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화경법문 시작하겠습니다 강의 들어가기 전에 며칠째 신문에 오르내리고 있는 간호조무사들의 어린아이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내용이 사진으로 찍혀서 인터넷에 오르고 신문에 여러 번 게재되고 이렇게 해서 처음에 깜짝 놀라고 섬짓하고 그랬는데.
워낙 큰 사건이 되어 가지고 여러 날 그것을 보도를 하면서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 더라구요. 간호조무사 정도 되면 나이가 영 어린 나이가 아닌데. 생명 갓 태어난 생명을 가지고 그렇게 장난삼아 했다고 하는데. 참 이게 어떻게 되어서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 있는가? 그런 놀라움을 금치못 하고 마음이 아프고 한편으로는 썹쓸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사는 일 가운데 뭐니 뭐니 해도 사람보다 더 소중한게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사람의 가치를 좀 제대로 알고 가치를 알면 그만치 사람을 존중하고 아끼고 서로 위해 주고 어떻게 하더라도 저는 늘 인불사상을 말하면서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자 사람을 부처님으로 이해 해야 된다.
또 사람이 사실은 부처님이고 그래서 사람을 부처님으로 이해 하고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면은 그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다. 사람 사는 것이 행복을 위한 것인데 그 행복이 라는것은 사람과 사람관계에서 서로 존중해 줄 때 그것이 가능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부모들로 부터 가정 교육이 그렇게 되었으며 또 사회 교육은 어떻게 되었고 친구들 사이에는 도대체가 어떤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고 무엇이 그 사람들 의 관심사 인지 참 이런 것들이 너무 놀라울 정도로 그렇게 잘못 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아주 통탄을 금치 못합니다.
사람의 삶이란 것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고 하면은 뭐 성불이니 보살행이니 그런 것 다 그만 두고라도 사람의 하루를 삶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저는 그런 표현을 합니다. 매일 매일 수 백억원 짜리 로또복권이 터지는 당첨되는 일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삶은 수백억원 복권이 당첨 되는 것보다 더 아주 행운이요 더 값진일이다. 그것도 매일매일 수백억원짜리 복권이 매일매일 당첨되는 그런 행운과 같은 것이 사람의 삶이다. 그렇게 표현을 간혹 합니다.
사실 표현을 하자니까. 그렇게 표현하지 어디 그것으로써 사람의 삶의 소중함을 다 표현 할수가 있습니까. 하도 세상이 돈돈 해사니까 그런 걸로 표현 해본것이죠 사실은 참 사람의 삶 만큼 소중한게 없는데 자신의 삶이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의 삶도 서로 아껴 주고 보호 해주고 하는 그러한 마음 자세가 필요하죠.
옛날에 어떤 사형수가 사형언도를 몇 칠 앞두고 그 때사 비로써 자기 간방에 기어 다니는 조그만한 벌레가 눈에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버레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는 거죠. 평소에도 있었지만은 그런데 죽음을 몇 칠 앞두고 가만히 앉아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을 보니까. 그 벌레가 그렇게 부럽드라는 거죠. 그래서 간단한 시를 남기기를
내가 저 벌레가 되어서라도 이 생명을 연장 할 수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벌레가 되어서라도 이 생명을 연장 할 수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표현을 했다는데 그만큼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사람의 삶이란게 그만큼 소중한 것이고 삶이 없을때 어떤 모양 으로든지 삶이 없을때는 모든 것은 없는 거죠.
이 세상은 통채로 없는 것입니다. 뭐 자기가 이룩해 놓은 성고이라든지 모아 놓은 재산 이라든지 또 자기가 쌓아놓은 업적이라든지 이까짓것 몇 푼어치 않됩니다. 세상에 태어 나면 온 세상이 그 사람 것이예요. 저 하늘 저 구름 저 시원한 바람 가만히 두어도 이렇게 변화무쌍한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라든지 뭐 이루 말할수없이 여러 가지 행운과 복이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 삶이 시작됨과 동시에 한꺼번에 굴러 떨어진 것 아닙니까.
