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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장 중요한 독립운동 단체를 당신이 모르는 이유
임시정부가 1919년 상해에서 발족했을 때,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한 종교의 교인이었다.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 장병 대부분도 같은 종교인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수많은 지사, 박은식·신채호·김좌진·이상설·홍범도·이범석·이상룡·김동삼·신규식·조완구… 이들의 상당수가 같은 교적에 이름을 올렸다.
그 종교의 이름이 대종교(大倧敎)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교과서에는 몇 줄짜리 각주로 처리되고, 중고등 역사 수업에서는 동학 · 천도교보다 훨씬 적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유가 있다. 대종교는 일제가 '종교 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해 조직적으로 탄압하고 기록을 지웠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역시 종교적 관점에서만 대종교를 바라봄으로써 그 역할을 독립운동사의 맥락에서 분리시켜 버렸다.
최근 학계에서는 단군민족주의를 표방한 대종교인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항일무장투쟁의 주역이었음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종교의 항일무장투쟁을 '육탄혈전'으로, 민족정신 운동을 '국혼운동'으로 재평가하며, 이것이 3·1운동의 독립선언과 함께 한국 독립운동사의 두 축이었다는 시각도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시작 단계다.
대종교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것을 만든 사람부터 알아야 한다.
홍암 나철(弘巖 羅喆, 1863~1916).
그가 없었다면 대종교도 없었고, 청산리도 없었고, 홍익인간이 교육이념이 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2. 대종교란 무엇인가 - 처음 듣는 사람을 위한 설명
'대종교(大倧敎)'에서 '대(大)'는 크다는 뜻이며 우리말로 '한'이다. '종(倧)'은 상고신인(上古神人), 즉 하늘의 신인을 가리키는 글자로 우리말 '검'(신) 또는 '얼'로 표현된다. 합치면 '대종'은 하늘 신, 즉 한얼님(하느님)을 의미한다. 단군을 전면에 내세우면 일제의 탄압이 더 거셀 것을 예상해 1910년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바꾼 것이다.
/신(神) 개념 - 삼신일체/
대종교의 신앙 대상은 '삼신일체 한얼님'이다. 하나의 하느님이 세 가지 작용으로 나타나는데, 환인(桓因)은 조화주(造化主), 환웅(桓雄)은 교화주(敎化主), 환검(桓儉·단군)은 치화주(治化主)다. 조화는 만물을 창조하고, 교화는 인간을 가르치며, 치화는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구조와 유사하다. 성부·성자·성령이 하나의 신의 세 위격이듯, 환인·환웅·단군은 하나의 한얼님의 세 작용이다. 최근 종교학 연구에서도 대종교의 삼신 한얼 신관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힌두교의 삼신론과 유사한 보편 구조를 가진다는 점이 주목받고 있다. 대종교를 단순한 국수주의 민족종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그 배경에 있다.
/경전 - 삼일신고와 천부경/
대종교의 핵심 경전은 '삼일신고(三一神誥)'다.
천훈(天訓)·신훈(神訓)·천궁훈(天宮訓)·세계훈(世界訓)·진리훈(眞理訓)의 다섯 장으로 구성되며, 인간이 어떻게 참된 본성을 회복하고 한얼님과 합일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핵심 구절은 "자성구자(自性求子·자성구자)하라, 항재이노(降在爾腦·항재이노)시니라 - 한얼 씨알을 내려주신 까닭이 있다. 그 씨알을 바탕으로 진짜 내 것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다."
신이 외부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는 내재적 신관이다.
'천부경(天符經)'은 천지인 삼신 사상을 81자에 압축한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우주 생성의 원리를 수리철학으로 풀어낸다.
수행법은 '지감·조식·금촉(止感·調息·禁觸)'이다. 느낌을 그치고(지감), 호흡을 고르고(조식), 몸의 자극을 삼가는(금촉) 세 가지 수행을 통해 삼망(三妄·마음·기운·몸의 흔들림)을 극복하고 삼진(三眞·성품·목숨·정기)을 회복한다는 수행론이다.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심신 수련 체계를 갖춘 수행 철학이었다.
/역사관 - 7회 비운론/
대종교는 독자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다. 단군조선에서 시작된 신교(神敎)의 맥이 역사 속에서 일곱 번의 큰 위기를 거치며 쇠퇴해왔다는 '7회 비운(七回悲運)' 론이다.
