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禪軒 독서일기 2025년 7월 15일 화요일]
《『대동야승』 中 조경남 『난중잡록』 趙慶男 亂中雜錄
1593년 6월 29일, 아! 진주성.》 [64]
<계사년 1593년 6월 만력 21년, 선조 26년 >
○ 심유경이 이때에 행장(行長)의 병영에 있으면서 청정(淸正)이 진주를 공격하려는 일을 들어 알고, 진주성을 비워서 칼날을 피할 계책을 본국의 원수 김명원(金命元)에게 통지하다. 송응창(宋應昌) 또한 이 일을 듣고 심유경에게 통지하여 여러 적장들에게 분명히 깨우쳐 침범하지 않게 하였고, 유정(劉綎) 또한 청정에게 글을 보내어 이해(利害)로써 설득시키게 하였으나 적이 듣지 않다. 이때에 변방의 경보가 날로 급하므로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본도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 황진(黃進) 및 여러 의병들이 함안(咸安)으로부터 진주로 물러 와서 목사 서예원(徐禮元)과 더불어 성을 지킬 준비를 하다.
[첨언] 가등청정 등 못된 왜적들은 지난번 진주대첩에서 패한 원한을 철군하기 전에 풀려고 다시 진주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명나라 송응창과 유정이 순리로 타일렀으나 외곬수 성격인 왜적을 전혀 듣디 않았다. 아! 진주성, 진주성.
○ 적의 경보 때문에 호남 각 고을에서 또 남아 있는 장정을 긁어모아서 남원에서는 품관(品官)과 교생(校生)으로 오장(伍長)을 삼고 팔결ㆍ연호(八結烟戶)로 군사를 삼고, 연호는 다만 성 밑에 있는 이만 뽑았다. 생원ㆍ진사로 수문장(守門將)을 삼아서 성을 지킬 준비를 하다. 매 첩(堞)에 연결(煙結) 각각 한 명이요, 5첩에 장(長)이 하나요, 55궁 가(弓家)인데 1가에 장이 있고 1군(軍) 45 궁가가 1붕(棚)을 얽었으니 이른바 망덕(望德)이다.
[첨언] 진주 목사 서예원이 지휘하여 전투 준비를 했다, 그러나 관군과 명군이 적극적으로 전투 준비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명연합군 수뇌부는 진주성을 왜적의 분풀이 감으로 던져줄 요량이었다.
○ 황제가 산동(山東) 양식 10만 석을 주어서 군량을 삼게 하고, 또 본국이 압록중강(鴨綠中江)에 개시(開市)하여 무역하기를 청하니 인하여 장시(場市)를 설치하다. 고사에서 나온다.
○ 북극(北極)에 치우기(雉羽簊)가 나타나다.
○ 6월. 심유경(沈惟敬)이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및 김귀영(金貴榮) 등과 더불어 왜적의 진영에서 나와서 본국으로 돌아오다. 행장이 양산(梁山)에서 유경을 전송하면서 작은 기를 주며, “후일에 전장에 임할 때에 이것으로 표(標)를 하라.” 하다. 또 말하기를, “관백(關白)이 연전에 군사를 보내었다가 진주에서 좌절을 당하였으므로 여러 장수로 하여금 힘을 다하여 그 성을 쳐서 무찌르라 하는데, 나는 중지시키고자 하나 청정이 듣지 않으니 일본 군사가 진주로 향하거든 성을 비워서 부딪치지 말고 사람들을 살리라.” 하다. 유경이 오다가 선산에 이르러 본국 여러 장수와 더불어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 6월 15일. 적장 청정 등이 군사 30여 만을 합하고 김해(金海)ㆍ창원(昌原)으로 경유하여 수륙(水陸)으로 아울러 나아가다. 다음날에 선봉의 적이 돌연히 함안(咸安)에 이르매, 이빈(李薲)ㆍ권율(權慄)ㆍ선거이(宣居怡) 등 모든 장수의 수만여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달아나는데 미처 피하지 못한 자도 매우 많고 짓밟혀 죽은 자도 역시 많았다. 적이 함안을 분탕질하다.
