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무렵에는 5.18문학상 공모가 있어 시부문에 응모하려 했으나 무등산에 관해 써놓은 시가 두 편이 있어 5편을 써볼 마음으로 무등산에 가려고 했으나 천안명상센터에서 나가지 않을 이유로 내년으로 미뤘다.
무사히 원효사 부근에 내렸으나 대규모 행사인 까닭에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산행을 시작할 무렵에는 정상까지 가는 것이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집행부에서는 전체 일정을 조정하여 공식적으로 정상을 오르는 것을 포기한다. 미리 통보를 했으므로 개인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한다.
발 빠른 젊은 산우들은 뒤를 보지 않고 출발한다. 우리는 인원이 많아 포기하고 광주 산우들과 늦재에서 만나기로 시간을 조정한다. 그러나 아직 패기가 넘치는 몇 산우는 오른다고 기를 세운다. 그러나 그 패기는 무더운 날씨를 탓하고 잠시 후에 기를 옆으로 세우고 합류한다. 아마 정상보다 정한 산우가 가지고 온다는 신선주와 5월의 보리숭어회와 멍게에 마음을 더 주었음에 틀림없다.
지금 더듬어 봐도 위대한 후퇴였다고 생각한다. 광주 산우들을 기다리는 동안 고운 꽃님들과 사진을 통하여 볼을 맞대고 잠시 연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가 있으며 그 명제에 동의하는 축에 끼지만, 오늘은 특히, 무등산의 철쭉은 사람에 비견해도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고, 그 우열의 비교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만나기로 한 늦재를 지나 바람재에 광주 산우들과 반갑게 만나 껴안는데 특히, 오랜만의 용우는 아직 든든함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정경도 회장님과 오창환 총장님도 반갑고 무거운 1.8리터 신선주를 열 병이나 가지고 온 정한 산우는 사람을 눈물겹게 하는 재주가 있다.
정경도 회장님과 오창환 총장님의 보리숭어회 등에 대한 보답으로 내 시집을 증정했지만, 아무리 경중을 다져도 내가 한참 미치지 못해 먹는 동안 내내 고마움이 맛을 더해준다. 다시 감사를 드린다. 시장기(발음은 시장끼)도 반찬이 되지만, 고마움도 반찬이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 모두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일부러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기적 유전자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이기심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한다. 잠시 요즘 한창 뜨고 있는 AI, 즉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타심이 더 많게 만들 수는 없을까! 라는 기대심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성자들이 다녀갔어도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며, 그 성자들을 이용한 제사장들이 악랄하여 그들이 오히려 세상을 혼란시키는 '악의 축'이 되었으니 역설도 이 정도면 코스모스 차원, 곧 우주급 경계나 차원이다.
잠시 만난 여인들이 우리에게 호감을 갖게 했으니 일부 산우 중에 먼저 요청하여 전화번호를 교환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비록 다시 연락하여 만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그들은 소위 뺑뺑이 세대이므로 광고와 일고는 어떤 점이 다르냐고 묻는다.
눈 밝은 어느 산우가 "우리에게는 4.19기념관이 있고, 일고에는 광주학생의거비가 있다. 일고는 당시 인구 40만의 광주 사람이 가는 것이고, 광고는 인구 4백만의 전남인이 가는 곳이었다. 물론 전북인이 오기도 했고." 정확하고 위대한 대답이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 그런 물음에 어떤 의의가 있을까!
세상은 찰나마다 끊임없이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덧없다는 말도 나오고. 불가의 용어이지만 붓다가 포교하던 시절의 처음에는 덧없다는 의미가 더 강했다는 설이 있다.
점심을 배불이 먹고 정한 산우 덕분에 멀리서 천. 지. 인왕봉을 보며 무등산 신선이 되어 나는 듯 '수자타'라는 불교음식점으로 왔다. 당초의 목표와 달리 시상은 달아나고 없어 산우들과 산중한담을 즐겼다. 내년에 하지 못하면 내후년에 하면 되는 것이므로 바쁠 것도 의무감도 없다.
당연히 육류가 없으니 배불리 먹어도 탈이 없을 것이라는 선입감을 가지고 실컷 먹었으나, '나이는 미리 알고 지름길로 온다'는 속담대로 쉽게 소화를 시키지 않는다. 그래도 입은 즐거웠으니 '행불행불변의 원칙'을 닮았다. 후에 영수가 떡까지 가져 왔으니 당연히 집사람 몫이 됐다.
무등산을 뒤로 두고 떠나는 서울행 버스는 아쉽지만 아름답다. 서울로 돌아와서 원무 산우가 추천한 동반시를 잊지 않고, 오늘의 기자인 삼모 산우가 낭송을 한다.
"초록 바람의 전언" / 고재종
뒷동산 청솔잎을 빗질해 주던 바람이
무어라 무어라 하는 솔나무의 속삭임을 듣고
푸른 햇살 요동치는 강변으로 달려갔다 하자.
달려가선, 거기 미루나무에게 전하니
알았다 알았다는 듯 나무는 잎새를 흔들어
강물 위에 짤랑짤랑 구슬 알을 쏟아 냈다 하자.
그 의중 알아챈 바람이 이젠 그 누구보단
앞들 보리밭에서 물결치듯 김을 매다
이마의 구슬땀 씻어 올리는 여인에게 전하니,
여인이야 이윽고 아픈 허리를 곧게 펴곤
눈앞 가득 일어서는 마을의 정자나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끄덕, 무언가 일별을 보냈다 하자.
아무려면 어떤가, 산과 강과 들과 마을이
한 초록으로 짙어 가는 오월도 청청한 날에,
소쩍새는 또 바람결에 제 한 목청 다 싣는 날에.
시를 읊고 헤어질 때 손을 모아 '시산! 시산! 파이팅!'을 외치면 항상 정겨운 구호가 된다. 1천회까지 유지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야 할까. 어렵겠지만, 즐거운 바람이 된다. 바람이 하늘까지 올라 하늘을 감동시키면 못할 것이 없다. 이름하여 희망의 바람. 중의(重義)적 의미다.
겨우 막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단잠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상쾌한 아침을 맞는다.
2019년 5월 24일 김정남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