꼭 무엇 좋은 부모를 만나고 좋은 환경을 만나고 좋은 조건에서 살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냥 이 세상에 떨어져서 산다는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그 가치는 무한한 거예요 성인들은 그런 것을 다 깨달아서 어떻게 하더라도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소중한 가치를 깨닫고 그 가치에 만족 하도록 그래서 사람노릇을 좀 하면서 살라고 하는 것을 신신당부 하면서 교육 시키고 했었는데
요즘 교육이라는 하는게 옛날 성인들의 교육을 등한시 해버리고 그저 취직하기 위한 그런 교육 무슨 기계를 만드는 기능사를 키우는 그런 교육 심지어는 돈 벌어 오는 기계 그러니까 돈버는 기계를 만드는 거죠. 교육이란게 이런 식으로 세상 교육이 전락 해버려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 노릇을 하는 교육이 자꾸 멀어져 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지 안았는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보니까 이 불교라는 것이 이 땅에 오래 되었슴에도 불구하고 힘이 너무 약하구나 불교외에도 많은 종교들이 좋은 삶을 가르치고 있지만은 왜 이리고 세상은 교육이 더 교육이 제대로 안되고 더 험한가 하는 그런 생각도 아울러 해보고 더욱더 종교인의 역할 이 더 기대 되고 더 활발발이 성인의 가르침을 널리 펴서 좀 사람의 가치를 이해 하고 제대로 사람다운 사람으로써 살도록 세상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일이 급하구나 무엇보다도 그게 급하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참 않좋은 이야기지만 지금 세상이 시끌벅쩍하게 사진도 여러 날 게제되고 사람들의 입 에 오르 내리고 해서 아울러 함께 생각 해보자는 뜻에서 이런 말씀 드립니다. 공자님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옛날에 왕들이 죽으면 궁녀들을 산채 생매장을 했지요. 왕은 죽어서 가지만 궁녀나 뭐 신하나 내시들은 산채로 큰 왕의 묘 속에 같이 갇히게 되어서 거기서 생명을 다하게 되는 그런 사례들이 엤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너무 무지막지 하다라고 그래서 사람의 형상을 짚으로 만들어 넣었어요. 그것을 용인(俑人)이라 그래요. 공자님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그렇게 짚으로 사람을 만들어서 같이 순장을 시키는 것은 까지도 인간으로서 할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산사람을 그렇게 순장을 시킬 수 있겠는가? 이것을 크게 꾸짖으면서 그 인형을 만들어서 함께 순장 시킨 이 일도 인간으로써 해서는 않된다 하면서 제일 큰 욕을 공자님이 하셨어요.
제일 아주 모진 욕이 있습니다. 그게 이제 무후(無後) 라는 욕이예요. 없을 무자 뒤 후자 [뒤가 끊어져라] 하는 그 욕입니다. 그 보다 더 심한 욕은 이 세상에 없다는거죠. 뭐 죽일 놈 살릴 놈이 아닙니다. 후손이 끊어지라고 하는 입에 담지 못할 그런 욕을 공자님 하셨습니다. [시작용자 기무혼저] 이런 말입니다. 문헌에 있는 말이죠.
처음 순장 시키는 인형을 만든 사람은 뒤가 끊어져라. 이렇게 까지 사람을 인격을 동등 하게 보지 못하고 그렇게 순장시키는 형식을 취했다고 하는 것. 아무리 왕이라 하드라도 그 사람의 형식을 만들어서 함께 순장 시켰다고 인형을 순장 시킨 것을 가지고도 그렇게 까지 욕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성인들은 인간에 대한 가치를 깊이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드라도 인간을 깊이 알고 인간을 존중하자고 하는 것 그것이 사람 사는 일이지 그 외에 다른 무슨 사람 사는 일이 특별한 게 있겠는가? 뭐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전부 뭡니까. 따지고 보면 사람을 위 하자는 일이지 다른 것 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종교 아무것도 없죠. 종교일수록 사람을 위한 것이지 종교를 위한 종교는 그건 잘못 생각한 거죠. 사람을 위한 종교입니다. 악세사리에 불과 한거죠 사실은 종교란 것은 이제 이런 것 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육이 좀 되어야 자꾸 듣고 그걸 읽고 그래서 마음에 새기고 이렇게 하므로써 사람이 조금씩 달라지고 사회가 달라지고 그래서 사람을 존중하는 그런 사회가 되어가는데.
