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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팬터마임
- 이어령
그때 나는 무엇 때문에 혼자서 읍내로 나갔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한여름의 눈부신 광선뿐이다. 모든 것이 화염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몹시도 울어대던 그 매미소리를 폭양이 흔들리는 음향이었다고 내 기억은 아직도 고집하고 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여름의 햇빛 속에는 인간의 권태가 그러며넛도 크나한 동요(動搖)가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든 여름의 그런 날, 그런 햇볕, 그런 흔들림 속에서는 무슨 일을 저지르고 싶어한다.
마을아이들에겐 언덕과 냇물을 지나야 하는 읍내 길이 금제되어 있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작은 언덕과 그 얕은 냇물은 하나의 국경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재가 몰래 혼자서 읍내로 빠져 나간 것은 권태로운 일광과 여름의 정적과 금제를 당한 마을 풍속이 서로 공모해서 꾸며낸 모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읍내에는 많은 가게가 있었다.
진열대의 풍선과 고무공들은 집에 있는 것들보다 훨씬 크고 아름답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지남철 팽이가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팽이의 둘레에선 생철로 만든 파랗고 빨간 두 마리의 뱀이 혀를 떨며 원을 그리고 꿈틀거리고 있다.
무슨 냄새였을까. 가게 속에는 박하 같은 냄새와 마술적인 경이가 졸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사물을 본다는 것은 그 사물 자체까지도 낯설게 하는 것 같다. 더구나 기억 속의 그 풍경들에는 소리가 없다.
낡은 필름이 돌아가는 채플린 시대의 무성영화처럼 소리는 소멸하고 몸짓만 남는다. 소리없이 흔들리는 해조(海藻)라든가, 흐느적거리는 어군(魚群)의 율동이라든가, 심지어는 잠수부까지도 숨소리를 낼 수 없는 수족관 속의 동작들……. 최초로 본 읍내의 시가는 그러한 몸짓들이 남아 있었다.
내가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은 햇빛과 그늘이었다. 어두운 것은 포목상이었을 것이다. 중국 사람은 긴 자를 가지고 비단폭을 재고 있었다. 현란한 색채들이 어두운 그늘 속에서 풀려 나온다. 발갛고 노랗고 하얀 광채들이 풀려 나온다.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유령들처럼 마차 바퀴들이 돌아가고 있다. 어째서 늘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색채만 있고 소리는 없는 것일까?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소리는 그 침묵 속에서 갑자기 울려온 「산옥이 아버지」의 웃음소리와 그리고 내 울음소리 뿐니다. 가게를 기웃거리고 다닐 때 술내를 풍기는 사람 하나가 나를 번쩍 안아 일르키고 껄껄거리며 웃었다. 갑작스러운 웃음소리……. 이러한 소리들은 정적 가운데서 무엇인가 사건을 만들어 내고 있다. 몸짓과 그 색채에 하나의 소리가 있게 될 때 비로소 사건이 생겨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음성이 있기 전까지는 원시의 혼돈이, 그 침묵만이 사물을 지배한다.
나의 이름도 그러했다.
「용인대 애기가 웬일이야? (마을 사람들은 나를 용인댁 아이라고 불었다)」
꺼칠꺼칠한 수염이 상기된 내 볼에 와 닿을 때 나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울음이 터져 나오기만 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은 과일가게 앞까지 나를 안고 왔다. 울지 않으려고 나는 학교 마당에서 나부끼는 만국기를 생각했다. 만국기가 있는 학교 마당에선 누나가 책을 읽고 있을 것이었다. 누나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울음처럼 목소리도 영 튀어 나오질 않는다.
그 사람은 과일가게에서 바나나를 샀다. 여러 송이가 달려 있는 한아름의 그 바나나를 사다가 내 품에 안겨 부었다. 그리고 귀에다 입술을 대고 말했다.
「아버지가 묻거든 산옥이 아버지가 사주었어요라고 말해야 된다. 산옥이……산옥이……. 애기야! 산 알지? 설화산, 그런 산 말이야. 산을 생각해요. 산……산……. 산옥이, 잊어버리지 않겠지? 그럼 어디 한 번 말해 봐. 산옥이 아버지라고……. 상옥이, 산옥이, 산옥이……」
그러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이 기쁨을 지키기 위새서는 빨리 그 사람으로부터 술냄새와 기름에 묻은 그 손가락들 사이에서 어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어린애들처럼 기쁜 일이 생기면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려고들 한다. 재물이나 사랑을 얻은 자리에서는 빨리 도망쳐야 된다고 믿고 있다. 훔친 물건은 그 현장에서 멀리 떠나냐만 완전한 자기 소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대체로 뜻밖에 기쁜 일이 닥쳐 왔을 때는 그것이 훔친 물건이나 혹은 곧 다시 빼앗기고 말 물건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그만큼 기쁨에 익숙해 있지 않다. 그러나 슬픔은 대개가 다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바나나를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뛰어야 했다. 풍선과 지남철, 팽이와 비단을 자질하고 있는 중국집 가게와 그리고 바람개비와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는 그 입내에서 빨리 도망쳐 나야야 했다.