1회는 서기전 1209년 평양 천도 문제로 삼천단부가 분열한 사태, 2회는 기자의 팔조교 허용 이후 외래 종교 유입으로 단부가 분열한 사태, 3회는 위만에 밀린 기준(箕準) 재위기의 서북 단부 궤멸, 4회는 서기전 108년 한사군 설치로 단군조 거점이 유린된 사태, 5회는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신교 세력 만여 명을 강제 이주·해산시킨 사태, 6회는 고려 말 몽골 침입으로 신교 제례와 교명이 단절된 사태, 7회는 구한말 교문 제사까지 끊기고 만주의 고묘·고적이 폐허로 남은 사태다.
나라가 망한 것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정신의 뿌리가 거듭 흔들려온 결과라는 역사인식이었다.
역사의 정통 계보는 단군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사에 있으며, 청나라까지 4천여 년을 신교의 역사로 보는 웅대한 사관이었다.
/목표 - 홍익인간 이화세계/
대종교의 구현 목표는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다. 모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고, 이치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울 때의 건국이념이기도 한 이 말은, 1941년 임시정부 건국강령 제1장 총강에 "홍익인간과 이화세계하자는 우리 민족의 킬 바 최고의 공리임"이라고 명시됐다.
해방 후 1945년 12월 조선교육심의회가 이를 교육이념으로 채택했고, 1949년 교육법 제1조로 법제화됐다. 지금의 교육기본법 제2조가 그 직계다. 대종교가 중광한 이념이 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 교육의 기본 가치로 뿌리내린 것이다.
대종교의 5대 종지는 경봉천신(敬奉天神)·성수영성(誠修靈性)·애합종족(愛合種族)·정구이복(靜求利福)·근무산업(勤務産業)이다. 하늘을 공경하고, 영성을 수련하며, 민족을 사랑하고, 복리를 구하며, 생업에 힘쓴다는 것이다.
3. 나철이라는 사람 - 유학자에서 종교 혁명가로
가계와 수학 : 1863년 12월 2일 전라남도 낙안군(현 보성군 벌교읍)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나두영, 나중에 나인영으로 바꾸었다가 1910년 나철로 개명한다. 나주 나씨 7대조 이후 벼슬길이 끊긴 한미한 집안이었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았다. 어려운 환경에서 홀로 상경한 나철은 20세 무렵 온건 개화파 김윤식(金允植)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1891년 29세에 문과 병과에 급제해 승정원 가주서와 승문원 권지부정자를 역임했지만 1893년 스스로 관직을 내놓는다. 당시 조선은 청·일·러의 각축과 내부 개혁세력의 갈등으로 극심한 혼란 속에 있었다. 유교 질서에 투철했던 나철에게 부패한 관료 사회는 더 이상 몸담을 곳이 아니었다.
나철의 구국운동은 1904년 42세 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단계 : 계몽운동과 비밀결사. 오기호·이기·최동식 등 호남의 우국지사들과 비밀결사 '유신회'를 조직하고 국채상환운동과 호남학회 활동에 참여했다. 이 단계의 정신적 바탕은 '삼국제휴론'이었다. 한·중·일이 연대해 서양 열강에 맞서면 동양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공통된 낙관이었다. 러일전쟁을 황인종 대 백인종의 전쟁으로 인식했던 시대적 한계이기도 했다.
2단계 : 도일 민간외교. 1905년 6월 첫 번째로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등 일본 정계 거물들을 만나 동양 삼국 동맹과 한국 독립 보장을 역설했다. 응답은 없었다. 그해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됐다는 소식을 일본에서 접한 나철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전문을 보내 "목이 잘리더라도 협약에 동의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1906년과 1907년 두 차례 더 도일했으나 모두 성과 없이 끝났다. 4번의 도일. 4번의 실패.
3단계 : 의열 투쟁. 1907년 '자신회'를 조직해 을사오적 처단 의거를 실행했다. 권총 수십 정을 준비하고 3월 25일 을사오적이 각자의 출근길에 나서는 시간을 노렸다. 참정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권중현, 내부대신 이지용 등을 동시에 처단하려는 계획이었다. 지휘 혼선과 삼엄한 경비로 실패했고, 결사대의 전모가 드러났다. 나철을 포함한 지도부가 자수했고, 나철은 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가 이듬해 사면됐다.