그런 교육이 자꾸 없어서 버리니까 세상이 그렇게 험 할 수밖에 없고 아무것도 그런 교육을 받지 않고 자란 철없는 아이들이 신생아르 갓 태어난 신생아를 그렇게 장난감 취급하듯이 그러다가 손길 거칠어서 다쳐서 질식이라도 하면 어떻게 할려고 그렇게 그런 험한 장안을 무심히 그렇게 치고 있었는지 참 생각 할수록 기가차는 그런 일 입니다. 이게 전주 교육이 제대로 않되어서 그런거죠.
돈 벌이 하는 것만 교육 시켰지 사람 이해하고 사람 되는 교육을 않시켰서 그런 결과다 이런 것 들을 우리 모두가 염려 하고 또 염려 하므로 해서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전파가 되어서 세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이게 불교가 할 역할이 아닌가 생각을 함께 해 봅니다.
오늘 법화경공부는 교재 202쪽 (3) 동남방의 범천왕이 법을 청하다. 그랬습니다 이 대통지승불이 성불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법을 깨달음의 법을 청해 주십사 하는 것이 이렇게 거창 합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도 성도 하시고 제석천이 법을 청했고한 그런 설명이 나옵니다 만은 사실 제대로 진리를 깨달고 인생을 알고 세상의 모든 존제의 원리 를 알고 하는 그런 진성 스승 다운 그런 스승이 계신다면 참 정말 정중하게 온 정성 온 힘 온 마음을 다 기울려서 법을 청해야 올겠죠.
그러한 것을 여기서는 이렇게 시방의 범천왕들이 각각 이렇게 깨달으신 대통지승불에게 깨달음의 법을 설해 달라고 이렇게 청하는 것이 아닌가 그만큼 법을 존중하는 그 의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봐 집니다. 그러니 훌륭한 가르침 성인의 가르침 앞서 이야기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만은 그만큼 값진 것이고 또 그것을 우리는 배워야 되고 그래서 우리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사람 다워야 되고 무엇 보다도 인간이 좀 인간답게 사는 것 이게 제일 우선 하는 일이니까 그점을 이런 데서도 부연해서 이해 하기로 하면은 그러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봐 집니다
③ 동남방(東南方)의 범천왕이 법을 청하다
13 또 비구들이여, 동남방의 오백만 억 국토에 있는 대범천 왕들이 각각 자기 궁전에 비치는 광명이 예전에 없던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여 희유한 마음이 나서 서로 나아 가서 이 일을 의논하였느니라. 그랬어요 전번에 대통지승불이 성도하니까 빛이 비췄다 빛을 통해서 비로써 내옆에도 사람이 존제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렇게 표현 되었다고 내가 그것을 아주 누차 강조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참 그렇습니다 인간의 눈을 뜨므로해서 인간이란 사실에 눈을 뜨므로해서 비로써 남을 볼수 있게되었고 다른 사람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써 다른 사람을 배려 할 줄 안다는 것. 이런 의미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안겠습니까.
갑자기 부처님이 성도 하므로해서 빛이 그빛을 통해서 이곳에 어찌하여 홀연히 중생들이 생겼는가?비로써 내 옆에도 사람이 산다는 것을 비로써 알게 되었다라고 한 이 의미의 참 심오한 뜻 그 내포하고 있는 여러가지 뜻은 무궁무진 합니다. 이걸 우리가 깊이 잘 생각하고 널리 ㅍ료현하는 어떤 생각을 많이 해야 할 줄 믿습니다이 때 그 대중 가운데 이름이 대비 (大悲)라는 대범천왕이 있다가 여러 범천들을 위하여 게송으로 말하였느니라.
