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불가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결을 타고 산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노파가 부르는 것이 분명했
다.
부엉이 소리가 장천(長天)의 달위로 겹치며 찬불가 소리와 합창이 되었다. 달이 흰 구름을 드러내며 산등선을 지나 서쪽 하늘가에 걸려 있었다. 차가운 겨울하늘 위에 걸려 있는 흰달의 모습이 서늘했다.
눈 구경하기 힘들었던 한 해가 운문산 자락에 무덤을 파고 있었다. 두꺼운 지층을 들어내고 그 속
에 지난 한해의 좌절과 희망, 사랑과 분노를 한꺼번에 쓸어넣고 새로운 시간을 낳기 위해 뜨거운 산통을 하고 있었다.
어둠이 나이테를 이루어 산 밑에서부터 층층을 만들며 일성암을 지나 산등선을 넘어 시간이 되
고 있었다.
"휴우!"
노경위가 내뱉은 한숨마저 시간이 되고 우주가 되었다. 산은 그렇게 모든 것을 망각시켰다. 산은 사고와 상식의 여건들을 무너트려 그저 산의 일부로 만들고 있었다.
법당 안에서 향내가 새어 나왔다. 집중력과 근기가 대단한 다래의 공덕이 신비하고 믿어지지 않았다.
ㅡ다래는 미륵의 딸이죠. 다래는 법 보살이며 문수보살의 화현이죠. 믿어지지 않으셔도 선생은 믿으셔야 해요. 벌써 다래의 원력에 의해 선생은 이곳 운문산의 산중 거사가 되어 있지 않으셨나요?
일성암의 시주자이며 신도라 말한 여자가 노경위에게 한 말이었다.
"댁은 뉘시죠?"
ㅡ저요?
"네, 댁이 신도이자 시주자라 해도 다래가 어찌 댁을 어머니처럼 기다리고 대하는 거죠?"
노경위는 암자를 떠나는 여자에게 물었었다. 여자는 아름다운 외모마냥 대답 또한 시원하고 간명 했다.
ㅡ어머니기 때문이죠. 미륵도 낳고 관세음보살도 낳는 불모에게 딸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여자는 단청 만다라를 그리는 불모(佛母)였다. 법당 안의 미륵탱도 그녀의 작품이었다.
"언제 또 오시나요? 이렇게 헤어지면 다래가 너무 힘들 텐데요?"
ㅡ호호, 언제 오냐고요? 선생께서 계셔 마음이 놓이네요. 모든 것이 미륵부처님의 안배일 터이죠.
여자가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남기고 산을 내려갔고 다래는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었을 뿐이었다.
법당안에 둥굴고 커다란 촛대 위에서 왕초가 푸른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추위가 등속을 파고 들
어 등짝부터 냉기를 밀어넣기 시작했다. 한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온몸이 오싹오싹 추워지는 만큼 정신은 맑았다.
그대 가면 찬 바람 불어 오는
대문은 어히 할까.
찬불가가 다시 들려왔다. 정신이 나간 노파일망정 노래의 청은 청승 맞았다. 노파의 신기는 노파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산을 짐승처럼 헤메고 다니는 노파의 오도송(悟道誦)이었다.
"남형, 당신의 억울한 원혼을 풀어 주겠다 해놓고 이 모양구료. 그런데 당신 억울하기는 한게요...?"
노경위의 독백에 촛불이 파르르 떨렸다. 굵은 촛농이 소영이의 눈물로 보였다.
ㅡ아빠!
소영이가 자신의 방문을 열고 소리를 치며 달려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환영이었으나 잔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 ...!"
촛불이 갑자기 꺼졌다. 칠흑의 어둠이 법당 안을 찾아왔다. 단청의 색감도 미륵탱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노경위는 라이터를 찾았으나 주머니 속에 없는 것을 알고 법당을 나왔다. 불빛이 없어도 경내는걸을만했다.
야밤 삼경에 촛불 하나 의지해 산길을 가려 하느냐. 정녕 촛불이 없이는 밤의 산길을 오를 수 없는 것이더냐.
밤의 물기가 법당의 처마를 타고 뚝뚝 떨어졌다. 그것은 짙은 먹색이었다. 노경위는 한 손을 내어그 물기를 손바닥 위에 받았다. 손이 금방 먹색으로 물들었다.
차갑고 검은 고독이 손바닥 위에서 퍼덕퍼덕 살아 움직였다.
12. 어떤 여자
랑(廊) 만다라
주인 윤 명
여자가 놓고 간 명함은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노경위는 법당 계단에 앉아 그 명암을 살펴 보았다.
여자는 화실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화실이라기보다는 만다라를 주제로 한 화랑을 하는 것이 맞을 듯 했다. 노경위는 얼마전 서교수를 만나러 갔을 때 보았던 만다라전을 기억했다.
여자는 일성암의 대 시주자였다. 여자가 암자의 유일한 신도이자 건물의 시주자인 이상 일성암의 주인은 그녀인 셈이었다.
"그토록 행복해 하다니..."
노경위는 여자의 명암을 지갑속에 넣고 다래를 떠올렸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던 어머니를만난 듯 행복해 하던 다래였다.
"으브!"
"다래야 이리와."
다래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노경위는 손을 뻗어 다래의 목을 쓰다듬어 주었다.
햇볕이 따뜻했다. 법당 앞 계단이 암자에서 아니 운문산 전체에서 가장 햇볕을 잘 받는 곳인 듯 했다. 그러고 보면 법당 안의 미륵탱은 운문산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래야 어제 그 아줌마가 그렇게 보고 싶었니?"
"... ...!"
"그런거야? 아줌마 이쁘더라."
"으브."
여자가 예쁘더란 말에 다래가 동조를 했다. 여자는 남일수와 어떤 관계였을까. 노경위는 다래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습지까지라도 산책을 갈 셈이었다.
"안갈래?"
"... ..."
다래가 손을 빼고 법당으로 들어갔다. 향내가 나지 않고 있었다. 향불이 꺼진 것인가.
노경위는 다래를 놔 두고 산책에 나섰다. 머리가 무거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남일수가 자꾸 떠올랐다. 잠시 잊고 있던 남일수였다.