4단계 : 마지막 도일. 1908년 12월, 마지막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민간 우익 세력까지 만났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3년여에 걸친 4차례 도일 외교와 의혈 투쟁이 모두 헛일이었다.
막힌 길의 끝에서 나철은 전혀 다른 문을 두드린다.
4. 백봉과 두일백 - 신화인가 역사인가
1905년 11월, 일본에서 귀국한 나철을 서울 서대문역에서 한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전(伯佺). 자칭 90세. 나이 탓인지 성(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백봉(白峯)의 제자라며 두 권의 책을 건넸다.
'삼일신고'와 '신사기'.
1908년 12월, 도쿄 숙소 청광관에 69세 노인 두일백(杜一白)이 찾아왔다. 그 역시 백봉이 보낸 사람이었다. 단군교포명서와 경전·의례서를 가져온 그는 말했다. "국운은 이미 다하였는데 어찌 이 바쁜 시기에 쓸데없는 일로 다니시오. 곧 귀국하여 단군대황조의 교화를 펴시오."
백봉 교단은 백두산을 근거로 한 신교(神敎) 계통의 비밀 도인 집단이었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1904년 음력 10월 3일 백두산 아래에 33명이 모여 '단군교포명서'를 발행하고, 20명을 파유원(派遊員)으로 삼아 만주·몽골·일본 등지에 파견했다. 그들의 임무 중 하나가 '현 정세 관찰'이었고, 그 과정에서 나철이 포착됐다.
백봉 교단의 역사관은 단군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사 정통론이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700년간 단절된 신교의 교맥을 되살릴 적임자로 나철을 지목했다. 백봉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아직도 역사학계의 논쟁거리다. 그러나 그들이 나철에게 전해준 경전과 역사관이 실재했고, 그것이 대종교의 사상적 기반이 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철은 도일에서 돌아온 지 불과 한 달여 뒤에 결심했다.
5. 1909년 2월 5일 - 중광(重光)의 날
1909년 음력 1월 15일(양력 2월 5일) 밤 11시. 서울 종로구 재동(현 가회동 14번지 일대), 여섯 칸짜리 초가집 북쪽 벽. 나인영은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봉안하고 동지들과 함께 '단군교포명서'를 선포했다.
참석자는 나인영·오기호·강석기·최동식·유근·정훈모·이기·김인식·김춘식·김윤식 등 10여 명. 평균 연령 50.6세. 대부분 나철과 함께 구국운동을 벌여온 호남 출신 지사들이었다. 이날이 대종교에서 '중광절(重光節)'로 기념하는 날이다.
'중광(重光)'이라는 표현이 핵심이다. 새 종교를 '창교(創敎)'한 것이 아니라, 고려 원종 때 몽골 침입 이후 700년간 단절됐던 고유 신앙을 '다시 빛나게 했다'는 뜻이다.
나철 자신도 창교주라 하지 않고, 그의 장례 발인 때 수도실 처마 앞에 세운 표목 앞면에는 「大倧敎 第二世 大宗師 弘巖 羅先生 化神之地」라고 쓰고, 뒷면에는 「檀帝御天後四千一百五十七年丙辰八月二十一日立標」라고 새겼다. 나철은 스스로를 창교주라 하지 않았다. '제2세'는 백봉 교단의 백봉대종사를 제1세로 보고, 나철이 그 법통을 이어받은 제2세 대종사라는 뜻이었다. 단군교의 정통성은 백봉 교단으로부터 이어진다는 선언이었다.
이것은 천도교·증산교·원불교 등 다른 당대 신종교들의 '창교주 신비체험'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중광 당시 나철에게는 뚜렷한 강신 체험도, 카리스마적 이적 능력도 없었다. 대신 백봉 교단으로부터 받은 경전·의례서·역사관의 체계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국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중광 이후 8년의 고행 속에서 나철은 달라졌다. 원도할 때마다 영험함이 응하고 한얼님의 묵계와 묵우를 받았다는 것이 그 자신의 고백이었고, 당대 지식인들이 나철을 정신적 스승으로 따른 데는 이 수행의 역사가 쌓인 종교적 권위가 있었다.
