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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공간◀ 스크랩 독일성서공회판해설·관주성경전서 와 굿뉴스 스터디바이블
유정호 추천 0 조회 668 12.05.08 07: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독일성서공회판해설·관주성경전서󰡕�와 󰡔�굿뉴스 스터디바이블󰡕�

- 구약을 중심으로 -


왕대일*

1.  우리말 해설 성서에 대한 서평이 필요한 이유

최근 대한성서공회는 두 종류의 우리말 해설 성서를 출판하였다. 1997년에 나온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 성경전서󰡕�(이하 󰡔�해설․관주 성경󰡕�)와 2001년에 나온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이 바로 그것이다. 외국의 경우 새 책이 출판되면 대개 그 책에 대한 서평이 곧장 그 뒤를 따르게 된다. 독자들에게 그 책에 대한 개요, 특징, 내용, 비평 등을 간략하게(그러나 정확하게) 제공함으로써 독서를 위한 건전한 지침을 제공해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서평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 풍토에 본격적인 서평이나 논평이 뿌리를 내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 학계나 우리 독서계는 다른 사람의 작업을 논평하기에도, 다른 사람의 논평을 듣기에도 아직 익숙하지 못하다.

서평은 해설 성서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술지나 계간지 등에 해설 성서에 대한 논평과 비평이 심심치 않게 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이를테면 󰡔�캠브리지 주석 스터디 바이블󰡕�(The Cambridge Annotated Study Bible), 󰡔�하퍼콜린스 스터디 바이블󰡕�(The HarperCollins Study Bible), 󰡔�NRSV 스터디 바이블󰡕�, 󰡔�NIV 스터디 바이블󰡕�에 대한 서평이나 논평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1) 이 서평들은 모두 해설 성서를 활용하는 독자들에게 그 책에 대한 학문적, 신앙적, 실제적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대한성서공회의 성경원문연구소에서 󰡔�성경원문연구󰡕� 제 9호에 해설 성서에 대한 특집을 싣기로 한 것은 무척 고무적이다. 우리말 해설 성서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본격적으로 회고하고 점검하고 조망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서평과 논평이 필요한가? 부정적인 시각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그 동안 우리 주변에서 출판된 숱한 우리말 해설 성서들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나라 교인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해설 성서는 대부분 그것을 집필한 사람의 이름을 싣고 있지 않다. 누가 책임지고 저작에 관여했는지를 알 수 없도록 해 놓았다는 이야기이다. 외국의 저명한 해설 성서를 번역(또는 번안) 했다고는 하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니다. 신구약성서에 정통한 학자나 목회자들의 책임 집필이라기보다는 기존에 출판된 여러 해설 노트들을 짜깁기 형식으로 모아 놓은 듯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말 해설 성서에 수록된 해설과 난외주의 저급한 수준(?)은 다 이런 잘못된 관행의 열매라고 보아야 한다. 혹 편집이나 출판에 간여한 저명한 학자의 이름이 실명으로 거론되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허명(虛名)으로 끝나고 만다. 그 저명한 학자의 동일한 이름이 여기 저기에서 출판된 해설 성서의 편집위원으로 반복 등장하는 경우가 하나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말 해설 성서에 대한 비평과 논평은 이렇게 잘못된 우리 해설 성서의 풍토를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불충분한 해설 성서의 피해는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가 입는 것이 아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 교회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나 해설 성서에 대한 서평이 필요한 진정한 이유는 이렇게 부정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해설 성서에 대한 서평이 진정 필요한 이유는 어렵게, 오래, 공들여, 값비싸게 만들어서 출판한 해설 성서를 오래도록 교회가 간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한 번 출판하고 마는 책이 아니라 개정판(revision)을 거듭하여 보다 나은(!) 해설 성서가 될 수 있도록 다듬어가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위해서 우리는 해설 성서에 대한 집필자의, 전문가의, 목회자의, 독자의 반응(feedback)이나 평가, 비평이나 제언 등을 지속적으로 듣고 적극 수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그렇듯이 해설 성서도 한 번 출판하고 마는 것으로 끝나서는 결코 안 된다. 해설 성서의 작업은 정작 책을 출판한 이후부터 더 끈기 있게 지속되어야 한다. 외국에서 간행된 해설 성서에 “확장되고 개정되었음”(Expanded and Updated)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음을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된다. 우리말 해설 성서에 대한 서평과 논평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2.  󰡔�해설․관주 성경󰡕�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 - 대본상의 차이

대한성서공회에서 출판한 󰡔�해설․관주 성경󰡕�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서로 다른 책이다. 이름이 달라서 서로 다른 책이 아니라 책의 성격과 특징이 서로 다르기에 다른 책이다. 물론 이 두 권의 해설 성서는 모두 외국 성서공회에서 펴낸 해설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해 놓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개역 한글판󰡕�에다가 독일성서공회에서 간행한 해설 노트를 첨부해 놓은 책이 󰡔�해설․관주 성경󰡕�이고, 미국성서공회의 성경본문인 󰡔�굿 뉴스 바이블󰡕�에다가 세계성서공회연합회에서 작성하여 붙인 해설(Good News Study Bible, 이하 GNSB)을 󰡔�개역 개정판󰡕�에 첨부해서 펴낸 책이 우리말로 된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이다.