남일수는 장안동에서 추적의 끈이 끊겼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허나 엉뚱하게도 노경위는 남일수의 과거 속에 들어가 허우적대고 있었다.
남일수가 살던 암자와 남일수가 사랑하던 다래와 남일수와 어떤 인연이 있던 여자와도 만났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윤명이라? 이름도 예뻐..."
노경위는 장안동에서 추적이 끊긴 남일수에 대한 새로운 의욕이 생겨났다. 소영이의 죽음으로 인해 잠시 자포자기에 빠졌던 수사 형사의 혼이 살아나고 있었다.
노경위는 심호흡을 하며 머리를 정리했다.
1. 남일수의 정체를 규명한다.
2. 남일수와 일성암의 연관을 캔다.
노경위는 아직까지 남일수의 정확한 인적 사항을 파악하지 못한 수사 단서를 일성암 주변에 집중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일수가 암자를 지어 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가 윤명이라는 여자의 물적 기부로 가능했다는 것이 파악된 이상 암자 주변을 좀더 살펴 본다면 무엇인가 재추적의 단서가 나올 것이란 판단이었다.
"영물께선 주무시고 계시나?"
노경위가 습지에 와 작은 돌을 하나 물에 던졌다. 물위에 작은 동심원이 생기기는 했으나 수면은 너무도 조용했다. 영물은 습지 깊은 진흙 속에서 겨울 잠을 자고 있는 것인가.
"흐흐!"
"응?"
노경위는 등줄기가 뜨끈했다. 뒤쪽에 노파가 쭈구리고 앉아 햇빛을 쬐고 있었다. 솜옷을 누빈 옷을 입고는 있으나 그것이 산중의 겨울 냉기를 감당하기에는 믿음성이 없었다.
"헐머니 정말 걱정되는군요."
" 큰 귀신이 왔었다카이?"
"네에?"
"큰 귀신 말이다. 쌍판을 보니 니 무섭제?"
노경위는 노파의 질문에 대답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조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굴 일이 아니었다. 노파는 불명확한 여러 언사를 통해 일성암의 어떤 사연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할머니?"
노파가 대답 대신 히즉 웃음을 지으며 쌈지를 열어 담배 꽁초를 하나 꺼내 태워 물었다. 지팡이로 삼은 작은 나무막대를 옆에 기대 놓고 담배 연기를 산중에 뿜어 놓는 노파는 영낙 없는 운문산의 삼신 할매였다. 산신령이 따로 없었다.
"종내기 니 순검이제? 내 말이 틀렸나카이?"
"뭐라고요?"
노경위는 노파의 말에 깜짝 놀랐다. 정신이 이상한 줄로만 알던 노파가 노경위의 신분을 말하고 있었다. 순검이란 순경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삼국사기로 읽는 타이젬 1.
-갑신에서 을유로
國手.
일국의 고수라는 명칭으로 쓰이는 국수가 우리 한국의 고유 명사가 된 것은 실로 역사와 근거가 있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동양 3국의 바둑 세계를 넘어 세계 최강이 된 이유도 최근의 천재적 기사들의 공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좀 더 깊고 먼 연원이 있다.
언제부터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바둑은 불교보다도 빨리 한반도에 들어와 고구려 백제에서 활발하게 발전했다.
백제 22대 개로왕 때에는 고구려 백제 양국에 바둑이 하나의 기계(棋界)를 형성할 정도로 융성을 떨친 듯하다.
개로왕 14년(468년)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조는 이렇게 적고 있다.
ㅡ 王召對棋果國手也
왕이 불러 대국을 해 보니 과연 국수였다.
개로왕의 이름은 경사(慶士)로 근개루라고도 했고 비유왕의 대를 이어 백제의 왕이 되어 마한을 복속하고 어지러웠던 백제를 강국으로 만든 성군이자 명문장이었다.
그는 왕위를 계승하자 군대를 일으켜 고구려의 국경을 계속 공격하고 쌍현성과 청목령에 성과 목책을 설치했으며 북한산성에 군대를 장기적으로 주둔시키며 당시의 아시아의 강국 고구려와 대치를 한다.
광개토왕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막강 전력과 일진일퇴를 벌이던 개로왕은 북위에(18년
472년) 사신을 보낸다.
ㅡ 신은나라가 동쪽 끝에 있고 승냥이와 이리(고구려 신라)가 길을 막아 비록 대대로 신령한 교화를 받았으나 때 맞추어 예를 표하기가 쉽지 않았나이다. 다만 멀리 대궐을 향해 바라보며 달리는 정만 끝이 없나이다.
(瞻望雲關馳精罔極)
중국 황제에 대한 사대적 사상이 엿보이기는 하나 문장의 정치힘과 중후함은 472년에 지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문장이다. 명문은 계속된다.
ㅡ옛날 요임금은 성인이었지만 단수(丹水)를 쳐 벌주었으며 맹상군은 어진이의 대표였으나 길에서 욕하는 이를 지나치지 않았나이다.
삼국시대에 이미 요순시대의 정치 이념이 도입되었고 맹자에 나오는 맹상군을 자유자재로 인용할 정도로 인문학적 지식도 대단했던 개로왕은 북위와 손을 잡고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고립시키고 남쪽에서 직접 교전을 벌여 고구려의 명군 장수왕과 맞선다.
이때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간첩(용간)을 이용한 반간계가 그 유명한 도림의 일화다.
도림은 고구려의 승려로 바둑의 고수였고 백제에 들어와 공공연히 바둑의 고수임을 자청, 개로왕의 부름을 받는다.
이 대목은 당시 고구려 백제 사회에 바둑이 굉장히 성행했고 국수라는 최고수급 기객들은 나라에관계없이 대접을 받았던 듯하다.
치열한 전쟁 상태에서 상대국의 고수를 불러 대국을 하고 '국수라 부를만하다'라는 언급과 곁에 두고 가까히 한 것이 그 모든 것을 반증하고도 남는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맞서 싸우던 이 용감한 개로왕은 마지막 죽는 순간도 비장하다.
