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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어두웠다. 차갑고 정적이 가득했다. 습기가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저편의 따스함은 옛날에 없어지고 살짝 남은 온기만이 등에 겨우 닿았다. 영원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깨진 얼음과 비가 내리는 달 밑에서 머리 위에 덧없는 생명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움직일 때였다.
그녀는 천천히 자신을 압박하는 부드러움을 밀었다. 사지를 뻗자 어둠 속에서 지낸 영원의 시간이 비명을 지르며 떨었다. 여기 저기서 형제자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등 뒤로 세게 내려치는 것 같은 따스함을 느꼈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일어날 시간이 된 모양이다.
니사……
머리 위의 무게를 밀쳐내며 긴장했다. 하얗고 파라면서 얇은 씨앗이 복부 아래의 벨벳 구멍으로 사라졌다. 더 깊은 곳에는 지금도 차가운 공기가 숨어서 신음 지으며, 맑은 수정의 칼날을 미지의 장소로 뻗치고 있었다. 그녀는 긴장에 몸을 떨었다.
어쩌면 못 일어날지도 몰라. 영원히 이 밑에 있게 되는 걸지도 몰라. 상실이 잊혀진 껍질 안으로 무너졌다. 죽지는 않았어. 하지만 살아 있지도 않아.
……니사?
머리 위로 어둠이 찢어졌다.
그녀는 몸을 떨면서 두통을 참으며 불안정한 두 다리를 뻗었다. 양 팔도 떨려서 상반신에서 떨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모든 움직임이 고통스러웠다. 채찍질하는 것 같은 열기가 냉기로 가득 찬 피를 순환시켜 사지에 힘과 색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빛이 있는 쪽으로 돌리자 시야가 펼쳐졌다.
“니사?”
《신록의 확장》 아트 : Zack Stella
그 언어가 저편에서부터 금을 그었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강하게 끌어당겼다.
세계가 섬광과 함께 지나갔다. 나무와 버섯이 뒤섞여 자라나 함께 숨소리를 내며 서로 경쟁했다. 사슴이 속삭이는 불모의 땅에서 가만히 돌을 먹었다. 구름은 중얼대며 그 몸을 눈 앞의 대지로 이끌었다. 도끼 날 모양을 한 돌이 드넓은 하늘에 떠올라 흘렀다. 물은 깊고 차가우면서 공허하게.
그녀는 기디온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의 목소리가 포효하는 짐승의 목소리로――사람의 말이야. 그녀 안의 무언가가 그렇게 고쳐주었다――일순 당혹스러워 하면서 곤봉의 모양을 한 것이――손가락이――눈 앞에서 흔들리며 갑자기 열기가 아닌 빛을 보았다. “난……”
난 씨앗이 아니야.
니사. 난 그저 니사.
그는 니사의 말을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제이스의 도서관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말을 하려 했지만 갈라져서 삐걱거렸다. “미안해, 기디온. 뭐라고 했어?”
그가 이를 보였다. 미소를.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군.”
“난……” 절반 정도 떨어진 세계에선 봄날의 툰드라에 꽃 한 송이가 머리를 내밀어 처음 맛보는 태양에 환희하고 있었다. 니사는 그들 모두의 얼굴을 보았지만 이해할 여지가 없었다. 설명 가능한 언어가 없었다.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 그녀의 시선이 무릎으로 떨어졌다. 거기엔 손도 대지 않은 식사가 있었다.
그가 접시 위의 고기덩어리를 손가락으로 집은 도구로――포크. 그래, 생각났어――찍었다. “자네와 찬드라가 젠디카르에서 해낸 일을 반 대사님께 이야기하고 있었네.”
찬드라. 주근깨 볼에 피가 뜨겁게 요동치고 예리하면서 재빠른 손의 움직임. 마치 새처럼.
니사는 정원에서 때때로 새에게 먹이를 준다. 배가 고픈 그들은 자신의 손에 담긴 씨앗을 먹기 위해 몰려든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순식간에 날아가버리지.
내 잘못으로 찬드라가 날아가버렸다.
감각과 본능이 완전히 닫혀 있었다.
이곳 라브니카에 와서부터 잠시도 편할 새가 없었다. 뜨거운 짐승의 숨소리가 목 뒤에 걸린다. 태양은 눈부신 백색에, 냄새는 지독하고 불쾌했다. 모든 지면이 서로 상처 입히고 찌어 발기기 위한 칼날을 가진 것만 같았다.