두 해설 성서 사이에는 대본(臺本)의 활용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있다. 󰡔�해설․관주 성경󰡕�의 발간사, 머리말, 일러두기 등에는 이 해설 노트가 대본으로 삼은 성경본문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 놓지를 않았다. 독자들이 미루어 짐작하기는 그것이 아마도 루터 성경 개정판이나 현대 독일어 성경일 것으로 추정되나, 󰡔�해설․관주 성경󰡕�의 머리말에서는 이런 점이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말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경우에는 우리말 개역 개정판 본문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 미국성서공회의 성서 본문인 󰡔�굿 뉴스 바이블󰡕�(Good News Bible, 이하 GNB)의 번역을 참조했음을 밝혀놓았다.

해설 성서에 수록된 해설 노트가 어느 성경 본문을 원문으로 사용했는지를 묻는 질문은 󰡔�해설․관주 성경󰡕�의 경우에는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해설․관주 성경󰡕�의 해설 방식이 문제가 되는 구절을 풀이해 주는 난외주나 난하주 형식이 아니라, 성서 본문의 각 문단 맨 밑에 지금까지 읽은 본문 전체를 해설해 주는 방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에도 이런 식의 해설이 문단 맨 앞에 (맨 뒤가 아니라)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성서 본문에서 돋보이는 것은 문단에 대한 그런 해설보다는 난하주 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는 본문의 구절에 대한 설명이다. 바로 이런 구절풀이 식의 해설이 󰡔�해설․관주 성경󰡕�에는 없다. 그런 까닭에, 어떤 번역 본문을 해설 성서가 그 대본으로 삼았는지를 묻는 질문이 󰡔�해설․관주 성경󰡕�의 입장에서는 굳이 제기될 필요가 없다. 본문과 그 본문에 대한 해설을 위주로 하는 작업에서는 원문으로 삼은 외국어 해설 성서와 우리말 성서 본문 사이에 존재하는 본문상의 이독(異讀) 문제가 그리 큰 걸림돌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에 사용된 성서 본문은 1998년에 출간된 󰡔�성경전서 개역 개정판󰡕�이다. 여기에 붙은 해설은 미국성서공회의 GNSB의 해설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GNSB의 해설 노트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는 원전의 대본(GNB)과 우리말 성서(󰡔�개역 개정판󰡕�) 사이에 본문상의 이독(異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곧 우리말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에는 GNSB의 해설 노트만이 아니라 GNB의 성서본문과 우리말 본문 사이에 존재하는 본문상의 “다름”도 반영되어야 하는 이중 과제가 드리워져 있다.

창세기 1:1-2에 대한 두 해설 성서의 해설을 비교해 보자. 󰡔�해설․관주 성경󰡕�은 창세기에 대한 “안내”, “창조와 원역사(1-11장)”에 대한 설명에 이어서 창세기 1:1-2에 다음과 같은 해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성경의 첫 문장은 기본 신앙 고백을 표현한다. 곧 존재하는 모든 것(천지)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우연이나 순전히 자연적인 원인들의 작용에 힘입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물의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있다. 창조하다로 번역한 히브리 낱말은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절대주권자답게 무엇을 ‘무에서’ 불러낸다는 뜻이다. 이에 맞도록 뒤이어 나오는 창조 본문에서 새 창조 작업마다 창조주가 권능 있게 명령하시는 말씀(그리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시 33:6, 9; 롬 4:17 참조)으로 시작된다. 󰡔�요한복음󰡕�의 첫머리는 생명과 구원의 능력인 이 말씀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시고, 또 인격을 지닌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요 1:1-14)는 점을 지적한다.

