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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성하기자 2012-11-05 2:20 pm
(전글에 이어)
타슈켄트의 고려인들
모스크바를 떠난지 3일만에 타슈켄트에 도착하였다. 날씨는 무덥고 공기는 건조한 느낌이 들었고, 사람들 역시 모두 조선사람 비슷하게 생겨서 누가 조선인이고 누가 우즈베크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먼저 시장으로 찾아갔다. 아무데 가나 조선인 교포들은 김치장사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꾸일육이라고 한 농민시장에 찾아가니 정말로 많은 조선인 교포할머니들이 조선말로 주고받으며 김치를 팔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김에 조선말로 인사를 하고 김치를 하나 사들고 이것저것 물었다. 나이는 60세 이상인 듯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말씨가 다른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어데서 왔는가고 물었다.
내가 북조선에서 왔다고 하자 할머니는 반가와 하면서 무슨 일로 왔는가고 물었다. 나는 좀 볼일이 있어서 왔다며『처음 오다보니 잠자리도 불편하고 뭘 좀 알아보자고 해도 힘들군요. 할머니 혹시 집에 자리가 좀 있으면 이틀만 묵어 갈 수 없습니까?』하고 묻자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좀 있으면 영감이 오는데 한 번 말해 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저기 시장을 돌아보고 다시 찾아갔는데 할머니는 사정이 있어 그렇게 못하겠다며 딱 잡아떼는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옆에서 김치장사를 하던 교포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꼴이 좋지 못한 생각이 떠올랐다. 왜 이럴까… 나는 모욕을 당한 듯 너무도 부끄러워 대충 인사를 하고 급히 자리를 떴다.
내가 시장을 막 나서려는데 교포 한 사람이 나를 붙들고 좀 도와달라고 러시아어 절반 조선말 절반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그는 한 손에 쌀자루를 쥐고 한 손에 남새를 비롯한 부식물을 들었는데 쌀자루를 좀 메달라는 것이다.
얼결에 나는 그를 보고『어디까지 가는지 제가 들어다 들이지요.』라고 말하자 그는 말씨가 다른 나를 빤히 쳐다보며 어데서 왔는가고 물었다. 나는 또다시 모욕당할까봐 잠시 망설이다 북조선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미안해하며『이거 참 안됐소. 나는 여기서 사는 고려 사람인줄 알고….』하면서 우물쭈물 하는 것이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여기서 사는 고려 사람이나 조선에서 사는 고려 사람이나 다 같지요. 사양말고 제가 메다 드리지요.』하고는 쌀자루를 냉큼 둘러메고 어디로 가는지 가자고 하였다. 버스 정류소에 나오자 그는 이제 버스를 타면 된다며 담배 한 대 권하는 것이다.
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그가 무슨 일로 왔는가고 물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이 나갔다.
『장사를 좀 할까 왔는데 말도 잘 통하지 않지, 잠자리도 온전치 못하지. 그래서 이렇게 다니며 거처할만한 곳을 찾던 중입니다.』
그러자 그는 지금 여관들도 시원치 못하고 특히 조선 사람들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힘들거라고 하며 누추하지만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는데 처와는 이혼하고 15살짜리 어린 딸을 데리고 살았는데 여름에는 우크라이나에 가서 수박, 참외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집에서 화투놀이나 하면서 산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분명 나를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보다도 장사를 한다는 말을 듣고 나의 돈주머니를 바라보고 데려왔다고 생각했다.
당시 타슈켄트 역시 소련의 다른 도시들처럼 중국 교포상인들이 장사로 많이 쓸러 들었는데 그는 중국상인들을 집에서 재우고 그들에게 돈을 받아먹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중국 사람들이 돈이 많다느니, 어느 때 누구는 돈을 얼마 주고 월 선불하였다느니 하면서 한참 엮어댔다.
나는 아무래도 그에게 불행한 나의 신세를 솔직히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저녁 식사 후 말하려고 했으나 돈을 기대하고 있는 그 에게 차마 말할 수 없어 그냥 잠들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난 나는 그에게 타슈켄트에 오게된 사연을 이야기하고 어디서 일할 만한 곳이 없는가고 물었다.
북조선에서 도주했다는 말을 들은 그는 대번에 태도가 달라졌다. 그는 여기서는 위험하기 때문에 살 수 없다느니, 북조선에서 도망친 사람들은 모두 북조선에서 체포해 갔다느니 하면서 빨리 딴 곳으로 자리를 옮기라는 것이다. 나는 도랑물처럼 얕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하룻밤 자고난 숙박비를 물고 일어서면서 물었다.
『
여기 조선인 꼴호즈(집단농장)들이 많다는데 주소를 좀 알려 주실 수 없습니까?』
그는 꼴호즈 이름들을 적어주었다. 김병하 꼴호즈(협동조합), 레니쓰까야 꼴호즈, 빨리따지역 꼴호즈, 우즈베쓰꺄야 꼴호즈 등 6개의 꼴호즈 이름들을 적었다.