기묘하면서도 무서운 얼굴의 나열들이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상상해본 적도 없는 많은 얼굴들. 그것들이 서로 융합해 천 개의 얼굴을 가진 괴물로 변해 나를 밀쳐낸다. 건물 사이를 걸으면 식은땀이 나고 몸은 떨렸다. 요란스럽게 다가와선 밀고, 때리고, 찔러댄다.
그 모습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주저앉아 금간 대리석 바닥 사이에 핀 고독한 꽃을 관찰했다.
정적이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낮에는 모루의 불협화음이 울리고 천의 솥이 끝도 없는 연회의 증기와 굉음을 올린다. 밤에는 세이렌의 서글픈 울음소리와 조각조각 나는 듯한 마나의 소리. 몇 만개의 소리가 쉬지도 않고 비명을 지르고 고통과 비탄, 욕망과 분노에 신음하며 투쟁하듯 맞물려진다. 요 근래 3개월 동안 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순간이 없었다.
얼굴, 소음, 무엇 하나 익숙지 않은 냄새가 목구멍 안으로 들어앉아 목을 조른다. 결국 그것을 참지 못하고 정원에 눌러앉아 귀를 막았다. 그런 나를 나무들이 지켜주었다.
이곳은 모든 것이 단단하고 눈부신데다 날카로웠다.
찬드라. 새벽빛과 같은 그 눈동자. 갖가지 사고가 그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두려움 없이.
아아, 젠디카르. 내가 어쩌다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걸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하지만 니사의 벚――최고의 친구. 2년에 걸쳐 떨어질 일이 없었던 파트너는――대답하지 않았다. 마음 속 어딘가의 젠디카르가 살아 있던 곳은 조용하고 공허로 가득했다. 난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네가 여기 있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본 적도, 이 만큼의 고독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니사?”
“응” 그녀가 손으로 한 빨간 과일을 들어올렸다. 토마토. 제이스는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수분과 탄력 있는 표면. 희미하게 신 냄새가 났다. “뭔가 궁금한 거라도?”
반은 니사가 신경이 쓰일 정도로 접시를 정확한 각도로 옆으로 세우고는 그 위에 손가락 몇 개를 올려놓았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오는 질문입니다만 혹시 괜찮으시다면 니사……공.” 그 직함은 속삭이는 정도였다―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당신은 자연 발생한 마법적 배열을 인식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지를 통해서 말이죠. 사실입니까?”
방 구석에 위치한 시계바늘 소리가 크게 들리듯 반의 상의를 장식하는 금줄 세공이 울렸다. 니사는 금줄 안의 에너지가 타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기디온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 아마 반에게도 들리지 않겠지. 그의 귀는 인간의 그것과 별 반 다를 것 없이 작았다.
그녀가 대답했다. “역선(Leylines)이에요.”
반이 예리하게 숨을 들이쉬며 콧구멍을 작게 만들었다. “참으로 흥미를 돋우는 대비로군요. 제가 사는 세계에도 비슷한 에너지가 하늘보다 더 높은 상공을 흐릅니다. 에테르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저희는 산 위에서, 또는 비행기계를 이용해 그 힘을 흡입시켜 장치 안에 모은 뒤 방출해 여러 가지 제품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쪽에서 사시는 분들도 이와 같이 하는지요?”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돌덩이가 하늘을 떠다니며 세계를 일그러뜨린다. 그물, 우리, ……격자.
토할 것 같은 충동이 그녀를 덮쳤다.
“아니오.” 니사가 어깨를 움츠러뜨리며 말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그 말이 입 속에서 막혔다. 어디부터 얘기하는 게 좋을까. “그게 아니고……이쪽에서 대지에게 묻는 겁니다. 뺏는 것이 아니라.”
“묻는다 구요?” 그 목소리가 경멸적으로 변했다. “물을 상대가 있습니까? 당신의 역선은 자연에서부터 발생한 현상이 아니라는 겁니까?” 신랄한 경멸이 동반된 경박한 목소리였다. 그의 양 눈의 모양과 조직이 불쾌한 각도를 잡았다. “뿌리에 철을 만들어달라고 산에게 부탁이라도 한단 말입니까? 먹을 것을 달라고 나무들에게 말한단 말입니까?”
“그래요.” 니사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토마토를 입으로 옮겨 씹었다. 수분이 입 안으로 퍼져나갔다――찌르는 듯 예리한 백색의 태양광, 죽은 자들의 잔해를 포함한 탁색의 흙. 상냥하게 간 논밭의 작은 길을 엘프와 드라이어드가 침묵을 지킨 채 조용히 지나간다.