2절에 따르면 창조는 모양이 없고 스산한 원초 상태(혼돈하고 공허하며)에서 시작된다. 여기에는 옛 중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던 생각이 깔려 있다. 태초에는 혼돈, 곧 생명도 생명의 가능성도 없는 상태가 있었고 땅은 어두움과 넘실거리는 물(깊음이 이를 뜻한다)로 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창조의 기본 행위를 경계 설정과 분리,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질서의 제정으로 이해하였다(이러한 관점이 10절까지의 묘사에 지배적이다).- 으로 옮긴 히브리 말은 숨, 바람을 뜻한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숨, 생명을 창조하는 숨이 잔잔하거나 출렁거리는 물 위에서 ‘움직이신다’(아마도 운행하시니라 대신에 ‘자신을 움직이시니라’로 옮겨야 할 것이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창세기 1:1-2의 의미를 설명해 놓은 해설이다. 이처럼 󰡔�해설․관주 성경󰡕�은 본문의 뜻을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풀이하는 데 해설 노트의 일차적 목적을 두었다(여기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다루게 된다). 위 인용문 가운데 2절에 대한 해설 마지막에 나오는 “신으로 옮긴 히브리 말은 숨, 바람을 뜻한다”거나 “아마도 운행하시니라 대신에 ‘자신을 움직이시니라’로 옮겨야 할 것이다”와 같은 노트는 본문상의 이독에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히브리어 단어의 번역과 관련된 풀이이다.

이에 비해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창세기 1:1-2를 이렇게 해설한다. “창세기 개론”, “우주와 인간의 창조(1:1-2:25)”에 대한 해설, “천지창조”에 대한 해설에 이어서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난하주에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기 시작하던 때에”로도 번역할 수 있다.

천지 번역본에 따라서는 “우주”. “하늘과 땅”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언급하는 방식이다.

창조하시니라 이 히브리 낱말은 오직 하나님과 연관되어서 사용된다.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나님께서 창조의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있던 것이라고는 황폐하고 아무 모양이 없는 텅 빔뿐이었다(비슷한 언어인 사 34:11; 렘 4:23을 보라).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번역본에 따라서는 “모든 것을 덮은 사납게 날뛰는 바다가 깊은 어둠 속에 묻혀 있고(시 24:2). 바다와 흑암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이전 존재했던 생명 없는 혼돈의 상태를 가득 채우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또는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바람”이나 “무시무시한 바람”으로도 번역된다. “영”으로 번역된 히브리 낱말은 “숨”, “바람”, “권능”으로 번역되며, “하나님”으로 번역된 단어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이란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본문에서 이 구절은 “강력한 바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수면 또는 “형체가 없는”.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해설에서는 “번역본에 따라서는....”, “또는 ......”이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이것은 본문 GNSB의 해설 노트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거나, 우리말 󰡔�개역 개정판󰡕�과 GNB 사이의 이독을 본문 비평적인 시각에서 검토한 과정을 해설 노트에 반영시킨 결과이다.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해설 노트에 반영된 GNB 성서 본문은 원문의 의미를 현대인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시도된 현대어 번역이다. 성서의 내용과 메시지를 표준적이고도 일상적이며 자연스러운 현대어로 표현하는 것을 번역의 기본지침으로 삼았다. GNB의 구약은 󰡔�슈투트가르텐시아판 히브리어 성서󰡕�(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의 마소라 본문을 대본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GNB는 때때로 마소라 본문을 이탈하고 있다.2) 인쇄된 자음본문을 해독함에 있어서 자음글자들의 분절을 마소라 본문과 다르게 하거나 마소라 본문의 독법과 차이 나게 읽기도 한다. 종종 히브리어 본문의 난 외에 표시된 이독(케레)을 본문의 읽기(케티브)로 수용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독이 히브리어 사본 하나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다면 그것을 과감히 번역의 대본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다. 만약 히브리어 사본들이 문맥상 만족할 만한 의미를 제공하지 않으면 GNB는 여러 옛 번역본(예, 그리스어, 시리아, 라틴어)의 증거를 따르거나 학자들이 일치된 목소리로 재구성한 본문(conjectural emendation)을 번역의 대본으로 수용하였다. 그 결과가 GNSB의 해설 노트에 표시되었고, 우리말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그것을 우리말로 옮겼다.

대한성서공회가 2001년에 출판한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의미의 동등성에 따라 이루어진 번역 본문(GNB)과 직역에 충실한 우리말 󰡔�개역 개정판󰡕�을 서로 보완해서 읽을 수 있게 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개역 개정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을 만났을 때, 거기에 대한 대안적 번역을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해설에서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말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난하주에는 히브리어 원본에 문제가 있을 때 그것과 관련된 본문 비평적인 검토를 번역에 반영시켜 놓았다는 GNSB의 해설과 함께, 경우에 따라서는 GNB와 우리말 󰡔�개역 개정판󰡕� 사이에 존재하는 본문상의 이독이 반영되어 있다.