개로왕은 한성에서 고구려군의 포위 속에서 아들 문주에게 이렇게 말한다.
ㅡ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겠지만 너까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당하여 나라의 계통을 보존하리오.
문주는 장수 목만치 조걸취를 이끌고 남하하여 웅진에 도읍을 정하고 문주-삼근-동성-무열-성-법-혜-무-의자왕으로 이어지는 사직을 이어간다.
바둑을 사랑했고 문장에 능했으며 싸움에 겁이 없었던 개로왕은 이렇게 비장한 최후를 맞는다.
반상에서 일국의 국수급 고수들과 쟁투를 벌였고 그로인해 바둑을 이해하지 못하는 몰이해로 타락한 군주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던 개로왕의 진면모를 이어받은 백제는 두고두고 바둑을 아끼고 사랑했다.
일본 정창원에 보관되어 있는 의자왕이 선물한 국보급 기반이 그것이다. 일본이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여 문화의 기반을 닦고 황실과 막부 등에서 바둑을 권장해온 전통도 따지고 보면 바로 백제의 영향이다. 백제의 국수의 아류가 바로 명인(名人)이다.
조선 중후기부터 한때 바둑의 쇠락이 있었으나 그때는 바둑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가 부진했을 때이고 보면 우리가 지금 바둑의 최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역사적 기반에 연원을 대고 있는 덕이다.
하여, 오늘 우리는 옛것을 상고하고 오늘을 다짐한다. 온고지신은 언제나 설득력이 있고 역사는 절대적으로 겸손한 자에게 미래를 열어 보여 준다.
다투고 싸우는데 온 나라가 소란했던 갑신년이 가고 화기만당(和氣滿堂)의 을유년으로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나는 노래한다.
이 노래는 나의 노래를 넘어 기우들의 노래이고 타이젬의 노래이며 나아가 한국의 바둑계의 노래이기를 바란다.
國手여 그대 한 시대의 이름이여
백제에서 조선을 거쳐 오늘 세계에 우뚝 선 國手여.
갑신년에도 그랬듯 을유년에도 그리하여
어려운 국가의 힘이 되어 다오.
* 그동안 불민한 학습과 바르지 못한 소신으로 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3개월이 행복했었답니다. 이름다운 인연들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인연도 있었습니다. 모두 잊으시고... 기우님들의 다음 1년이 행복하시길 빕니다. 모든 것은 인연입니다. 선연도 악연도...
12. 어떤 여자
"아, 칠성이 할머니요? 그 할머니 신기가 있어 운문산을 누비고 다니시죠."
"신기가 있는 것은 아나, 그 할머니가 일성암 주변을 맴도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노경위가 찾은 사람은 암자 아랫 마을의 새마을 지도자였다. 마을 이장은 군 이장단 회의 때문에 출타중이었다.
"아, 그건 장군 바위 때문일겁니다."
"장군바위요?"
"암자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 아시죠?"
노경위는 노파가 촛불을 켜 놓고 치성을 드리는 바위를 떠올렸다. 새마을 지도자는 서울 말씨를 쓰고 있었다. 그의 집은 지은 지 얼마 안된 듯 깨끗했다. 거실 안에는 독수리 박제와 괴목으로 만든 탁자가 눈에 띄었다.
"아 그 바위가 장군 바위군요?"
"맞습니다. 칠성 할머니가 신주로 모시는 바위죠. 그 아래에 밭이 하나 있었는데 남 뭐라는 사람이 매입해 암자를 짓는 바람에 할머니가 감정을 갖은 거죠."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할머니의 손자가 칠성입니까?"
노경위는 새마을 지도자의 부인이 내 온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한참 만에 마셔 보는 커피였다.
향이 좋았다.
"칠성이가 손자가 아니라 칠성신을 모시는 당주라 그리 부르는 겁니다."
칠성신이란 용왕신과 더불어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토착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용왕신이 바다와 우물 저수지 등 주로 물을 대변한다면 칠성신은 천문과 점지 신앙을 대변한다 할 수 있다.
"그렇군요. 참 그 밭 주인은 누굽니까? 동리 사람이겠죠?"
"강씨라고 저 윗집입니다. 여보 전화좀 해 봐."
"지금 넣고 있습니더. 아 집에 계시다카네예."
새마을 지도자의 아내는 경상도 말씨가 살가운 30대 후반의 여자였다. 두 젊은 부부가 알뜰살뜰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강씨는 집에 있었다.
"남일수라예? 그 자가 누근데예?"
환갑을 넘긴 듯한 강씨가 남일수를 되물었다. 노경위가 경찰 신분을 밝힌 것이 그는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허나 경찰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는 낮선 사내의 방문과 질문에 협조할 인상이 아니었다. 그는 경찰에 감정이 있는 듯 했다. 그런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이유 없이 배타를 당하는 경찰의 비애였다.
"저 위 암자터를 산 사람 말입니다."
"그 사람이 남일수라예? 아닐낀데..."
"선생이 땅을 파셨다면서요? 그런데 이름도 모르십니까?"
"가만..."
강씨가 방으로 들어가 한 통의 서류를 들고 나왔다. 부동산 매매 계약서였다.
" ... ...!"
노경위는 그 계약서를 보자 손이 떨렸다. 그러나 계약서상에 남일수는 없었다.
"남덕우...? 남일수의 본명이 남덕우였나...?"
노경위는 계약서에 적혀 있는 남덕우의 인적 사항을 적었다. 남덕우는 58년생이었다. 의문이었다. 남일수의 신원 확인 절차는 철저했다. 행자부와 경찰청의 국민지문 수집 자료는 세계에서도 정평이 난 자료였다. 열지문을 채집해 대조한 자료에서 나오지 않은 남일수가 남덕우일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했다.
"전화좀 한 통만 쓰죠?"
노경위는 바쁜 나머지 강씨네 전화로 성동서 지령실을 연결해 자신의 비번을 대고 남덕우를 조회했다. 조회 내역은 금방 나왔다.
"수배사실 없고 전과 사실 없고...본적이 네... 전남 장성군 북면..."