꼴호즈 순례
나는 먼저 김병하 꼴호즈를 찾아갔다. 꼴호즈에 들어선 나는 처음 한동안 어리둥절하였다. 북한의 농촌처럼 어지럽고 그야말로 촌 냄새가 확 풍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을의 소도로와 집마당까지 모두 시멘트로 포장하고 집집마다 앞마당에는 포도 넝쿨이 우거지고 매 가정마다 큰 단층 주택들이다. 북한의 농촌 전경과는 대비할 바 없이 부유한 살림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어깨가 처지는 것 같았다.
꼴호즈 사무실이라고 생각되는 큰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집은 사무실이 아니라 꼴호즈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여관이었다. 내가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등뒤에서 어디로 들어가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조선인 젊은 여인이 행주치마를 두른 채 올롱하게 쳐다보며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인사하고 회장이 조선 사람이냐고 물었다.
여인은 회장은 우즈베크인이고 부회장이 조선 사람인데 부회장이 지금 남조선에 가고 없다며 어디서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북조선에서 왔다고 대답하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일을 할까하고 찾아 왔는데 받아주겠는지… 회장이 조선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러자 여인은 희죽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순간 당황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고 물었다.
『우리 꼴호즈에 북조선에서 온 사람 두 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잡혀가고 한 명은 어디로 피신했는데 지금 어디서 사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도 처음에 일자리를 찾았지요.』
그 말을 들으니 저절로 한숨이 나갔다.
(후- 이렇게 개값도 안되는 김일성을 위대한 인간으로 칭송해 온 내가 어리석지. 이제 어디가서 어떻게 산단 말인가. 실로 그는 위대한 인물이야. 우리가 못사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데 가서나 살 수 없게도 하는 특출한 축지법을 쓰는 것 같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녀가 또 물었다.
『앞에 달고 다니는 초상휘장을 어떻게 했어요. 도망치면서 버렸어요.』
나는 입이 쓰거워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대충 대답했다.
『뜯어서 개를 주었는데 흠, 흠 냄새를 맡더니 버리고 그냥 가더군요. 그럼 나는 가보겠어요.』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는 기어코 식사를 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식사로는 국수를 들여왔다.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여인은 이것 저것 꼬치꼬치 물었다.
북조선에는 먹을 게 없다던데 사실인가. 고기를 먹어보기 힘들다던데 정말인가. 등 등.
다음 나는 우즈베쓰까야 꼴호즈로 찾아갔는데 역시 아무러한 성과도 없이 돌아섰다. 하루 종일 이렇게 헤매다노니 날이 저물었다. 이젠 또 잠자리가 걱정이다. 어디 가서 잘까. 갈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역 대합실로 찾아갔다. 그런데 역 대합실은 안전한 곳이 못 되었다. 경찰들이 계속 순찰하면서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증명서 검열도 하고 데려가기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밖에서 왔다 갔다 하며 서성거리다 비디오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거기가 제격이었다. 경찰들의 감시도 피할 수 있고 돈만 내면 밤새껏 구경하면서 새벽 5시까지 앉아있었다. 나는 위생실에서 세수를 하고 차 한잔 마신 다음 또 살길을 찾아 떠났다.
이번에는 빨리따 지역 꼴호즈를 찾아갔다. 사무실에 가보니 회장도, 부회장도 없었다. 오전 한결을 기다렸으나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 4시경에야 부회장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인사를 하고 북조선에서 왔다고 하자 그는 공식인다운 태도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참 반갑습니다. 앉으십시오. 작년에 북조선의 초청을 받고 평양을 방문하였는데 대접도 잘 받고 구경도 잘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솔직하게 말했다.
『부회장동지. 저는 북조선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여기 저기 다니며 알아보니 이 꼴호즈에 조선인들이 많고 사는 것도 괜찮다고 하여 왔는데 좀 도와주실 수 없습니까. 저에게는 지금 아무러한 증명서도 없는데 조선인들이 사는 곳이면 꽤 의지하여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찾아왔습니다.』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될 것 같습니다. 우리 꼴호즈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북조선에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여기 경찰들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숨어가면서 일할 수 있겠지만 그러다 잡히면 북조선과의 관계상 문제도 있고 하여 구원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는 어느 정도 진실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부회장동지 잘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가지 물어볼 것 이 있는데 여기 다른 꼴호즈들도 다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레니쓰게야 꼴호즈가 있는데 거기에 한 번 가 보십시오. 회장이 조선 사람인데 이런 일에 경험도 있고, 또 무슨 방법도 알 수 있을 겁니다. 마침 나도 그 방향으로 갈 일이 있는데 함께 갑시다.』
나는 그의 차를 타고 레닌쓰게야 꼴호즈로 찾아갔다. 부회장은 나에게 방향을 가르쳐주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사무실로 막 들어서려는데 한 사람이 마주 나오기에 회장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고 물었다. 마침 그는 자기가 회장이라 고 하면서 무슨 일인가고 물었다. 찾아온 사연을 대충 이야기하는 데 그는 내 말을 다 듣지 않고도 알만하니 여기서 서성거리지 말고 딴 데로 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좀 불쾌한 기색을 짓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우리 꼴호즈에 북한 내무원들이 와 있소. 얼마 전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여기로 와서 일했는데, 북조선에서 알고 찾으려 왔는데 다행히 그는 딴 곳으로 피신했소.』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고 빨리따 지역 부회장의 소행이 괘씸했다. 그는 분명 이런 내용을 알고 나같은 사람의 처지를 보여주려고 나를 여기로 데려 온 것 같았다. 회장은 나에게 덤비지 말고 조심하라고 이르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 역시 더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돈도 물지 않는 나의 훌륭한 거처지 타슈켄트역으로 돌아왔다.