3.  󰡔�해설․관주 성경󰡕�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 - 해설 방식의 특징과 그 차이

대한성서공회가 발간한 󰡔�해설․관주 성경󰡕�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모두 성서 본문의 맥(脈)을 짚어주고, 본문의 문학적 문화적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밝혀주면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구절에 해설을 붙이는 장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이 두 책은 크게 두 종류의 해설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본문에 대한 안내이고, 다른 하나는 본문 가운데 문제가 되는 구절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다. 이런 해설 노트들은 그 범위가 본문에 대한 개괄적인 조망으로부터 개체적인 단락이나 구절에 대한 자세한 설명, 번역본 상의 이독 등에 이르기까지 무척 광범위하다. 이 설명들은 혼자서 성서를 공부하는 사람, 교회 안에서 소그룹을 인도하는 사람, 또는 성서의 내용을 좀 더 많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 모두에게 성서의 깊은 의미를 찾아서 그 메시지와 대화하고 그것을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두 해설 성서는 그런 장치를 해설하는 방식에서 서로 차이를 보인다.

󰡔�해설․관주 성경󰡕�은 신구약의 독자들에게 본문의 문맥과, 본문이 무엇을 “뜻했는지”와, 그에 따른 본문의 의도를 의미 전달 형식으로 전달하고 있는 해설 성서이다. 이런 관점에서 󰡔�해설․관주 성경󰡕�은 독자들에게 본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돕는 문단을 단위별로 설정하고, 본문과 관련된 문학적 역사적 지리적 사회적 배경을 그것에 맞춰 밝혀주고 있다. 그렇기에, 󰡔�해설․관주 성경󰡕�은 본문의 특수한 낱말이나 구절을 해설하는 구절풀이에 심혈을 기울이기보다는, 문맥에 따라 설정해 놓은 본문(문단)의 객관적(역사적) 의미를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일에 충실하고자 한다. 물론 그 해설을 읽어보면 특정 구절이나 단어에 대한 풀이나 해설이 엄연히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생김새는 구절보다는 문단을 그 맥락에 따라 해설해 가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해설․관주 성경󰡕�의 이런 방식은 독자들에게 성서의 말씀을 잘 파악하게 한 후 그들을 말씀의 오묘한 은혜 속에 빠질(!) 수 있도록 돕는 장치 구실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해설․관주 성경󰡕�은 난하주(난하주에는 관련 구절을 밝히는 성구들만 표시된다)가 아닌 본문의 각 문단 맨 밑에 본문전체를 해설하는 방식의 해설 성서를 고안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독하는 독자들에게는 본문을 문단에 따라서 읽게 하고, 그 의미를 총체적으로(!) 깨닫게 하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따르다 보면 신구약성서의 독자는 성서 전체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했었고, 그것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되는지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위에서 살핀 창세기 1:1-2 문단에 대한 󰡔�해설․관주 성경󰡕�의 해설 장치가 바로 그런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해설․관주 성경󰡕�의 해설은 목회자나 평신도들에게 통독을 위한 신구약 해설이라는 아주 값진 유산을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 󰡔�해설․관주 성경󰡕�의 고유한 특징이 있다.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해설․관주 성경󰡕�과는 정 반대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문단으로 설정한 본문 전체에 대한 안내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그리고 나서 본문의 여러 구절들에 대한 풀이를 소개한다. 이것은 그 독자들에게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윤곽을 미리 알게 하고 나서 본문 읽기를 유도하는 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문단 해설은 대체로 󰡔�해설․관주 성경󰡕�의 그것에 비해 해설의 분량에서 상대적으로 짧다. 분량만 짧을 뿐만 아니라 해설에 접근하는 방식도 다르다.

예를 들어 “쉐마”로 알려진 신명기 6:4-5을 이 두 해설 성서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신명기 6:4-5에는 아무 난하주가 없다. 단지 6:5의 “마음”이란 단어에 대한 용어 해설을 참조하라는 표시가 붙어 있을 뿐이다. 대신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는 소제목이 붙은 문단, 신명기 6:1-9에 대한 해설에서 그와 관련된 해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부분은 첫 계명을 자세하게 설명한 단락이다. ‘쉐마’(히브리어 성경에서 6:4-5를 시작하는 말로 “들으라”는 뜻)로 알려진 6:4-5는 이스라엘 *신앙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을 선포하고 있다. 예수도 이것을 모든 *율법의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으로 인용하고 있다(마 22:37; 막 12:29-30; 또한 눅 10:27).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라는 구절은 “*여호와”, “*여호와만 우리 하나님이시다”나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시다”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여호와만 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2.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고 다른 신은 없다(시 96:5; 115:4-7; 135:15-18). 3. 이방 신들은 *바알처럼 여러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6:6-9에 기록된 명령은 11:18-20(또한 출 13:9)에서 반복된다. 후대 사람들은 성구함(‘테필림’이라는 성구가 들어 있는 소형 가죽 상자)을 이마와 왼쪽 손목에 매고(마 23:5) *성경 구절이 들어 있는 작은 상자(‘메주자’)를 집의 오른쪽 문설주에 붙여 놓았다.

