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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교리신학원 총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득원(가브리엘)
② 이 젊은 사도(使徒) 4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은데, 이들은 겨우 몇 달만을 조선에 머문 뒤에, 예수 그리스도께 그들의 땀을 바치기 전에, 그분을 위해 피를 흘리게되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무한한 인자(仁慈)로, 선교사(宣敎師)가 이 세상에서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상, 즉 순교(殉敎)의 영관(榮冠)을 그들에게 주시기로 작정 하셨었다.
디종(Dijon) 교구에서 온 시몽 ․ 마리 ․ 앙뚜안 ․ 쥐스뜨 ․ 랑페르 드 브르뜨니에르(Simon-Marie-Antoine-Just Ranfer de Bretenieres) 신부는, 부모가 임시로 거처(居處)를 정하고 있던 살롱 ․ 쉬르 ․ 쏜(Chalon-sur- Saone)에서 태어났는데, 오래 된 가문의 출신으로, 그 집안 조상(祖上)들은 오랫동안 매려오며 부르고뉴(Bourgone)의 사법관(司法官)의 높은 지위에 있었다. 훌륭한 가문(家門)과 재산(財産)과, 뛰어난 재질(才質)이, 세상에서 그에게 주게 될 모든 이점(利點)을 업신여기고, 그는 1859년에 잇시(Issy) 신학교(神學校)에 입학했고, 2년 후 1861년 7월 25일에는 외방전교회 신학교(外邦傳敎會神學校)에 입학해서, 신학공부를 했다. 그는 동료 블리외(Beaulieu) 신부와 도리(Dorie) 신부와 같이 1864년 5월 21일에 티벳 교구장(敎區長) 또민 ․ 데마쥐르(Thomine-Desmazur es) 주교의 손에 의해서 사제품(司祭品)을 받았다.
보르도(Bordeaux)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1840년 10월 8일에 출생한 베르나르 ․ 루리 ․ 블리외(Bernaed ․ Louis ․ Beaulieu) 신부는 보르도(Bordeaux) 대신학교(大神學校)에서 5년 동안 공부를 하고 나서, 1863년 8월 28일에 부제(副祭)로 외방전교회 신학교(外邦傳敎會神學校)에 들어가, 그 다음해 5월 21일에 사제품(司祭品)을 받았다(그의 전기(傳記)로는 Launay(Memorial), p. 31~32)의 약전(略傳)외에 P. G. Deydou, Viede B. Beaulieu,(Bordeaux 1868)가 있다).
뤼쏭(Lucon) 교구의 쌩 ․ 띨래르 ․ 드 ․ 딸몽(Saint ․ Hilaire ․ de Talmont)에서 1839년 9월 22일(9월 22일이 아니라 23일. Launay(Memorial), p. 205. 그의 전기(傳記)로는 F. Baudry, Vie de Henri Dories,(Paris 1867)가 있다. 이 책은 그 후 영어판(英語版)도 나왔다)에 출생한 삐에르 ․ 앙리 ․ 도리(Pierre ․ Henri Dorie) 신부는 1862년 8월 13일(8월 13일이 아니라, 8월 23일), 외방전교회 신학교(外邦傳敎會神學校)에 들어갈 때에, 아직 소품(小品)밖에 받지를 못했었다. 그는 1864년 5월 21일에 사제품(司祭品)을 받았다.
랑그르(Langres) 교구의 라 ․ 뻬르떼 ․ 쉬르 ․ 아망스(la Ferte ․ sur ․ Amance)면 기용벨(Guyonvelle) 출신(1836년 10월 20일 출생, 1861년 6월 29일 사제서품 (司祭敍品). Launay(Memorial), p. 316~317. 그의 전기(傳記)로는.Th. Ramaget, Vie -de Martin-Luc Huin,(Langres 1893)이 있다)인 마르땡 ․ 뤼끄 ․ 위앵(Martin ․ Luc ․ Huin) 신부는 1863년 8월 20일에 외방전교회 신학교(外邦傳敎會神學校)에 들어갔는데, 2년여 전에 신부가 되어, 믈레(Melay)와 부아제(Voisey) 본당(本堂)에서 보좌신부(補佐神父)의 직분을 열심히 했었다.
이들 4명의 선교사(宣敎師)들은 1864년 7월 15일 파리를 떠나, 19일에 마르세이유(Marseille)에서 멧사쥬리 ․ 마리띰(Messageries Maritimes) 회사의 상선(商船)을 탔다. 9월 중순 경에 홍콩에 도착하여 상하이(上海)로 보내졌다가, 거기에서 요동(遼東)으로 가서, 조선교구장(朝鮮敎區長)과 연락을 취하기로 하였다. 거기에서 겨울을 나며, 기도(祈禱)와 한문공부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을 위한 준비(準備)를 했다(1864년 11월 요동(遼東)의 양관(陽關) 부근 차구(차溝)에 이르렀고, 1865년 4월 17일 그곳을 떠나 같은 해 5월 27일 조선에 잠입(潛入)하였다. Launay (Memorial), p. 90, 205).