이빈이 의령(宜寧)에 이르러 여러 장수를 모아 의론하기를, “흉적의 계획이 반드시 진주를 함락시키고 말 것이니, 먼저 들어간 외로운 군사로서는 결코 보존해 지키기 어렵다. 본도의 의병을 더 보내면 기세를 더할 수 있으리라.” 하니, 곽재우(郭再祐)가 거절하고 응하지 않으며, “변통이 있는 이는 능히 군사를 쓰고 지혜가 있는 이는 능히 적을 헤아리는 것이니, 진실로 능히 군사를 쓰는 이라야 승리를 획책할 수 있고 적을 잘 헤아리지 못하면 끝내 반드시 일을 그르치는 것이다. 지금 적병이 치성하고 날래어 천하에서 그 세력을 당해 낼 수 없는데, 3리 되는 외로운 성이 어찌 능히 지켜낸단 말이오. 하물며 모든 군사가 다 성중으로 들어가 버리면 또 안팎에 응원하는 세력이 없어지니, 나는 마땅히 밖에 있어 응원이 되고 성에는 들어가지 않겠소.” 하다.
우감사 김륵(金玏)이 자리에 있다가 크게 노하여, “장군이 대장의 영을 따르지 아니하니 군율(軍律)은 어찌 하겠소.” 하니, 재우도 또한 노하여, “한 몸이 죽고 사는 것은 진실로 족히 아깝지 않으나 백 번 싸운 군사를 어찌 차버린단 말이오. 나는 차라리 자결을 할지언정 성에는 들어가지 않겠소.” 하다. 이빈이 그제야 재우로 하여금 정암진(鼎嵓津)을 막아 지키게 하다.
[첨언] 그럼 김륵은 관군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갔는가? 곽재우의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광분한 야수 앞에 무턱대고 맞서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곽재우 의병은 정규전에 느와지 않고 유격전에 능하다.
○ 김천일이 서예원을 불러 창고의 곡식을 계산하니 거의 수십만 석이 되었다. 모든 장수들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성은 높고 물은 험하며, 양식은 풍족하고 기계도 넉넉하니, 이야말로 오늘날 힘을 바칠 시기이다.” 하고, 그날로 군대를 나누는데 김천일ㆍ최경회는 도절제(都節制)가 되고 황진은 순성장(巡城將)이 되며, 각 도의 관군과 의병은 성을 계획하고 부대를 나누어 계엄하여 변고를 기다리다.
○ 6월 18일. 적병이 함안으로부터 마구 몰아 바로 정암 나루를 건너매 곽재우가 형세상 당적할 수 없어 뒤로 퇴각하다. 이빈은 권율ㆍ이복남(李福男) 등과 더불어 퇴각하여 산음(山陰)으로 향하다. 적은 의령에 들어가 분탕하다.
○ 19일. 적병이 의령으로부터 바로 진주로 향하는데 호호탕탕하여 산에 가득하고 들에 가득하니, 총소리는 땅을 진동하고 고함소리는 하늘까지 이어지다. 척후병을 나누어 보내 혹은 단성(丹城)ㆍ삼가(三嘉)로 보내고 혹은 곤양(昆陽)ㆍ사천(泗川)으로 지정하여 밖의 응원병을 쫓다. 전리 병사 선거이가 경기도 조방장 홍계남(洪季男)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이르러 말하기를, “적과 우리가 많고 적음이 엄청나게 차이가 있으니 물러가 보존함만 못하다.” 하였다. 김천일이 크게 노하여 꾸짖으니 선거이 등은 군사를 끌고 다시 나와서 이빈 등과 더불어 퇴각하여 함양(咸陽)으로 향하다.
