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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로, 물과 공기가 깨끗해 세계적 장수촌으로 알려져 있다. 아라랏산에서 흘러나온 천연수와 오크 나무를 이용한 꼬냑도 유명하다.
인구 324만 명( 해외 70개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은 600만 명이 넘어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해외 거주 인구가 본국 인구를 훨씬 초과한 나라)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두 차례 전쟁(1994년,2020년)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아르메니아는 남캅카스에 위치한 내륙국으로 수도는 예레반이다. 지리적으로는 서아시아에 속하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는 유럽에 가깝고 각종 국제기구에서 유럽 소속 회원국으로 활동중이기 때문에 동유럽으로 보기도 한다. 대한민국 외교부에서는 아르메니아를 유럽으로 분류하고 있다.
고대 아르메니아는 한때 로마 제국에 대항할 정도로 강성했으나 이후의 역사는 많은 외국세력의 지배와 이에 대항한 독립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원래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신앙인 아르메니아 신화를 믿었다. 그러다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와 접촉하면서 그들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받아들였다가, 서기 4세기인 301년에 기독교가 국교화되었다.
현재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종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이다. 1세기에 바르톨로메오와 타대오 두 사도가 아르메니아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그리고 301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언한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313년에서야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것은 392년이니, 91년이나 빨랐다. 이렇다 보니 아르메니아 국민 90%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들이다.
주위의 강대국(러시아, 튀르키예, 이란 등)이 있어서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안보위협이 꽤나 큰 나라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주범인 오스만 제국의 계승 국가 튀르키예와 역사적으로 사이가 매우 안 좋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제국이 터키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을 사막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100만 명 이상 희생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튀르키예와의 갈등은 과거사라고 할 정도이며(최근에는 국경봉쇄도 풀었다) 오히려 이웃나라인 아제르바이잔과의 갈등이 현재진행형이다.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이 두 차례 있었고, 최근에도 두 나라간의 다툼이 심심찮게 기사로 뜬다. 물론 두 나라는 전쟁이 끝난 지금도 앙숙이다. 하지만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두 나라를 직접 왕래할 수는 없고, 조지아라는 제3국을 경유해야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한국인들한테는 잘 알려져있지 않으며 국토 또한 작지만, 러시아 등 옛 공산권에서는 예전부터 관광지, 휴양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캅카스 산맥 지역답게 옆나라 조지아처럼 웅장한 자연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고, 오랜 역사답게 자연과 어우러진 오래된 기독교 건축물이 매우 많다.
비슷한 처지였던 조지아가 먼저 적극적인 한국인 360일 무비자와 적극적인 홍보로 그나마 캅카스 국가 중에서 한국 관광객을 많이 유치하고 인지도가 올라간 반면, 아르메니아는 이 쪽에 좀 늦는 편이었다. 다만 2018년 드디어 한국인 180일 무비자를 시행하게 되었다.
참고로, 아르메니아를 말하면서 아라랏산을 뺄 수는 없다.
성경 창세기에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후에 물이 빠지면서 아라랏산 등마루에 머물렀다는 해발 5,137m의 아라랏산.
중세시대까지 아르메니아 땅이었던 아라랏산은 오스만 투르크에 정복당한 후 지금도 튀르키에 영토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라랏산을 민족의 성지로 여기는 곳이다. (민족의 성지 수준을 넘어서 아르메니아 국가의 정신적인 지주로 느껴진다. 아라랏주도 있고,아라랏이란 이름을 딴 기업등 곳곳에서 아라랏을 만난다. 심지어는 묘지도 아라랏산이 보이는 곳에 설치한다.)
1. 세반 수도원
세반호는 아르메니아 최대이자 코카서스 최대의 호수로 서울 면적의 두배 가량이고 아르메니아 국토 면적의 5%에 달한다. 바다와 접하지 않는 내륙국가인 아르메니아에서는 세반 호수가 바다인 셈이다.