이것이 무슨 인연(因緣)으로 이러한 현상을 나타내는가. 우리들의 여러 궁전에 비치는 광명이 예전에 있지 않던 것이니 대덕천(大德天)이 태어나시려는 것인가. 부처님이 세상에 오시는 것인가. 앞에도 있었지만 대덕천은 아주 덕이 높은 사람 이세상에 아주 덕이 높은 그런 존경 할만한 훌륭한 분이 오실려는 것인가 아니면 깨달으신 분이 오실려는가
이런 현상을 본 적이 없나니 일심(一心)으로 함께 알아보리라. 천만 억 국토를 지나더라도 광명이 비치는 곳을 찾아보세.아마도 부처님이 세상에 오셔서 괴로운 중생들을 제도하시리라 깨달으신 분의 할일은 뭐 뻔하죠. 괴로움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제도 할려하는 것. 사람을 좀 사람 답게 가르칠려고 하는 것. 사람이 좀 사람 답게 되었을때 괴로움으로 부터 벗어날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예를 든 그사건 만 하드라도 그것때문에 사람이 사람 답지 못한 사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괴로움을 격었겠습니까
14 이 때 오백만 억 범천왕들이 궁전과 함께 하여 각각 꽃바구니에 하늘의 꽃을 가득 담아 가지고 서북쪽으로 함께 가서 이 상서를 찾았느니라. 대통지승여래를 보니 도량에서 보리수 아래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여러 천신. 용왕. 건달바. 긴나라. 마후라가. 사람. 사람 아닌 이들이 공경하여 둘러서 있었느니라. 또 십육 왕자가 부처님께 법륜을 굴리 시기를 청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지난 시간에 이야기 하고 똑 같습니다. 시방에서 범천왕들이 일일 이 그렇게 법을 청하니까요. 그러니까 그 빛이 비쳐오는 것을 보고는 세상에 이런 빛은 그 동안 없어는데 무슨 상서로 이러한 광명이 비치는가. 그래서 각각 그 빛의 소호종래를 찾아서 빛의 출처를 찾아서 그렇게 모여 들었다는 거죠. 찾아오니까 십육 왕자가 부처님께 법륜을 굴리 시기를 청하는 마침 광경에 나타 나드라는 것입니다
그 때 범천왕들이 머리를 숙여 부처님께 예배하며 백 천번을 돌고 하늘의 꽃을 부처님 위에 흩었느니라. 그 흩은 꽃이 마치 수미산과 같은데 부처님의 보리수에까지 공양하였 느니라. 꽃으로 공양하고 나서 각각 그 궁전을 부처님께 받들어 올리고 말하였느니라. 보리수나무에도 공양을 올렸다. 부처님이 성도하기 위해서 선정에 들 때 나무 밑에 앉았 었는데 그 나무도 본래는 보리수가 아니었는데 보리를 성취 하므로 그 때부터 보리수라고 이름 지어 졌지요. 또 사실은 쿠사라고 하는 길상초 그것도 풀을 깔고 앉으셨는데 그것이 부처님께서 성도 하셨기 때문에 그 풀도 길상초 라는 이름이 명명 되었습니다.
그 뭐 주변에 뜯기 쉬운 풀을 뜯어서 깔았겠지요. 그런데 그런 풀을 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전 상에서 표현하기를 부처님의 사좌자라고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법화경에서도 여기서도 그렇지만 화엄경에서도 석가모니부처님이 성도 하셨는데 그 사자좌는 어마어마 높고 화려하고 금 은 보석으로 아주 값지게 꾸며져 있다 이런 표현들을 하고 있거든요. 그것은 다 깨달음 안목으로 볼 때 이 세상은 그렇게 미묘하고 아름답게 값지게 보이더라는 것이죠.
'저희들을 어여삐 여기시어 이롭게 하사 원컨대 이 궁전을 받아주십시오.' 궁전을 공양을 올리면서 받아 달라고 간청 하는 그런 대목이 되겠습니다. 15 이 때 범천왕들이 부처님 앞에서 한결같은 마음과 음성으로 게송을 말하였느니라. '거룩하신 하늘 중의 왕이시여, 가릉빈가의 음성으로 중생들을 어여삐 여기시는 분이시라. 여기 [가릉빈가의 음성으로 중생들을 어여삐 여기시는 분이시라] 가릉빈가는 새 이름인데 가릉빈가는 인도에 있는 새 이름인데 그새의 노래 소리가 그렇게 음성이 아름답고 좋답니다.
그래서 능엄경에서도 부처님이 설법 하시는 광경을“가릉빈가의 음성소리는 시방 세계에 두루 퍼지더라.”라고 이렇게 표현한 대목이 습니다. 마찬가지로 법화경에도 여기서도 [가릉빈가의 음성으로 중생들을 어여삐 여기시는 분이] 부처님의 음성을 이렇게 표현 하고 계시는 군요.