단군교 설립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미국 하와이,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신문들이 거의 동시에 이 소식을 보도했다. 불과 6개월 만에 해외 한인 사회까지 전해진 것이다. 교세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10년 7월 교인 6천 명에서 8월에는 2만 1539명으로 불었다. 독립운동가와 지식인층이 대거 합류했다. 당시 대표 언론인 '대한매일신보'도 논설에서 단군교를 국교 후보로 거론할 정도였다.
6. 일제의 눈에 비친 대종교 - 두려움의 크기
대종교가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는 일제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1911년 충청남도 장관 박중양(친일파)이 총독부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가 생생하다.
공주 지역 학교에 대종교 포교가 이루어진다는 보고를 받은 박중양은 즉각 총독부에 전보를 쳤다. "대종교는 공인된 종교인가?" 총독부의 답변은 명확했다. "대종교는 종교로 공인한 적이 없다."
박중양의 분석 보고서는 일제가 대종교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를 드러낸다. 그는 대종교 포명서가 "철두철미하게 마치 예부터 완전한 독립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기술하여 도처에서 단결의 요를 논하고, 시사를 개탄하며 국가 만회를 고취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분석했다. 이 책자가 학생들 사이에 퍼지면 "크게는 예측할 수 없는 독이 퍼지고, 작게는 내지인과 조선인 상호의 융화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5대 종지의 네 번째 '안고기토(安固基土)'가 특히 문제였다. "단군 때부터 삼천단부의 강역이 단군이 물려준 땅이니 이것을 회복하자"는 내용이, 일제 강점에 대한 직접적 저항 선언으로 읽혔던 것이다. 1914년 나철은 교단을 이끌고 중국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로 총본사를 이전했다. 국내에서의 포교가 완전히 봉쇄됐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도 청일학교 등을 세워 민족교육을 이어갔지만, 중국관헌을 통해 일본 측이 압력을 넣어 동창학교는 강제 폐교됐다.
1915년 10월 조선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이 발표됐다. 신도·불교·기독교만 공인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유사 종교단체'로 분류해 경무국 관리 하에 둔다는 것이었다. 나철은 그해 12월 대종교를 한국의 신도(神道)로 신고해 공인 인가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대종교 포교의 모든 길이 막혔다.
7. 구월산 삼성사 - 마지막 선의식과 조천
1916년 음력 8월 4일. 나철은 서울 남도본사를 나섰다.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로 가는 길이었다. 구월산은 단군과 그 아들 부소·부우를 모신 삼성사가 있는 성지였다. 그는 시봉자들과 함께 폐허가 된 사당을 며칠에 걸쳐 손수 수리했다.
8월 15일 새벽 1시, 마을 사람들과 교인 31명이 모여 선의식(䄠儀式)을 시작했다.
선의식이란 무엇인가. 나철이 복원한 고유 천제(天祭) 의례다. '선(䄠)'이라는 글자는 '한얼님께 올린다'는 뜻의 고자(古字)다. 개의식(開儀式)으로 시작해 참령식·전폐식·진찬식·주유식·주악식·원도식·사령식·폐의식의 9단계로 이루어진다.
올리는 제물은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하다. 오곡·삼베·돈 세 가지 폐물, 정화수·밀·배·고사리나물·쌀밥·미역 여섯 가지 제물. 화려한 유교 제례와 달리 민중이 일상에서 쓰는 재료들이었다. 귀족 제례가 아닌 민중 천제였다.
주유식(奏由式)에서 나철은 한얼께 고했다.
"수백 년 앞부터 교문이 닫히고 지금 수십 년 동안에 선의까지 없어져서 한얼과 사람이 서로 느끼는 길을 끊었더니, 얼마나 한울 운수가 돌아와서 한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깨우치시사 대종교가 다시 일어난지라. 철이 비록 어리석어 같지 못하나 몸을 이 교문에 바치어 널리 한울 길을 베풀고 크게 뭇 사람을 건짐으로써 제 책임을 삼은지도 이미 8년이라."
선의식이 끝났다. 나철은 수도실로 들어가 문을 안으로 잠갔다. 문 중앙에 종이를 붙였다.
"오늘 상오 3시부터 시작해 3일간 절식 수도를 하니 이 문을 열지 말라(自今日上午三時爲始 三日間絶食修道 切勿開此門)."
