법민(金法敏)에게 계림주 도독(鷄林州都督)을 제수하였다.
○ 상주(尙州)ㆍ양주(良州)ㆍ강주(康州)ㆍ웅주(熊州)ㆍ전주(全州)ㆍ무주(武州)ㆍ한주(漢州)ㆍ삭주(朔州)ㆍ명주(溟州)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강역총론조(疆域總論條)에 나온다.
○ 당은군(唐恩郡)ㆍ장구진(長口鎭)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닷길로 갈 경우, 바닷가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오골강(烏骨江) -삼가 살펴보건대, 강은 압록강 서쪽에 있다.- 에 이르며, 이어 남쪽으로 바닷가를 따라가면 오목도(烏牧島), 패강(貝江)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동강이다.- 입구,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 서북쪽에 있는 장구진에 도달한다. 또 마전도(麻田島), 고사도(古寺島), 득물도(得勿島)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덕물도(德勿島)이다. 덕(德)과 득(得)은 옛날에 통용하였다.- 를 지나 1000리를 가면 -삼가 살펴보건대, 오골강(烏骨江)에서 당은포(唐恩浦)까지가 1000리임을 이른 것이다.- 압록강의 당은포 입구에 이르고, 이어 동남쪽으로 육로를 통해 700리를 가면 신라의 왕성에 이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남양부(南陽府)는 신라 때 당은군(唐恩郡)이라고 칭하였다. 그런즉 당은포는 남양의 바다 포구이다. 《신당서》에 당은포에서 육로를 통해 700리를 가면 신라의 왕성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왕성은 지금의 경주(慶州)이다. 경주는 과연 남양부에서 동남쪽으로 7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리고 소정방(蘇定方)이 올 적에 신라 왕이 이천(利川)에 나와 주둔해 있으면서 배를 보내어 소정방을 덕물도(德勿島)에서 맞이하였는데, 덕물도는 남양의 앞바다에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당시에 당나라와 통하는 길은 반드시 남양을 경유하였을 것이므로, 당은포가 남양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당서》에서 압록강(鴨綠江)의 당은포라고 한 것은, 당시에 전사(傳寫)하면서 잘못 쓴 것이다. 장구진은 마땅히 초도 근처에 있어야 하는데, 초도는 지금의 풍천(豐川) 앞바다에 있는바, 생각건대 지금의 장연(長淵)이나 은율(殷栗) -본명은 율구(栗口)이다.- 등지이다. 당나라 때 신라는 대동강을 경계로 삼았으므로 초도와 장구진이 신라의 서북쪽 경계가 된 것이다.
○
당항성(棠項城)
《구당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貞觀) 16년(642)에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해서 당항성을 탈취해 신라에서 당나라에 입조(入朝)하는 길을 끊으려고 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항성은 조선의 전주(全州) 동북쪽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당항성은 신라에서 당나라로 통하는 길이다. 당시에 당나라로 통하면서는 매번 남양부의 앞바다를 경유하였은즉, 당항성은 마땅히 남양 근처에 있어야 한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근거로 하여 보면, 지금의 안산군(安山郡)은 본디 장항구현(獐項口縣)인데, 당(棠)과 장(獐)은 음이 비슷한바, 이른바 당항이란 것은 안산인 듯하다.
○
칠중성(七重城)ㆍ
매초성(買肖城)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가 고구려의 반군(叛軍)을 받아들여서 백제의 지역을 침략해 지키고 있자, 황제가 노하여 군사를 동원해 정벌하였다. 상원(上元) 2년(675)에 유인궤(劉仁軌)가 신라의 군사를 칠중성(七重城)에서 격파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이근행(李謹行)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신라의 매초성(買肖城)에 둔병(屯兵)하게 하였는데, 신라와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삼가 살펴보건대, 칠중성은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이고 매초성은 바로 매성(買省)의 와전으로, 지금의 양주(楊州)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칠중성은 조선의 경주(慶州) 북쪽 경계 안에 있다.
○ 천정군(泉井郡)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에서 발해의 책성부(柵城府)까지는 39개 역(驛)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천정군은 지금의 덕원군(德源郡)이다.
○ 청해진(淸海鎭)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보고(張保皐)가 신라로 돌아가서 그 나라의 왕을 알현하고는 말하기를, “온 중국이 신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鎭)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사람들을 잡아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청해는 해로(海路)의 요충지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청해가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청해진(淸海鎭)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강진현(康津縣) 완도(莞島)이다.
○ 김주(金州)
《책부원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2년(927)에 신라국의 김주사마(金州司馬) 이언모(李彦模)를 가간교우상시(可簡較右常侍)로 삼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해부(金海府)를 고려 때 김주라고 칭하였는데, 이곳에서 김주라고 칭한 것이 과연 김해부를 가리키는지는 미상이다.