저희들이 지금 예배합니다. 세존께서 매우 희유하시어 오랜 세월에 한번 오셨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깨달으신 분은 세상에 그렇게 쉽게 오는 게 아니죠. 석가모니 이후에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잘 듣고 잘 실천해서 많은 깨달으신 분들이 계셨 습니다만 그 전에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영 없었다고 그렇게 장담은 못하지만 그래도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나타나신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니까 그 동안 이런 분이 없었는데, 이런 분이 비로소 생겼다. 라는 감동을 법화경에서 대통지승불 여래의 깨달음에 다 맞추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백 팔십 겁 동안 부처님이 계시지 아니하였습니다. 삼악도(三惡道)만 가득하고 훌륭한 대중들은 점점 줄더니 부처님이 이제 오시어 중생들의 눈이 되었습니다.보십시요 부처님이 깨달은 분이 오시어 중생들의 눈이 되었다. 얼마나 좋은 표현 입니까?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 삶의 길잡이 역할을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거지요. 그게 중생들의 눈이 되었다는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참 아주 멋지죠. 부처님이 오시어 중생들의 눈이 되었 습니다.
뭐 금을 한 트럭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다야몬드르 한 트럭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무슨 구호품을 뭐 큰 배에 한 가득 싣고와서 넉넉하게 나누어 준것도 아니고 부처님은 오로지 미혹한 중생들의 지혜의 눈을 열어주는 그런 역할로서 오셨다. 그러죠 사월 초하루가 지나고 며칠 안 있으면 부처님 오신 날 큰 행사가 진행이 되고 사실 음력 초하루 부터 부처님 오신 날 기념행사 기도에 다 들어갔죠. 사찰에서는 다그렇게 합니다. 뭐 축제가 대단하죠 어제 동대문야구장에서 부처님 오신 날 연등 행사가 있었는데 아주 대단 했죠 그 진행이 얼마나 굉장했습니까.
저는 티브를 중개만 봤습니다 만은 그전 서울에 있을 때는 직접 2년 동안 참관을 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고 그렇게 훌륭한 그런 축제가 또 있는가 할 정도로 참으로 감동을 했습니다. 타 지방에 있는 이들은 그날에 맞춰서 차를 대절해서 신도들 모두 인솔해서 그 행사에 꼿 참석하고 그렇게 내려온 평생에 잊지못할 훌륭한 축제에 참석한 것이 될거라는 그런 광고도 많이 했습니다.
정말 그 축제를 보고는 내가 3,4년 전인데요 그 때보고는 아 정말 이렇게 내가 불자가 된 것이 정말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그렇게 아주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치 불교 축제도 참 잘하고 있어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잘하고 있습니다. 연구팀들이 1년 내내, 7,8명이 상근 하면서 그날의 행사를 위해서 그렇게 연구를 하고 있기도 하고 그런 정도로 까지 하고 있 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중생 들에게 다른 거 혜택줄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중생들의 지혜의 눈이 되도록 하기 위한 오로지 그 마음 하나지요. 부처님 오신 뜻은 바로 그것 입니다.
그 법화경 방편품에서 밝히고 있는 것을 제가 강조하고 누차 말씀 드렸는데,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이 무엇이냐? [개시오입 불지지견] 그런 표현을 했는데 부처님이 깨달으신 인생에 대한 깨달음의 안목을 모든 사람들에게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그 속에 들어가서 마음껏 그런 깨달음의 삶을 누리도록 해주기 위해서 부처님이 오셨다. 그것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뜻입니다. 아주 정확하게 그렇게 밝힌 거죠 여러 가지 부처님 오신 뜻을 표현 합니다 만은
가장 의미가 바르고 무게가 있고 정확한 그런 표현은 바로 법화경 방편품에서 말한 그것입니다. 당신이 깨달은 것을 그대로 다른 사람도 깨닫게 해 주려는 것 이 것이다. 라고 경전에서 스스로 밝힌 것이니까 틀림이 없습니다. 그 뜻은 우리가 생각해 봐도 역시 그렇구요. 여기도 중생들의 눈이 되었습니다. 참 좋은 표현이죠.
