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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트에서 미관말직으로
뿐만 아니라 이황의 문집인 <퇴계집>을 열심히 읽고 퇴계학문의 깊은 이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였다. <서암강학기 西巖講學記>와 <도산사숙록 陶山私淑錄>은 이 때의 공부내용을 기록한 저서이다. 관리로서 임무는 소홀히 한 채 억울한 좌천에 낙심하여 기생을 옆에 두고 술로 세월을 보냈을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선생의 이런 자세는 지식인으로서의 참모습이요, 200여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오늘에도 관리들의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세번의 유배길 “북쪽바람 눈 휘몰 듯이 나를 몰아 붙여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체포되어 죽음은 겨우 면하였지만 형 약전과 함께 유배길에 올라 1801년 음력 11월 하순의 추운 겨울 날, 유배지 강진읍에 도착하여 지은 '객중서회 客中書懷'라는 시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가슴아픈 이별을 뒤로하고 천리 먼 길을 걸어온 유배객을 기다리는 것은 매서운 겨울바람과 백성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큰 독소로 여기고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며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강진읍 동문 밖 주막의 노파가 내준 허름한 방 하나에 겨우 거처를 정한 다산은 억울한 유배의 억눌린 심정을 잊고 이제야 학문에 전념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이에 다산은 누추한 주막의 뒷방을 '사의재'라 이름하고 방대한 육경사서에 대한 저서의 시작으로 <예기> 연구에 열중한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유배지에서의 진정한 성인 |
-'천주학쟁이' 다산 -다산과 광암 이벽과의 만남 -신해사옥 이후 다산의 입장 |
-18세기 후반의 사회상 -다산의 암행어사 시절 -천연두와의 한판 승부 |
다산의 18년 동안의 고독한 강진 유배생활에서 말없이 따뜻한 위로를 해주던 친구는 그윽한 차향기, 그리고 더불어 다도를 즐기며 말동무가 되어 주던 혜장과 초의 두 선사(禪師)였다. 하지만 다산이 언제부터 처음 차를 마셨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유배전의 음다설과 유배후의 음다설로 나눠진다. 주의할 것은 단순히 차를 마신 것과 음미하면서 다도를 즐기며 차를 생활화한 것은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배 전의 음다설(飮茶說) 차 연구가인 김명배 선생은 『다도학논고 茶道學論攷』에서 이전의 일반설이었던 유배후의 음다설에 대해 다산의 차에 관한 시문의 역사적 시기를 증거로 제시하며 유배전부터 다산은 차를 마셨다고 주장한다. 관직생활을 하기 전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생활하며 그곳에서 읊은 <등성주암 登聖住菴>(18세) <하일지정절구 夏日池亭絶句>(19세)의 다시(茶時)와 성균관 유생시절 차가 들어 있는 식당 차림표로 볼 때 유배 전부터 다산은 차를 마셨다고 주장한다. -유배 후의 음다설(飮茶說) 다산은 강진에서의 귀양살이 기간 중 혜장선사(惠藏禪師 兒菴 1772-1811)로부터 차를 배워 즐겨 마셨다고 한다. 이는 이을호 교수를 비롯한 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는 다산이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1801)되어 오기 전에 차와의 인연을 찾아볼 수 있는 문헌은 없고 오히려 유배 후 백련사의 선승 혜장선사를 만나 비로소 차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와서 동문 밖 주막집에 거주한지 5년째 되는 을축(乙丑 1805)년 가을에 인근 백련사(만덕사)에 소풍을 나갔다가 다산 만나기를 갈구하던 혜장선사와 해후를 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차생활을 시작하며 그에게 명다(茗茶)를 부탁하는 <기증혜장상인걸명 寄贈惠藏上人乞茗>이라는 시를 보내기까지 한다. 그는 오랫동안의 유배생활과 학문연구로 인해 쇠약해지고 병든 몸을 치료하기 위한 약으로도 차를 즐겨 마셨으며, 혜장이 소개해준 다선(茶仙) 초의선사와의 만남은 사제지간으로 발전한다. 다산은 귀양에서 풀려 한강변 고향집으로 온 후에도 초의나 강진 다신계의 선비들이 보내주는 차로써 계속해서 차를 마셨고 경기학인를 비롯한 막역한 벗들과 차와 시로써 교유하였다. 그는 생애를 마감할 즈음에도 다종(茶鍾 찻잔)을 곁에 두고 지낸다고 할 정도로 차를 사랑하였다. |
-정조의 비호 하지만 다산은 1801년 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처자들을 데리고 고향 마재로 낙향한다.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도록 뒤에서 충동질하던 벽파가 이에 반대하던 자신을 포함한 남인 시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자신이 머무르는 집을 조심하며 살겠다는 뜻에서 '여유당(與猶堂)'이라 부르고 "선인들 남기신 글 다시금 읽으며 남은 생애 이 가운데다 내 맡기리라"하며 분주한 벼슬살이로 하지 못한 공부에 열중한다. 낙향하여 학문에 열중하고 있는 어느 날, 규장각 서리가 보자기에 뭔가를 들고 밤늦게 찾아왔다. 정조가 보내준 <한서선 漢書選> 10권이었다. "너를 잊지 않고 있으니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보내 준 책을 읽으며 학문에 정진하라"는 정조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였다. -정치관료로서의 만남 10살 연상인 정조와의 인상적인 만남은 1784년 23살의 나이로 성균관 학생으로 있을 때였다. 정조가 <중용>에서 의심스러운 80조(70조-이광용)를 기술하고 이에 대한 답을 적어 올 것을 숙제로 내주자 서학을 포함하여 폭넓은 독서를 한 사람으로, 사적으로는 큰형 정약현의 처남으로 자신과는 사돈 사이인 이벽과 상의하여 <중용강의>를 지어 바쳤다. 