노경위는 남덕우의 인적 사항을 받아 적고 강씨집을 나와 암자로 올라갔다.
"남덕우의 주소지로 가 열지문을 확인해 봐야겠어. 어떤 조화가 있는 듯한데..."
노경위는 남일수가 남덕우의 이름으로 사회 생활을 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덕우와 남일수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암자에서는 다래가 노경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법당 앞에서 놀던 다래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래야, 우리 내일 며칠 여행 좀 다녀오자. 너도 좋지?"
"으브."
다래가 찬성을 하며 법당 안으로 들어가 단조리를 했다. 며칠 안에는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걸까. 다래는 단단하게 법당을 챙겼다. 노경위는 그런 다래를 바라보며 윤명이란 여자의 말을 떠올렸다. 다래는 과연 미륵의 딸이었다.
" 으브."
다래가 깨끗하게 빨아 놓은 속옷을 한벌 내 놓았다. 노경위 것이었다. 세탁기가 없는 암자에서 다래가 손빨래를 해 말려 놓았던 모양이었다. 노경위는 그런 다래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이제 다래의 신분을 정리해 줄 때였다. 주민등록도 만들어 주고 학교도 보내야 하는 것이다.
12. 어떤 여자
언양읍 사무소에서 조회해본 남덕우의 주민등록의 마지막 주소지는 대전시 중구 중촌동이었다.
남덕우는 88년 부로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있었다.
대전의 중촌동 사무소는 도시의 한복판에 있었다. 동사무소에서는 멀리 기념물로 보존하고 있는 교도소 망루가 보였다. 6.25 때 대전 지역의 우익 인사 1천여 명이 수장된 비극을 담고 있는 옛날 대전 교도소내의 우물과 망루를 보존하고 있었다.
남덕우의 열지문이 채집되었다.
노경위는 남덕우의 열지문 번호와 남일수의 열지문 번호를 비교해 보았다. 남일수의 열지문은 수사 자료로 형사들에게 회람된 사항이었다.
남덕우ㅡ 97988 . 89988.
남일수ㅡ 97889 . 89989.
두 사람의 열지문은 달랐다. 다른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남일수가 남덕우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산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었다. 열지문 분류번호가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열지문 중 3개의 지문이 틀린다는 것은 형제이거나 인척간일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형제간이군. 형제라..."
노경위는 남덕우의 주민등록 원본에 나타난 그의 가족 관계를 살폈다. 그러나 남덕우가 호주였고 부모는 이미 오래 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형제의 기록은 없었다.
"본적지를 가 봐야겠어. 어린 시절을 탐문하다보면 무엇인가 나오겠지."
노경위는 남덕우의 본적지인 장성으로 길을 잡았다. 24시 마트에서 핸드폰을 충전시키자 마자 전화가 왔다. 경무과장이었다.
"자네 수사를 재개한거야?"
"어제 지령실에 조회를 한걸 아셨군요?"
"그럼 이 사람아, 휴직을 한 형사가 타인의 수배 여부를 물었는데 보고가 들어오는 것은 당연하지. 휴직을 풀고 서장님한테 수사를 다시 시작했다고 보고를 드려도 되겠지?"
"정식 인사를 드려야 되는데 여건이 그러니 말씀 좀 잘 드려주십시요?"
"오케이. 노준호 화이팅!"
노경위는 전화를 끊고 차를 길가에 세웠다. 중국집 앞이었다. 아침도 거르고 출발한 탓에 배가 고팠다.
"다래야, 짜장면 먹을래?"
"으브."
노경위의 말에 다래가 신이나는 모양이었다. 암자에서 출발할 때 들고온 동화책이 다래 손에 들려 있었다. 짜장면 두 사발이 나왔고 다래는 고개를 숙이고 정신 없이 면을 입에 집어 넣었다. 그러고 보니 다래를 만나고 중국집엘 처음 와 본 듯했다.
"이런!"
정신 없이 짜장을 먹던 대래의 목에서 흘러내린 목걸이가 그릇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노경위는 다래에게서 목걸이를 벗겨 휴지로 닦았다. 둥근 메달 속에 다래와 소영이가 찍은 사진이 있었다.
ㅡ 사랑하는 다래와 함께.
" ... ...!"
사진 밑에 사랑하는 다래와 함께란 글씨가 보였다. 소영이가 컴퓨터를 이용해 뽑은 사진을 목걸이를 만든 모양이었다. 다래는 짜장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말을 못한다고 먹고 싶은 것도 말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노경위는자신의 무심함을 책했다.
장성은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광주 북쪽에서 우측으로 빠져 나가면 있는 작은 군이었다. 북면은 백양사가 있는 시골 마을이었다.
"으브. 으브."
다래가 백양사쪽으로 향하는 장성호반을 보자 소리를 쳤다. 아는 곳이란 뜻이었다.
"다래 너 여기 와 본적 있구나?"
"으브."
"그래 아빠하고 와 봤니?"
"으브."
그랬다. 다래는 장성과 연관이 있었다. 아니 남일수가 이곳과 무관치 않다는 뜻일 것이다. 남일수는 다래를 데리고 이곳에 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면의 한 시골 리(里)의 남덕우의 본적지의 지번은 모텔촌으로 바뀌어 있었다. 멀리 백암산이 보이고 앞으로 장성호가 조망되는 위치에 대여섯 채의 모텔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남덕우의 본적지는 그렇게 상전벽해로 변해 있었다. 인근 동리가 장성호로 수몰되고 모텔촌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냥 뒤지고 다니는 수밖에 없겠군."
노경위는 모텔에 방 하나를 잡고 다래를 데리고 백양사 초입에 있는 상가로 나왔다. 막막하기는 매일반이었다. 상가 앞으로 절로 들어가는 행락객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고즈넉하기 그지 없는일성암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노경위는 남덕우의 본적지를 중심으로 탐문할 생각을 하고 저녁을 먹었다. 상가내의 식당에서 파는 된장국에 밥을 말아서 다래가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밖에 나오면 다래는 뭔지 모르게 위축된 모습이 보였다. 무엇인가가 무섭고 두려운 모양이었다.