 

이에 비해 󰡔�해설․관주 성경󰡕�은 신명기 6:4-5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먼저 6:4-5의 난하주에 “6:4-5(사랑하라) 신 10:12; 11:1, 22; 13:3; 30:6, 20; 수 22:5; 시 31:23; 집회 2:15 6:4 출 20:3관; 고전 8:4,6”이라는 관련구절을 병기해 놓았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에게 순종하라는 권고”라는 문단으로 소개된 6:1-9에다가 다음과 같은 해설을 첨부하고 있다.


4절에는 이스라엘의 기본 신앙고백이 들어 있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건한 유대인들은 아침 저녁으로 기도 드릴 때에 이 고백과 그 다음 몇 절을 낭송한다(이른바 ‘쉐마 이스라엘’. 막 12:34 다음 해설 참조).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시니’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러한 형식의 고백이 생겨났을 때도 아직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으로 통하지 않았지만(14절 참조), 이스라엘에게는 ‘오직 하나이신 분’이셨는데, 이는 사랑에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은 늘 오직 하나이며 하나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아 6:8-9 참조). 그러므로 뒤이어 5절에서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사랑보다 앞서기 때문에, 곧 하나님 몸소 선택하시는 사랑의 행동으로 우리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에(4:37; 7:8), 사람더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여기서 요구하는 사랑은 사람 전체를 요구한다. 곧 이 사랑은 감정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가운데 드러난다. 그리하여 이 계명들을 - 5절의 기본 계명뿐만 아니라 - 명심하기 위해서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다(6-9절). 8절의 규정으로부터 유대교에서 ‘경문’(마 23:35 참조)을 차고 다니는 풍습이 생겨났는데, 본디는 팔찌나 머리에 두른 천의 장식 핀에 이 신앙고백을 새겼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9절의 문설주에 대해서는 출 12:7 참조(문*).

예수께서는 5절을 ‘첫째 계명’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인용하셨다(막 12:28-30).


신명기 6:4-5에 대한 (또는 6:1-9에 대한) 이 인용문은 두 해설 성서가 해설 방식에서 어떻게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히브리 원문이 번역 과정에서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는지를 검토하는 일에 해설의 초점을 두고 있다. 반면 󰡔�해설․관주 성경󰡕�은 히브리 원문이 말하고자 했던 의미를 전달하는 일에 해설의 일차적 목표를 두고 있다. 이런 해설 방식의 차이는 독자에 따라서 그 호(好) 불호(不好)가 결정된다고 본다. 본문의 의미를 확인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싶은 마음으로 해설 성서를 읽는 독자들은 󰡔�해설․관주 성경󰡕�의 안내를 받으려 할 것이고, 본문의 증언이 다른 옛 번역본들에 비해서 어떻게 검토되고 그 결과가 우리 해설 성서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독자는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안내를 받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도 거론했듯이 󰡔�해설․관주 성경󰡕�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차이는 본문 비평적인 문제에 대한 해설 방식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번역본의 이독과 관련된 문제를 각 구절에 대한 해설에서 자주 거론하고 있다. 󰡔�해설․관주 성경󰡕�은 그것을 “본문 비평 주”라는 제목 밑에 권말 부록 형식으로 따로 붙여 놓았다.3) 본문비평이 무엇인지, 본문 비평의 문제가 왜 생겼는지, 본문 비평 주를 읽을 때 독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들은 무엇인지, 본문 비평 작업에서 검토되고 있는 옛 번역본들은 어떤 것인지를 간략하게 설명한 후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이르는 본문 비평 주를 첨부해 놓았다. 이런 부록 형식의 안내는 󰡔�해설․관주 성경󰡕�의 특성에서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과연 얼마나 독자들이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별개의 문제이다.

4.  󰡔�해설․관주 성경󰡕�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 - 해설 노트에 반영된 해석학적 좌표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이나 󰡔�해설․관주 성경󰡕�의 해설은 대략 크게 두 가지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우선 하나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서 본문의 문단의 뜻이나 그와 연관된 구절(본문)의 의미를 해설 노트로 풀이해 주는 일이다. 이 풀이는 원칙적으로 본문 비평적이거나(text-critical), 어의론적이거나(semantic), 문학적이거나(literary), 주석적이다(exegetical). 이것은 크게 다음 네 가지 유형의 정보로 정리된다.