③ 베르뇌(Berneux) 주교는 1865년 11월 19일 외방전교회 신학교장(外邦傳敎會神學校長)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AME: Cause 1866 HB 25 ~34).
『올해에 우리에게 새로이 일꾼 4명을 보내주신데 대해 무어라 감사(感謝)를 드 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리라고 기대합 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차례가 간 유산(遺産)에 만족하고 있고, 온 힘을 기울 여 말을 배우고 있으며, 오는 봄부터는 일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발 이정도로 그치지 마시고,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증원군(增員軍) 을 보내 주십시오. 우리가 조금 편해지려면, 지금부터 2년 안에 새 동료를 10 명은 받아야 할 터인데, 그래도 우리는 모두가 매우 바쁠 것입니다…. 나는 석 달 전부터 매일 열이 난 후로, 이제 겨우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정신도 없고, 기운이 다해서 이만 그칩니다.…』
거룩한 주교(主敎)가 서양(西洋)으로 보낸 것으로는 마지막인 이편지에는 그해 의 성사집행(聖事執行)의 결과(結果)가 들어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숫자는 다음과 같다.
사규고해(四規告解) 14,433, 재고해(再告解) 3,493, 성인영세(成人領洗) 907 명, 대세(代洗) 받은 외교인 아이 1,116명, 그중 983명 사망.
그런 다음 이런 추신(追伸)이 있었다.
『나는 아주 최근에 어떤 관장(官長)을 통해, 조선 땅에 정착(定着)하기 위해 러시아인들이 하는 새로운 탄원(歎願)에 대해, 대원군(大院君)과 더불어 약간 의 접촉(接觸)이 있었습니다. 대원군(大院君)은 나의 연락을 친절하게 받았습 니다. 왕의 어머니인 그의 부인(婦人)은 나더러 북경(北京)에 있는 우리의 공 사(公使)에게 종교의 자유를 청하러 오라는 편지를 보내라고, 비밀리에 전갈 (傳喝)을 보내왔습니다.
서울의 고관(高官)들은 프랑스 선박(船舶)들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 는 대원군(大院君)과 상의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고집하고 있습니 다. 비록 여전히 금지된 채로 있지만, 우리의 처지(處地)는 좋으며, 내년에는 우리가 한 층 더 편해지리라고 믿습니다.』
④ 이 희망(希望)들은 미구에 참혹(慘酷)하게 어긋나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베르뇌(Berneux) 주교의 동료들은 결코 주교만큼 안심(安心)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다블뤼(Daveluy) 주교는 이런 편지를 보냈다(1865년 10월 6일 서한. AME: Vol. 579, f. 782).
『어린 왕의 아버지는 지금까지 우리도 우리 신자들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 러나 이런 사태(事態)가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인지요. 그는 성격(性格)이 격하고, 잔인(殘忍)하며, 백성을 업신여기고, 사람의 목숨을 아주 경시(輕視)합니다. 이 런 그가 만약 천주교를 공격하는 날이면 무섭게 할 것입니다.…
이번 겨울은 지내기가 힘들 것입니다. 우선 가뭄이, 다음에는 홍수(洪水),그리 고 벌써 많은 가난한 사람이 굶주림으로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경험에 비추어 기근(饑饉)이 있는 때에는 우리 신자들에게는 괴롭힘과 박해(迫害)의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여전히 법의 보호(保護)를 박탈(剝奪)한 자들이 고, 따라서 모든 도둑들과 관리들의 집에 우글거리고 있는 약탈자(掠奪者)들에 게 만만한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한편 페롱(Feron) 신부는 이런 말을 썼다(1865년 10월 19일 서한. AME: Vol . 579, f. 765~770).
