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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정-1.21침투로-경순왕릉-호로고루성-상승op-백학마을-숭의전지-당포성-북한군, 중국군묘지-자운서원. 연천답사는 모놀가족 42명이 참가했다.
고구려-통일신라-고려-박정희대통령-오늘날까지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삼국의 대치와 몽고항쟁, 임란, 남북대치 등 그 긴장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서울 압구정동에서 7시를 출발해 모놀답사로는 처음으로 합정동에 들렀다가 통일로를 달리니 8시 무렵에 파주에 도착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불과 한 시간즈음에 남북한과 대치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은 목사가 된 김신조의 아들이 2번이나 자살기도했다는 것은 남과 북의 첨예한 대림과 이념의 결과를 말해주는 사건이 아닐까. 무장공비의 아들로 태어나 사회에서 겪어야 할 차가운 시선과 냉대를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모놀의 첫 일정지는 121 침투로다. 민통선 안쪽에 있어 사전 예약은 물론 미리 명단이 들어가야 들어가야할 수 있는 곳. 우리군에 있어서는 치욕적인 일이지만 반면 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1968년 1일 17일 김신조를 비롯한 30명의 모장공비들이 이 남방한계선 철책을 넘어 침투했다. 청와대 습격을 위해 황해도 사리원 인민위원회 청사에서 예행연습까지 실시했다고 한다.
1월 21일 오후 8시에 청와대를 기습해 박대통령과 그 가족을 살해하고 차량을 탈취해 북으로 도주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만약 그때 떨 박근혜가 죽었다면 오늘 우린 여성대통령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휴전선 침투 후 이틀째 되는 날 나무꾼 우씨 4형제를 만나게 된다. 이들을 죽여 땅에 묻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터벅머리에 남루한 옷차림을 보고 고향에 두고온 동생이 생각난 모양이다. 여기서 죽일까 살릴까 갑론을박을 벌였다고 한다. 결론이 나지 않자 북으로 무전을 쳤고 난수표 조합을 해독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살해지령이었다고 한다.
신고를 하면 너희 가족들을 그만 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협박을 하고 노동당 입당원서까지 받고는 시계 2개를 주었다고 한다.아마 가난한 대중은 자기 편이라고 오판을 한 모양이다. 통일이 되어 이 시계를 보여주면 너희는 인민영웅이 도리 것이다라고 회유까지 했다고 한다. 무척이나 인간적이고 어리숙한 공비들이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집으로 돌아온 4형제는 고민끝에 9시 30분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자정무렵 대간첩 작전이 시작된다. 이때 청와대 근처를 지킨 30경비단 중령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북악산 북한산 일대에서 거의 사살을 하면서 풍운아 전두환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파주에서 제 3땅굴을 발견했던 사단장이 전두환인 것을 보면 어쩌면 북한이 전두환을 대통령을 만들어주지 않았나 싶다. 포위된 김신조는 자결 할려고 수류탄 안전핀을 뽑았지만 수류탄이 불발디는 바람에 이것이 운명이라 여기고 순순히 투항을 했다고 한다. 이에 언론은 생포였다고 발표했다.철저하게 구멍뚫린 군의 자구책이랄까. 31명중 김신조는 오늘날까지 살아 목사가 되엇고 29명은 사살되거나 자결하고 딱 한명만은 북으로 도주해 영웅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바로 그들이 침투한 그 루트를 따라 다시 올라갔다고 한다.
그 사람이 바로 박재경대장(총 징치국 부총국장)이다. 금강산사업의 총책임자로 2000년 9월 김대중대통령에게 선물할 칠보산 송이버섯을 들고 김용순 노동당 대남비서를 수행해 다시 서울을 찾은 인물이다.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던 공비가 다시 대통령특사역을 맡긴 것은 무슨 의도일까.
박재경 역시 훗날 이중간첩 혐의를 씌여 숙청했다고 한다.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이 두려웠겠지
우리가 뚫린 척책은 당시 미군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이 초소에서 열감지기를 통해 적을 감시했다고 한다.남의 나라이니 대충 보초를 선 모양이다.