(1) 문화적, 역사적 주(註). 󰡔�해설․관주 성경󰡕�이나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독자들이 원문의 의미를 그 본래적인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정보를 충실히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시 89:10에 있는 ‘라합’에 대한 해설 행 27:9의 ‘금식하는 절기’에 대한 해설).

(2) 본문상의 주해. 󰡔�해설․관주 성경󰡕�의 강점은 본문의 단락에 대한 풀이(주해)에 있다.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에서 이런 설명은 문단 앞에 나오거나, 번역자들이 다양한 이유로 히브리본문이 아닌 다른 본문을 번역의 대본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경우에 대한 해설로 나타난다. 특히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하나나 그 이상의 옛 번역본들을 번역의 대본으로 참조하였을 경우, ‘어떤 옛 번역이 본문을 이렇게 읽는다’거나(예, 창 1:26), ‘몇 개의 옛 번역들이 본문을 이렇게 읽는다’라고 표시한다(예, 창 4:8). 성서학자들의 추측으로 이루어진 본문수정을 채택하였을 경우 난 외에 ‘가능한 텍스트는 이러하다’라는 설명을 남긴다(예, 창 10:14). 신약성서에서 이런 설명은 그리스어 사본 중에서 심각한 차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밝히는 본문상의 주해에 포함된다. 이런 차이들은 본문상의 첨가(예, 마 21:43), 삭제(예, 마 24:36), 대체(예, 막 1:41)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3) 대안적인 표현이나 해설. 원문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때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한 둘 이상의 상이한 방법을 표시한다. 이 같은 경우 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대안적인 번역을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난하주에 남긴다(예, 창 2:9; 마 6:11). 󰡔�해설․관주 성경󰡕�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용어 해설”도 이것을 밝혀주는 일에 공헌한다.

(4) 칠십인역 본문 표기.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에서 칠십인역 본문은 신약성서에서 직접 인용되거나 의역의 형태로 인용되고 있다. 또 칠십인역 본문이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 심각한 의미상의 차이를 낳게 되는 경우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구약성서의 고대 그리스어 번역에서 비롯된 구절에 대한 표시를 난하주에 남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두 해설 성서가 구절 해설에 특히 목말라하고 있는 우리 독자들의 궁금증을 다 해소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궁금한 것들이 󰡔�해설․관주 성경󰡕�이나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해설 노트에서 충분히 다루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앞으로 이어질 우리의 독자적 해설 성서를 저작하는 데 필요한 문제 제기로 남겨두려고 한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대한성서공회가 발간한 두 종류의 해설 성서에는 세계 성서학계의 지적 유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해설 노트 말고도 󰡔�해설․관주 성경󰡕�이나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본문의 문단이나 구절에 대한 해설에 앞서서 독자들이 미리 알아야 할 성서의 여러 분야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문학적, 지리적 배경 등을 각종 해설문 형식으로 밝혀주고 있다. 󰡔�해설․관주 성경󰡕�의 경우 “성경 각 책에 대한 안내”, “도량형 및 화폐 단위 해설”, “용어 해설”, “본문 비평 주”, “연대표”, “천연색 지도와 흑백 약도” 등이 따로 첨부되어 있다. 이런 해설문들은 모두 본문 이해와 관련된 문학적 역사적 지리적 사회적 배경 등을 밝혀주는 일에 일정 부분 공헌한다.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경우 “해설문”, “구약/신약 개론”, “성경의 큰 단위에 대한 개론”, “각 책의 개론”, “용어 해설”, “지도와 찾아보기” 등을 마련해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우리말 번역 성서의 역사”,4) “󰡔�성경전서 개역 개정판󰡕�에 대한 해설”5)이라는 귀중한 자료를 덧붙여 놓았다.

이 때 이 두 해설 성서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자세하고 더 많은 해설문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느냐를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런 비교는 이 두 책 각각의 개성으로 삼으면 되기 때문이다. 가령 󰡔�해설․관주 성경󰡕�에는 구약의 경우 “모세 오경 안내”, “신명기 역사서 안내”, “역대기 안내” “예언서 안내”는 소개되지만, 성문서에 대한 안내나 지혜문학에 대한 안내나 구약과 신약 전반에 대한 안내는 없다. 신약의 경우에는 복음서 안내나, 서신서 안내 같은 총론 성격의 해설이 아예 없다. 반면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에는 “구약 개론”, “오경 개론”, “예언서 개론”, “신약 개론”, “복음서 개론”, “신약서신 개론”이 있다. 하지만 거기에도 구약의 역사서 개론이나 성문서에 대한 개론 등은 없다.

