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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지리산②지리산의 사계 | ||||||||||||||||||||||||||||||||||||
하늘하늘 ‘내게 오라’ 하는 손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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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순 기자 yard@idomi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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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사골 지나 노고단 가는 길 안개가 내렸다/느닷없이 나무의 뼈들이, 그 뼈를 싸고도는/수액이 빛나는 게 보였다/나이테가 견디어 온 한 해 한 해의 금들/나무의 아픈 허리를 자꾸 흔들어댔다/임걸령표지판 아래 꽃들이 길을 열어보였다’(조재영의 ‘지리산에서’ 부분) 지리산을 예찬하는 글귀에는 꼭 ‘그 분’들이 오신다. 지리산의 사계를 고스란히 안고 오는 구름과 야생화다. 지리산에 오르다 하얀 솜털 옷을 입고 나타난 매력적인 연인을 만난 적이 있다면 그는 초가을이면 절정에 달하는 골안개다. 지리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섬진강 골안개는 봐도 봐도 지겹지 않은 지리산의 매력이다. 지리산은 섬진강을 끼고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어 안개장관을 자주 연출한다. 지리산을 표현한 시마다 한구절씩은 ‘안개와의 끈질긴 인연’이 담겨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한 편의 예술을 수십·수백 컷 담으려는 사진작가들에게 안개는 첫눈에 반하는 연인임이 분명하다.
16년을 지리산과 동거하며 <하늘에 수놓은 구름이야기>를 최근에 펴낸 섬진강 문화학교 인소혁 교장은 하늘위로 떠있어 그나마 굽이치는 마을이라도 보이는 것이 안개구름이라면 땅바닥까지 자욱이 깔려 속세를 감추는 것이 안개라고 말한다. 구름의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아서 간간이 파란하늘을 보일 때가 있다. 산 사진 중 낮은 구름 사이로 스며나온, 햇빛이 촘촘하게 늘어선 나무들을 비추는 장면은 이때 나오는 것이다.
지리산의 가을이 안개구름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구름결이 폭포를 이루며 산등을 넘는 듯한 형상을 연출하는 폭포구름이 매력을 발산한다. 구름보다 사계절을 먼저 반기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제 몸을 불태우는 야생화다. 특히 지리산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에 있는 해발 1600m 높이의 둘레 30리에 이르는 고원분지는 계절마다 고운 빛을 발하는 야생화의 뜰이다. 세석평전이라 불리는 이곳은 봄·여름·가을·겨울에 걸쳐 20여종의 꽃이 군락을 이룬다.
관광객 발길 끄는 매력으로…예술 작품 소재로 춘삼월 봄이 오면 영신봉 아래 잔설 속에서 아기갯버들이 버들강아지를 피우고 연달아 처녀치마가 군락을 이루며 피어난다. 지금 5월은 영신봉 산등을 타고 얼레지가 나풀거릴 때다. 보랏빛 뽀얀 얼굴을 새초롬하게 떨구고 있는 얼레지는 깐깐하기 그지없다. 일본·한국 등지에서만 자라는데 뿌리가 깊어 분주가 어려운데다 발아에서 꽃이 필 때까지 5년이 걸린다. 어찌보면 가장 세계화할 수 있는 한국적인 꽃인 것이다. 늦여름부터는 키가 큰 참당귀와 궁궁이가 키를 같이하며 산녘을 물들이고, 찬바람이 불면서부터는 황기가 보랏빛 긴 꽃술을 내저으며 초원을 덮는다. 구월이 오면 가을 첫머리에서 별꽃을 뿌려 놓은 듯이 쑥부쟁이·산구절초가 고원 위에 잔치를 벌이고 있을 무렵 용담꽃도 풀섶을 헤치며 꽃잎을 벌린다. 그렇게 오늘도 지리산의 야생화는 아무 대가없이 손을 내밀고, 구름은 지리산의 기운을 돋운다. 도움말/임소혁 섬진강 문화학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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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5월 15일 박종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
역사속의 지리산③지리산과 차 | ||||||||||||||||||||||||
하늘이 주신 기후, 천년의 향 넘쳐나게 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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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순 기자 yard@idomi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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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엽따서 상전께 주고/중엽따서 부모께 주고/말엽따서 남편께 주고/늙은 잎은 차약지어 /봉지봉지 담아두고/우리아이 배 아플 때/차 약 먹여 병 고치고/무럭무럭 자라나서/경상감사 되어주오’ 함양 마천의 차민요다. 요즘 지리산은 천년의 향이 서리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3대 차 재배지인 하동에서는 지난 4월 20일 곡우를 전후해 아낙네들이 마대를 하나씩 꿰차고 찻잎을 따기 시작해 ‘결실의 절정’을 맞고 있다.