진눈깨비 속에서
이젠 어떻게 할까? 나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세어보니 1600루불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주머니 돈까지 떨어지면 정말 길가의 거지 신세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금새 온몸에 맥이 풀려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눈까풀이 저절로 스스로 내리감겼다.
바람이 분다.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닌 진눈깨비가 내린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이렇게 추운데 입지도 못하고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비틀거리며 방향없이 이리저리 가고 있다.
길가던 남녀 로시아인들이 『에이 더러워, 저리 비켜』 하며 막 밀친다. 나는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졌다. 차가 마주온다. 일어서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차는 나를 깔아뭉개듯이 그냥 달려온다. 10m 5m 삐-익 급제 동한다. 그런데 차는 서지 않고 그냥 나를 덮친다. 아-악 깨 보니 꿈이다.
온몸에 식은땀이 내뱉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어둠에 잠겼고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자유롭게 자기 행동을 한다. 허탈감으로 머리가 아팠다.
내가 왜 이럴까. 그렇지 오늘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 뭘 좀 먹고 머리를 식혀야 해.
카페로 들어간 나는 커피, 칼바스, 흘레브, 우유를 사서, 먹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다 먹었다. 카페에서 나오는데 꾀죄죄한 늙은이가 손을 내밀었다. 돈을 비는 것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래도 아직 너보다는 낫구나. 주머니를 뒤져보니 20전짜리 잔돈이 있어 그의 손에 쥐여주고 위생실에 들어가 찬물에 세수를 하니 정신이 좀 들었다.
그날도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어떻게 할까. 어디로 갈 까. 다시 돌아갈까. 아니야 죽으면 죽었지 돌아갈 수는 없어. 그럼 어떻게 할까. 옳지 나는 갑자기 좋은 수가 생겼다.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가서 중국 상인들을 사귀고 그들의 도움을 받자.
그러나 나는 다시 도리질했다. 하바로프스크는 위험해. 북조선의 원동개발의 기본 거주지인 하바로프스크는 온통 북조선 사람 천지다.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로 갈까. 나는 아무데건 가야 했다.
역 대합실로 들어가 소련 철도 약도를 쳐다보았다. 타슈켄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르쓰라는 도시가 눈에 떴다. 나는 무작정 아르쓰로 떠났다. 4시간만에 아르쓰에 도착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조선인 교포들을 찾았으나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고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나는 조급해졌다.
어디로 가볼까. 어떻게 할까. 나는 또다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 보았다. 다행히 15살나 보이는 남자애가 한 집을 가리키며 김이라는 조선인이 산다는 것이다. 그집으로 다가간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난데없이 러시아 여인이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여인에게 김씨 집이냐고 묻자 자기 남편이 김씨인 데 그는 출장가고 없다는 것이다. 맥이 탁 풀렸다. 후- 겨우 찾은 김이 출장가다니. 그 집에서 나온 나는 땅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문득 북한에서 당 학습회나 강연회에서 당과 조국을 배반한 자들은 개보다도 못하며 참다운 삶과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배우던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정말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아니야. 아니야. 맥을 놓으면 안 돼. 맥을 놓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어. 나는 조국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한 참다운 길 남행길을 걷는 거야.
탈출하여 수기를 쓰고 있는 오늘까지 남행길은 내 마음 속의 기둥이었다. 조국으로 가는 길, 남행길이라는 하나의 의지가 없었다면 나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했으리라. 그 후 나는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왔다.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오는 길은 10여일이나 걸렸다. 물론 그 기간 아슬아슬한 위험의 고비를 몇 차례 겪었다.
다시 하바로프스크로
아닌 밤중에 나는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여 혼자 살고 있는 쎄르게이 가시어머니 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아니 이게 누군가. 어떻게 이렇게…..” 남조선으로 가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어디가서 굶 어 죽지나 않았는지 계속 걱정하였는데 이렇게 왔구만. 빨리 들어오라구. 그래 어디서 이렇게 오는 길인가. 어이구 세상에 쯔쯔…..”