그러다가 나는 길바닥에 엎어지고 만 것이다.
바나나의 송이들은 사방으로 찢기어 흩어졌다. 나는 한 송이라도 잃을까 조바심을 낸다. 그것을 하나하나 주워 모아서 가까스로 품에 안는다. 그러나 몇 발자국 안 가서 제가끔 떨어져 나간 바나나들은 하나 둘 길에 다시 떨어진다. 한 송이도 흘리지 않기 위해서 나는 애를 쓴다. 그것을 주으려고 몸을 굽히면 이번에는 다른 바나나들이 와라락 땅으로 굴러 떨러진다.
이것을 주우려면 저것이, 저것을 주우려면 또 이것이 떨어지다. 줍고 흘리고 줍고 하며 걸어간다. 한참을 이런 동작으로 걷고 있었지만 나는 몇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핶다. 욕심과 집착은 나를 지치게 했다.
아, 얼마나 먼 길이었던가. 모래알이 깔려 있는 뜨거운 강변길은…….숨막히는 황토의 언덕길은…….그리고 끝없이 퍼져있는 깨밭길은…….
이제는 떨어진 바나나를 주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 둘 굴러 떨어지는 바나나를 누가 주워 갈까 조바심 내던 마음도, 술내나는 산옥이 아버지의 알굴도 없았다. 한아름 껴안았던 두 필을 그냥 풀지 않은 채 울며 걷고 있었다. 나는 나의 울음소리만 듣고 있었다.
집 문 앞에서 행랑 아줌마가 달려 왔을 때는 이미 바나나를 한아름 안고 있었던 앞가슴은 텅 비어 있었다.
행랑 아줌마는 내가 팔을 다친 줄로만 알았던 모양이다. 구부린 두 팔을 피려고 할 때 나는 한사코 거부하며 더욱더 기를 쓰고 울었던 것이다.
끝내 팔만은 피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거기에는 한 송이의 바나나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도 팔은 아직도 그것을 흘리지 않으려고 고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집안 식구들이 모여 들었을 때 나는 헛소릴 하듯 「산옥이 아버지예요……. 산옥이 아버지예요」란 말만 되풀이했다. 아무에게도 잃어버린 바나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더구나 혼다서 구경한 읍내 이야기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너무 많은 바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가 단 한 개의 바나나를 사주었더라면, 아니 그렇지 않았어도 좋다. 비록 많은 바나나였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질 수 있을 만큼의 바나나에만 집착하였더라면, 그날은 기쁜 날이 되었을 것이다. 기쁨은 그보다 더 크고 집요한 욕망 때문에 더 쉽게 지나간다. 기억할 수도 없는 여름의 소나기처럼 언제나 급히 나나가 버린다.
왜 많은 것을 주려고 하는가? 많이 준다는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는 것. 가득한 햇살에는, 여름의 그 충만한 공기에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권태가 있지 않는가. 많은 햇사이 어두운 그늘보다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다.
물속에는 소리가 없다. 가득히 괸 물속에는 햇살 같은 침묵이 있다. 물속에서는 소리들이 울리지 않고 거품이 된다. 소리는 물방울이 되어 뜬다. 바나나도, 읍내의 그 많은 가게들도 물방울처럼 떠서 거품이 된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지만 무엇을 한아름 안고 동아온 두 팔의 그 무게만은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행랑 아줌마는 그때 분명히 내 두 팔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집안 식구들도 나도 모두 마낳가지다. 누가 그것을 알 것인가? 텅빈 손뿐이었을까?
바나나의 향내를 맡으려고 하면 아무 냄새도 없다. 그러나 단념하고 돌아서면, 저만큼 물러나 앉으면 은은한 향내가 코끝에서 어른거린다. 다시 바나나를 코에다 대면 그 향기는 여전히 도망치고 만다. 이런 일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 하면서 그 여름은 성숙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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