○ 천주(泉州)
《오대사(五代史)》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
사비성(沙鼻城)ㆍ기노강성(岐奴江城)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지천황(天智天皇) 2년(663) -당나라 용삭(龍朔) 3년- 3월에 장군을 파견하여 신라를 정벌해 신라의 사비기성(沙鼻岐城)과 노강성(奴江城)을 빼앗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두 성은 상고할 수가 없다.
첫댓글 <대륙조선사>에서 상대적으로 동쪽지방의 한계는 반도와 열도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현 북방삼성과 반도와 열도에 대한 근거적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북경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장성은 근세기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동쪽이나 동북변에서 조선을 위협한 예는 극히 드뭅니다. 이것은 동쪽은 바다에 막히고, 동북의 삼성지대는 당시 인구가 매우 적어 가치가 별로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라 생각됩니다. 특히 현 삼성지대와 그 북방의 내몽골 및 러시아 영토는 최 근세기에 인구유입이 늘어난 것이지 19세기 이전엔 무인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거기가 신라중기만 해도...거인들이 살던 신라 극동북 경계지대였단 얘깁니다...ㅡ. .ㅡ
삼성지대는 내몽골을 포함한 19세기 말경의 인구는 3백만명도 되지 않았다는 사전의 기록도 있는데, 그 면적으로 보면 무인지경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이곳이 과거 수천년 이래로 수많은 종족, 부족들이 일어나고 망하고를 거듭했다고 하는 현 역사해설은 거짓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상기해 보면, 바이칼이나 울란바토르등지의 역사도 다시 점검이 필요로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바이칼과 외몽골의 역사는...
역사서를 봐도...중국의 동북...조선의 북방...대막의 밖에 있던...고립됀 지역...
즉, 청나라 동북 변방 영고탑지로 명기돼어 나왔으니...
기존 역사서에도 동북 혹한의 오지로 사람살기 어려운 자리요...번화한 도읍지자리가 아니라 나옵니다.
그러나 북방왕조들의 원 고향이 대부분 거기였단 것도 내내 나옵니다.
번화지가 아니라하여...엄연히 역사서가 명기한 그들의 원 조상들 발원지가 아니라 속단할 수 없는 이치입니다.
한반도 최 동남단 경상도 깡촌이...
대부분 대한민국 유력 정치인들과 대통령들의 고향이듯이여...
북방왕조란 말의 뜻이 언 뜻 와 닿지 않는 것은, 바이칼이나 올란바토를 중심으로 했던 왕조가 있었는가 할 정도이니, 물론 그것도 인간이 살았을 것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역사서에 명기했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지명이 과연 그곳인가? 등등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 대한 근세기의 기록을 보면 홛당한 면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영고탑의 지리적 위치? 한 번 추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거기는 기존 사서에도...그 북방왕조들의 고향으로 나오지...대규모 도시나 왕성이 있던 곳이라 나오지 않고...
청나라나 금나라 동북방 발원성지라 하면서도 그 영고탑지는...
그저 목책을 두른 진지정도라 하듯...대규모 왕궁이 있던 자리가 아님은...역사에도 분명 명기됐습니다.
그러나 거기가 원 발흥지였음도 분명 명기 됐습니다.
환인제국의 중심이 바이칼이란게 아니라...최초 환인이 시베리아(사백력)에서 득도해 남으로 진출...
천산유역에 환국의 중심을 뒀단게 제 주장입니다.
해빙기 이후...시베리아종들이 남하하면서...인류사가 급속도로 요동쳤단 예상입니다.
그 시원지는 역시 초라하겠고여...
원래 모든 문명의 통치자들 고향은...대개가 깡촌 구석탱이이듯여...
양이들과 인도인들이 원조 에덴동산을 동북방 천산유역으로 보는 이유고...
천산(중국)유역 동양인들과 그 동부 동이족들이...천제나 제사를 지낼땐...예외없이 북방으로 절을 하는 이유가 그것같다 전 봅니다.
무슨 천문학적 뜻이라 하면...이슬람교도들이 그 교조의 고향인 메카로 절을 하듯...각자 방향이 달았을 것인데...
동방족들은 대대가 다 북쪽을 지배자의 자리로...하늘의 자리로 함도....
그 문명의 시원이...춥고 하찮지만 시베리아이기 때문이라 봅니다.
또한 시베리아 전 지역중...가장 물이 많고...주변강들의 수온이 온천들로 안정적인 자리는 단연 바이칼지역입니다.
역사시대 이후의 중심이자 번화가는 아니지만...
그 현대인류 주류문명인들의 역사의 출발을 이른 종족들의 최초 발원중심지는 맞을 것이라 봅니다.
그러니 서역인들인 러시아 백인들도...
지들지역도 후보지가 많은데...유독 이 바이칼을 찝는 겁니다.
그내들은 뭔가 아는 겁니다.
