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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2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7월 설교 시리즈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2. 창조주는 ‘한계’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 누가복음 10장 29절(29~37절)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새번역>
오늘날 사람들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표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으로, ‘한정적 영역(Narrow Area)’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영역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자신에게 필요한 영역에서만 최소한의 관계를 가지고, 필요하지 않은 영역에는 철저히 무관심해지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더욱 심해질수록 현대인들의 삶의 영역은 점점 더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이해가 가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 개인주의와 그 한정적 영역이라는 세속화가 교회 안으로도 물밀 듯 들어오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이런 세속화의 물결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는 태도가 있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현실을 바라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 이것이 세속화냐고 교회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시대정신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주의와 한정적 영역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런 교회가 되는 순간 교회는 문을 닫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개인주의를 지지하신 적이 없고, 한정적 영역을 의라고 하지 않으셨으며, 결정적으로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선’을 긋지 않으신 분, 한계를 창조하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선교와 전도에 대한 필요성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은 과도한 감정의 소비입니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사랑은 가식입니까?
내 부모를 위하여, 내 가족을 위하여 살지도 못하는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이미 끝난 명령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를 위해 살기도 짧은 세상, 그냥 이렇게 나만 위해서 살면 안될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좁아진 그 한정적 영역에 대해 설명하면서 ‘관계를 단절한 십자가의 전달자’ 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들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세대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 새번역>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장 8절, 새번역>
이 말씀들을 정면으로 자발적으로 어기고 있으니 결국 예수님의 재림까지는 영영 물 건너 간 것이라고, 아니면 예수님의 재림을 늦추고 늦추기 위해 일부러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한숨 섞인 농담을 하며 이 말씀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14절, 새번역>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지역을 결코 한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또 다른 천사가 하늘 한가운데서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과 모든 민족과 종족과 언어와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6절, 새번역>
그리고 그 하나님은 분명하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레위기 19장 18절, 새번역>
예수님이 처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구약의 이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와 법을 가르치면서,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시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면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구절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미 그 옛날부터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가르쳐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유대인뿐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으로 갔는데, 딸린 아이들 외에, 장정만 해도 육십만 가량이 되었다. 그 밖에도 다른 여러 민족들이 많이 그들을 따라 나섰고, 양과 소 등 수많은 집짐승 떼가 그들을 따랐다. <출애굽기 12장 37~38절, 새번역>
결코 유대인만이라는 ‘선’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을 지나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이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여호수아 6장 17절, 새번역>
그리고 이 라합의 남편이 된 정탐꾼 살몬의 족보를 통해 유대인들이 가장 위대한 인물로 존경하는 ‘다윗’왕의 족보에 하나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여인을 등장시키십니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기 4장 21~22절, 새번역>
그런데 차마 여기서 이름을 쓰고 싶지 않았던 유대인들을 위해,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인 마태복음은 친절하게 그 이름을 다시 한 번 알려주고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마태복음 1장 5~6절, 새번역>
하나님이 정말 ‘선’을 긋기 원하시는 분이라면,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라면, 지역 신이라면, 결코 라합이라는 기생의 이름을, 모압 지방의 룻이라는 여인의 이름을, 예수님의 족보에 올렸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이 기생이든, 여자든, 이방 여인이든, 어떤 모습이든,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일 뿐이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거나 알려야 할 일이 있다면 전하게 하셨으며, 하나님이 일하셔야 할 때 절대 민족과 환경과 조건에 한계를 두지 않으시고 행하셨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구약에서 유대인들에게 온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를 보여주신 것이 요나서가 아니겠습니까? 유대인 요나와 이방 니느웨 백성에 대한 이야기, 그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서 4장 10~11절, 새번역>
이렇게 끝난 요나서와 신약의 연결고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렇게도 유명한 이 말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 새번역>
그리고 이 모든 말씀, 구약과 신약을 공부하고, 그 공부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은 바울의 외침이 오늘 우리의 외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요엘 2장 32절, 사도행전 2장 21절, 로마서 10장 13절, 새번역>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한 율법학자의 이 질문에 우리는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삶을 적극적으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이 질문이 우리의 현재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10장 29절, 새번역>
왜 옳게 보이고 싶었는가 하면 자신은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금식과 구제와 기도라는 경건생활을 바리새인으로서 잘 실천하고 있으니 칭찬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건생활은 하나님 사랑을 위한 것도, 이웃 사랑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이웃에 대한 범주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는 생각도 하기 싫었고,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이웃이라는 범주에 두는 것이 수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차별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그들은 종교적 신념과 전통이라는 선을 긋고, 벽을 치고 자신들만의 ‘바운더리’, ‘나와바리’라는 ‘한정적 영역’을 만든 지 오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웃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이웃은 없는, 실체 없는, 그저 자랑행위였습니다.
율법학자라는 사람이, 구약 성경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그리고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을 자신들을 위한 제한적 사랑으로 축소시켜 버렸으며, 지역적 하나님, 이기적 하나님, 무엇보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율법학자 중에는 진짜 말씀이 무엇인지 똑바로 알고 있던 이도 다행히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마가복음 12장 28~34절, 새번역>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나은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즉 예배라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진짜 삶 속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새번역>
그래서 예수님은 그 율법학자를 향해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놀라운 칭찬을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 자는 결코 ‘선’을 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을 통하여 ‘한계’를 만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것은 그 역시 만들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짜리’임을 천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이웃 역시 ‘예수님 짜리’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 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말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섬기며 기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짜 복음을 깨달은 이들은 ‘한정적 영역’이 아닌 ‘Unlimited Area’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제사를 기뻐하시는지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과 가진 것을 나눠주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히브리서 13장 6절, 새번역>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결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내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21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예배자 여러분! 혹시라도 우리 안에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이 있다면, 한정적 영역에 갇혀 계신다면, 오늘도 무관심 속에 자신을 가두고 계신다면, 최소한의 필요한 관계 외에는 다른 어떤 관계에 열심을 내고 계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기에 변화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여전히 삶 속에서 ‘선’을 긋고 계신다면, 다른 이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벽을 세우고 계시다면, 그래서 나 역시 벽에 막혀 아무런 소통과 교통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면, 그 선이 더욱 더 뚜렷해져서, 그 벽이 점점 두꺼워지고 견고해져서 이제는 그 선을 침범하고 그 벽을 무너뜨리려 하면 화가 나는 지경까지 이르셨다면, 이제 그 선을 지우고 벽을 무너뜨릴 때가 드디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말씀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단절한 십자가의 전달자’, ‘개인주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이기적인 그리스도인’
‘내 몸만 사랑하기에 하나님 사랑도 형식적이 되어 버린 그리스도인’
더 이상 이런 오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아니기를 소망합니다. 대단한 변화에서부터 선이 지워지고, 벽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하나님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시선과 손길과 발길과 마음이 향하기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며 이웃 사랑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선을 긋고 있는 율법학자가 아닌 오늘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는 율법학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꽁꽁 얼어붙었던 사랑의 관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여 다시 관계를 시작하고, 한정적 영역의 빗장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흘려 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결단 찬양 –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 거리마다 기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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