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창작과 비평 2004년 여름호 실린 중편 '채식주의자', 문학과사회2004가을호에 실린 중편 '몽고반점', 문학판2005년 겨울호에 실린 '나무 불꽃'을 채식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낸 한강의 소설이다. 2016년 세계 3대 문학상이라고 불리우는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맨부커상은 시대상과 그에 따른 사회의 모순과 문제를 냉철하게 다룬 문학에 주는 상으로 알고 있다. 5.18이나 4.3, 페미니즘이나 가부장제에 대해 소설의 인물들을 통해 깊숙이 접속하는 한강 작가 특유의 작품세계가 세계적으로 확장되는 초석이 되는 상이기도 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각각 서로 다른 제목의 중편을 엮은 것이지만 결국 하나의 궤로 이야기가 연결된다.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 채식주의라는 이름을 씌우는 가족들. 잘 들여다보면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꿈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릴적 키우던 개에게 물린적인 있었고 막내딸을 문 개를 잡아먹겠다면 아버지는 오토바이에 개를 묶고 달린다. 움직이다 죽은 개가 살이 연하다는 이유다. 그렇게 개를 잡고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이고 물렸던 영혜에게 까지 억지로 개고기를 먹인다. 영혜는 어릴적부터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다. 아버지에게 조아리고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며 적당히 눈치껏 살았던 언니와 남동생 하지만 영혜는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아버지의 폭력에 더욱 더 노출되었으리라 보인다. 그리고 어느순간 육식을 멈춘다. 냉장고의 모든 육고기들을 쏟아버리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가 아니라 육식을 하지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채식을 선택하는 순간 갈등은 수많은 곳에서 벌어진다. 남편의 회사 간부 부부 모임에서도 등장하고 평범하지 않다고 여기는 주변의 시선과 가족들의 걱정이 고조된다. 무엇보다 남편의 승승장구에 영혜의 채식이 문제가 된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가족모임에서 강제로 고기를 입에 넣고 그것을 뱉자 따귀를 때린다. 아, 무슨일이 벌어진 것인가? 아버지의 이러한 폭력에 모두가 동조하는 그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누군가는 양팔을 잡고 누군가는 입을 벌리고 아버지는 그녀의 입에 고기를 쳐넣는 모습이라니. 기존의 질서와 다른 선택을 한 것이 이렇게나 끔찍한 현실을 만들어야 했던가! 가부장의 폭력, 질서의 폭력, 남성이 여성에 대한 폭력, 선택에 대한 폭력, 차이에 대한 폭력 이 모든것이 일상화되는 폭력이라니 그땐 그랬다고, 다 그랬다고 하는 말이 들릴 때면 아찔함이 온몸에 흐르고 머리 속은 차갑게 멈춰버리는 느낌이 든다. 결국 폭력에 대한 저항은 자신에 대한 가해로 이어진 채식주의자 편이 여전히도 횡행하고 있으리라 생각이 들며 가슴을 후볐다.
'몽고반점'은 채식주의자와 연결되어 형부의 시선으로 영혜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비디오로 작업을 하는 시각영상미술가 정도로 설명될 수 있겠다. 처제의 엉덩이에 여전히 몽고반점이 있다는 말을 듣고 몽고반점과 연결되어 상상되는 작업의 내용이 점점 경계를 넘어 구상된다. 아픈 처제에서 그녀의 몸을 통한 작업을 상상하고 실제로 진행한다. 나체에 그려낸 그의 꽃그림과 그것이 육체와 연결되어 비디어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이것은 가족이라는 선을 넘어 결국 포르노와 예술이라는 경계에 서보지만 그 어떤 경계도 넘지 못하게 된다. 영혜는 이 일로 다시 정신병동에 갇히게 되고 형부는 유치장을 거쳐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 몽고반점 편은 무척이나 몰입되어 읽어 보았다. 영혜의 언니의 반듯함과 자신은 최선을 다해 일하고 일과 육아를 도맡아 하면서도 남편의 예술 작업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여성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언니의 모습. 마음이 아팠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결국은 남편이 맘껏 작업하고 성공하는 것인가? 결혼하는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건 도대체 어디다 팔아 먹은 것인가? 가족에서 여전히 육아는 여성의 몫이었고 남자 사람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만 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 세상이 보인다. 결국 언니의 모습은 너무도 처연하고 쓸쓸해 보였다. 결국 삶에 대한 궁극적인 이유가 사라진 관계는 되돌리 수 없는 파탄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으리라 여긴다. 물론 형부를 한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이해가 갔다. 예술과 포르노의 경계에서 사람들은 생각할 터이지만 작가로서 표현하고픈 아름다움의 순간을 만났을 때 이 얼마나 경이로왔겠는가? 설사 그것이 고도로 자극적이고 성적이며 쾌락 그 너머일지라도 말이다. 어쩌면 장면이 어떠 만일 둘의 관계가 형부와 처제가 아니었다면 논란이 되지 않았을까? 묻는다면 그 또한 명확한 대답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장은 '나무불꽃'이다. 언니의 시선에서 쓰인 작품이다. 아, 애처롭고 가련한 여인. 영혜는 더이상 그 무엇도 먹으려 하지 않는다. 물구나무를 서며 자신의 손에서는 뿌리가 돋아나 땅에 박힐 것이고 위로 뻗은 다리에서는 잎이 돋아날 것이기에 햇빛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식음을 전폐한 동생 영혜. 결국 그녀가 원하는 것은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었으리라 표현되는 글에서 가슴이 맺혀왔다. 모든 가족이 버린 동생 영혜. 그녀의 남편과 부모, 남동생이 버렸는데 언니만이 책임진다. 아, 아프다. '누가 너보고 그렇게 하래? 아무도 너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어. 그런데 네가 한거잖아. 네가 원했잖아.' 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누군가의 욕망과 욕구를 이루기 위해 대신 희생하는 자. K-장녀의 모습, 혹은 책임감 넘치는 여성들이기도 한데 그녀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한국의 여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충 비위를 맞추고 문제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떠안고 가는 여성의 모습 말이다. 어쩌면 내 모습에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전체적으로 빠르게 읽혔다. 그럼에도 가볍지 않았고, 어려운 듯 하면서도 어렵지 않았다. 불쾌감보다는 생각할 꺼리와 연결할 꺼리를 찾고 주제 의식을 찾게 되는 책이다. 9일날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너무도 놀랍고도 벅찬 순간이었다. 내가 아는 한국의 작가가 세계의 작가가 된다는 건 내가 아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의 일부이기도 중심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삶의 공유, 문학의 공유, 관계의 공유, 가치의 공유가 얼마나 중요한가. 뒤섞인 모순과 관계가 오늘도 이어지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좀더 나은 세계를 말하고 꿈꾸고 바꾸고 이루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