눈 역할을 하는 분이고 우리가 사찰에 오거나 불교에서 만나거나 불교에 귀의 하거나 절에 오거나 하는 것도부처님의 눈을 빌리자는 것입니다. 내가 잘 공부해서 내가 부처님의 눈을 나도 갖게 되면 더 말할 나위도 없고 만약에 지금은 아직 없으면 가르침을 통해서 부처님의 눈을 좀 빌리자는 것이지요. 내가 눈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눈을 빌어서라도 인생의 길을 바르게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뭐 얻으려 오는게 아니예요 단 얻는 다고 표현하면 부처님의 눈을 얻는 거예요 부처님을 빌리려 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찰에 와서 또는 불교에서 우리가 구하려는 것과 얻으려 하는 것과 많이 다르죠. 그런데 살림에는 눈이 보배라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눈 하나 잘 갖춰 버리면 끝나죠.모든 문제의 해결이 바로 안목에 있습니다. 눈에 있습니다. 그래 이 표현이 참 너무 근사하죠 [부처님이 이제 오시어 중생들의 눈이 되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이런 것은 밑줄 아주 석줄 정도 좍좍 그어야 할 대목 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귀의할 곳이 되어 모든 중생들을 구호하시고 중생들의 어버이가 되어 어여삐 여기고 이롭게 하십니다. 중생들 구호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들이 귀의 할 곳이 되고 중생들의 어버이가 되고 그래서 어여삐 여기고 저희들은 숙세(宿世)의 복이 있어 지금 세존을 뵙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부처님 가신 때는 비록 오랜 세월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지금 부처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고 옛날 사람들 보다 공부할 조건이 너무 좋아졌습니다. 복이 이만저만 많은 게 아닙니다.
이것을 감사히 여기고 참 대단하게 생각해야 할 텐데. 이것은 어떻게 하드라도 깨달아야 됩니다. 불법 공부 하는 것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 뭐 가장 뛰어난 선택이다. 무량대복이다. 하는 것을 느껴야 할 텐데. 참 언제나 그렇게 내 인생을 뒤 흔들 정도로 감동적으로 느낄지요 그게 아주 무엇보다 급한 일입니다. 그것을 느끼면 공부 하지 말라고 해도 기를 쓰고 공주를 합니다. 잠자지 않고 공부 하개되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전에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나요. 설악산 비로봉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어떤 사람이 투덜투덜 하면서 여기 아무것도 볼 것이 없구만..그 때가 가을이 였습니다. 비로봉 골짜기가 아름다운 비로폭포죠. 비로폭포가 있는 곳이 아름다운 때 였는데. 아무것도 볼 것이 없구만 누가 이리로 가자고 해서 사람을 끌고 와서 이렇게 힘들게 만드느냐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참 다리에 힘이 빠지고 너무 놀라운 나머지 평생을 잊지 못하고 간혹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 불교 안에서 우리가 그렇게 마음 쓸 사람은 없겠지만 참으로 감사 하구나 참 정말 내 인생에 있어서 그 누구를 만난 것 보다 그 어떤 인연을 만난 것 보다 가장 뛰어나고 복된 인연이 구나 하는 그런 느낌을 받으면 더 이상 바랄게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16 이 때 범천왕들이 부처님을 게송으로 찬탄하고 각각 말하기를 '원하옵건대 세존께서는 모든 중생들을 어여삐 여기사 법륜를 굴리어 중생들을 제도하소서.'하고, 다시 여러 범천왕이 한결같은 마음과 음성으로 게송을 말하였느니라. '큰 성인께서 법륜을 굴리어 모든 법의 모양을 보여주시고 괴로운 중생들을 제도하여 큰 기쁨을 얻게 하소서. 제법상 제법의 실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원리를 깨우쳐 달라는 것이죠. 그리고는 괴로운 중생들을 제도하시어 큰 기쁨을 얻게 하소서 그러니까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도 불교적인 시각에서 보면은 그 모든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원리가 있게 되어있으까요. 원리가 있으니까. 그 원리를 꿰뚫어 본다면 하등에 어떤 변화에도 끄달릴 까닭이 없습니다. 그야 말로 수처작주隨處作住죠 어떤 상황 에서도 그 상황의 돌아가는 원리를 아니까 흔들릴 까닭이 없는거죠. 마치 가을에 단풍이 드는 그런 변화에도 우리는 당연히 단풍드는 것이고 오이려 잘 들기를 바라죠. 그런데 인간관계의 어떤 변화나 자기 사업관계의 어떤 변화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죠. 또 낙엽이 지는 것도 아주 지는 것을 아름답게 보고 지지 아니하면 오이려 이상하게 여깁니다.