○ 6월 21일. 적의 선봉에 있던 기병(騎兵) 수백 명이 바로 마현(馬峴)의 봉우리 위에 이르러 위엄을 날리며 달리더니, 이튿날에 많은 적이 마구 몰아 나오는데 수를 헤아릴 수 없어서 기세가 바람과 불길 같다. 일시에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기를 심히 급하게 하니, 성중에서 응전하여 물리쳐서 날마다 이렇게 하다. 아래에 나온다.
포위를 당한 지 여러 날에 적의 세력이 더욱 치성하니, 개미 새끼도 통할 수 없어 소식이 아주 막히고 장수와 군사는 피곤하여 휴식할 겨를이 없다. 매일 밤 경(更)마다 적들이 호각을 불어 서로 응하고 높은 소리로 크게 외치며 일시에 총을 쏘매 성중에 어지러이 떨어져서 뇌성과 우박 같고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한참 만에 그치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우리 군사 중에 죽은 자가 쌓여 있었다. 하루는 경회와 천일이 누각에 올라 바라보고 말하기를, “구원병이 많이 온다.” 하니, 모든 장수들이 크게 기뻐하여 큰 종을 울리며 앞다투어 바라본즉, 멀고 가까운 1백 리에 가득 찬 것이 모두 적병이었다. 천일이 말하기를, “하늘이 만일 정의(正義)를 도와 우리들이 성공하여 대궐에 가서 뵙는다면 하란(賀蘭)의 고기를 구워서 함께 먹으리다.” 하다.
○ 고성(固城)의 의병장 최강(崔堈)과 이달(李達)이 진주를 구원하려고 달려왔다가 적의 세력이 작년의 비교가 안 되므로 손을 대지 못하고 다시 고성으로 물러가다. 이때 적이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을 하니, 진주ㆍ함안에 피란한 사람들로 최강을 따르던 자 3백여 명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다 죽게 되다. 최강이 말을 타고 달리며 충돌하여 밤새도록 심하게 싸워서 군사와 백성이 보전되고 죽은 적이 매우 많다. 진주의 생원 한계(韓誡) 역시 피란하는 사람 중에 있다가 산에 올라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수많은 옛 역사책 안에 이와 같이 용맹스러운 장수가 있었던가. 중직에 맡기지 못한 것이 아깝도다.” 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이 때에 중국 조정의 제독 이여송이 경성에 머물러 진을 치고서 진양(晉陽)이 위급하다는 것을 듣고 낙상지ㆍ송대빈(宋大斌) 등을 독려하여 호남으로부터 나아가 구원하게 하고, 또 영남에 있는 유정(劉綎)ㆍ오유충(吳惟忠) 등 여러 장수로 하여금 협력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세력이 대적할 수 없어 모두 명령을 듣지 않았다.
○ 김명원을 체직하여 전라 순찰사 권율로 도원수 제도도찰사 겸 의정부 좌참찬(諸道都察使兼議政府左參贊)을 삼고, 전주 부윤 이정암(李廷馣)으로 전라 감사를 삼으며, 홍세공(洪世恭)으로 전주 부윤을 삼다. 이때에 권율이 함양으로부터 물러가 남원에 있으면서 급히 관내의 선비와 백성들을 모아 성을 지킬 계책을 세우는데, 부사 조의(趙誼)가 능히 조치를 하지 못하다. 권율이 성을 내어 때리고 꾸짖기를, “국가에서 그대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은 정히 오늘날을 위한 것인데, 어찌하여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나라의 일에 죽으려 하지는 않는가.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하고, 곤장을 쳐서 죄를 다스리다. 관내에 있는 전 목천 현감(木川縣監) 최적(崔頔)은 권율과 삼종(三從)의 척당이었다. 권율이 그가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을 듣고 군관을 보내어 잡아와서, “네가 나를 아느냐. 먼저 너를 베어 죽이지 아니하면 큰일을 이룰 수 없다.” 하고, 곧 묶어서 얼굴에 재를 바르고 성중에 외치며 보이게 하였다. 이에 품관ㆍ교생들이 피하려고 꾀를 내어 뒤에 처졌던 자들이 앞다투어 성에 올라서 각기 맡은 바 여장(女墻)ㆍ궁가(弓家)에 들어서서 계엄하여 변고를 기다렸다. 성안에 가마솥과 높은 사닥다리ㆍ도끼ㆍ낫 등의 물건을 많이 설치하매 사람들의 힘이 다 되었다.