12. 어떤 여자
북면 상리(上里)에서 남덕우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상리는 거의 전부 장성호로 수몰되어 버렸고 마을을 형성하고 살던 사람들 태반이 광주나 인근 장성 등으로 이주를 해버린 탓이었다.
상리는 법정 행정리에서 없어진 상태였다.
"저 자리가 삼골이 있었던 자리긴 한데, 모두 이사를 갔지. 여섯 가구인가 아마 그랬지..."
모텔촌 근방의 외딴집에 살고있는 한 촌노가 삼골을 기억했다. 삼골은 모텔촌이 자리 잡은 곳의
옛 지명인 모양이었다.
"그 곳에 살던 남씨를 혹시 기억 하십니까?"
"남씨? 삼골은 거의 남씨였어. 남씨들이 모여 산 마을이지 다들 가난하게 살았지."
촌노는 삼골을 잘 기억하고 있었으나 남덕우는 몰랐다. 그는 80 노인이었다. 삼골은 남씨의 집성촌이었던 모양이었다.
"남덕우라고 올해 마흔 대여섯 되는 사람인데 모르시겠습니까?"
"그걸 어찌 기억하나? 집집마다 애들이 많았어. 내가 아는 어른들은 거의 죽었지. 아, 절에 한번 가봐."
"백양사에 말입니까?"
"그래, 그 안에 찻집을 하는 아주매가 있지. 그 여자가 삼골에 살았어. 교통 사고로 서방과 자식들을 한꺼번에 잃고 거기 살고 있어. 불쌍한 여자지."
노경위는 촌노에게 인사를 하고 백양사로 향했다. 다래가 경내로 들어서자 마냥 기분 좋아했다.
쌍계루 앞 커다란 연못에 와서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경내의 매점에서 어류 먹이를 한 봉지 사 물속에 넣어 주었다.
"으브!"
다래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청단홍단(靑丹紅丹)의 어류들이 모여 들었다. 어른 팔뚝만한 비단잉어들이었다.
"다래야, 먹이 놀다가 저곳 찻집으로 와 ?"
"으브."
노경위는 다래에게 찻집을 말해주고 그 안으로 들어 갔다. 차집은 연못과 붙어 있었다. 간단한 차와 기념품 등을 파는 작은 가게였다. 다래는 백양사의 경내를 어느 정도 아는 듯 했다. 남일수가 삼골에 오면 찾곤 했던 모양이었다.
"삼골에서 사셨지요?"
"누구시죠?"
개량 한복을 입은 40대 초반의 여인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곱게 늙어가는 여자였다. 남편과 아이들을 불시에 잃은 여인은 절집의 처마에 생도지망을 잇는 찻집을 내고 자신이 인생을 연소시키고 있는 것일까.
여인의 몸에서는 향내가 나는 듯 했다.
"아, 죄송합니다. 먼저 녹차 두 잔만 주시죠. 삼골에 살던 사람인데 그 사람 좀 찾으려고요."
"누구를 ...?"
"혹시 남덕우나 남일수라는 사람 아십니까?"
"아니, 그 형제들을 왜 찾죠?"
연인이 녹차를 내 오며 물었다. 노경위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들이 형제입니까?"
"네. 형은 불구로 살다 어린 시절 죽었다는 소리만 들었고 일수씨는 제가 좀 알죠."
노경위는 찻잔을 든 손이 파르를 떨렸다. 남덕우와 남일수는 형제간이 맞았다. 남덕우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고 남일수가 죽은 형의 신분으로 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도 일수씨 아이를 데리고 이곳에 왔었는데...그런데 그를 왜 찾는거죠?"
"사실 저는 경찰입니다. 좀 도와 주셔야겠습니다."
"형사분이신가 보죠? 그런데 일수씨가 무슨... 도박 같은 걸로 걸렸나요?"
여인이 질문했다. 남일수가 도박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가 죽었습니다. 피살되었지요."
"일수씨가 죽었다고요?"
"네. 그를 아는 대로 말해 주십시요?"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죽음에 대해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비극적인 자신의 가족사가 떠오른 것일까.
"으브."
"오, 너 다래 아니냐?"
여인이 찻집으로 들어오는 다래를 반겼다. 다래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란을 느끼는 듯 했다. 찻집 앞마당에 옷을 잘 입은 숫닭 한 마리가 노는 것이 보였다.
여인은 남일수에 대해 어떤 얘기를 들려줄 것인가.
12. 어떤 여자
찻집 벽에는 벽사소복(霹邪召福)이라는 글씨가 써 있었다. 백양사 어떤 스님이 써준 휘호인 모양이었다. 닭의 울음 소리가 복을 부른다는 뜻의 신년 덕담인 셈이다.
닭은 12지신(神) 중 10번째 영물로 시간적으로는 5시에서 7시를 지키며 계절로는 8월에 해당하고 방위로는 서쪽을 관장하는 신이다.
닭은 문. 무. 용. 인. 신의 5덕으로 백양사의 경내에 한 해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유유자적 노닐고 있었다.
다래도 마찬가지였다. 다래는 명부전앞에서 놀고 있었다. 백양사 명부전은 조선 중종의 왕후이자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 윤씨가 하사금을 내려 지어진 건물로 고색창연했다.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의 추증 임금이었다.
"제가 고인이 된 남편을 따라 삼골에 들어 왔을 때 일수씨네는 삼골 사람들이 아니였어요. 허름한집은 남아있었지만 식구들이 모두 떠난 상태였죠."
"그런데 그를 어떻게 알고 계시죠?"
"처음엔 남편에게 들었지요. 특히 일수씨가 남편의 친구인지라 더욱 그랬죠. 그리고 가끔 일수씨가 고향을 찾아오기도 했으니까요. 노모와 불구인 형과 함께 살다 형이 죽자 마을을 떠나 도시 생활을 한거죠."
"그는 주민등록도 없이 살았더군요. 형 남덕우는 호적상 아직도 살아있고요."
"그런 일도 있나요?"
여인은 남일수의 이야기를 해 주면서도 자세한 내막에는 한계를 들어냈다. 어린 시절의 고향에 내려오던 사람에 대한 한계일 터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여길 온 것은 언제였죠?"