『왕의 아버지인 이 나라의 섭정(攝政)은 완전히 인망(人望)을 잃었습니다. 그의 포악(暴惡)함과 인명경시(人命輕視)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은 완전히 그에게서 떠나갔습니다. 그는 중과 그들의 미신(迷信)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자기 집안 의 행운(幸運)이, 자기의 아버지가 무너진 절의 탑(塔) 자리에 묻힌 데서 온다 고 확신(確信)하고, 그 탑을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만큼 호화롭게 다시 세우게 하고, 다른 탑 여러 곳에도 터무니없이 많은 희사(喜捨)를 했습니다(대왕대비 (大王大妃)가 대원군(大院君)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소(墓所)에 원정수묘자(元 定守墓者) 외에는 전부를 충군(充軍)케 하고, 군액(軍額)에 충정(充定)하라고 명한 일 이 있었는데, 아마 이러한 지시와 더불어 있었던 사실인 듯 하다『고종(高宗)』1년 8월 17일. 남연군(南延君)의 묘(墓)는 충청도(忠淸道) 덕산(德山)에 있다).
물론 이것은 모두가 국고(國庫)에서 나간 것이지요. 올 봄에 그는 자기 아들 에게 새 궁궐(宮闕)을 지어줄 생각을 했습니다(경복궁(景福宮)의 중건(重建)을 말 한다. 대왕대비(大王大妃)는 1865년 4월 2일 경복궁(景福宮)의 중건(重建)을 명하였 다.『고종(高宗)』2년 4월 2~3일). 터를 닦는 데만 한꺼번에 6만 명의 인부(人 夫)가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설계(設計)에는 방이 1,777개가 들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어마어마한 세금 (稅金)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백성들의 눈에는 이 괴상망측(怪常罔測)한 착상 (着想)을 윤색(潤色)해 보이기 위해, 그는 전에 일본인들과의 전쟁(1592년의 임 진왜란(壬辰倭亂)을 가리킨다) 통에 타버린 옛날 궁궐(宮闕) 자리에, 옛날의 대 궐(大闕)을 재건(再建)하면, 나라의 번영(繁榮)이 확고부동(確固不動)하게 될 것이라고 알리는, 새겨진 글이 땅속에 파묻혀 있다가 발견되었다고 사방에 공 표(公表)하게 했습니다.
그 새겨진 글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있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그것을 준비(準備)해서 미리 땅 속에 감추었으리라고 의심(疑心)하지 않는 사 람은 아무도 없습니다(과연 1865년 3월, 의정부(議政府)를 수리할 때 글을 새긴 돌 이 하나 발견되었는데,「계미갑원(癸未甲元) 신왕웅등(新王雄登) 국사우절(國嗣又絶) 가불구재(可不懼哉) 경복궁전(景福宮殿) 갱위창건(更爲刱建) 보좌이정(寶座移定) 성자 신손(聖子神孫) 계계승승(繼繼承承) 국조경연(國祚更延) 인민부성(人民富盛)」이라고 했고, 돌 뒷면에는「동방노인비결(東方老人秘訣) 간차불고(看此不告) 동국역적(東國逆 賊)」이라 씌어있었는데, 세상에는 이 글이 대원군(大院君)의 비결(秘訣)에서 나온 것 이 아니가 의심들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예언(豫言)을 믿는 체 하였고, 세금(稅金)을 바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진해서 꽤 많은 돈을 내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대원군(大院君)이 그것을 참작(參酌)해서 관장이나 다른 관직(官職)으로 자신 들의 열성(熱誠)을 보상(補償)해 주기를 바라서였습니다(대원군(大院君)은 경비 (經費)가 옹색해지자, 소위 원납전(願納錢)을 받고, 벼슬을 파는가 하면 세금을 올리 고, 심지어는 서울의 성문(城門)을 출입하는데도 세금(稅金)을 부과(賦課)하고, 당백 전(當百錢)을 발행하는 등 무리한 일을 강행했었다 그래서 양반들로부터 일반 백 성에 이르기까지 원망(怨望)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기억력(記憶力)이 그렇게 좋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감사(感 謝)에 기대(期待)를 걸었던 사람들은 수고와 돈을 잃었습니다. 들리는 말로 는 지금 공사(工事)가 중단(中斷)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는 돈을 벽돌과 회반죽에 써버리는 것보다는 그대로 가지는 것이 더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⑤ 끝으로 뿌르띠에(Pourtthie) 신부는, 외방전교회 신학교장(外邦傳敎會神學校長) 알브랑(Albrand) 신부가 중국(中國)에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事件)들의 영향(影響)이 어떤가, 종교자유(宗敎自由)의 가능성이 다소간 있음직한가 등에 대해, 그에게 묻는 여러 가지 질문(質問)의 대답으로, 그가 늘 보여준 총명(聰明)으로 진정한 사태(事態)를 다음과 같이 진술(陳述)하였다. 1865년 11월 20일자로 된 이 편지는,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그가 순교(殉敎)하기 전에 서양(西洋)에 보낸 편지로는 마지막 것이다. 그러므로 그 편지를 거의 다 이용(利用)하기로 한다(A ME: Cause 1866, Pourth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