2사단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나중에 발뺌을 했지만 훗날 김신조가 시연을 하고 나서야 시인했다고 한다. 물론 그 때문에 옷을 벗은 군인들은 부지기수
방첩대 옷을 입고 특수임무를 띄고 있다고 하니 모두 통과
북한군 묘지의 김춘식묘. 상위니까 우리네 대위에 해당하며 121사태 총 책임자다. 당시 생포했지만 자신의 조끼에 수류탄 안전핀을 걸어 일종의 부비트랩을 만들어 이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조끼를 벗기려다 수류탄이 터진 것이다.
121침투로에서
통일염원 리본. 그런데 취업 잘 되게 해주세요는 뭐야
어찌보면 이들도 참 불쌍해
겨울산 하루에 10km도 힘든데 하룻밤에 30km를 이동했다는 것은 대단하다.
최병수 문화유산 해설사. 북한관련 얘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군대 교관 같다.
신라를 고려에 넘긴 경순왕릉. 후대인은 그를 어떻게 봐야 할까? 폭군 견훤에게 아버지는 죽음을 당하고 어머니는 능멸을 당했으니 복수할 수 길은 왕건에게 나라를 주고 힘을 보태는 일이었다. 더 이상 백성이 다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왕건은 그의 뜻에 따라 통일을 시켰고 그는 고려의 공신이 되었다. 92세에 죽게 되는데 고향 경주로 장례 행렬이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경시내가 텅 빌 정도로 추모객이 경주로 향한 거이다. 이에 고려조정은 당황했고 유민반란까지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조정은 그가 고려의 왕족이기에 죽어서도 100리 이내에 장례를 치뤄야 한다는 명을 내리게 된다. 그가 멈춘 곳은 80리~~^^
바로 아무 연고 없는 연천에 묻힌 이유이기도 했다. 임란때 도굴당했고 , 병자호란, 정묘호란 때도 능이 만가지고 6. 25때도 총탄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영점 조준한다고 비석 구멍이 숭숭 뚫린 것이다. 그렇게 허물어지고 잊혀졌던 묘지가 1970년대 후반 이곳을 지키는 병사가 묘비를 발견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백옥비석. 딱 9자만 판독 가능
왕릉 주변은 온통 지뢰밭
임진강 최대의 항구인 고랑포, 한때 600가구,돛단배를 타고 3일이면 마포나루에 닿았다고 한다. 화신백화점, 금융조합, 우체국 등 강아지도 지전을 물고 다녔을 정도로 부자동네인데 지금은 인적을 찾기 힌들 정도다.
고랑포 옛사진
고구려성인 호로고루성, 역사스페셜에 자주 등장하는 성이다. 강변으로 주상절리대가 발달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삼각형인데 두변은 이렇게 강을 끼고 있고 한변만 육지와 연결. 은진리성과 당포성도 같은 형식. 강 건너는 이잔리성. 백제성으로 추정되며 당시에도 남북처럼 서로 대치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호로탄이라는 여울이 형성되어 있는데 한여름에도 배를 타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곳. 그렇기에 625때 북한군 전차부대가 가까운 문산으로 넘어오지 않고 이곳을 넘어 한양으로 진격했다고 한다. 김신조도 그렇고....예나 지금이나 천혜의 요지다.
고구려 기와파편은 이렇게 붉을 빛
망대에 올라
고구려 성벽돌을 볼 수 있다. 중국 오녀산성의 형식과 이곳의 축성방식이 어쩜 이렇게 같을 수가. 이것이 문화다.
미끄럼
노란 옷은 밥줘님
자연석을 다듬어 서로 포개어 성을 쌓았다.
임진강 건너 전차부대. 북의 전차부대가 내려오는 것을 막고 있다.
상승op와 제1땅굴
철통같은 검문소를 통과해 북쪽으로 한참을 들어가면 상승op가 나온다. 그야말로 최전방 관측소로 정훈장교가 북한과 이곳에 얽힌 역사를 설명해준다.
남과 북을 가로막는 휴전선은 철책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푯말이 서있다고 한다. 200m마다 하나씩 나무푯말을 세웠는데 60년이 지나 거의 낡아 남은 것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무, 바위등 지형지물을 가상의 휴전선으로 여기고 있다.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2km, 북쪽에서 2km. 이곳이 비무장지대로 완충지대로 남방한계선으로 이곳에 철책이 드리워져 있다.그곳에 철책과 초소인 GOP가 있다. 그 안쪽에 있는 초소는 GP로 영화 '공동경비구역'은 바로 이곳 . 적이 먼저 초소를 만들었기에 우리도 1km전방까지 앞에 초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양측은 2km내에서 대치
개성사람들이 1년동안 먹을 수 있는 평야였다는 연천평야는 지금은 쓸모없는 땅으로 바뀌었다. 북의 전차부대가 남으로 내려왔던 사미천도 보인다.