할머니는 놀랍고 반가운 김에 옷을 빌려주고 밥을 끓이고 야단이었다. 할머니가 나를 이렇게 반겨 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한달 정도 방황하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쳐버린 나는 할머니의 정성에 가슴 짜릿한 사랑을 느끼며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어떻게 된 일인가. 여기 하바로프스크는 온통 북조선 사람들 천지인데 어쩌자고 여기로 돌아왔나.”
결심하고 떠났던 길을 되돌아 온 것이 부끄러웠다.
“할머니 오랫동안 열차를 타고 왔더니 피곤하군요. 좀 자고 일어나서 얘기하지요.”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아침이었다. 할머니가 나를 급히 흔들어 깨웠다. 나는 얼결에 자리를 차고 후다닥 일어났다.
“이 사람아, 누가 찾아왔어. 빨리 일어나라구.”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누가 왔어요.”
“그걸 어떻게 알겠나. 혹시 북조선 사람들이 우리집에 자주 다녔는데 그들이 아닌지. 오, 빨리 이 밑으로 들어가라구.”
할머니는 황급히 식료품을 넣어두는 지하실 문을 열었다. 나는 미처 옷도 입지 못하고 사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희미한 전등불이 비치는 지하실은 숨이 헉 막히도록 곰팡내가 풍기고 바닥에 물이 차있고 어느 한 구석에선가 벌레가 살아있는 듯, 쥐가 다니는 듯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온 몸이 써늘해지는 것 같아 움크리고 사다리 층계에 앉아서 온 신경을 집중하여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이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를 들어보니 여러 명이 온 것 같았다.
무슨 말을 주고받는 듯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더니 성난 듯한 할머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분명 나를 잡으러 왔구나. 혹시 역에서부터 나를 미행하지 않았을까.) 머리카락이 곤두섰다.(어떻게 할까. 여기서는 빠져나갈 길도 없는데.) 금방 지하실 문을 열고 뒷덜미를 잡을 것 같아 맨 발로 바닥에 내려섰다. 물이 발목까지 잠겼다.
지하실 맨 끝까지 가보니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나는 아무 준비도 없이 맥을 놓고 잠잔 것이 얼마나 후회되었는지 모른다. 주위를 두루 살펴보니 호미자루가 눈에 띄었다. 반항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호미자루를 잡았다.
이때 지하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아, 빨리 나오라구.”
(아 더러운 늙은 마귀. 제 입으로 나오라구 소리치다니.)
늙은이한테 얼리었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원통하고 분하여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아뜯었다. 또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람아, 뭘 하나. 빨리 나오라구. 이젠 됐어, 다 돌아갔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돌아가다니…..)
`아니 이 사람이 거긴 왜 들어갔나. 맨발로 거기가 어디라고…, 빨리나와 발을 씻으라 구.”
나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호미자루를 틀어쥐고 문 어귀로 나갔다.
“할머니 누가왔어요.”
“우리 손자 녀석이 제 동무들을 데리고 왔댔어. 나는 너무 놀라서 그 녀석을 막 욕해서 쫓아버렸네.”
그 말을 듣자 호미자루가 맥없이 떨어졌다.
첨벙. 물방울이 튀면서 다리를 적셨다. 그제서야 나는 쥐와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차디찬 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등골이 오싹 해졌다.
지하실에서 나와 발을 씻고 있는데 할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오늘은 맥이 풀려 아무 일도 할 것 같지 않아. 다 준비해 놓았으니 제 손으로 식사하라 구.”
그리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 역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이 생각, 저 생각하는데 할머니가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 모서리에 앉아 하염없이 나를 내려다 보았다.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가랑가랑 고여 있다. 고향의 어머니 생각이 났다.
“자네 말하지 않아도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만하네. 자네 어머니가 알면 속이 타서 아마 죽을 거야.”
내 손등으로 할머니의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오래간만에 고향의 따스한 어머니 품에 안긴 것 같아 격해지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할머니 나는 할 수 없이 여기로 돌아오면서도 할머니가 저를 반가워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였는데 ….., 정말 고마워요.”
“이 사람아, 날씨도 추워졌지. 자네 옷도 변변히 입지 못했지. 그러니 딴 생각말고 겨울이 지날 때까지 우리집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구. 나도 늙은 게 혼자 살다보니 자네에게 겨울 솜옷 한 벌 사줄 형편이 못되네.”
“고마와요. 그런데 할머니 남조선에는 누가 있습니까.”
“수원군에 윤정순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있네.”
할머니의 지난날
할머니는 자기의 피눈물나는 과거사를 들려주었다. 수원군에서 한 가정의 3형제 중 맏딸로 태어났다. 해방 전 몹시 빈곤하게 살던 할머니의 가정에서는 기둥같이 믿고 살던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 혼자 세 자식을 먹여 살리기 너무 힘들어 11살 난 할머니를 북쪽에 있는 먼 친척에게 주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생이별하고 모진 고역살이를 겪다가 나이도 채 들기 전에 남편을 만났고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다시 이민했다. 중국으로 건너온 후 아들, 딸 두 자식이 생겼는데 남편은 가족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그후 할머니는 어린 두 자식을 데리고 또다시 소련의 원동 땅으로 흘러 들어왔다. 지금 남조선에는 여동생 하나가 있고 남동생은 사망하였다며 한번 만나 보지도 못한 남동생 일이 제일 가슴 아프다는 것이다.