지리산의 차는 828년 신라 흥덕왕 3년에 첫 외래종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대중화된다. 삼국사기에 보면 ‘겨울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 종자를 가져오니, 왕이 이를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이미 선덕여왕때(632~647)부터 있었으나 이때부터 크게 일어났다’라고 전한다. 공납폐단이 심해지면서 차가 나지 않는 거창에서는 무명 30필에 차 1말을 바꾸어 바칠 정도로 차 공출이 심해 백성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이규보는 차나무를 불살라 차 공납을 금하면 남녘 백성들이 편히 쉬게 될 것이라 읊었다고 전한다. 점필재 김종직은 함양 군수로 가면서 백성들에게 차를 요구하지 않고 관에서 스스로 구하여 바치도록 하기 위해 관영차밭을 만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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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5월 22일 박종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
역사속의 지리산(4)지리산의 새 | ||||||||||||||||||||||||||||||||||||||||||||||||
오롯이 새들의 안식처 인간아, 소리치지 마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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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순 기자 yard@idomi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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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화개골에 어둠이 깔리자 검은 파도가 몰려왔다. 바람에 몸을 실은 검은 무리가 일렁이며 장관을 만든다. 지난 2월, 10년 만에 이곳을 찾은 겨울철새 되새떼다. 이 놈들은 영화 <태백산맥> 첫 장면의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낮에는 각자 흩어져 먹이를 먹다가도 저녁이 되면 꼭 화개골 차시배지 근처 대나무 숲에 떼를 지어 와서 잠을 청한다.
그리고 약 30년만인 92년에 모습을 나타냈고 다시 95년에 50만 마리 정도가 나타났으며 다시 10년 후인 2005년에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지리산국립공원이 최근 모니터링을 통해 보고한 새 종류는 50종. 공식적으로 보고된 67종에 비해 줄었지만 모니터를 시작한 2001년부터 변함 없는 수치다. ‘많이 먹어 봐야 맛을 안다’는 말처럼 새는 이동성이 좋아 환경에 민감하다. 하지만 수치를 보면 지리산은 그나마 새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리산 국립공원 생태담당 박선홍씨는 “무엇보다 지리산은 1차 생산자인 식물이 잘 보호돼 있고 지형적으로 계곡과 고지가 넓게 분포돼 있어 새들의 중간 정착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리산에 많이 분포하는 새는 박새와 뱁새다. 탐방객이 가장 집중되는 화엄사 계곡에는 박새가 주를 이룬다. 몸길이 약 14㎝정도로 머리와 목·윗가슴은 검고 흰색 뺨과 날개에 두 줄의 가는 흰색 띠가 돋보인다. 한국 숲에 사는 조류의 대표적인 우점종이기도 하다. 뱀사골 계곡은 동고비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동고비는 나무줄기를 자유자재로 기어다니는데, 머리를 아래로 한 채 거꾸로 다니기도 하고 굵은 나뭇가지 아래쪽을 기어다니기도 한다. 울음소리가 크고 금속성 소리를 내며 둥지는 딱따구리의 낡은 둥지나 나무구멍을 이용해 튼다. 현재 통제구역인 칠선계곡에는 흔히 뱁새라 불리는 붉은머리오목눈이가 우점종이다. 붉은머리오목눈이는 한국의 대표적인 텃새. 동작이 재빠르고 움직일 때 긴 꽁지를 좌우로 쓸듯이 흔드는 버릇이 있다. 번식기 이외에는 보통 30~50마리씩 무리지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시끄러울 정도로 울어댄다. 새들이 자연을 좇다 인간이 만든 덫에 걸리는 것은 부지기수. 특히 지리산의 도로는 동물을 비롯해 새들에게는 죽음의 통로임은 어쩔 수 없다. 지난해 ‘로드킬’실태조사에서 매일 8마리, 한달 245마리 야생동물이 숨지고 있다고 발표됐다.