하나의 생애가 이곳으로 옮겨져 와 입 한 가득 신선한 달콤함을 선사했다. 몇 개월이고 인내하면서. 고마워. 그녀는 그리 생각하며 토마토를 삼켰다.
기디온이 의자 위에서 몸을 움직여 니사와 반 사이를 살짝 가로막았다. “대사님. 니사가 사는 세계는……이곳의 기준과는 많이 다릅니다.”
방 구석의 두꺼운 문이 열리며 피곤이 역력한 모습의 제이스가 들어왔다. 그 뒤를 라비니아가 따랐다. “마음 깊이 뭔가 마실 게 필요해.” 그렇게 말하자 라비니아가 그의 손에 잔을 떠넘겼다. 이 냄새는 레몬, 하비스쿠스, 그리고 니사로선 알 수 없는 몇 가지의 약초 냄새가 났다. 제이스가 멍하니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당신을 돌보는 것도 제 역할입니다. 길드팩트.” 라비니아가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식사를 덥힐까요?”
“아냐, 고마워. 라비니아.” 그가 의자를 끌었다――오래된 암색 떡갈나무가 태양빛에 변색되어 있었다. 이 의자는 어디에서 온 걸까 하고 니사는 생각했다. 이 집보다도 훨씬 오래 됐어. 그 안에 있었던 생명은 지금은 속삭임 정도의, 흐린 날의 그림자 정도였다.
제이스의 접시에는 몇 가지 누르스름한 덩어리가 있었다. 치즈와 곡물. 식었어도 니사는 그 냄새를 방 저편에서부터 맡았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브로콜리가 들어가 있는 거야?”
“철분이 필요합니다.”
“싫어한다고――”
“눈치도 못 채시지 않았습니까.” 그 목소리에 거부권은 없었다.
반이 제이스를 냉담하게 바라보았다. “어린애가 따로 없군요.”
제이스가 한 스푼을 입에 넣고는 겨우 삼켰다. “응, 으, 전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눈 안에 10가지가 넘는 소리 없는 사고가 어른거렸다.
그 칼라데시인의 이마에 주름이 지어졌다. “경험에 영향을 받은 습관적 행동을 생각할 때 특정의 사건을 의식적으로 생각해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생애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예도 상정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요. 만약 전부를 잊어버렸다고 해도 그 자는 똑 같이 잘못된 결단을 내리고 같은 종류의 사람들을 끌어 모을 것입니다. 이건 제 확고한 생각입니다. 그가 한 손을 흔들었다. 황소가 꼬리로 파리를 쫓아내듯이. “순진하게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필멸자에게 그 정도의 유연성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종교적 성향을 가진 자는 자신보다도 위대한 무언가를 찾아내기 마련이지요. 그 신앙심을 보여주기 위해. 범죄자는 어디까지나 범죄자로 존재할 뿐입니다.”
제이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 상정은……운명론적인 관점이군요. 대사님.”
반이 눈을 깜빡였다. 한 눈씩 차례대로. 눈짓이 아닌 그의 독특한 버릇이었다. 니사가 이제까지 보아온 것과는 달랐다. “필멸자라는 집단은 마음은 있어도 일련의 복잡한 장치 중 하나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 장치를 조사하고 움직여 올바른 결과로 이끄는 것은 정말 단순한 작업이지요.”
침묵이 흘렀다. 제이스가 헛기침을 했다. “견학은 즐거우셨습니까?”
니사가 식탁을 둘러보더니 생선 구이 조각 하나를 집어 혀 위에서 녹는 것을 맛보았다. 흐르는 듯한 은빛 몸이 녹색 그림자 밑에서 빛났다. 떠오르는 이탄의 알맹이. 희미한 금속의 쓴맛. 그것은 그녀가 잘 아는 언어는 아니었지만 의미는 마찬가지였다. 고마워. 당신이 준 지혜를 잘 먹겠습니다.
반이 의자에 등을 기대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눈치채주셨으면 하는 구조적, 조직적인 결함이 다수 존재했습니다. 아래층의 돌출된 곳을 지지하는 대들보가 쪼개져 있더군요. 무게가 많이 가면 부러질 겁니다. 또 대부분의 침실에 있는 가구의 배열이 능률을 낮추고 있습니다. 올바르지 못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쓸모 없는 공간이 많아 효율적인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이 도서관에는 책 17권이 올바른 책장에 꽂혀 있질 않습니다. 2층의 등불 중 몇 개는 적절한 환기가 되어 있지 않으며……”
“메모해 두는 게 좋겠는걸.” 기디온이 짓궃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내가 전부 기억해둘게.”