○ 6월 27일. 참장 낙상지, 유격장군 송대빈이 각기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전주ㆍ임실(任實)로부터 남원에 들어와 유진(留鎭)하다.
○ 6월 29일. 적병이 진주를 함락시키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이상 3인은 삼충(三忠)이라 하는데 그 뒤 8년 만에 진주에 삼충사(三忠祠)를 세워 제사 지내다., 전라 복수 대장 고종후(高從厚)ㆍ우의병 부장 고득뢰(高得賚), 좌의병 부장 장윤, 적개 의병 부장(敵愾義兵副將) 이잠(李潛), 영광 의장(靈光義將) 심우신(沈友信), 태인 의장(泰仁義將) 민여운(閔汝雲), 해남 의장(海南義將) 임희진(任希進), 도탄 복병장(陶灘伏兵將) 강희보(姜希甫), □□의장 이계련(李繼璉),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사천 현감(泗川縣監) 김준민(金俊民), 남포현령(藍浦縣令) 송제(宋悌), 진주 목사 서예원 등이 다 죽다.
충남 수령을 따라온 병사 중에 죽은 이가 심히 많으나,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적이 매일 죽여도 다 죽이지 못하자, 속이기를, “사창대고(司倉大庫)에 피란하여 들어가는 자는 죽음을 면한다. 운운” 하였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협박을 당하여 앞다투어 창고에 들어갔더니 적이 한 번에 불을 질러 태워 죽이다. 남원 사람으로 여러 의병을 따라 진주성에 들어갔던 자가 3백여 명인데 남강(南江)으로부터 헤엄쳐 나와 살아 돌아온 사람은 정기수(鄭麒壽) 등 두어 사람뿐이었다. 적이 성과 참호를 다 헐어버리다. 군사의 죽은 수효는 아래에 상세히 보인다. 적이 바야흐로 성에 들어올 때에 최경회ㆍ김천일이 달아나 촉석루(矗石樓)에 오르매 장수와 군사들이 다 모였다. 적병이 죽이며 나아오는데 이잠ㆍ김준민 등은 화살이 이미 다되어 바로 죽창을 가지고 육박전으로 싸우매, 적병이 잠시 가까이 오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힘이 다되어 죽다. 천일 등은 서로 안고 강에 떨어져 죽었다 한다.
[첨언] ‘김천일, 최경회, 황진, 고종후(高從厚), 고득뢰(高得賚), 장윤, 이잠(李潛), 심우신(沈友信), 민여운(閔汝雲), 임희진(任希進), 강희보(姜希甫), 이계련(李繼璉), 이종인(李宗仁), 김준민(金俊民), 송제(宋悌), 서예원 등이 다 죽다.’, 이름이 남은 이들 외에도 6만 명 의병, 관군, 백성들이 죽었다. 죽어야 할 자리인 줄 알면서도 죽은 훌륭한 인물들이다.
진주성 학살과 남경 학살, 왜적이 조선과 중국 인민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역사는 똑바로 기록하고, 현재인들은 이를 갈아야 하며 후세인들은 크게 경계해야 한다. 후일 언젠가 다시 왜적이 야수성을 발동하여 침략 전쟁을 도발해 오면, 한국인과 중국인은 굳게 단결한 연합전선을 펼쳐 왜적을 섬멸해야 한다. 그리고는 반드시 왜씨를 열도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해야 한다. 왜, 내 말이 과격한가? 그래서 조건을 달았지 않는가. 일본인들은 후일 언젠가 멸족당하지 않으려면 야수성을 순화하여 인간성으로 진화하고, 침략전쟁을 다시는 도발하지 않으면 된다.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