지금 짝짓기 중…안정위해 등산객 주의를 여기에는 천연기념물인 소쩍새가 55마리, 큰소쩍새 17마리가 포함돼 있었다. 상춘객들이 붐을 이루는 지리산은 4~7월 짝짓기가 한창인 새들에게는 치명적이다. 인간과 새가 무엇이 다르랴. 옛날 산모가 있는 집에 금줄을 치듯, 짝짓기나 산란기 때는 어미도 새끼도 안정을 취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새들을 위해 등산객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소리치지 말 것과 과일 껍질을 버리지 말 것. 인간이 깨끗하게 먹겠다고 과일껍질을 까지만 그 껍질에 있는 농약은 그대로 새들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 도움말 ∙ 사진 -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관리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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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5월 30일 박종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
역사 속의 지리산⑤지리산의 고인돌문화 | ||||||||||||||||||||||||||||||||||||
외형은 각양각색 혼령은 영혼불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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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순 기자 yard@idomi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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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전남 화순 고인돌 축제에서 선사인이 다시 살아났다. 선사인 10여명이 채석장에서 캐낸 수백㎏에 달하는 거대한 돌을 직접 옮겼다. 고인돌을 만드는 것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자연환경은 생사를 좌우하는 신이었다. 따라서 인간보다 오래도록 잔존하고 있는 거목이나 거석을 항상 우러러봤다.
고인돌은 세계적으로 동북아시아에 가장 많이 분포돼 있다. 우리나라에 약 3만6000여 기로 세계적으로 밀집도가 가장 높다. 그 중에서도 전남지방에 약 2만여 기, 영남지방에 4800여 기가 분포해 지리산 주변 일대보다는 남해안 반도지역에 고인돌이 밀집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전남을 중심으로 인접지역인 전북·경남·전북지역이 고인돌 유적 수의 84.5%를 차지한다.
경남지역에서 확인된 고인돌 유적수는 2004년 11월 현재 대략 412개소인데, 이중 지리산 주변인 산청과 하동, 함양, 남해, 진주, 사천에는 150개소에 약 500여 기가 알려져 있다. 고인돌 밀집 분포지역도 전남은 여수반도 등 남해안에 몰려 있으나 경남은 남해안보다 지리산 동쪽에 더 밀집돼 있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존재한다. 그래서 선조들이 부르는 고인돌 별칭도 다양했다. 자연석이 땅에 묻혀 있는 것을 독바우, 바둑판식 고인돌은 괸바우라 불렀다. 덮개돌의 형상에 따라 명칭도 다양했는데 지리산인근 구릉지에도 거북 형상을 한 고인돌이 있다. 전남 구례 중학교와 구례군청에서 남동방향으로 300m정도 가다보면 나오는 구례 봉서리 고인돌이다. 거북형상을 한 고인돌은 당시 선조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장수와 치병을 위한 거북신앙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네 선조들은 고인돌을 훼손하는 일은 자신과 자손에 해가 된다고 믿었다. 그 믿음 때문에 수천년간 고인돌은 자연보존의 파수꾼 역할도 톡톡히 한 셈이다.