"봄이죠, 아마... 다래와 함께 와 한동안 있다가 갔으니까요."
"한동안이라면?"
"한 달 정도 있었을 거예요. 모텔에 묵으면서 우리 가게에 매일 오다시피 했지요."
"별다른 일은 없었나요?"
"워낙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이라... 아, 한번 한 여자가 찾아온 적이 있어요. 윤명이라고 하는 아주 예쁜 여자였어요."
"윤명이라고요?"
"네, 워낙 인상에 남아 이름까지 기억이 나네요."
노경위는 찬물을 마셨다. 얼마전 일성암을 찾아왔던 여자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떤 관계로 보이던가요?"
"애인이겠지요. 애인이 아니고서야 서울에서 이 먼곳까지 찾아와 하룻밤을 지내고 가겠어요?"
여인이 찻집으로 들어오는 손님들을 보고 그쪽으로 가 주문을 받았다. 손님들이 몇명이 더 들어오고 있었다.
"절좀 한바퀴 돌다 오겠습니다."
노경위는 찻집을 나와 다래가 놀고 있는 곳으로 가 법당 안을 보았다. 법당 안에는 아미타불과 로사나 비로사나불이 놓여 있었다.
"다래야, 지난번 왔던 아줌마 말야?"
"으브."
다래가 생각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노경위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래에게 죽은 아버지의 여자를 묻는다는 것이 잔인해 보였다. 그리고 다래에게 속 시원한 이야기를 들을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응?"
"... ...!"
노경위의 시선이 닿자 다래는 두 발을 모았다. 대래가 신은 운동화의 한쪽 코가 뚫려 있었다. 지난번 서울에서 사준 운동화가 아니었다. 빨아 널어 놓았다가 경황 중이라 헌것을 신고 따라온 모양이었다. 자신은 좋은 아버지가 되긴 틀린 것인가.
"다래야, 운동화 사올께. 여기 잠깐 있어?"
"으브!"
"같이 가자고? 그래 같이 가자."
노경위는 다래를 차에 태우고 장성읍으로 나가 다래의 운동화와 양발 그리고 속옷을 사 다시 절로 돌아왔다. 찻집의 손님은 모두 나가고 없었다. 바깥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산문(山門)을 닫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인가.
백양사는 동안거 중이었다. 한소식 깨달음을 얻어 보겠다고 전국의 눈푸른 납자들이 모여 들어 행주좌와어묵동정간을 살피고 노려 나름의 선기를 가다듬고 키우는 순간이었다.
"오늘 주무시고 가시나요?"
여인이 주방을 정리하며 물었다. 그녀도 하루를 마감하고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경위는 아까 물어 보지 못했던 질문 하나를 얼른 던졌다.
"남일수를 기억하는 사람이 혹시 또 없을까요?"
"작은 시골이라 친구들이 몇명 되지 않았나봐요. 어린 시절 친구 중에 서울에서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고 남편이 말하기는 하던데...조명인이라고 바둑 잘 두는 사람있죠?"
"네에? 뭐라고요?"
"남자니까 바둑 아실 거 아니예요? 조명인이라고 한국에서 바둑 제일 잘 두는 사람 말이예요. 그 분이 어린 시절 친구라고 남편이 자랑을 많이 했지요. 저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요."
"이런 ...?"
노경위는 등짝을 누군가에게 심하게 맞은 충격을 받았다. 명인 조풍은이 남일수의 어린날의 친구였다는 증언이 아닌가. 이 소리는 전혀 뜻밖이었다. 노경위는 모골이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12. 어떤 여자
수사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명인 조풍은이 장애로 등장한 것이다.
그는 남일수 사건의 최초 단서였다. 남일수가 품속에 마지막 남은 비상금마냥 꼬깃꼬깃 접어 간직하고 있던 메모에 기록되어 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 메모로 인해 미궁에 빠질 뻔하던 남일수의 추적 단서가 되어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거다.
그러나 장성에서 얻은 방증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그것은 의외였다.
"내가 그에게 당했던 것일까?"
노경위는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조명인이 누군가. 그는 기예로 당대의 1인자이며 인격적으로도 존경받는 인물 아닌가. 노경위는 대구와 상왕십리의 그의 집에서 만났던 조명인을 생각했다.
"무슨 까닭이 있었던 것일까?"
노경위는 차를 몰며 계속 중얼거렸다. 다래는 잠이 들어 있었다. 노경위는 새벽을 달려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수사는 생물과 비슷했다. 수사는 앉은뱅이로 어둠 속을 걷는 걸음이기도 했다. 수사는 현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특히 살인사건은 더욱 그랬다. 수사는 바로 이 점을 착안, 사건 현장에서 용의자를 추론하는 기법이 발전되어 왔다. 범인은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믿음이 형사들 사이에 있었다.
조명인은 남일수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유년기의 친구였던거다. 그런데도 그는 남일수를 초면으로 증언했다. 재야의 바둑의 고수가 찾아와 대국을 요청했고 그에 응했다는 증언이었다.
조명인의 증언은 진실했다. 성의와 미더움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왜 유년의 친구라는 말을 하지않은 것일까.
차가 성동서에 들어설 때까지 노경위는 그 생각을 했다. 다래는 계속 자고 있었다. 아침 6시가 조금 넘고 있었다. 노경위는 차에 다래를 놔두고 형사계로 들어섰다.
"어, 노반장 아니십니까?"
"일찍도 일수를 찍는구료."
노경위는 형사계를 나오는 젊은 기자와 말 인사를 했다. 중앙 일간지 사회부 소속의 신참 기자였다. 그들은 새벽에 대여섯 곳의 경찰서 형사계와 유치장을 돌며 신문사로 출근하는 것이 일과였다. 어떤 일이든지 쉬운 게 없는 법이었다.
"에이, 고시래!"
"어어?"
"아이쿠 반장님?"
차형사가 신참 기자를 뒤따라 나와 복도에 소금을 뿌렸다. 기자가 형사들의 터부를 건든 모양이었다.
"당직이야?"