“자네 남조선으로 갈 생각은 참 잘했네. 한국방송공사에서 나에게 동생을 찾아주고 나 같은 게 뭐라고 설 명절에는 신년장까지 보내주곤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늙은 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뭔가 좀 보답할 생각도 있는데 궁리가 떠오르질 않네. 글도 변변히 쓰지 못하니 인사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지.”
나는 할머니가 얼마나 기구한 운명을 살아왔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할머니 내 이제 기어이 남조선으로 가겠어요. 남조선에 가면 할머니의 동생도 만나보고, 팔뚝에 힘이 뻗치고 심장에 피가 한동이씩 끓는 젊은놈이 가자구나 하면 못 할 일이 있어요. 그런데 할머니 여기 시장에 중국 장사꾼들이 많던데 그들을 좀 소개해 줄 수 없어요?
좋은 사람 한 두 명 친해가지고 그들을 통해서 중국을 거쳐 남조선으로 가던가. 아니면 다른 한가지 길은 몽골로 가던가. 라디오를 들으니 몽골 대통령이 한국도 방문하고 한국에서는 몽골에 원조를 주었다는데 몽골을 통해서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할머니는 아직 젊어서 철없이 덤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글세 중국에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 갈 수 있다 치고 몽골에는 어떻게 가겠나. 말도 모르지. 아는 사람도 없지. 괜히 덤비지 말고 잘 생각해 보라구” 하고는 나가서 차를 마시자고 하며 일어섰다.
차를 마시며 할머니의 기색을 살펴보니 모진 고생의 흔적인 듯 주름살이 많은 얼굴에 나에 대한 걱정으로 더 늙어 보이는 것 같았다.
“할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힘든대로 시장에 나가 중국사람들을 좀 데려 오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숨어있어 가지고는 아무 일도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들과 사귀고 친교도 맺고 도움도 받고 도와줄 일이 있으면 도와도 주고 그러노라면 무슨 방도가 서겠지요.”
할머니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여기로 사람을 데려오자니 어쩐지 속이 떨리네. 나는 지금 앉아 있는 것만도 힘들어. 금시 누가 올 것 같은 게….”
바로 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제기랄 범이 제 소리를 하면 온다더니.) 나는 황급히 지하실로 뛰어 들어갔다.
한참 후 할머니가 지하실 문을 열고 옆집 러시아 영감이 가스통을 빌리러 왔다갔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머리가 아픈 듯 한참 손으로 싸쥐고 있었다.
“좋아. 내 먼저 몽골 사람들을 만나 보겠어.”
남조선 상품
할머니는 나에게 잠이 오지 않으면 노래나 들으라고 녹음기와 테이프를 가져다 주고는 부엌 에서 설거지를 하였다.
녹음기는 휴대용으로 작은 것인데 참으로 맵시있게 만들어 졌다. 나는 대뜸 아는 체를 했다.
“일본제로군요. 그 쪽발이들이 뭘 만드는 걸 보면 깜찍한 것들이야.”
그러자 할머니는 웃으며 “그건 남조선 녹음기야.”
상표를 보니 정말 남조선 상품이었다. 남조선 경제가 발전했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이렇게 질 좋은 녹음기는 처음 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 만져보고 테이프를 끼우고 녹음을 틀었다.
노래들은 대체로 얼음이 녹아내리는 듯, 가슴을 간지럽히는 유행가들이다. 저절로 흥이 난 나는 침대에 누워 콧노래로 따라 불렀다.
노래들 중에서도 “아름다운 서울, 서울에서 살렵니다.”라는 노래가 제일 듣기 좋았다. 가 사도 곡도 좋지만 낭만에 넘쳐 활달하게 부르는 가수 또한 명가수였다. 노래를 듣노라니 지나간 일들이 영화 화면처럼 떠올랐다.
1990년 아른 봄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소연방의 개방, 개혁 정치에 따라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을 둘러싸고 있던 철의 장막은 물거품 마냥 녹아 내리기 시작했고 마약과도 같은 자유세계의 진한 향기는 공산독재하에서 자유바람에 굶주린 자들의 폐부를 간지럽히면서 들뜨게도 만들고 두려움에 망설이게도 하였다.
정세변화에 맞추어 날쌘 한국 기업체들은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기들의 상품을 굶주린 러시아인들에게 들이밀었다. 한편 북한의 독재자들은 때가 늦었다. 아마 김일성이 몸이 너무 비대하여 동작이 굼뜬 모양이다.