신앙의 대상으로 인식돼 훼손없이 잘 보존 지리산과는 거리상 좀 떨어져 있지만 최근 가장 눈길을 끌었던 고인돌의 무덤형태가 있다. 창원 덕천리, 마산 진동리, 사천 이금동, 김해 장유 율하 고인돌이다. 이 무덤은 거대한 묘역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무덤 한 변 길이가 50m에 이르고 거대한 장방형 묘역을 석축을 쌓아 돌렸다. 그 가운데 무덤방도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혈연집단보다는 정치적인 지배자의 출연을 암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사천 남강댐 본촌리 돌널(무덤)에서 각각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가 발견(1995~99년 대평리 유적)됐다. 당시 죽은 이를 널 속에 안치한 후 다른 사람의 치아를 뽑아 넣어준 장송의례 즉, 복상발치가 행해졌던 것이다. 목이 잘린 인골도 남강댐 옥방에서 확인됐다. 목이 잘린 사람은 전쟁희생자, 개인 항쟁 행위자, 부정한 죄를 지어 참수를 당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고인돌, 그래서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다. 하지만 고인돌은 선조들의 간절한 바람 뿐만 아니라 선사인들의 피땀과 삶의 지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이자 우리지역의 문화유산이다. 도움말·사진제공/이영문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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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6월 07일 박종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역사속의 지리산⑥남강 유역의 선사문화 | ||||||||||||||||||||||||||||||||||||||||||||||||
천혜의 자연 속 풍요 누리던 청동기 대평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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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순 기자 yard@idomi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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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인류 문명의 모태다. 인류 문명이 강에서 비롯되었다면 강은 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특히 지리산을 내려와 낙동강과 만나는 남강은 선사시대를 대변하는 도시형성의 요람이었다. 남강은 덕유산에서 발원해 함양군·산청군을 지나 진주시에서 지류인 덕천강과 합류하고, 의령군과 함안군을 지나 함안군 대산면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남강 상류부에서는 전북 남원시 아영분지와 남원시 운봉면·산내면·함양군 마천면의 골짜기를 흐르는 작은 하천들과 합류한다.
그 중 남강 상류부인 진주 북동쪽 대평은 지금은 비록 하나의 촌락이지만 선사시대엔 무척 번창한 도시였다. 이곳은 ‘들췄다 하면 반드시’라고 할 만큼 많은 선사시대 유적들이 발견됐는데 특히 1990년대 후반 대규모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신석기·청동기·삼한시대·삼국시대 유적이 발견돼 ‘선사시대 생활상의 보고’라고 불렸다. 대규모 주거지와 환호(둥글게 경계를 만들어서 외부침입을 막는 마을형태)를 비롯해 밭고랑도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속에 반달돌칼·돌도끼·돌낫·돌보습·돌괭이 등 경작용 연장이 나왔고 일상적인 먹거리인 조·콩·쌀·참깨·수수 등 곡물이 불탄 채 출토됐다. 당시 청동기 농경에 대한 근거는 곡물이나 농기구에 국한됐을 뿐 직접적인 물증인 밭은 나오지 않았던 터라 당시‘역사를 바꾼 발굴’이었다. 그들의 생활상을 상상해보면 이러하다. 대평의 청동기인들은 3000여 년 전 진주 대평 들에서 도시를 이뤘다. 1만평이 넘는 광활한 밭을 일궜고 400동이 넘는 움집에서 수천명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는 돌과 토기·옥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장인집단도 존재했다. 밭이나 환호 같은 시설물은 대규모 노동인력을 필요로 하기에 청동기시대 대평 지역이 수장을 중심으로 결속해 성장해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그럼, 대평이 당시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환경·지형·토양 등 모든 여건이 풍족해 최적의 농지로 꼽히는 대평리. 청동기때도 대평은 농사짓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었다. 남강가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모래질의 좋은 흙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지리산 핏줄 받은 ‘청동기 혁명의 역사’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남은 것은 따로 비축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대평은 매우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점차 인구가 증가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 근처에서 찾은 옥돌로 장신구를 생산하는 등 수공업도 발달했다. 그래서 곡물과 옥 등 생산물을 멀리 떨어진 해안지역이나 산간지역과 교역도 가능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천혜의 자연 속에 평화를 누렸던 대평리 청동기인들. 그런데 대평인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청동기 후기에 접어들면서 그 많았던 유적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마을이 쑥대밭이 됐다하더라도 정복자 집단이 천혜의 땅을 가만히 내버려 둘리는 만무하다.