이러한 도움장치들은 독자들에게 각 본문을 소개하기 앞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전반에 관한 전체적인 안내를 제공해 준다. 구약의 경우 구약성서란 무슨 책이고, 구약성서의 텍스트는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저자의 문제, 문화와 역사적 상황, 번역의 과정, 오늘날 구약을 읽는 자세는 어떠해야 되는지 등을 서술하고 있다. 신약의 경우에도 구약과 신약에 대한 대조, 신약성서의 세계, 신약이라는 정경상의 토론 등이 약술되고 있다. 이런 서론적인 조명 외에도 각종 지도와 도표 등을 통해서 신구약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설명들이 제공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해설․관주 성경󰡕�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해설문이나 안내문이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을 비롯한 성서해석의 유산을 적극 활용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 출판된 개신교용 해설 성서들이 대부분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에 반감을 표시하는 문자주의적 해석의 경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세계 성서학계가 지적 유산으로 남겨 놓은 성서해석의 방법론을 창조적으로 활용해서 우리 독자들에게 성서 읽기의 난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해설․관주 성경󰡕�의 “머리말”은 그런 노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사람에게 계시하셨다. 이것은 무한한 은혜이며 신비 중의 신비이다. 더욱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나타내셨다는 사실이다(요 1:14). 이것은 성경 말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옷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눈이 부셔서 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언어를 직접 듣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내리실 때에도, 부활하신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의사 전달의 매체는 사람의 언어였다. 성경은 인간의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언어로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말씀하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의 언어 체계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과 같다고 여기다가는 성경의 문자를 우상화하는 잘못에 빠지게 될 것이다.


“눈이 부셔서 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언어를 직접 듣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은 인간의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언어로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이와 비슷한 견해가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에도 명시되어 있다.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구약개론”이 구약의 저자 문제를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자.


구약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구약이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에는 한 작가가 한 책을 쓰는 것이 하나의 관행처럼 굳어버렸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하거나 활용할 때 그 글의 출처를 밝혀야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쓴 글을 저작권으로 보호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은 구약 시대에서는 판이하게 달랐다....어떤 기록이 거룩한 말씀으로 간주되는 일에서 원래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이냐를 묻는 질문이란 그렇게 긴요하지 않았다. 이 말씀을 보존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신앙공동체가 자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에스겔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설교하고 외치는 이들이었지 결코 작가가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모세 오경”으로 여겨지는 책 속에 모세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들어 있다는 것이나, 여러 다양한 사람이 썼다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그것을 각각 “다윗의 시”나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부르는 것을 결코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제목들은 오늘날의 의미에서 저자가 누구인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그렇게 불리는 책 속에 수록된 위대한 전승을 창시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모세 오경”, “다윗의 시”, “이사야” 같은 제목을 저자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런 해설을 통해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 명칭들은 저자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책 속에 수록된 위대한 전승을 창시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여기에 󰡔�해설․관주 성경󰡕�이나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이 우리 나라 개신교회의 성서해석 풍토에 미치는 창조적인 공헌이 있다. 역사비평을 비롯한 성서해석의 유산을 적극 수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는 멋과 맛을 이 두 해설 성서가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 두 해설 성서가 차지하는 해석학적 좌표(座標)가 있다.

5.  평가와 전망

베뢰아 사람들은 날마다 말씀을 깊이 상고하므로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다(고상하다)”는 칭찬을 받았다(행 17:11). 이것은 진정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아 마땅한 칭찬이다.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그리스도인들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늘 깊이 있게 읽고 공부해 왔다. 그런 점에서 대한성서공회가 펴낸 󰡔�해설․관주 성경󰡕�(1997년)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2001년)은 성경을 읽고, 배우고, 알기를 원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좋은 지침서에 해당된다. 해설 성서에 관한 한 척박하기 그지없는 우리 토양 위에 󰡔�해설․관주 성경󰡕�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제대로 된 이정표를 세우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해설․관주 성경󰡕�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 사이에 해설의 방식을 놓고 귀납법 식이거나 연역법 식이라는 차이가 보이지만, 이 두 해설성서는 모두 집필자를 실명(實名)으로 제시하면서, 성서 본문을 대할 때 거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또는 무엇을 얻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게 만들었다. 성경이라는 우물가에 해설 성서라는 두레박이 있는데, 그 두레박을 누가,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잘 길어 올릴 수 있는지를 일깨워주었다는 것이다.