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가 망하는 것과 우리 노동자들이 한국에 대해 환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에 많이 퍼져있는 우리 노동자들은 이제 한국의 강대함과 발전정도를 알게 되었다. 그 어떤 선전보도 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 시작했다.
때늦게 정신을 차린 김일성은 엉기적거리며 호령을 내렸다. 그의 비대한 체격에 맞게 목소리 또한 호랑이의 울음소리와도 같아 즉시로 그의 어용나팔수들은 우리 재러 임업노동자들에게 더러운 남조선 괴뢰들의 상품에 손을 대지 못하게 대대적인 선전을 벌였다.
하루는 나는 상품을 구입할 목적으로 신우프갈로 갔다. 어느 한 식료품 상점에 들어가 보니 놀랍게도 비누가 많았다.
남조선 비누 소동
하루는 나는 상품을 구입할 목적으로 신우르갈로 갔다. 어느 한 식료품 상점에 들어가보니 난데없이 비누가 많았다.
나는 얼른 비누 한 지함을 샀다. 당시 러시아에 상품이 고갈되면서 우리 사람들에게 상품을 제대로 팔지 않았으므로 러시아인에게 돈을 더 주고 샀다.
나는 조국에 있을 때 비누가 없어서 어머니가 양잿물에 정어리기름을 섞어서 쓰던 생각을 하니 마음이 흐뭇하여 발걸음도 가벼이 버스(북조선 벌목장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가 부러워하며 소련 상품 같지 않은데 어느 나라 상품인가고 물었다.
얼결에 상표를 본 나는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다시 쳐다보니 분명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써 있다.
나는 급히 상표를 감추느라고 하였지만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드는 통에 할 수 없이 내보였다.
“아니, 이거. 남조선 상품인 것 같아.”
그러자 사람들은 저마다 쳐다보며 한마디씩 했다.
“여, 큰일나기 전에 도로 갔다 물리는게 좋아.”
며칠 전 토요 강연회에서 선전비서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의 주체조선. 영웅조선의 노동 계급들이 더러운 남조선 괴뢰들의 상품에 손을 대는 것을 씻을 수 없는 수치스런 행동이다. 러시아에 남조선 괴뢰들의 상품이 나들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 괴뢰들의 반사회적 모략 선전이다.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현정세의 요구에 맞게 혁명적 경각심을 높이고 오직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두리에 철통같이 뭉쳐 원쑤들의 온갖 파괴 암해책동을 단호히 짓부수고 사회주의 완전 승리를 이룩하겠다는 굳은 각오와 신념을 가져야만 한다.”
버스에는 한 두 명도 아니고 상버소 간부들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피할 길이 없었다. 이때 앞쪽에서 특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동무는 어디서 왔어. 상표나 보고 살 노릇이지 그게 뭐야. 내다 버리라. 비누와 정치적 생명을 바꾸겠어!”
그렇다. 정치적 생명과 바꿀 수 없다. 북조선에서는 정치적 생명을 잃은 사람은 개와 같은 신세이다.
나는 지함을 들고 밖에 나가 길바닥에 둘러메쳤다.
비누에도 사상이 있다는 김일성의 전사답게… 그리고는 운전수보고 깔아뭉개라고 소리쳤다.
운전수는 깔아뭉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비누는 형체도 없이 납작하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이 거지같은 북조선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누를 만든 남조선의 노동자들이여!
용서하시라.
그러나 용서하지 마시라!
당신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노동의 열매를
깔아뭉개라고 호령하는 독재자들을.
나는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혼자서 웃었다.
“아니, 자네 뭐가 좋아서 혼자 웃나?”
“할머니 노래들이 재미있군요. 난생 처음으로 재미있는 노래를 듣는 데요.”
“응, 노래들이 모두 좋은 것들이야. 나는 혼자서 적적할 때마다 듣곤 하는데 마음이 좋아지곤 하지. 그런데 북조선에는 그런 노래들이 없는 것 같아.”
“허 참, 할머니 북조선에서는 이런 유행가들은 들을 수도 부를 수도 옶어요. 들으면 붙잡아가고 부르면 체포해 가지요.”
나는 노래를 하여 기분이 좋아져 할머니를 도와 장판도 씻고 집안도 깨끗이 거두었다.
다시 유랑의 길로
이런식으로 한 달이 지나갔다. 물론 매일 한두 번씩은 지하실로 뛰어 들어가야만 했다. 할머니는 시장에 몇 번 나갔다가 중국 상인도, 몽골인도 찾지 못하고 돌아오곤 하였다.
할머니는 차츰 앓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을 놀래우며 곰팡내나는 지하실로 뛰어 들어가고 어느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살다보니 젊은 나까지도 신경 환자가 될 지경인데 늙고 연약한 할머니야 오죽했으랴.
죽기보다 더 고통스런 일이었다.
더욱이 힘든 노릇은 할머니의 딸 따찌아냐가 알고 하루 건너씩 찾아 와서는 할머니를 욕하는 것이었다.