자연 수몰돼 고고학적 궁금증만 남아 자연재해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그렇게 아쉬움이 남은 채로 대평 상촌 일대는 자연상태로 수몰됐고 대평 충적지인 본래의 옥방 마을과 어은 마을이 미조사 지역으로 남아 있다. 경남대 이상길 교수는 “대평 유적지는 오랜시간을 두고 발굴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수몰된 게 아쉽다”며 “일본의 경우 몇십년에 걸쳐 유적발굴을 하는데, 우리나라는 여러가지 조건상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왜 대평인들은 갑자기 사라졌을까? 수몰된 저 속에 무엇이 있을까? 대평 유적의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조사되지 못한 지역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도움말·사진/경남대 인문학부 이상길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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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6월 13일 박종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
역사속의 지리산(7)서부경남의 가야문화 | ||||||||||||||||||||||||
임나일본부설 잠재울 숨은 보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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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순 기자 yard@idomi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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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송학동 1호분, 고성과 가까운 사천 선진리 고분, 거제 장목고분 등에서 왜계 양식이 잇따라 발견됐다.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명성 속에 파묻혀 있는 고성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경남의 소가야. 5~6세기 그 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하지만 서부경남지역에서 가야유적의 발견은 이런 통설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왜일까. 무엇보다 대가야에서는 왜의 문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일본 규슈 서북부의 아리아케 연안지역과 북부 규슈지역과 연관이 있는 유물들은 소가야식 유물이 절대다수다. 또한 함안·고성·산청에서 발견된 서부경남 지역 가야 유물은 김해 금관가야의 마지막 유물을 그대로 잇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래 형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가야인이 활발한 해상활동 과정에서 왜인들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 결과 외래 문물이 서부경남 지역에 유입된 것이 아닌가라는 결론에 이른다. 고성 송학동 1호분·거제 장목고분 등 소가야가 왜와 교류했다는 사실은 소가야가 대가야만큼 거대했을 거라는 근거만 마련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는 임나일본부설을 깨는 근거도 된다. 20년 전 함안 도항리 말산리 고분에서 파란녹이 발견됐다. 빨간녹은 철을, 파란녹은 청동을 의미한다. 무엇일까 들춰보니 일제시대 헌병군화 경첩. 샅샅이 도굴하고 신발만 남기고 떠난 것이다. 일본은 가야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애타게 찾은 것은 고분 속에 친일계 지배자가 남긴 상징적인 유물이다. 함안의 고분은 대충 헤아려도 1000여 기. <살아있는 가야사 이야기> 저자 박창희씨는 들녘에서 만난 노인들마다 ‘일본 것들이 금 캐듯 다 캐서 가져갔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1917년에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들은 함안 도항리 대형고분 52기를 발굴한다. 대충 조사보고서를 꾸민 뒤 160여점의 부장품들을 대부분 일본으로 가져간다.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고자 안간힘을 썼던 것인데, 결국엔 실패한 채 도굴꾼 노릇만 한 셈이다.