"네, 춥죠? 어서 들어 오세요. 반원들은 모두 목욕탕엘 갔습니다. 저놈이 헛소리를 해 고시래를 하는 중입니다."
"하하, 그게 다 미신이야. 컴 좀 사용할께. "
노경위는 차형사의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형사용 컴에만 있는 각종 수사 자료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형사 당직반에는 한가지 터부가 있었다. 그것은 하루를 마감하는 새벽에 누군가 외부인이 당직반을 찾아와 한가하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가 끝나자 마자 전화벨이 울린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살인이나 강도 도주 같은 강력 사건이.
노경위는 남덕우의 인적 사항을 중심으로 한 종횡의 인적 관계를 찾아 보았다. 그를 중심으로 한 사돈의 팔촌까지의 각종 기록이 나열되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특별히 주목할 대목도 나오지 않았다.
"차형사, 이따 봐."
"오늘부터 출근하십니까?"
"오후에 나와 서장님께 인사 드리고 일을 시작할꺼야."
노경위는 경찰서를 나와 집으로 향하다가 조명인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조명인은 집에 있었다.
그는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시간이 되시면 한번 뵐까 하고 전화 드렸습니다."
"오전에는 한국기원에서 대국이 있으니 오후에 봅시다. 오후엔 장안동에 그림 전시회가 있는 데..."
"장안동요? 제가 오후에 그리로 가 전화를 드리죠. 어떤 화랑입니까?"
"랑 화랑이라고 하여튼 이따가 봅시다."
조명인이 전화를 끊었다. 그는 편안하고 여유가 있었다. 그가 랑 화랑을 말했다. 랑 화랑 이라면 윤명이 주인으로 있는 화실이 아닌가.
"휴!"
노경위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렀다. 망치로 뒷머리를 맞은 듯했다. 아파트단지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기다리는 눈은 오지 않고 비를 뿌리려나. 다래가 무거운 눈꺼플을 띄며 차문을 열었다.
"내리자꾸나. 집엘 다 왔다."
다래가 고개를 푹 박고 노경위의 뒤를 따랐다. 조금도 즐겁지 않은 표정이었다. 다래는 산에 있을 때를 생각하는 것일까. 산에서 인사를 못하고 온 그 무엇이 있는가. 노경위가 다래의 작은 손을 잡았다. 따뜻하기도 하지...언제 사람의 따뜻한 손을 잡아본 적이 있던가.
13. 장단 서벽
무엇을 기다려 왔던가.
어둠의 길목을 지키고 서서.
떠오르는 별을 기다리며
나는 귀신이 되었다.
비호는 김포의 한 초막에 와 있었다.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강안 마을의 한 집이었다. 여름 장마가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어김 없이 집들이 덤불처럼 떠내려가는 강안 마을이었다.
그곳이 가난한 비호의 가족이 사는 동리였다. 그곳에 늙은 노모와 아이들 둘이 살고 있었다.
농토는 애당초 없었고 노동력마저 없는 탓에 생도지망이 전적으로 비호의 손에 달려 있었다.
비호의 손에는 쌀 몇 말과 미역 한 단 그리고 굴비 몇 마리가 들려 있었다.
"아부지!"
"아부지!"
먼저 비호를 알아 보고 열살, 여덟살 되는 아이들이 강둑을 타고 달려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었다. 죽어도 그리워 죽지 못할 아이들이었다.
"송아! 장아!"
두 아이가 파도처럼 다가와 온 몸에 안겼다. 그리움과 보고픔으로 병이된 아이들이었다. 신은 세상에 여자와 남자를 만들어 그리움을 만들고 자식을 주어 사랑을 알게 한다. 그리움을 모르는 자 사랑을 모르고 사랑을 모르는 자 어찌 그리움을 안다 하나. 돌림병으로 죽은 아내가 서러웠다.
"할머니는?"
"강에 조개 캐온다고..."
"조개를 ?"
노모는 강에 나간 모양이었다. 가난한 강 사람들에게 강조개는 유용한 식량이었다. 강가의 자갈과 모래가 뒤섞인 곳을 조금씩 파다보면 어른 주먹만한 조개가 지천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이었다. 물은 얼었고 바람은 차가웠다. 집안에 식량이 떨어진 게 분명했다.
"아부지, 이거 쌀이야? 누나 이거 쌀이다."
장이가 보퉁이 속에 든 쌀을 확인하고 소리를 쳤다. 입고 있는 입성이 거지가 따로 없었다.
"춥구나. 어서 집에 들어가자."
비호가 아이들을 몰고 집으로 들어갔다. 보퉁이를 풀고 노모를 마중하러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노모가 들어 왔다. 작은 바구니에 강조개가 가득했다.
"엄니?"
"오, 애비구나. 얼굴이 왜 그 모양인고? 고생이 많은가 보구나?"
노모가 조개를 항아리에 쏟아 놓고 비호의 두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양식이 떨어진 모양이군요. 오늘 오기를 잘 했네요."
"웬 쌀이니? 보리나 겨 등과 바꿔올 걸 그랬구나."
노모가 쌀과 미역 굴비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길고 긴 겨울의 초입이었다. 춘삼월 보리고개라는 말은 배 부른 소리였다. 강안 마을 사람들은 겨울의 초입이 되면 식량 독이 절독이 되곤 했다.
"엄니, 몸좀 녹이고 밥을 지으세요. 산에가 나무좀 한짐 해올께요."
비호는 헛간에 변변한 땔감이 없는 걸 보고 나무지게를 지고 나섰다. 가까운 산들은 산주인들이 나무해 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노모 혼자서 강둑을 돌아다니며 나무토막을 주어 불을 때며 살았을 터였다.
비호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산으로 갔다. 나무는 지천이었다.
"아부지, 윤초시네 머슴들이 난리칠 텐데?"
송이가 걱정을 했다. 그러나 비호는 불에 잘 타는 참나무를 골라 뚝뚝 분질러 나뭇짐을 만들었다. 나무 한짐이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니놈이 죽을려고 생떼를 쓰는구나? 초시 나리댁 산의 나무를 마구 꺾다니..."
