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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할 것 같은 소백산. 나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경북도계와 백두대간 산행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아내는 산과는 멀어지고 말았다. 그런 아내가 봄이면 산행을 시작하고 싶다고 하니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워 ‘어머니의 산’으로 불리는 소백산이 제격이다. 안동과는 지근거리에 있어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길을 떠날 것 같았지만 얽힌 실타래처럼 생각과 같지 실행되지는 않는다. 또한 소백산의 돼지바위의 실체를 알고 있는 아내는 샤머니즘적인 행위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1월에 접견하러 가자고 아내와 약속을 했건만 2월이 끝나가는 오늘에서야 소백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조선시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병란을 피하는 데는 태백산과 소백산이 제일 좋은 지역이다”고 했고, ‘정감록’ 등은 소백산 자락의 금계촌을 흉년·전염병·전란이 없는 십승지의 으뜸으로 꼽았다. 예언서 ‘격암유록’의 저자 남사고가 소백산 옆을 지나가다 갑자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며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활인산(活人山)이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초암사 주차장에서 둘 만의 산행이건만 대구에서 온 젊은이가 동행을 하고 싶다고 정중하게 청한다. 안동중학교를 졸업한 안동사람이지만 직장 때문에 대구에 있다는 젊은 친구와의 어색한 동행은 불과 2km를 가기도 전에 깨어지고 말았다. 산악회에 갔으나 발이 느려 혼산하려고 왔다고 하더니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되면서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도 빨리 가는 것도 아닌데. 힘겹다고 자꾸만 쉬면 안 되는데.......사점(死點, dead point)을 잘 극복해야 만 남들과 함께하면서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을 텐데. 아쉽지만 점차 우리와 멀어져 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얼음 속을 흐르는 죽계구곡의 맑은 물소리가 이제 겨울을 끝내고 봄이 오고 있음을 직감케 해 준다. 초암사를 지나자 등산로가 두 갈래로 나눠진다. 왼쪽은 달밭골을 거쳐 소백산 주봉인 비로봉(1439.5m)을 오르는 산길이고, 오른쪽은 석륜암터를 거쳐 국망봉(1420.8m)에 오르는 등산로이다. 우린 초암사~석륜암터~국망봉~비로봉~달밭골~초암사로 산행하기 위해 석륜암 계곡을 따라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초암사로 흘러가는 물은 이미 봄을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흘러내린 이름 모를 폭포는 가는 겨울의 마지막 자존감을 보인다. 점차 경쾌한 물소리가 지루하기만 했던 겨울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음이다. 한동안 대구사람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너무 느려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아 둘만 오른다. 지금은 암자의 흔적조차 사라진 석륜암터에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끈다. 봉황 형상을 해 봉바위(봉두암)로 불리는 18m 높이의 기암괴석으로, 꼭대기에는 신기하게도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소백산 낙동강발원지 비석이 세워진 석륜암터의 봉바위 오른쪽 나무계단을 100m쯤 오르면 길섶에서 돼지 한 마리가 튀어나와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거대한 돼지가 웃고 있는 형상의 돼지바위로 새해 첫날에는 이 바위에서 소원을 빌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섰다고 한다.
돼지바위! 아내는 비록 냉담자이긴 해도 천주교신자이지만 서울에 있는 아들과 딸의 문제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한국 어머니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돼지 입을 만지고, 뽀뽀도 하고.....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예술을 다한다. 등산객이 없는 한적한 돼지바위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는 독립을 했지만 아직 짝을 구하지 못한 녀석들 덕분에 기해년 첫 날 와룡산에서 일출을 보며 빌기도 했지만 엄마의 마음도 몰라주고 저 잘난 맛에 살아가니 속이 답답한 모양이다. 이곳에서 간식을 하며 한동안 둘만의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대구 젊은이는 보이지도 않는다. . 돼지바위에서 백두대간 마루금과 접하는 곳 까지는 나무계단의 연속이다. 하늘을 가린 참나무 숲 나목 사이로 설산으로 변한 연화봉과 비로봉이 숨바꼭질을 하며 산들은 산그리메를 보이며 한 편의 수묵화를 그린다. 드디어 비로봉을 비롯해 국망봉 등 소백산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백두대간 능선 마루금에 오르자 그간 포근하기만 했던 날씨는 표정을 바꾸어 한기를 품은 거센 바람이 인사를 건넨다. 1월에 찾았다면 설화와 상고대로 단장한 철쭉나무 군락이 끝없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바위봉우리인 국망봉이 쪽빛 하늘 아래에서 설산으로 변한 백두대간을 굽어보고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봄마중을 하고 있는 오늘에는 단지 바람만이 우릴 맞이하고 있음이다. 신라 마의태자가 삼베옷을 입고 엄동설한에 국망봉에 올라 옛 도읍 경주 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하여 우리도 한참동안이나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위로 했다.
