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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 중국 산동성 청년 우희광(于希光)이 몸을 숨겨 인천으로 건너온다. 산동성이 전란에 휩싸여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을 때다.
가난한 점원 우희광은 22살이 되자 짜장면집을 낸다. 중국음식점 산동회관의 점원으로 일하던 그가 1911년 북성동에 건물을 짓고 이듬해 '공화춘(共和春)' 간판을 내건다. '공화춘'은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붕괴되고 공화정을 표방한 손문(孫文)의 중화민국이 탄생하자 '공화국의 봄이 왔다'는 의미로 지었다.
중국집을 낸 우희광은 부두노동자는 물론 일대 많은 화교들에게 중국의 면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시계바늘을 그로부터 30년 전으로 되돌려 본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며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온다. 이 때 자국군대에 물품을 공급하던 군역상인 40여 명이 함께 들어와 정착한다. 이 땅에 화교가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2년 후 선린동 일대의 5천평에 중국 조계지가 설정되고 차이나타운이 형성된다.
1898년 청나라에서는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ㆍ서양열강 공사관 습격사건)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산동성 주민들이 가까운 인천으로 대거 피난했다. 우희광이 그 중 한 명이다.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은 사업수완이 뛰어나 큰 돈을 벌었다.
가까운 산동성에 입소문이 나면서 '코리안 드림'을 꿈꾼 산동성 주민들이 또다시 몰려온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화교들의 이상향이 됐다.
하지만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중국인들은 일본의 위세에 눌려 차이나타운의 경제도 어려워진다. 수많은 화교들은 부두노동자(苦力.쿨리라 부름)로 전락하게 되는데 이들은 끼니를 대충 때우고 얼른 일을 해야 했다.
돈 없고 시간 없던 화교들은 싸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했다. 바로 고향 산동지방에서 먹었던 작장면(炸醬麵)이 여기에서도 등장했다. 삶은 국수에 중국 된장을 비벼 길거리에서 쪼그리고 앉아 얼른 먹고 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이 때 부둣가에 손수레 식당이 등장했고 우희광과 같은 중국음식점이 생겨났다.
작장면이 한국인의 입맛을 본격 사로잡게 된 데는 그 후 또 다른 배경과 작장면의 진화에 있었다. 1948년 캐러멜을 첨가한 춘장(사자표 춘장)이 등장하면서 달콤한 맛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입맛을 자극한다. 이때부터 흔히 말하는 '까만 짜장면'이 탄생하게 되는데 사실상 오늘날의 한국 짜장면으로 진화한 것이다.
곧 이어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밀가루 원조로 춘장과 밀가루의 만남은 짜장면이 한국 최고의 외식으로 등극하는 요인이 됐다. 짜장면은 문화관광부가 2006년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100가지 문화 상징'에 이름을 올렸다.
우희광이 경영했던 공화춘은 인천 차이나타운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지만 1980년대 경영악화로 문을 닫았다. 이후 차이나타운 내에 한국인이 '공화춘'이라는 간판으로 새로운 식당을 열어 영업을 하고 있고 옛 공화춘은 짜장면박물관으로 차이나타운을 지키고 있다.
100년이 넘은 이 건물은 중정형 중국식 상업건물로 서구의 실용적인 건축문화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근대건축 유산으로 주목받는다. 기단은 1907년에 지은 그대로이고 윗 부분은 2012년 원형 대로 복원했다. 내부에는 중화풍을 그대로 살려 중국 무술영화에서 볼 수 있는 멋진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개항기에 싹 틔운 중국사람들의 이식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명소로 격동기 우리 근대사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집중 포화 대상이 됐고 그 후 화폐개혁과 부동산 소유제한으로 화교사회는 크게 위축된다. 절반 이상이 대만과 미국으로 재이민 떠나는 상황을 맞았다.
오랜 침체 속 한국과 중국 간의 수교를 계기로 다시 서서히 주목받아 왔다. 관광특구가 되면서 화려했던 옛 영광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2008년 관광객이 215만명에 달했다.
현재 800명 정도의 화교가 살고 있는 인천 차이나타운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중국음식점은 청관, 연경, 공화춘, 만다복 등 일부 대형식당 중심으로 재편되고 나머지는 업종변경으로 활로를 찾고 있다. 요즘 가장 인기있는 것이 중국과자(월병)와 공갈빵, 화덕만두, 하얀백년짜장 등이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거리가 됐다. 시대에 따라 생활상이 변해 가고 있다.
화교는 외국에 정착할 때 3가지 칼을 준비해 간다. 생계를 위해서다. 음식점과 주방에서 사용하는 육도와 채도, 양복점에서 사용하는 가위인 전도, 이발소에서 사용하는 면도칼인 체도가 그것이다. 이는 화교의 기본적인 생업이 음식점과 양복점, 이발소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이 있는 동네가 선린동, 북성동인데 선린동(善隣洞)은 초기에는 청나라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청관(淸官)이라 부르다 일본이 득세하면서 비하하는 의미로 지나정(支那町), 미생정(彌生町)이라 개칭했다. 이후 중국인들이 한중 친선교류를 강화하자는 뜻으로 선린동이라 부르게 됐다.
이곳의 짜장면박물관인 구 공화춘은 꼭 봐야 할 명소다. 이외 몇 개의 관심끄는 시설물이 또 있다.
우선 인천역 맞은편이자 차이나타운의 입구인 제1패루다. 멀리서 봐도 이국적 풍경을 뿜어내는 제1패루는 중국에서는 마을 입구에 세우는 작은 조형물인데 이곳에는 매우 크게 설치했다. 자매도시인 웨이하이에서 2008년 통대리석을 조각해 만들어 기증했다. 제2, 제3패루도 있다.
청나라 영사관이 있던 자리에는 1934년 건립한 화교중산학교가 있다. 아치형 창호와 지붕층에 만든 출창이 특징이다. 인천 유일의 대만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과정이 있다.
2005년 건립된 한중문화관은 양국의 역사와 문화 교류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곳으로 다양한 체험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중국을 방문하지 않고서도 중국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중국인들의 교화 및 정신적 안녕을 기리는 중국식 사당 의선당도 볼 만한 곳이다. 산동지방의 도교 식으로 구성된 내부에는 사후 안식을 기원하는 관음보살, 돈을 벌어준다는 관우상, 자식을 점지해준다는 삼신 할머니상, 중국을 왕래하는 뱃길의 안전을 보살펴 주는 용왕상을 동시에 모시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자유공원 가는 길목에는 삼국지벽화거리가 조성돼 있다. 전체적으로 중화풍의 붉은 채색을 했는데 그림만 봐도 알 수 있을 법한 인물들이 눈길을 끈다.
그 언덕길 위에 자유공원이 있다.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과거를 회상하 듯 인천 앞바다를 향해 서 있다.
차이나타운 맞은편의 인천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의 시발역으로 철도의 발상지로서 상징성과 의미를 갖고 있다. 1900년 5월 1일 준공한 역사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1960년 지금의 역사로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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