󰡔�해설․관주 성경󰡕�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정녕 이제부터 시작될 우리의 독자적인 해설 성서를 위한 하나의 초석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 두 해설 성서가 아쉽게 남긴 사항들을 신학자의 입장에서, 목회자의 입장에서, 독자의 입장에서 평가해 보는 일도 우리 논의에 소중하다. 여기에서 필자는 이 두 해설 성서의 장단점을 헤아리기보다는 이 두 해설 성서가 남겨 놓은 공통적인 자취에서 평가와 전망을 더불어서 살펴보려고 한다.

해설 성서는 독자의 독서를 돕는 책이어야 한다. 이 두 해설 성서는 학문적(?) 해설서다운 분위기를 지나치게 표방하고 있다. 그만큼 어렵다. 그만큼 전문적이다. 우리의 해설 성서가 학문적, 지적 유산을 적극 수용하고 활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독서를 위한 것이어야지, 집필자의 시각을 펼쳐 놓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을 위한 참고서를 만들어야지, 교사를 위한 참고서를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해설 성서가 존재하는 이유는 독자의 독서를 돕는 데 있다. 독자가 물을 수 있고, 독자가 궁금해 할 수 있고, 독자가 배우고 싶어할 것을 해설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해설 성서의 모든 해설과 안내에는 독자의 경험이 철저하게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사실 본문 비평적인 문제는 성서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소중한 도구이다. 본문에 대한 주석과 주해는 성서의 말씀을 온전히 수용하는 데 필요한 절대적 장치이다. 그러나 해설 성서를 읽어갈 때 오해를 낳을 수 있는 구절이나, 난해하거나 쉽게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나, 서로 상충되거나 어려운 한자어투가 있는 구절 등에 대한 안내가 누락되어 있다면, 독자들은 그 책에 대해서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특징 있는 해설 성서를 만들어야 한다.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고려하고, 또 밝혀야 한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해설해 주거나, 하나로 모든 독자들을 만족시켜야 된다는 강박관념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 해설 성서의 정체성을 우선 결정하는 일이 시급하다. 주석과 해설 사이, 해설과 해석 사이, 해석과 주해 사이, 개론과 해설 사이, 신학과 변증 사이, 말씀과 교리 사이에서 해설 성서를 어떤 모습의 도우미로 꾸밀 것인가를 먼저, 충분히 파악해야 한다.

해설 성서는 읽기가 쉬워야 한다. 전문적이되 전문적인 용어를 가급적 풀어서 사용해야 한다. 전문 용어에 대한 해설(용어 해설)의 중요성이 여기에 드러난다. 해설 성서는 사용하기가 편리해야 한다. 책의 부피가 좀 두꺼워진다고 해도 독자 입장에서 일목요연할 수 있어야 한다. 해설 성서가 지나치게 두꺼워지면, 상업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모든 것을 간명하게 추스를 필요는 없다. 간명하게 하려고 하다보니까 오히려 독자들에게 읽기에 어려운 버거운 짐이 되게 하였다.

󰡔�해설․관주 성경󰡕�과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계속 개정되어야 한다. 인쇄상의 오류도 수정해야 하고,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해설 노트에 첨삭이 (필요하다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두 책이 외국의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기에 여전히 남아 있는 번역투의 문장도 좀 더 바로 잡아야 한다. 불필요하게 남성 중심적으로 이루어진 문장이 있다면 그것을 다듬어야 하고, 번역상의 스타일이나 사용된 용어가 일부 독자들에게 엉뚱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면 수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한성서공회는 이 두 해설 성서를 사용하고 있는 독자들의 반응에 좀 더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어야 할 것이다.


* 감신대 교수, 구약학.

1) 여기에 대해서는 대한성서공회 성서학문헌정보자료실에서 두 권으로 정리해 놓은 󰡔�성경원문연구소 연구자료- 주석성경(Study Bible) 자료집󰡕�을 참조하라.


2) "Preface," in Good News Study Bible, p. xv. 이 서문은 󰡔�굿 뉴스 바이블󰡕�이 언제, 무슨 이유로 맛소라 본문을 이탈하고 다른 본문상의 증거들을 번역의 대본으로 삼고 있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우리말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이 점을 주의 깊게 취급하였다. 우리말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개역 개정판󰡕� 본문에다가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해설과 난외주를 첨부하였기 때문이다.


3) 󰡔�해설․관주 성경󰡕�의 “부록”, pp. 73-84.


4) 󰡔�굿뉴스 스터디바이블󰡕�, pp. 23-30.


5) 󰡔�굿뉴스 스터디바이블󰡕�, pp. 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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