다시 국망봉에서 마의태자와 접견을 끝내고 초암사갈림길에 도착했으나 대구에서 온 젊은 친구는 아직 마루금에 오르지 않아 더 이상 우리와는 인연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출발하면서 지도를 보고 오늘 가야할 등로를 자세하게 설명을 했기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무사히 산행을 하겠지. 돼지바위 방향으로 오름길을 한동안 쳐다 보다 둘만의 산행을 이어가다 마루금을 벗어나 양지바른 곳에 앉으니 너무나 따뜻하여 점심상을 차렸다.
밥 먹고, 떡 먹고, 과일을 먹고, 커피로 입가심을 한 뒤 또 한참을 쉬다가 사탕을 입에 넣고 비로봉으로 향한다. 국망봉에서 비로봉 사이의 단양 쪽 북서사면은 어른 키보다 큰 철쭉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칼바람에 날려 온 눈보라는 응달이라 바닥이 눈으로 포장한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아이젠을 작용하고 산행을 이어간다. 철쭉이 제 색을 낼 늦은 봄의 소백산는 초록으로 융단을 만들고, 이름 모를 야생화들과 화려한 꽃으로 채색된 모습으로 찬가를 받으며 산객을 맞이하겠지만 오늘은 나목들 사이로 가는 겨울의 잔상들인 눈으로 등로를 덮고 있을 뿐이다. 나무와 나무가 손을 맞잡고 숲을 일으키고 산을 일으켜 화려함으로 변신할 때 나는 다시 소백을 찾을 것이다. 나목들 사이로 무시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비로봉이 조망되는 곳에 서면 언제나 나는 발걸음이 멈추고 만다(비로봉 900m 전 이정표). 바람의 왕국인 소백산은 아주 오랜 시간 천천히 익숙해진 길이 바로 비로봉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던가? 불어오는 바람에 순응하며 아름다운 베르네가 나올 것 만 같은 알프스의 노래를 부르며 목가적인 데크를 따라 소백산의 주봉인 비로봉에 오른다.
어렵게 정상에서 인증을 하고 일망무제를 자랑하는 비로봉에서 조망을 즐긴다. 북으로는 국망봉, 상월봉 넘어 죽구종주하며 만났던 신선봉과 민봉이 물결처럼 흐르고, 남으로는 백두대간의 연봉인 연화봉과 천문대 그리고 죽령을 넘어 도솔봉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멋을 더한다. 대간 마루금이 펼치고 있는 산그리메는 ‘구운몽‘의 양소유가 팔선녀와 노닐 것 같은 환상에 빠지게 한다. 시간에 제약되지 않고, 아내와 함께인지라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산행에서 더 이상 바랄게 없어 보인다. 날이 맑았다면 태백산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지만 아쉬움을 남기고 하산을 서두른다.
산은 변하지 않는 그 자체이기에 찾을 때마다 달라지는 것은 나의 변화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음이 아닌가 싶다. 이제 환갑도 지나 얼마 뒤면 공직에서 은퇴할 나이가 아닌가? 나에게는 젊을 때처럼 미래지향적인 삶이 아닌 현실 만족에 있음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자주 이 말을 외치면서 더욱 유명해진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좋아한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이 무엇보다도 확실하며 중요한 순간임을 일깨워 준 카르페 디엠과 욜로(yolo)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욜로(yolo)족은 미래가 불확실한 젊은이들이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소비하는 태도로 ‘인생은 한 번뿐이다’를 뜻하는 것이니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한 암울한 현실을 대변했다면 카르페 디엠은 현실을 직시하며 미래를 설계하란 것이다.
산이 높아 상대적으로 골도 깊은 소백산. 햇볕에 반사되어 물결치는 것 같은 삼가저수지의 환영을 안고 긴 내림길 끝에 달밭골에 도착했다. 예전엔 비탐구역이었던 등산로를 따라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지의 청정지역임을 확인하고 이 길을 들어선 내가 부끄러워해야 했던 그 길은 이제 소백산 자락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산객의 발길을 부르고 있으니 흐르는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되게 만드는 것 같다.
산으로만 한정한다면 아내는 신데렐라 콤플렉스(Cinderella complex)다. 산을 찾는 많은 여자 분들은 남편과 함께 산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아내는 나와 함께하지 아니면 산행 자체를 하지 않으니 대략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나는 산행거리가 웬만하면 15km 이상을 선호하지만 아내는 15km이내였으면 좋다고 하니 어떤 방법으로 최소공배수를 찾을 것인가? 예전에는 공룡능선, 용아장성, 화채능선, 지리산 종주, 덕유산 종주 등 장거리 산행을 나와 같이 많이 섭렵했지만 요즘은 싫다고 하니 어쩌란 말인지. 초암사, 아픔이 슬픔이 되어 내 가슴에 살아있는 변근우님과 정백화님의 생전의 모습을 아내와 이야기 하며 봄의 향기를 맡으며 주차장으로 향한다. 둘이여서 좋았던 산행이라 차제에 이런 기회를 좀 더 많이 만들며 여유로움을 찾으며 산행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
바람의 나라 소백산 국망봉과 비로봉을 오르며 바로가기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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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이렇게 사시기를
산행후기 잘 읽고 갑니다.
두분 선생님 너무 보기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