조금만 아래쪽에 태어났으면 그들의 인생은 또 바뀌었을 것이다. 그들의 휴가는 28박 29일, 교통수단이 없어 거의 걸어서 가야하기에 그렇게 길다고 한다. 보일러 시설이 없어 주로 땔감을 이용해 북한산은 거의 민둥산..영하 20도의 살을 애는 추위에도 우리 국군은 참 늠름하다.
1974년 11월 15일 선임하사 구중섭이 수색중 땅밑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수상히 여겨 이곳을 파던중 북한초소로부터 갑자기 300발의 사격을 받았다.
그는 월남파병용사로 배트공의 지하전술을 잘 아는 군인은 남달랐다. 아군땅에서 땅을 파는데 적이 공격하니 더욱 더욱 의심을 사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땅굴. 당시 땅굴이란 개념은 전혀 없었고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해 서로 평화시기였는데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물론 북은 아니라고 발뺌을 했지만 배수로가 북으로 향하고 있고 혁명과업완수라는 낙서도 보여 이것이 북쪽 땅굴임을 증명한다. 물자수송을 위해 레일까지 조성했다고 한다. 한시간에 1200명이 우리 후방을 침투할 수 있는 규모다.
사단 슬로건은 '찾고잡자 555' 5명 적 사살, 5명 귀순유도, 제 5땅굴 발견하자
구호는 단결~모놀 예비군입니다.
모놀 김연아
백학마을 부녀회에서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야채와 두부~어찌나 맛갈나던지
소주와 맥주도 한 잔~~나라를 생각하며
고려의 종묘인 숭의전
태조 왕건의 위패와 초상 그리고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6분 왕의 신위를 모시고 잇다. 그리고 고려 16공신을 모시고 있다.
고구려 성인 당포성 당개 샛강과 임진광 본류에 형성된 높이 13m성벽
성에 서 바라본 임진강
성벽에 자라고 있는 나무
파주, 북한군/중국군 묘지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혹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에 있다고 한다. 헛된 죽음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고결한 희생으로 기억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군인으로서의 사명감은 이런 곳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Until they are home" 미국은 전사자가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때까지 시간과 비용, 인력을 아끼지 않겠다라느 의지를 담은 모토다.
미군은 연간 500억원이 넘는 예산으로 한국은 물론 북한, 태평양섬, 베트남, 세계대전 전쟁터 등에서 발굴작업을 한다고 한다. 미국은 세계 어디에 있든지 자국민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있다. 한국전에서 희생된 8100여명의 미군 중에서 북한에 있는 5100여명의 유해를 찾기 위해 1996년부터 북한의 운산, 장진호 등지에서 북한과 공동 발굴 작업을 해왔다. 그 대가로 2500만 달러의 비용을 부담하면서 말이다.
우리도 유해를 발굴하다보면 자연스레 북한군,중국군의 유해를 찾게 된다. 북한에 무려 1천여구의 시신을 인계하려 했지만 북한의 거부로 단 한 구도 보내지 못했다. 통일이 되면 자연스레 해결된다는 억지 주장만 내세운 채 말이다.
북한에서도 배신당하고 고향으로도 가지 못한 유해 1천구가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답곡리 37번 국도변에 모셔져 있다. 군번도 없고 무명씨라는 이름을 단 채 북쪽을 향해 누워 있었다. 하얀 눈은 무명천이 되어 따사로운 볕을 맞으며 한을 곱씹고 있었다.
불과 5km만 가면 고향 땅인데~
초토의 시-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욱 신비로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30리면 가로막히고 무인 공산(無人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어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묘지는 2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2묘역은 6.25때 죽은 북한군과 중국군, 1묘역은 주로 무장공비
묘지를 조성한 이유. 제네바 합의 '자기 측 지역에서 발견된 적군 시체에 대해 인도,인수에 대한 조치를 취한다.(제나바 협정 120조)
요즘은 판문점을 찾은 중국인이 제법 찾는다고 한다. 이것이 중국과의 차원높은 교류가 될 것이다. 북한에 있는 모택동 아들 모안용의 묘보다는 더 감동받지 않을까 싶다.적군의 묘를 이렇게 잘 조성했으니 말이다.