이 호수는 아라라트산의 화산폭발로 생겨난 호수이다. 구 소련 스탈린 시절 공사로 해수면이 19m 아래로 떨어지고 면적도 현저히 줄어들어 위기가 있었으나 다행히 스탈린 사후 공사는 중지되고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계속되고있다.
해발 1900m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수에는 세바나반크(세반 수도원)이 있다.
세반호수가에 있는 세반 수도원은 874년에 아쇼크 1세의 딸 마리암 공주가 요절한 남편을 기리기위해 교회를 지어 기부한 것인데, 처음에는 호수안의 섬에 있었으나 수면이 낮아져 육지와 연결되는 바람에 반도가 되었다.
반도의 언덕에는 세반수도원의 고색창연한 두 건물이 걸터앉았다. 1,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원으로,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에 저항해 사도교회를 지키려던 아르메니아인들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세반수도원은 아르메니아의 대표적 순례교회라고 한다.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후 세운 최초의 교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수도원은 874년 바그라트 왕조 때 건축한 것으로 워낙 고립된 지역에 있어
에치미아진 대성당에서 죄를 지은 사제와 수도자를 위해 만든 일종의 감옥이라고 한다. 수도원은 원래 4개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두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쪽이 성 사도교회이고 오른쪽이 성모 마리아교회이다.
2. 게하르트 수도원
게하르트 수도원(Geghard Monastery)은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위대한 정신적·문화적 유산으로 꼽힌다. 4세기경 아르메니아를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개종시킨 성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가 기도하러 왔다가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동굴을 파서 수도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9세기에 아랍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후 절벽을 깎아 만든 교회, 동굴 안에 만든 교회, 벽을 쌓아 만든 교회, 절벽 안 깊은 곳에 만든 교회 등 다양한 형태의 교회가 지어졌다.(현재의 건물은 12~13세기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수도원의 원래 이름은 동굴 사원을 뜻하는 ‘아이리방크’였다고 한다. 그러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 병사가 찌른 창을 뜻하는 게하르트(Gehard)로 변경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유대인 사도였던 타데우스(Thaddeus)가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로마 병사의 창(‘롱기누스의 창’)을 아르메니아로 가져왔다고 한다. 현재 이 창은 에치미아진 교회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다.
골짜기로 들어가다 보면 수도원에 이르기도 전부터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깊은 산속, 높은 바위산에 둘러싸인 풍경 때문이지 싶다. 그런 느낌은 잠시 후 동굴교회에서 정점을 찍는다. (바위굴을 깎아 교회를 만든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심과 절벽에 석굴을 깎아 절을 만든 불교도들의 신앙심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깎아지른 바위절벽은 수도승들의 기도처였다고 한다. 사다리나 밧줄로만 닿을 수 있는 수많은 동굴에서 거주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한다.
수도원은 마치 성곽을 연상시킨다. 수도원을 둘러싼 높은 축대는 성벽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유일한 통로에는 작게 문을 냈다.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온 나라들의 전형적인 건축 스타일이라 하겠다.
수도원은 네다섯 개의 교회와 그 앞의 넓은 홀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동굴교회인데, 거대한 바위를 파내고 안을 세심하게 조각해 만들었다. 사람의 힘으로 들 수 없는 무거운 돌덩이를 쌓고 깎은 것으로도 모자라 암벽을 파내기까지, 신심이 이끌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르메니아의 수도원은 묵직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어두운 내부를 비추는 것은 신과 만나기 위해 뚫어놓은 천장 구멍과 창으로 들어오는 빛, 그리고 촛불뿐. 화려하게 장식된 유럽 대도시 성당과는 다른 단정하고 신성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다.
수도원 중심에는 교회 건물이 위치하고 그 주위에 학교, 필사실, 도서관, 그리고 성직자들의 주거시설들이 교회를 빙 둘러싸고 있다.