윤초시댁의 머슴들이 달려와 나뭇짐을 막아섰다. 가난한 동리 사람들이 얼어 죽어도 자신들 산은 울울창창해야 속이 시원한 양반들이었다.
"지랄들 말고 눈 감어라. 니놈들 내가 누군지 모르나?"
비호가 나무지게를 받쳐놓고 한 머슴의 손목을 잡아 꺾어 논바닥에 집어 던지며 말했다. 나가 떨어진 머슴이 별이 보이는지 정신이 나간 듯 했다.
"초시어른 알면 어쩌려고?"
"가서 나불거려라. 니놈들과 초시놈까지 한 두름에 엮어줄 테니.. 내가 황단의 왈자라는 걸 모르나?"
비호가 또 다른 머슴의 가슴팍을 걷어 차고 소리를 쳤다. 그의 두 눈에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머슴들이 기겁을 하고 물러섰다.
"가자. 집에 가서 밥먹자꾸나."
비호가 나뭇짐을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노래를 하며 뒤를 따랐다. 일강(一江)에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강화에서 서강으로 들어가는 세곡선이었다. 한양으로 가는 세곡은 저리 많은 데 강 마을의 쌀독은 항상 곤궁했다.
13. 장단 서벽
비호는 미륵이 마련해준 재물로 노모와 아이들을 한양의 칠패로 이사를 시켰다. 칠패의 주막전에
작은 장국밥집을 내어 노모와 아이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놓고 비호는 야밤을 틈타 미륵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황천길에 잠시 귀휴(歸休)를 얻었던 시간이었다. 지난 며칠간은 자식으로 아비로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검계안에서 살수(殺手)로 키워진 비호였다. 살수에게 대수인(代囚人)의 계로 환명(還命)을 준 것은 더 크게 죽을 자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검계인은 누구보다 그것을 알고 행동해야 한다. 잠시간의 인간사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왔느냐? 앉아라."
미륵이 비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비호를 내 놓고 반길 처지가 아니었다. 비호는 호적상 죽은 몸이었다. 비호가 죽던 날 포청에서는 죄수 한명이 탈옥을 했다. 살인범이었다. 그는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었으나 비호가 그를 대신해 나다닐 수도 없었다.
"가족들은 안정시켰느냐?"
"그러합니다."
"누구라도 찾을 수 없도록 단단하게 단조리를 했느냐?"
"네."
"됐다. 자 받아라."
미륵이 품속에서 자신이 항상 품고 다니던 비수를 꺼내 비호에게 주었다. 손잡이에 미륵이란 글자가 선명했다.
"오포장인지요?"
"아니다. 이장곤이다. 그의 집은 안국동 초입이다. 등청길을 노리는 것이 적당할것 같구나."
미륵은 비호에게 용호대 대장 이장곤의 제거를 지시하고 있었다. 비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 속으로 오포장을 생각하고 있던 탓이었다.
"오포장은 내가 죽인다. 사실 오포장이 너를 살려내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너에게 은인이라 할 수도 있다. 너의 손으로 죽인다면 잔인하지 않느냐?"
"이 칼을 내리신 이유는 ...?"
비호가 미륵의 분신 같은 칼을 품속에 안으며 말했다. 그것은 자칫 미륵에게 엄청난 반격이 될 수 있는 물증이기도 했다.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그 칼의 의미는 살아 남으란 뜻이다. 꼭 살아 남아 우리 단 하루만이라도 좋은 세상에서 살아 보자꾸나."
"두령...!"
미륵이 비호의 한손을 잡고 등짝을 두드려 주었다. 사내 둘이 속울음을 울었다. 그것은 산짐승의 신음소리였다. 진정 뜨거운 사내들만이 나눌수 있는 밀어였다.
"일이 성사되면 인천으로 가 남일수와 함께 있어라. 그러다 세상이 바뀌었다 소리가 있으면 나오거라."
"네."
비호가 미륵에게 큰절을 하고 방문을 열고 담을 훌쩍 뛰어넘어 달속으로 사라졌다.
"호호, 두령?"
"아니?"
미륵이 느닷없는 가희의 출몰에 기겁을 했다. 가희는 잠도 자지 않고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뭘 그리 놀라죠? 무슨 죄라도 진 사람같네요?"
"험, 죄는 무슨? 그런데 이 야밤에 어딜 싸돌아 다니는 거냐?"
미륵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비호를 본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오포장과 단 둘이 꾸민 일이었다.
아니 오포장 혼자서 일을 꾸미고 자신에 엄청난 액수의 뇌물을 요구했던 사안이었다.
"두령, 오포장이 답을 받아오라던데요? 마빡은 언제 보내는 거냐고요?"
마빡은 뇌물을 지칭하는 검계의 은어였다. 우물에서 숭늉을 기대하는 인사였다. 챙기는 것은 인정 사정 없기로 소문난 오포장이었다.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해라. 염전을 내 놓았으니 팔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미륵이 염전을 얘기했다. 애초에 그리 큰 뇌물은 줄 생각이 없었다. 다만 미륵에게 올 뇌물을 기다리다 죽음을 맞을 오포장이었다. 이왕 죽을 바에는 꿈이라도 야무지게 꾸다 죽으라는 뜻으로 미륵이 쇤 소리를 한 것이었다.
"엄청난 마빡을 줄 모양이죠? 그런건가요?"
"그래. 기분 좋냐? 니년 오빠 재물이 생긴다니까?"
"호호, 그런데 어째 기분이 알싸하네요? 왜 그럴까?"
"나가봐."
"호호, 꼴보기 싫다 이거죠. 그런데 아까 담을 넘어 사라진 그 자 많이 본 인사던데...이장곤이 어떻고 하면서..."
가희가 미륵을 쏘아 보았다. 과연 염탐과 정보 수집에 일가견이 있는 가희였다. 달리 오포장의 수족일까.
"이런 능글 맞은 년이..."
미륵은 방문을 닫고 가희를 이불 위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웃통을 벗었다.
"어멋, 두령?"
"입 닥쳐라. 앞으로 너는 나의 계집이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사는... 알았느냐?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