장마 북한군 시신이 떠내려와 송환하려했지만 거부했다고 한다. 물에 빠진 것도 서러운데 ..이곳에 슬쓸하게 누워 있다.
제2묘역 전경
묘지는 북쪽을 향하고 있다.
사실 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전쟁터에 내몰고 동포들에게 총질하라고 명령한 사람들이 문제지.
제 2묘역은 무장공비가 주를 이룬다. KAL기 폭파범. 김승일도 이곳에 묻혔다는데 유족들 때문에 무명인으로 한 모양이다. 6.25 군인이야 이해하지만 글쎄 무장공비까지 이렇게 묘를 만드는 것은 국민 정서에 맞는지 모르겠다.
김신조 무장공비 묘 북한 고위직 출신이 적군묘지를 다녀온 후 충격을 받앗다고 한다.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적군을 이렇게 잘 조성해 놓은 곳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제는 편히 쉬십시요. 라는 글귀가 와 닿는다. 영혼과 화해하는 자리다.
한때는 적군묘지였지만 지금은 북한군, 중국군 묘지로 바뀌었다. 군장병의 시기나 정체성 때문일까, 도무지 안내 푯말을 찾을 수 없다. 네비의 주소도 찍히지 않고, 차로 몇군데를 헤메다가 운동하고 있는 동네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모른단다. "우리 동네에 북한군묘지가 있어요?"
다시 마을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갔더니 농장이 하나 있어 물어보려고 들어갔더니 동남아 외국인이었다 "혹시 북한군 묘지 어딘지 아세요?' 예상대로 모른단다. 외국인에게 북한군 묘지를 가르쳐 달라는 내 처지가 우습다. "농장에 한국사람 없어요."
서투른 한국어에 인사를 하고 돌아나왔다. 도대체 여기가 어느나라 땅이야. 다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샅샅히 뒤졌더니 S오일 주유소 길건너 맞은편인 것을 찾아냈다. 주유소가 이정표가 역할을 한다는 것이 서글프다.
37번 국도변 적성가기전 식현리로 빠져나와 유턴을 하면 너른 주차장이 보인다.
화석정. 의주로 몽진하는 선조는 임진강이 가로 막히지 진퇴양난. 이때 이항복이 이 화석정에 불을 지르자 주변이 훤해 도강했다고한다.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율곡이 이를 대비해 정자에 오를 때 들기름을 수시로 발랐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친필
500년 느티나무와 유유히 흘러가는 임진강
신사임당 묘와 이율곡묘
문성공 이율곡 묘
사당
350년 된 느티나무. 자운서원
신사임당의 화충도 왼쪽 그림에 벌레가 없는 것은 진짜인둘 알고 닭이 쪼아 먹었기 때문
이율곡에 대한 설명도 듣고
정조임금이 율곡을 흠모해 18자를 남겼다.
마지막 단체사진 함께 해주신 모놀식구들께 감사드려요. |
첫댓글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라 더 알차고 즐겁게 안보의식도 고취하고 시공을 넘나드는 역사 공부도 하고
즐겁고 행복한 모놀답사길을 저도 함께 한 듯 따라다녔습니다.
대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3월 모놀답사를 기다립니다.
근데 이 후기는 수도권/경기도여행후기방이 아니고 모놀국내답사여행후기 방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 ㅎ ㅎ *^^*
잘 봤습니다.
잘봤습니다 수고하셨어요 ^^
잘봤습니다.
첫 여행길이었지만 부담없이 즐기며 다닐 수 있었던 여행길 이었습니다.
사진 몇장 담아 갑니다..^^
가까운곳이니 날씨가 따뜻해지면 꼭 한번 다녀와야겠네요^^
모놀가족여러분 즐거운 여행이셨겠네요 넘 잘보고갑니다 ^^
잘보고 갑니다~~~~~~~~~~~^*
서울에서 이렇게 가까운곳에 좋은 여행지가 있다니... 찾아가는 방법을 게시해주면 더 좋겠네요....
잘 보고 갑니다...
좋은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
경순왕은 경애왕의 아들이 아니고....
중공군들은 중국군이 되어 귀향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