3. 가르니 주상절리, 가르니 신전
골짜기를 따라 현무암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늘어섰는데, 중력에 맞서 매달린 기둥이 오르간을 닮았다고 해서 ‘현무암 오르간’으로도 불린다. 여기에 협곡의 물줄기가 보내주는 사운드트랙을 보태면 협곡은 ‘돌의 교향곡’으로 승화된단다.
주상절리(柱狀節理)는 마그마의 냉각과 응고에 따른 부피 수축에 의해 생기는 다각형의 돌기둥이다.
주상절리는 단면이 육각형으로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 이는 용암의 표면에 냉각·수축의 중심이 되는 점들이 고르게 분포할 때, 각 수축 중심점들을 중심으로 수축이 균등하게 일어나면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각형이나 오각형 등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기도 한다. 단면의 크기는 작은 것은 수 센티미터에서 크게는 수 미터에 이르기도 한다. 기둥의 길이도 수 미터에서 길게는 수십·수백 미터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용암이 식을 때 수축되면서 갈라지게 되는데, 이때 계곡을 흐르는 충분한 물이 있어, 용암이 빠르게 냉각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로인해 저처럼 멋진 주상절리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르니 협곡의 주상절리는 협곡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주상절리가 펼쳐져 있다.가르니계곡과 아자트 계곡의 주상절리는 규모나 크기, 다양함에서 그 어느 곳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위용이 압도적이었다.
가르니 신전구역은 기원전 3세기에 왕궁요새로 건립되었으며 시간이 지나 기원전 1세기에 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서 태양신 미트라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헬레니즘 양식을 한 고대 로마식 신전으로 지어졌다.
4세기 경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이후로는 황제의 여름 궁전으로 쓰였다.
가르니 신전은 17세기 대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다가 1970년대에 복원을 하였지만 원래의 자재가 66%이하로 사용 복원되었다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는 등재가 되지 못하였다.
AD 897년 신전 근처에 2층으로 된 여름 궁전을 추가로 지어졌다. 목욕탕과 교회 등이 함께 들어선 커다란 복합지구를 형성했다 한다.
가르니 요새는 난공불락이라고 했다. 북쪽의 성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이 천 길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요새(가르니 신전) 곳곳에서 멋진 조망을 즐길 수 있다. 발아래로 아자트 계곡의 주상절리가 광활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신전에서 계곡으로 내려가 볼 수도 있다.
4. 하흐파트 수도원
하흐파트 수도원은 아르메니아 비잔틴 건축과 카브카즈 건축의 혼합 양식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정식 명칭은 아르메니아 使徒 교회라고 한다.
10세기 말에 건축되었으며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아르메니아의 중요한 종교와 교육의 중심지였으며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적 장소로 여겨져 왔다.
특이한 생김새로 인해 전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다. 또한 수도원 주변의 자연 경관이 아주 아름답다.
하흐파트 수도원은 10~13세기 사이 조성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수도원이다. 976년 짓기 시작해 991년 완공돤 이후 부속교회등의 건물들이 지어진다. 하지만 지진과 외세 침략으로 여러 번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걸 재건·확장하면서 원형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덕분에 아르메니아에서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수도원이 되었다. 이웃하고 있는 ‘사나힌 수도원’과 함께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교회 북동쪽에 있는 3층짜리 종탑은 1245년에 지어졌다. 아흐파트 수도원은 요새화된 대규모 수도원 단지였다. 당시 저 종탑은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루의 역할까지 수행했었다고 한다.
아흐파트 수도원의 건축물은 장식 없이 단순 질박함 그 자체라고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스스로의 격을 갖고 있단다. 굵은 기둥, 묵직한 천장, 그러면서도 요소요소에 디테일이 살아있는 양각 조각은 육중함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바닥의 항아리들은 평소에는 와인과 유제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외침 때는 양피지에 기록된 아르메니아의 기록물을 은폐하는 곳으로 쓰였다고 한다. 때문에 습도와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 지붕을 제외하고 모든 부분을 흙으로 덮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