나는 더는 참기가 어려웠다. (떠나자. 아무데건, 무조건 떠나야 해.) 이렇게 생각한 나는 밤에 할머니를 데리고 몽골 사람들이 사는 기 숙사로 찾아갔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저마다 도리질을 했다.
몽골과 러시아 국경 지대는 시베리아 내륙지대로서 날씨가 대단히 춥고 그 지대는 험한 수림 지대인데 사나운 짐승들이 많아서 대단히 위험하다며 그 길은 죽음의 길이라고 모두가 한마디씩 했다.
그래도 나는 기어이 떠나리라 결심하고 집에 돌아와 고생살이 속에 쌓이고 쌓인 할머니의 헌 누더기를 뒤져서 솜옷 한 벌과 겨울용 신발을 하나 찾았다. 너무 더러워서 손대기가 끔찍한 누더기였으나 나는 깨끗이 빨고, 깁고, 수리하였다.
할머니는 나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고 심정은 어떠했으랴.
“이 사람아, 며칠만 더 참아보라구. 내 중국 사람들을 한 번 찾아보고 그들과 한 번 토론해 보고 안될 것 같으면 떠나라구.”
다음날 할머니는 중국 조선인 교포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이름은 김경식. 나이는 44살. 중국의 계서시에서 왔다고 한다. 나는 그와 통성(명)하고 저녁에 마주앉아 술 한잔 같이 하면서 나의 기구한 운명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중국으로 갈 수 없겠는가 물었다. “은,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자. 국경을 걸어 넘던가 아니면 남의 여권을 빌려가지고 건너가서 다시 들여보내도 될 수 있지. 여기 내가 잘 아는 중국 사람들이 많아.”
그리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거, 북조선에서는 김두부 때문에 잘 못 살아. 북조선 사람들이 불쌍해. 북조선에서는 감두부를 왜 그냥 놔두는지 이해할 수 없어.”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김두부라는 사람이 누군가고 물었다.
“김일성이 자기 생일날 사람들에게 두부 한모씩 선물하지 않나. 그래서 우리 중국에서 사는 교포들은 김일성을 김두부라고 부른다네.” 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사탕과자는 선물로 받았으나 두부는 선물로 받은 일이 없었다. 내가 그런 일이 없다고 하자 그는 왜 없는가고 하며 오히려 자기가 북조선 사람인 것처럼 나더러 북조선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그와 통성하고 중국으로 가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때 그의 가시어머니가 타슈켄트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먼저 타슈켄트에 가서 그의 장모를 데리고 하바로프스크에 다시 왔다가 중국 국경을 넘기로 했다.
그는 알고 보니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와 함께 1991. 11. 2일 열차를 타고 타슈켄트로 떠났다.
“조카(그는 나를 조카라고 불렀다), 이제부터 너는 철저히 중국 사람이야. 절대로 북조선에서 왔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해.” 그 말이 옳았다. 북조선에서 왔다고 하면 아무데 가서나 발 붙이기가 매우 힘든 것이다. 제나라, 제땅, 자기의 조국을 두고 중국 사람이라고 해야 한다.
부끄러워서 나는 더는 북조선에서 왔다는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이게 바로 김일성 부자가 만들어 놓은 주체의 조국, 사화주의 모범의 나라이다. 북조선에서 그렇게 떠드는 김일성, 김정일의 위대성, 권위와 위신은 이게 전부이다.
마야와의 만남
하바로프스크에서 타슈켄트까지 7일간 가야 한다.우리는 그때 열차에서 위딸리라는 조선인 교포를 만나 그와 동행하였다.
그는 성격이 온순하고 고지식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외국인이라고는 처음 상대하는 그는 우리를 좀 어려워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중국 교포 김경식은 푸접이 좋고 거짓말도 잘 했다.
4일째 되는 날 아침에 우리는 노보씨비리스크에 도착하였다.여기서 타슈켄트행 열차를 갈아타야 했는데 밤 11시에 타슈켄트행 열차가 있었다. 우리는 그 기간 시내 구경도 하고 소풍도 하면서 보내고 있었다.
김경식이 나더러 조용히 만나자고 하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조카, 내 위딸리하고 좀 의논하여 보았는데 네가 원한다면 너에게 처녀를 한 명 소개해 주겠데.”
나는 놀랐다. 생각조차 하지 않던 문제다.
“아니, 삼촌. 그것도 말이라고 해요. 나한테 처가 있고, 아이까지 하나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럼 말을 해요?’
그는 내 생각이 답답한 듯 설복하기 시작했다.
“조카, 잘 생각해봐. 네가 도망쳤는데 북조선에 가서 네 처를 데려 올 수 없어. 천만에, 내가 너를 중국으로 데려가겠다는 것도 너를 데리고 가서 먼저 장가를 보내고, 결혼을 하고 그 다음에야 여권 수속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는 거야.