여기에서 다산은 인의예지의 사단(四端)은 理가 發해서 나온 것(四端理發)이라는 퇴계를 비롯한 기존의 일반설을 뒤집고 氣가 發한 것(四端氣發)이라는 율곡의 說을 주장하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에서 자신과 생각이 일치함을 확인한 정조는 "세속의 흐름을 벗어나 독창적이며 논리가 명확하여 첫째로 삼는다"고 하고 다산을 불러 크게 칭찬하였다. 이후 성균관에서 보는 시험에서 출중한 성적을 내어 임금으로부터 많은 서적을 하사받은 '우등생'이었던 그는 나중엔 당시 규장각에서 인쇄한 책은 다 받아 더 받을 책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나이 28세인 1789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종7품인 희릉직장으로 시작한 벼슬길은 정조의 총애 아래 잘 닦은 신작로를 달리는 것처럼 순조로웠다. 과거에 합격한 바로 그 해에 초계문신으로 뽑힌다. 정3품 아래의 당하문관 중에서 문학에 재질이 있는 자를 뽑아 국왕이 직접 지도 · 편달하면서 재교육하는 제도인 초계문신제는 정조의 강력한 개혁정치를 뒷받침할 신진 엘리트 관료집단을 양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초계문신들과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정조는 개혁의 필연성을 설파하고 그 방법과 방향을 함께 모색하였을 것이다. 당파싸움으로 날이 새고 지는 암울한 상황을 개혁의 중심세력이라 할 이 신진엘리트들의 도움아래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정면돌파하고자 하는 정조의 야심이 숨어 있는 것이다. -기술관료로서의 만남 정치관료로서의 이러한 만남 말고도 다산은 기술관료로서도 정조와 만난다. 다산은 자연과학과 기술, 특히 이용후생과 관련된 기술분야에서는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거기에 성(화성)을 만들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신도시'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죽어 간 아버지를 새롭게 이장하고 그곳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또 매년 참배하는 것에는 할아버지(영조) 때부터 실시해 온 탕평정치를 정착하여 망국적 당쟁을 일소하고자 하는 정조의 포부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당쟁의 약화 내지 일소는 자연스럽게 왕권의 강화로 이어져 신진 엘리트 관료들의 후원아래 정조는 자신의 개혁프로그램을 차근차근 그러나 과감하게 실행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이러한 정조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는데는 다산처럼 자신과 개혁적 성향을 함께하면서도 과학기술에 능통한 관리가 필요하였다.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에 능행(陵幸)하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여기엔 배다리(舟橋)가 필요하였다. 한강 폭만큼의 선박을 가로로 이어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수백명의 능행 행렬이 지나가도록 배다리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용은 둘째치고 안전상의 문제가 심각한 것이었다. 정조의 왕조개혁 구상과 직결된 배다리를 완벽하게 만들어낸 다산은 더욱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배다리에 이어 다산의 기술적 역량이 발휘된 사업은 화성(수원성) 축조이다. 1792년 겨울 부친상으로 3년상을 치르고 있던 중이던 다산은 정조로부터 화성축조를 위한 기술적 설계를 지시 받고 기존의 조선과 중국(청나라)의 성제를 바탕으로 벽돌을 이용하고, 성벽의 중간부분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등 독창성을 발휘해 좀 더 선진화된 성제를 보여줬다. 또 정조가 직접 하사한 책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여 기중기를 설계하여 4만냥 이상을 절약하고 일반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지 않게 하였다.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그 신하를 따뜻이 보살펴 주었던 정조와 다산의 아름다운 만남은 당쟁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에 막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만다. 정조가 죽었다는 갑작스런 천붕(天崩)의 소식에 접한 다산은 얼마전 하사한 그 책이 "신하와 영결(永訣)하시며 내리신 선물"이라며 통곡하였다. 정치관료로서 그리고 기술관료로서 현군(賢君) 정조와 의기투합하였던 다산은 바로 '정조스쿨'이라 할 수 있는 초계문신에 뽑혀 그와 함께 참혹한 백성들의 현실에 가슴아파하며 모순투성이인 봉건왕조의 개혁에 헌신하였으나 두터운 당쟁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머나 먼 유배길을 떠나고 만다. |
-부인 홍씨와의 애틋한 이별 -유배지에서 여섯폭 다홍치마의 위안 파르르 새가 날아 뜰앞 매화에 앉네(翩翩飛鳥 息我庭梅)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가위로 잘라 네 첩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다산 부부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60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한 이팔청춘 곱던 얼굴의 여인을 주름살만 가득한 할머니로 만든 무심한 세월에 대한 투정이 가볍게 묻어 있다.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데 -폐족의 설움을 안고사는 다산의 어린 자식들 -따뜻한 아버지 다산 |
첫댓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다산은 정 많고 따듯한 인물 이었나 봅니다. 오랜 유배 생활에도 저술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다산은 이 시대 우리가 가슴에 모시고 간직해야 할 큰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읽는 내내 노자나 장자의 사상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