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감 정주한(鄭周翰)
[생졸년] 1634년(인조 12)~1701년(숙종 27) / 향년 67세
[본관] 영일(迎日)
[거주지] 한성([京])
[무과] 현종(顯宗) 10년(166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6위(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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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현감 정공 묘표(縣監鄭公墓表)
공의 휘는 주한(周翰), 자는 무경(武卿)으로, 연일(延日) 사람이다.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 정몽주)은 용구(龍駒 용인)의 문수산(文秀山) 아래에 묘를 썼는데, 자손들이 이어 대대로 그곳에 살았으니, 공이 그 9세손이다.
증조 진(震)은 주부를 역임하였고, 조부 종선(從善)은 현감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음직이다. 부친 간(侃)은 승지에 추증되었다. 외조부는 판관을 역임한 경주(慶州) 김천석(金天錫)이다. 공은 기유년(己酉年,1669, 현종 10)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무겸, 혜산(惠山)과 가덕(加德)의 첨사, 오위장, 내금위장, 홍주(洪州)와 청주(淸州)의 영장을 역임하였다.
공은 도적을 잘 다스리기로 명성이 있었는데, 말을 듣고 모습을 보면 귀신같이 가려내었으며, 또 엄정하고 맹렬하게 그들을 대하였다. 청주에 있을 때 감사가 사적으로 죄수 1명을 석방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따르지 않았다. 감사가 순찰하러 오자 공무로 인해 들어가 뵈었는데, 심할 정도로 모욕을 주고 꾸짖자 공이 전립(戰笠) 위에 있는 무장의 표식을 떼어 그 앞에다 내던지며 말하기를,
“내가 그대에게 곤욕을 당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고는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갔다.
감사가 더욱 분노하여 장계를 올려 파직시키려 하였다. 지나는 길에 판서 이수언(李秀彥)에게 들렀는데, 이수언이 말하기를,
“나 역시 사적인 일로 청탁을 하려다 그렇게 하지 못한 적이 있네. 이 사람의 뻣뻣한 성정을 그대는 몰랐는가.”
하니, 감사가 후회하여 수레를 돌려 사과를 하고서 떠났다.
정축년(丁丑年,1697, 숙종 23), 큰 기근이 들자 조정에서 부고(桴鼓)를 근심하여 공을 신창 현감(新昌縣監)에 임명하니, 도적들이 그 소문을 듣고 놀라 흩어져 경내가 편안해졌다. 중간에 경주 영장(慶州營將)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부임하지 않았다. 숙종 신사년(辛巳年,1701, 숙종 27) 4월 26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8세였다.
부인 구씨(具氏)는 능성(綾城)의 큰 성씨로, 민(旻)의 딸이다. 공보다 12년 뒤에 세상을 떠나 같은 고을 왕곡(旺谷)에 합장하였으니, 문수산과 10리 떨어진 곳이다. 공은 부모를 잘 섬겨 모친이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부친의 병간호를 한 검루(黔婁)처럼 하였다.
자제들을 대할 때에도 매우 엄격하여 관을 쓰지 않으면 보지 않았고,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하고 조심하여 자손을 위해 재산을 불리지 않았다. 젊었을 때에는 몇 말의 술을 마실 수 있는 주량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미치광이처럼 술주정을 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는 입에 대지 않았다.
성격이 강개하고 의기와 절개를 좋아하여 고금의 충신열사에 관한 일을 들으면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성품이 또 헌걸차고 오만하여 세상과 맞지 않아 이로 인해 벼슬이 현달하지 못했다. 벼슬이 없을 때는 곧장 고향으로 돌아와 이따금씩 사냥을 하며 홀로 즐겼다.
공은 팔척장신으로, 남다른 용력이 있었는데, 바라보면 위엄이 있어 범할 수가 없을 듯했다고 한다. 옛날에 한 문제(漢文帝)가 이광(李廣)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고제(高帝) 때에 살았더라면 만호후(萬戶侯)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아, 인생살이에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함은 운명이니, 공이 어찌하겠는가.
공은 아들이 둘인데, 도징(道徵)은 방어사이고, 덕징(德徵)은 병마절도사이며, 손자 찬술(纘述)은 삼도통제사이니, 모두 공이 누리지 못한 복을 받은 것이다. 공 역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찬술은 덕징의 아들로 도징의 후사가 되었는데, 찬지(纘志)는 그의 아우이다.
절도사가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서 노년을 보냈는데, 나와 같은 고을에 산다는 이유로 찬지를 보내어 묘소에 세울 묘표를 부탁하였다. 내가 비록 공을 뵙지는 못하였으나 오히려 그 기개를 상상할 수 있으니, 공과 같은 분은 어찌 이른바〈주남(周南)〉의 토끼를 잡는 야인과 같은 부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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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脚註]
[주01] 현감 정공 묘표 :
이 글은 정주한(鄭周翰, 1634~1701)의 묘표이다. 정주한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무경(武卿)이다.
[주02] 부고(桴鼓) :
전쟁 또는 도적을 잡거나 쫓을 때에 북을 쳐서 신호하여 경계하는 것이니, 거듭된 기근으로 인해 도적떼가 날뜀을 말한다.
[주03] 벼슬을 …… 하였다 :
검루(黔婁)는 유검루(庾黔婁)를 말한다. 남제(南齊) 사람으로 자는 자정(子貞)이다. 잔릉(孱陵) 수령이 되었다가 어느 날 부친이
병환에 걸렸을 것임을 마음으로 느껴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아버지 병세의 차도를 알기 위해 대변이 쓰고 단지를 맛보고 매일 저녁마다 북극성에 부친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기를 빌었
다고 한다.《南史 권50 庾黔婁列傳》
[주04] 주남(周南)의 …… 부류 :
《시경》〈주남(周南) 토저(兔罝)〉에 “맞게 쳐진 토끼 그물, 말뚝 소리 정정하도다. 씩씩한 무부여, 공후의 간성이로다.[肅肅兔罝,
㭬之丁丁. 赳赳武夫, 公侯干城.]”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주(註)에 “현명한 인재가 많아 비록 토끼를 잡는 야인이라도 그 재간의
쓸 만함이 오히려 이러했다.[賢才衆多, 雖罝兔之野人, 而其才之可用, 猶如此.]”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