반이 말을 끊었다. “듣기로 기디온 공의 운동장에서의 사고는 여러분에게 고용되어 있는 화염술사의 소행이라지요?”
“’고용’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을 것 같군요.”
“여러분의 고용 형태는 잘 모릅니다만 올바른 예방책의 결함에는 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이곳 도서실의 장서는 분야도 선택도 훌륭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화염술사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한 가연성 물질에 지나지 않겠지요. 혹시라도 이곳에 화재라도 난다면――”
“찬드라와는……의견이 충돌할 때도 있습니다만 신뢰 하고 있……” 제이스가 거기서 말을 끊었다. “찬드라는 어디 있지?”
니사가 얼굴을 들었다. 찬드라의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기디온이 어깨를 움츠렸다. “나도 찾아봤네. 모두의 물건은 적재적소에 사용하도록 일러두고 싶었으니까 말야. 마지막으로 본 건 옥상에서 뛰어 내려와서――”
니사가 숨을 죽였다.
“――그걸 릴리아나가 쫓아갔지.”
제이스가 퍼뜩 얼굴을 들었다. 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라비니아가 말을 꺼냈다. “길드팩트. 보고해도 되겠습니까?”
“뭐? 그래!” 제이스가 의자 위에서 몸 방향을 틀었다. “두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나?”
라비니아가 살짝 등허리를 세웠다. “조금 전 일입니다. 주라 대장의 부탁으로 베스 양을 추적시켰습니다.”
제이스가 기디온을 노려보자 그가 머쓱하며 말했다. “그녀는 사령술사야.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러고는 입 한 가득 고기를 씹었다.
라비니아는 체중을 한쪽 다리에 실어 방 안의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음량으로 갑옷을 움직였다. “그녀는 날라르 양에게 접촉해――”
반이 흥미롭다는 듯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시장구역을 돌아다니며 오후를 보내고는 그리고, 그러니까……플레인즈워크 했습니다.
“함께 말인가?” 제이스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기디온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어디로?”
“저희로선 그걸 알 길이 없습니다.”
“날라르―” 반이 조용히 말했다. 찬드라와 똑같이, 이곳의 누구도 완전히 재현하지 못했던 발음으로. “저의 동요를 용서해 주십시오. 오랫동안 듣지 못한 이름입니다.”
제이스는 접시를 옆으로 치우고는 양 손을 식탁 위에 올렸다.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만 이것도 저의 의무이겠지요.” 반은 무릎 위에서 손을 꼬았다. “피아 날라르와 키란 날라르는 혁명파 초기 활동 시기의 유명인이었습니다. 슬픈 표현이 됩니다만 그들은 범죄자로 영사관이 분배하는 에테르 비합법 분배 죄에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찬드라의 부모님입니까?” 기디온이 물었다. “난 칼라데시 출신이라는 것 조차 몰랐는데......”
“친부모입니다. 제 추측이 크게 틀리지 않는다면 12년 전, 그들은 밀수 임무에 딸을 연루시켰습니다――그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상세한 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 아이는 위험한 화염술 능력을 발현해 구치소에서 도망쳤습니다. 날라르 일족은 피난처에 숨으려 했지요. 조사반이 그들을 브라나트까지 추적했습니다만 체포 도중 마을 한 개가 불태워졌습니다. 공식 기록으로는 3명 모두 사망했다고 보고되어 있습니다.”
“12년 전?” 기디온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였던 거죠?” 니사가 조용히 말했다.
반은 입을 열려다 닫고는 생각에 잠겼다. 소맷부리를 덮는 금줄을 손가락으로 튕기다 겨우 말을 이었다. “아무쪼록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이건 전 정권의 권한 하에서 집행된 일입니다. 당시에서조차 그러한 만행은……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었습니다. 조사에 관련된 공무원이 공적인 철수명령을 무시하고 추적을 계속했습니다. 그 자는 횡령의 죄로 정식적으로 기소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횡령――!” 제이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의 양친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단호한 어조로 기디온이 말했다. “어쨌든 간에 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가 뭐든 찬드라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반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충동적인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달만큼이나 크단 말입니다.”
반이 손가락을 꼬고 그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기디온 공. 에테르란 우리가 호흡하는 대기 그 자체 안에 존재합니다. 대지에 내리는 비 속과 나무의 잎사귀 안에. 공학이라는 장갑을 껴야지 겨우 겨우 그 힘에 닿을 수 있습니다. 몇 만의 역할을 가진 부품이 각자 안전하게 그 역할을 다 해도 힘들지요. 우리는 이 방식을 정밀하게 추구하는 것으로 마법사가 마나를 직접적으로 사용해 일어나는 사고의 87.4퍼센트를 회피해 왔습니다. 이 표현을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화염술사는 특히……부수적 피해를 가져올 확률이 높습니다.” 반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적자색 눈동자가 그의 사고 안에서만 존재하는 어떠한 영상을 쫓았다. “과거에 화염술사는 심각한……비극을 일으켰습니다. 항상 의도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론 그들의 성격에 의한 것이었지요.”