죽음을 앞두면 마음이 선해진다고 했던가. 죽음을 앞둔 이들 고적위원들은 하나같이 ‘임나일본부는 조선에 없다’는 말을 남겼다. 역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떠들어대지만 일본 고고학자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또한 일본에서는 입을 다문다. 서부경남 가야유적에 앞서 김해 금관가야에서는 더 확실한 근거가 등장하기도 했다. 4세기 갑옷과 말재갈이 그것이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갑옷은 나오는데 마구는 등장하지 않는다. 요약컨대 가야는 기병집단이었고 일본은 보병집단이었다는 것. 임나일본부가 지배했다고 한다면 일본의 보병이 기병을 부수고 식민지를 만들었다는 얼토당토 않은 결론이 나온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나타나는 돌 화살촉 또한 말할 필요가 없는 근거다. 철이 발에 차이던 금관가야에서 과연 일본의 돌 화살촉이 필요했을까? 이는 일본이 가야의 철을 얻어가면서 남긴 자신들의 최고의 물건인 것이다. 왜계교류 관계를 짚어 볼 수 있는 서부경남의 가야유적은 아직 발굴도 연구도 미비한 상태. 하지만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막을 확실한 근거가 될지도 모르는 숨은 보석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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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6월 20일 박종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역사 속의 지리산(8)지리산 답사 | ||||||||||||||||||||||||||||||||||||||||||||||||
희미해진 산 등진 사찰 오색빛깔 매력 발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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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순 기자 yard@idomi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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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좋아하는 등산객들은 비가 오면 짐을 싼다. 비가 그친 후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풍경은 지리산만 가지고 있는 매력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매력은 사찰이다. 안개로 희미해진 산을 등지고 있어 사찰의 오색빛이 더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선암사는 6번이나 화재가 났던 곳이다. 이곳 스님들은 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 ‘해천’이라는 뜻은 하천이 바닷물이 되어 불을 꺼 달라는 스님들의 간절한 의미가 담겨있다. 조선시대 핍박 속에서도 선암사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있었다. 대웅전에는 세도정치 권력자인 김조순의 조카가 쓴 글이 있고 화려한 꽃무늬가 돋보이는 원통전은 김조순 일가가 놀던 곳이다. 왕에 버금가는 세력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그나마 선암사의 고귀한 멋이 지금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그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효심탑인 것이다. 석등이 보이는 사사자 석탑쪽에서 시계방향으로 돌아보자. 사자가 서서히 입을 벌리고 사자 아래 있는 비천상은 장구를 치고 악기를 연주하고 피리를 불고있다. 석등아래 연기대사가 어머니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보고만 있어도 1400년 전 통일신라시대로 돌아간 듯하다. 석탑하나로 그 당시 분위기를 재현해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연곡사-피의 역사가 서린 곳 = 화엄사를 떠나 30분쯤 가면 지리산 피아골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오르면 밤나무 꽃향이 코끝을 스친다. 정유재란때 왜적 400여명이 하동·악양을 거쳐 이곳을 비롯해 쌍계사·칠불사에 난입해 모두 파괴했다. 연곡사를 중창한 이는 소요태능. 왕실의 신주목을 봉납했던 곳으로 신주목의 재료였던 밤나무가 유난히 많은 이유다.
피의 역사가 묻어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른 사찰에서 느낄 수 없는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연곡사 기슭에는 고관순의 비석이 있다. 과연 고관순은 누구일까. 게릴라식으로 의병항쟁을 하던 고관순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연곡사에 본 기지를 두고 활약한다. 그가 찾아간 사람이 매천 황현. 그는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 격문을 써달라 부탁하지만 황현이 거절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고관순이 일본 손에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남쪽 초야의 한 시인이 목숨을 끊었다. 매천 황현이다. 왜 그는 고관순을 따라 목숨을 끊었을까.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몇 번 자결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결국 매천사 뒷마당 저수지에서 맷돌을 짊어지고 자결한다. 연곡사 뒷산 곳곳에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부도양식은 다 있다. 그리고 끝 길에 고관순 비가 나무에 가려진 채 가는 이들을 아쉽게 보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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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6월 27일 박종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