여기서도 같애. 하루 이틀은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질 수 있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도와줄 사람이 없어. 그러나 장가만 들면 자기 가정을 가지게 되고, 도와줄 수 있는 믿음직한 반려자가 생기고, 할 일도 찾을 수 있을 거야.
네가 처를 그렇게 잊지 못하겠다면 무엇 때문에 도망쳤어. 친척도 아는 사람도 없는 너에게 누가 곱다고 여권을 만들어 주겠어. 네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장가를 드는 길이야. 네 처만이 너를 도와줄 수 있어. 잘 생각해봐.”
그의 설복은 끝이 없었다.
나 역시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를 기둥같이 믿고 기다릴 처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사람이 그런 짓을 할 수 없어.
나는 처음으로 나에 대한 처의 사랑을 생각했다. 조국을 떠날 때 어린애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손저어 바래주던 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 나는 사람이 아니야. 짐승같은 놈이야. 그 불쌍한 여인이 이젠 어떻게 될까! 내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어느덧 열차는 카자흐스탄 공화국권내에 들어섰고 위딸리는 내릴 준비를 하였다. 그는 카자흐스탄의 잠불에서 내려야 했다. 우리는 서로 주소를 교환했고, 위딸리는 기다릴테니 손님으로 꼭 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위딸리가 내리자 그는 집중적으로 설복하기 시작했다. 타슈켄트에 도착하여 우리는 그의 장모를 만났는데 그의 장모 또한 그런 식으로 설복했다. 놓친 기회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장모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중국에 가기만 하면야 집을 팔아서라도 너를 도와줄 수 있어. 그런데 네가 어떻게 국경을 넘어. 국경에서 잡히면 죽어. 죽는다는 것이 뭔지 알기나 해. 김일성이 너 같은 건 파리 잡듯 하는 사람이야.” 그들의 말이 모두 옳았다. 친척도, 친구도 없는 나를 누가 도와주겠는가. 그렇다고 처가 살아 기다리는데 장가들 수도 없고… 처의 편지 구절이 생각났다.
“… 청석이 아버지. 빨리 귀국하세요. 들리는 말이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다 망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되었다면서요. 우리 나라에서는 자본주의사회 물을 먹은 사람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지 않아요. 자신과 청석이를 생각해서라도 빨리 나오세요.
그리고 청석이는 매일 아버지를 찾는답니다. 집에 찾아오는 사람마다 붙들고는(우리 아빠 소련에서 사탕이랑, 고자랑, 텔레비전이랑 사 가지고 곧 나온대)라고 자랑하며 매일 아버지한테 편지를 쓰라구 야단입니다…”
나의 고민은 끝이 없었다.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어떻게 할까’라는 말이 머리속에 꽉 들어찬 채 3일이 지나갔다. 그런데 3일이 지나간 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위딸리한테로 가야 한다는 그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91년 11월 15일 위딸리 집으로 찾아갔고 12월 10일 위딸리의 동생 리 마야와 살기로 약속하였다.
올가미에 걸려들어
당시 나에게는 안착된 생활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여권을 만들어 가지고 남조선으로 가야한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었던 것 같다.
1992년 2월 중순경이었다. 나는 여권을 발급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던 중 마야의 사촌 오빠 윅또르를 통하여 여권 발급 담당자 한 사람을 만났다. 내가 그에게 여권을 부탁하자 그는 자신있게 대답하였고 돈 1만 루블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며칠 후 2월 18일이다. 나는 윅또르의 집에서 그와 차를 마시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여권 수속 담당자한테서 온 전화인데 여권 수속을 하려고 하니 나를 데리고 오라는 전화였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어떻게 할까. 내가 혹시 올가미에 걸려든 건 아닌가. 그렇다고 부탁해 놓고 찾아가지 않으면 그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형세가 더 불리해질 수 있는 것이다.)
윅또르 역시 미덥지 않았던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윅또르, 내가 직접 경찰서로 찾아가는 것은 위험하기는 하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체포령을 내릴 수도 있고 감시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어찌보면 여권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고 …”
나는 윅또르 차를 타고 경찰서로 찾아갔다. 여권 담당자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반가워하면서 신분 카드를 내주고 성명, 생년월일을 비롯한 간단한 경력을 쓰라고 하였다.
윅또르의 이름으로 여권을 발급하기로 한 나는 그의 경력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출입문이 열리며 사민복 차림의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여권 발급 담당자는 벌떡 일어서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순간적으로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찰 책임자는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으나 나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내 생각만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3년간 일하면서 도주하였던 사람들이 체포되어 가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하였는데 바로 이 순간 그 생각이 떠올랐고 내가 친구들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저렇게 잡혀갈 바에야 무엇 때문에 도주하는가. 바로 저런 것들을 보고 개죽음을 당했다고 말하는 거야. 멍텅구리 같은 것들…”
그런데 이젠 내가 그렇게 된 것 같다.
(다음글에 계속) 출처 : 탈북자동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