“다시 말해 당신은 성냥이 불법이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기디온이 받아 쳤다. 니사가 이제껏 들은 적 없는 냉엄함으로.
반이 시선을 떨궜다. “이건 어디까지 추측일 뿐입니다만 여러분의 상태를 보니 날라르 양은 이 일을 이야기 하지 않은 것 같군요?”
“한 마디도.” 기디온이 대답했다. 그는 먹다 만 음식을 바라보며 한쪽 주먹을 쥐고 있었다.
제이스가 그를 동정하듯 바라보았다. “우리 중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지.”
“하지만 할 수도 있었잖아.” 기디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걸 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야. 찬드라지.” 니사가 말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팔 가장자리에서 미끄러뜨렸다. “우리 모두에겐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의 상처가 있어.”
그 때 찬드라가 눈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손가락 끝에는 불의 꽃을 피우고는. 단지 평온을 바라고 있었다. 흥분한 새가 긴장을 풀어줄 무언가를. 하지만 난 잘못 움직였다. 찬드라는 퍼득거리며 날아가버렸다.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반이 말했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예상이 가십니까? 설마 칼라데시로 갔을 정도로 성급한 건 아니겠죠.”
니사가 고개를 들었다. 제이스와 기디온의 시선이 교차되었다. 두 사람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스가 탈의실로 향하려 했다. “내가 칼라데시로 가겠어. 나라면 간단히 끝낼 수――”
한 손으로 칼자루 끝을 잡은 라비니아가 앞길을 막았다. “또 가십니까?” 그 어조에는 피곤과 실망이 가득했다.
제이스가 라비니아를 노려보았다. “내가 서류작업이나 계속 하고 앉아 있게 생겼어!”
“다른 두 분이라면 날라르 씨를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길드팩트는 안 됩니다.” 그녀는 기디온과 니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디온이 그 큰 손을 제이스의 어깨에 얹었다. “그녀의 말대로야. 좀 더 큰 시점으로 생각해보게 제이스. 나도 할 수는 있지만……” 그의 말이 거기서 끊겼다. “기분이 내키진 않는군. 강제적으로 하면 찬드라가 어떻게 나올지 알잖아.”
칼라데시. 기라푸르. 진주와 공업의 수도. 라브니카와 마찬가지로 결코 잠들지도 않고, 바람에는 금속의 냄새와 에너지의 소리를 품고는 서로 뒤엉켜 왕래하는 인파가 끊이지 않는 곳.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는 속닥대는 타인의 바다. 시선. 손 끝. 그리고 밀고 부딪치는 군중.
“내가 가겠어.” 그 말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입술을 통해 나왔다.
기디온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심인가?” 그 눈이 니사의 떨리는 손가락을 향했다. “니사, 혼자서 갈 필요는 없어.”
니사는 주먹을 꽉 쥐고 그 떨림을 진정시켰다. “내가, 칼라데시로 갈게. 반 씨가 안내해 줄 거야. 내가……”
내가 뭘 할 수 있지?
찬드라를 고향으로 돌려보낼 거야? 지금 그녀는 고향에 있어.
싸움에서 구해내? 그녀는 이미 어른이야. 하고 싶은 데로 할 수 있어.
그녀를 지켜내? 찬드라의 마음은 베일로스의 그것과 같아. 지켜줄 사람은 필요 없어.
“……함께 싸운다면.”
그게 가장 올바른 대답인 것 같았다.
(Tr. Mayuko Wakatsuki / TSV Yohei Mori)
첫댓글 뭔가 베포젠부터 이니까지는 베르세르크의 전반부 느낌이었는데 이걸 보니 어느순간 요정섬으로 가는 이야기가 되어버린것 같네요
칼라데시는 축제로 가득하니까요!
아하...이전 영문소설과는 다르게 묘하게 일본어를 번역한 느낌이 든다 싶었는데, 중역을 하신 건가요?
전 영어는 못해서요... 그래서 영어->일어->한글 이라는 이상한 번역물이 나왔습니다. 하하...
수식어(일본어판)가 많이 생략되어 있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려고 나름 신경을 많이 쓰고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