동국으로 시작된 사서는 당신 멋대로 동국사서가 되는가요. 동국의 의미나 제대로 공부하세요. 글을 많이 쓰면 헛말이 나옵니다. 글을 신중히 쓰세요.
원래 동이(東夷)는 파미르 이동이다.
그 중심의 천산일대 기준으로 동쪽 전체는 동국조선 영토다...
그러나 그 중원의 동국조선의 영토의 다시 동부 별지는...동국조선 기준으론 또다른 동국조선이 돼는 이치다.
이런 의미로 쓴 내용입니다.
김선생님이 아시는 동국이란 무었이셨는데 이리 화를 내시는지여...?
그러지 않아도 이미 기본적인 의견은 많이 제시했기에...
더 쓸 글 소재도 별반 없고...그러기에 당분간 글을 자제하려 했습니다.
제 생각을 꿰뚤어 보셨습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내 잘못했습니다..김선생님...그건 그렇고...
정작 이 글의 주제인...신라 동쪽 변방의 철관은 현 북경일대일 것이란 제 글의 문제점은 없는지도 좀 접검해 주시란 부탁입니다.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모순들만 찝지 마시고...
정작, 이 본문글의 핵심주제인...삼국 중 가장 동쪽에 있었단 신라의 가장 동쪽 철문(鐵門)이란 변방진지...
이곳의 위치비정이 어찌 잘못됐나에 좀 집중해서 조언들을 해주심이 저에게도 도움이 돼겠습니다.
동국 조선에 번국 동국을 주장하려면 사서와 유적을 가지고 오세요. 당신 역사를 말장난으로 복원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근거 없는 주장이 왜곡이 아니고 먼가요.
당신 상상속에 있는건 당신 블러거에나 쓰세요.
사서를 가려 보라고 해도 아집으로 뭔 역사를 공부 집어치우소. 방향만 조작해도 엉둥한 내용이 됩니다.
대륙조선의 상대적 동쪽인 동국의 증거가 없다고여...?
동국여지도란 엄연한 지도가 있습니다...못 보셨나요...?
그리고 그 동국개념은 끝도없는 해석의 각자 관념차니 저도 꼭히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아쉬운건...
이 글의 본 주재인...삼국의 가장 동쪽 신라의 또 가장 동쪽에 있단...그 철관을 전 현 북경일대로 보는데...
김선생님은 어디로 보시냔 조언을 구하는 겁니다.
동국개념의 자의적 비정은 저가 잘못했습니다.
위의 본문내용에 대한 조언을 구합니다.
강단 욕하지 마소 , 강단 보다 더한 사람이 당신이요...내가 묻지 않았소 몇번이나 동국으로 시작되는 사서는 뭐가 되나여 님의 주장이 진실이라 주장 하시는데 . 근거가 동국자 붙은 지도를 가지고 조선의 번국 동국이 있다 이건 경상도에 나오는 유물은 무조건 신라 유물이다 이것과 무엇이 다르나요
동국여지도는 진위가 가려지지 않았지요. 한반도를 조선 8도로 그린 지도인데요.. 님이 주장하는 동국의 개념과 다르지요..
조선사 여러곳을 한번 보십시요...제가 인용한 자료들에도..
틀림없이 조선은 조선기준 동쪽의 변방을 다시 동이(東夷)라고도 규정하고...자신들도 서토의 중국에 대한 동번(東蕃)이라고 차처하면서도 ...또 자신들의 동쪽을 동이(東夷)라고도...다시 동번(東蕃)들이라고도 합니다.
자신들 기준의 또다른 동쪽 번국은 당연 동국(동쪽나라)이라 호칭할 수 있는겁니다.
내 잘못했습니다 김선생님...
동국에 관한 정의는 김선생님 말씀 십분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가 아쉽단건..정작 제 글의 주재인 신라의 최 동북단 관문이란 철문은 현 북경이란 제 주장이...
어디 모순됀 점 없나 점검 좀 해 주시란 부탁입니다.
김규형님은 댓글에 예의를 갖추어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쟁점에 관해서 상대방의 견해를 강력히게 부정하시려면 본인의 자세한 반박 글도 올려주셔야 된다고 봅니다
<김규형>님!
다른 분의 글이 내 주장이나 의견이 다를 때, 반론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주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기록에 엄연히 나온걸 그대로 올린겁니다.
지중해 조선사 분들같이...사료증거도 없이...모든 기록들에 나오는 엄연한 난쟁이 왜(倭)들을...
키가 장신인 인류인 노랑머리 영국 웨일즈애들이라하는 오바에 비하면
허접한 제가 차라리 더 객관적이라 자부하겠습니다.
조선시대 기록들 보십시오...4M육박하는 실존한 사람들의 이름과 동내까지 나옵니다.
지금 없다고 하여...예전에 지구오지에 거인들이 아예 없었다 단정하는건...
선조들이 남긴 기록을 너무 무시하는 오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