자연현상은 우리가 경험이 많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받아들이는데. 인간관계라든지 우리 사업관계라든지 나에게 이해 관계가 걸려있는 거라든지 이런 것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 하는거죠. 그런 것 까지도 자연의 현상과 같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게 어떤 존재와 변화의 원리와 법칙이 당연히 있게 마련인것이다. 이걸 이제 우리가 부처님을 통해서 알든지 아니면 스스로 깨닫든지 참선이나 어떤 명상이나 경을 보는 일을 통해서 깨우쳐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그 법문을 듣고 도를 얻어 천상에 나면 모든 악도는 줄어들고 선한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이 때 대통지승여래께서 묵묵히 허락하시었느니라. 이제 시방에서 동서남북 사유상하 이렇게 이제 10곳의 방향에서 모두 와서 법을 이런 형식으로 청하니까 일일이 묵묵히 마음속으로 허락 했다는 그런 표현이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남방(南方)의 범천왕이 법을 청하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4 남방(南方)의 범천왕이 법을 청하다
17 또 여러 비구들이여, 남방의 오백만 억 국토에 있는 대범천왕들이 각각 자기 궁전에 비치는 광명이 예전에 없던 것을 보고 매우 환희하여 희유한 마음을 내고 서로 나아가서 이 일을 의논하되 '무슨 인연으로 우리의 궁전에 이런 광명이 있는가.' 하였느니라. 앞서 하고 형식은 똑 같죠. 그 대중 가운데 묘법(妙法)이라는 대범천왕이 있다가 범천의 대중들을 위하여 게송으로 말하였느니라. 어디든지 어떤 단체든지 당연히 인솔자가 있고 리더가 있기 마련이죠. '우리들의 모든 궁전에 광명이 매우 찬란한것은 인연이 없지 아니하리니 이 현상의 까닭을 찾아보리라. 지나간 백천 겁 동안에 일찍이 이런 일을 본 적이 없었으니라 대덕천이 태어나시려는가. 부처님이 세상에 오시려는 것인가.' 이렇게 이제 이런 형식을 똑 같이 빌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18 이 때 오백만 억 범천왕들이 궁전과 함께 하여 각각 꽃바구니에 하늘의 꽃을 담아 가지고 북쪽으로 함께 가서 이 상서를 찾았느니라. 대통지승여래를 보니 도량에서 보리수 아래 사자좌에 앉아서 여러 천신. 용왕. 건달바. 긴나라. 마후라가. 사람. 사람 아닌 이들이 공경하여 둘러 모시고 있었느니라. 또 십육 왕자가 부처님께 법륜을 굴려주시기를 청하고 있는 것을 보았느니라. 그렇죠 저 앞에 하고 형식이 같습니다
그 때 범천왕들이 머리를 숙여 부처님께 예배하며 백 천번을 돌고 하늘의 꽃을 부처님 위에 흩었느니라. 그 흩은 꽃이 마치 수미산과 같고 부처님의 보리수에까지 공양하였느니라. 꽃으로 공양하고 나서 각각 그 궁전을 부처님께 받들어 올리고 말하였느니라.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성도 했다고 보리수 나무를 부처님 위히듯이 위하는 그런 풍속이 있죠. 특히 스리랑카 같은 곳에서는 아주 대단합니다. 보리수 나무를 부처님 위하듯 그렇게 위하죠. 또 그 인연으로 사칠에는 보리수를 심기를 원하고 또 보리수에는 보리자 라는 열매가 맺는데 그 열매로 염주를 만들어서 목에 걸기도 하는 그런 아주 여러 가지 의미있는 나무 이기도 합니다. '저희들을 어여삐 여기시어 이롭게 하시기 위하여 이 궁전을 받아주십시요. 그래 궁전을 저 앞에도 여러 번 있었지만 궁전을 들고 가서 공양을 올리고 받기를 이제 원합니다.
