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장성발 묘역
(義城 蔣成發 墓域)
문익공 효효재 장성발의 묘역은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산10 번지선 등운산 줄기 경사진 능선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동남 - 북서 방향으로 앞쪽에는 문익공 장성발의 묘가, 10m 떨어진 뒤(북서쪽)에는 장성발과
같은 一家 것으로 추정되는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묘역 안에는 2기의 방형분이 앞뒤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앞 쪽의 1기가 문익공
효효재 장성발의 묘입니다.
장성발의 묘는 크게 묘, 상석, 배례석, 망주석, 비석2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묘 앞에는 토사
유실의 방지 등을 목적으로 2단의 석축열을 설치되어 있습니다.
묘는 사각의 방형분으로서, 사각의 둘레에는 크고 작은 할석을 이용하여 대부분 허튼층쌓기
수법으로 석축을 쌓았습니다. 이는 경사진 지형으로 인하여 4면의 석축 높이가 다릅니다.
前面 석축 바로 앞에는 1786년(丙午年)에 기존의 비석이 있었으나 새로이 세웠다는 명문이
새겨진 비석이 있습니다.
그 앞 가운데에는 상석과 배례석이 놓여져 있다. 1단 석축열 바로 앞에는 1955년에 세웠다고 기
록된 또 다른 비석이 있으며, 2단 석축열과의 사이에 좌우로 망주석 1쌍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내부구조는 확인되고 있지 않으며,
가로 7.7m, 세로 7.3m, 석축높이 0.7~1.2m, 전체높이 약 2.2m입니다.
장성발묘에서 뒤쪽으로 10m 떨어진 지점에는 장성발과 같은 一家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묘의 외부 형태도 장성발묘와 같이 방형분으로서 4면에 석축하였으나 뒷면인 북동쪽은
거의 흐트러진 상태입니다.
묘의 전면에 1열의 석축열이 있으나 상석, 배례석 망주석은 보이지 않는다. 내부구조는 역시
확인되고 있지 않으며,가로 7.7m, 세로 7.7m, 석축높이 0.7~2.0m, 전체높이는 약 2.5m입니다.
장성발(蔣成發)은 고려 말 문신으로, 고려 충혜왕 5년(1344)에 경상도 의성현에서 출생
하였습니다. 관(貫)은 아산(牙山)이며, 휘(諱)가 성발(成發), 아호(雅號)는 효효재(囂囂齋)
시(諡)는 문익공(文翊公)입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고, 벼슬이 전공전서(典工典書)에 이르렀다 하며,
인품 또한 훌륭하여 도량이 크고 넓었으며, 겸손하고 타인을 존경하였다고 전해옵니다.
몰년은 현재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춘정 변계량선생이 찬(撰)한 장성발의 시장(諡狀) 등을 근거로 45~47세(1389~1391) 사이로 추측되고, 묘의 조성연대도 이 즈음으로 추정
됩니다.
의성 장성발 묘역의 묘들은 방형묘로서, 이 묘제는 시기적으로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일정한 계층사이에서 유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장성발의 생몰연대와도 부합
하고 있습니다.
경상북도에서 동 시기에 석축하여 조성된 방형묘가 흔하지 않은데다 규모 또한 작지 않고,
피장자의 신분이 고려말 고위 관직을 지냈던 문익공 장성발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고지도인 해동지도 의성현, 여지도서 4책 73열, 안동도회(좌통지도) 의성현편에 장성발
묘역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 문익공 효효재 장성발에 대한 1785년 천사 김종덕 선생의 글 -
[공의 아우의 이름이 성미인데, 나에게 외선조가 된다. 형제분이 모두 정경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 집안의 내력을 추측할 수는 있으나 이제와서 이를 고증할 길이 없다. 공이 고려왕조에 벼슬
했다는 것은 연대로 따져서 알 수 있고 벼슬이 전서였다는 것도 무덤 앞에 있는 표석을 보고 알
수 있으며, 본관이 아산이라는 것과 할아버지는 이름이 자방, 벼슬은 예빈경, 아버지의 이름은
균, 벼슬이 판도판서였다는 것은,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알 수 있다. 전하는 말로는 또
공이 살던 곳이 하사촌 교동이라기도 하고, 또는 구산 목촌에 있다고도 한다. 동리 들어가는 바
위 위에다 판서동이라고 새긴 것이 있다 하는데 그것도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이런 것을 알아낼 이인을 만날길 없으니 한탄스럽기만하다]
영락이후 7회의 을사(1785)년 월 일 상락후인 김종덕씀
- 1811년(손조11년) 17대손 인복의 글 -
[산소에서 남쪽으로 십리쯤 되는 곳에 교곡리가 있다. 이곳은 우리 중간선조께서 대대로
거주하던 곳이다. 점곡은 겨우 상리, 중리, 하리 3개 부락으로 된 면이다. 여기서 하리를 교곡
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선조 오형제가 모두 전서를 지내어 한 세대에 영예를 누리었다.
그러므로 마을 앞에다 커다란 무지개 다리를 가설하여 귀인들은 다리 위로 천인들은 다리
밑으로 통과하게 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마을 이름을 「다리골」이라고 불렀다 한다.
또 앞 산 바위 위에 「오전서동」이라는 네 글짜를 커다랗게 새겨 놓았다 하는데 지난 임자년
(1732) 홍수에 바위가 무너져버려서 지금은 찾아볼 길 없다. 그러나 선조께서 대대로 거주하던
터전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여기에 기록하여 후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한다]
숭정기원후 네번째 신미년(1811) 10월 하순 17대손 인복 삼가씀
(등운산 자락 장성발 묘역 전경)
(해동지도 의성현)
안동도회(좌통지도) 의성현
첫댓글 새로운 내용을 배우고 갑니다. 고지도까지 올려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돌담으로 쌓은 묘는 처음 봅니다~^^
목마른 자에게 감로수같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글 사촌관련 사이트로 모셔갑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조선중기 이전 사료를 찾았으면 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었을 텐데, 이자료는 1800년대 이후 자료라 문화재 위원들이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문중에서 자료를 찾고 좋은 결과가 있길 기대 합니다.
고려말 아산장씨 오형제 전판서 명문 집안이 의성 점곡 교동(교곡:다릿골)에 있었으니 장성길 장성발 장성휘 장성미 장성유이다 조선이 개국되며 완전 몰락하여 장영실은 노비가된다 장:~성발은 장:~영실의 중부이고 장영실은 셋째 장성휘의 아들이며 선안동김씨 도평의공파조 김구정은 넷째 장성미의 사위 이고 그 아들 사촌입향조 김자첨에게 장:~영실은 외오촌 이다 넷째 장성미의 사위인 당시40대 중반의 도평의공 김구정에게도 정치적 몰락이 오고 1389년 연유미상의 죽음으로 의성행촌(업2리)중강에 묘역이 형성된다 28세의 그 외아들 감목공 김자첨이 외가인 상촌(웃마)에 가리쑤를 심고 사촌마을을 조성한다 (story텔러 여명 김정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