19 이 때 범천왕들이 부처님 앞에서 한결같은 마음과 음성으로 게송을 말하였느니라. '세존은 친견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모든 번뇌를 깨뜨리신 분입니다. 사실 그래요. 보면은 어느 사찰에 살아도 사찰 가장 가까이 살아도 대대로 사찰을 통해서 생업을 유지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것인지 대대로 사찰을 덕에 생업을 유지하고 먹고 살고 이렇게 생활이 영위 되는 데도 불구하고 사찰에서 사람들이 드나들고 많이 가면은 오늘 무슨 날인가? 왜 가는가? 여기는 전혀 관심이 없고 나도 한번 가봐야지 무슨 행사가 벌어지는 가? 무슨 말을 하는가? 이점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없어요. 참 묘합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그렇게 묘한데 가까이 부처님 가까이 사는 인연은 있으되 또 부처님 법에 대해서 궁금해 하거나 공부할려고 하는 그런 인연은 없다는 그죠.
어떤 큰 스님이 아들이 정말 불법을 한마디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데도 멀리서 천리나 되는 그런 먼곳에서 몇 날 며칠을 걸려서 아주 돈 써가며 힘을드려서 아무 먼길 그 법을 한번 들을려고 그 멀리서 오는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큰 스님의 자식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한마디도 들으려고 마음을 내지 않는 것. 내가 어릴 때 선방에 다니면서 그런 상황을 보고 또 인연이란 것이 각양각색이고 미묘 불가사의한 것이 인연의 도리이구나 하는 것을 느껴서 이런 기회에 또 말씀드립니다.
[세존은 친견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모든 번뇌를 깨뜨리신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절 밑에 대대로 수 십년 수 백년 살아도 세존 친견하기는 어려운 것이며 법문 한미디 듣기는 어려운 그런 인연을 타고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정말 불법의 지름길로 불교공부를 할 수 있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자긍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생각 합니다.
일백 삼십 겁을 지내고야 이제 한번 친견합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모든 중생들을 법의 비로써 충만하게 해주십니다. 이게 굶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는 것이 정말 음식물을 못 먹고 못 마실 물을 못 마셔어 목마르다는 뜻도 아니고 굶주림의 뜻도 아니죠. 정말 진리에 배고프고 진리에 목마른 그런 중생들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비로써 충만하게 해주십니다] 옛적에 뵈옵지 못하던 지혜가 한량없는 분이십니다. 마치 우담바라화와 같아서 오늘에 비로소 친견합니다. 저희들의 이 모든 궁전에 광명을 비치어 장엄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원컨대 받아주십시오.'
우담바라가 여기에 또 나왔습니다만은. 한국 신도님들 우담바라 좋아 하지요.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담바라. 우담바라 꽃은 최소한도 피었다고 하면은 그 꽃의 지름이 1m가 넘을 겁니다. 그리고 아주 화려하고 뭐 돋보기를 들이대고 보는 그런 우담바라는 세상에 있을 수는 없는 거죠. 성인이 한번 나올 때마다 한번 핀다는 그런 표현도 있고 또 삼천년 만에 한번 핀다 하는 그런 표현도 있습니다.
그런 성스러운 꽃이 뭘 그렇게 현미경 돋보기 갖다 들이대야 돋보기를 들이대야 비치는 그런 꽃이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 해봐도 참 우리가 뭐 사찰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서 내가 함부로 말 씀 못드리겠습니다 만은 우담바라 말이 나왔으니까 이렇게 또 참고 해서 바른 소견을 가지시라고 일러 드리는 것입니다. [우담바라화와 같아서 오늘에 비로소 친견 합니다. 저희들의 이 모든 궁전에 광명을 비치어 장엄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원컨대 받아주십시오] 궁전을 받아주십시요 하는 그런 그 표현을 하면서 궁전을 받치는 그런 이야기 입니다.
내용은 지난 시간의 역시 시방에서 범천왕들이 부처님이 성도를 하신 그 경사를 축하하고 가서 공양을 올리고 법을 청하는 하는 그런 내용하고 같습니다. 뭐 진정 이런 큰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 오셨다면 몇 날 며칠을 두고 라도 찬탄하고 또 공양하고 그것을 높이 기려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 아울러 해봅니다.오늘 법화경 공부 여기 까지 하겠습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_()()()_
큰 스님 감사합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십시요..성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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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감사합니다._()()()_
저희들의 이 모든 궁전에 광명을 비치어 장엄하였습니다...나무묘법연화경
부처님이 중생들의 눈이 되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 삶의 길잡이 역할,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는 거지요. 그게 중생들의 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나무묘법연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