그리고 음식을 끊고 폐기법(閉氣法)으로 스스로 숨을 끊었다. 1916년 음력 8월 15일. 향년 54세.
대종교에서는 이것을 '죽음'이라 하지 않는다. '조천(朝天)', 하늘에 조회(朝會)하러 갔다고 한다.
8. 다섯 장의 유서 - 그가 남긴 말들
나철이 조천 직전 남긴 유서들은 그의 생각의 전모를 보여준다.
순명삼조(殉命三條). 목숨을 바치는 세 가지 이유를 밝혔다. 대종교의 큰 도를 빛내지 못한 죄책, 한배검의 은덕에 보답하지 못한 죄책, 천하 동포의 죄를 대신 받겠다는 다짐이었다. 종교학자들은 이것을 '대속적 희생제의(代贖的 犧牲祭儀)'의 성격으로 분석한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는 기독교 논리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언어와 신앙 체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조선총독사내서(與朝鮮總督寺內書).
조선 총독 데라우치에게 보내는 마지막 항의였다.
"유대가 망하자 예수의 도는 점점 떨치고, 인도가 쇠잔하되 석가의 도는 더욱 일어났다. 만일 한국의 옛 교로써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공법이 반드시 항거하리니 또한 애닯지 않은가. 철이 장차 한배님의 곁에 모시어서 반드시 중생의 선악부를 살피고 만세의 공정론을 기다리노라."
대종교를 탄압하면 오히려 더 강해질 것이라는 경고였다. 하늘에서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겠다는 엄숙한 다짐이기도 했다.
이세가(離世歌·세상 떠나는 노래). 순 우리말로 쓴 세 장의 시가다. 2절의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이것이다.
"형제자매 못은 고통 오날 이 몸이 다 맡어가니 / 참 믿음에 큰 공 세워 다시 신국에서 만납시다."
절망이 아니었다. 함께 남겨진 이들을 격려하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었다.
유계장사7조(遺誡葬事七條). 장례에 관한 지침은 동시에 사회 비판이었다. 화장할 것, 관곽 쓰지 말 것, 상여 대신 지게로 운구할 것, 부고 돌리지 말 것, 고기와 술 쓰지 말 것, 교인들은 상장 달지 말 것. 조선 유교 사회의 허례허식 장례 문화를 완전히 거부한 것이었다. 죽음에서도 개혁을 실천했다.
중광가(重光歌). 대종교 중광 이후 8년의 역정을 노래한 54장. 마지막 54장은 이렇게 끝났다.
"이 몸이 한배 길에 다 마치고 가오면 / 남은 형제자매들아 부디 잘 살으오."
9. 대종교의 장례 - 죽음 이후의 여정
나철의 장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였다.
8월 17일 일본 헌병대장이 의사를 데리고 와서 사망을 확인했다. 전보가 남도본사로 날아갔다. "15일 하오 11시 선생이 조천하셨습니다." 설도 김서종(임오십현중 1인, 건국훈장 수여자)이 삼성사 밖에서 하늘을 쳐다보니 시루고개로부터 사황봉까지 무지개가 뻗쳤다고 한다.
구월산에서 출발한 유구는 안악·사리원을 거쳐 기차로 서울 남도본사까지 왔다. 남대문역에 영구가 도착했을 때 교인들이 모자를 벗고 절했다. 8월 25일 화장이 이루어졌다. 유해는 박달나무 궤에 넣어 원도를 올렸다. 9월 18일 신해(神骸)는 다시 기차에 실려 만주 화룡현 청파호의 총본사로 향했다. 무려 한 달여의 여정이었다.
11월 20일 총본사에서 봉장예식이 거행됐다. 25개 교당에서 일제히 추모 예식이 열렸다. 그 울음소리가 만주 벌판을 가득 채웠다.
10. 조천이 불꽃이 되다 - 나철 이후의 대종교
나철의 죽음은 대종교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2세 교주 김교헌은 1919년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주도했다. 3·1운동에 앞서 발표된 이 선언서는 서명자 38명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고, 처음으로 무장투쟁을 선언한 문서였다. 이 정신은 같은 해 북만주에서 결성된 '중광단(重光團)'으로 이어졌다. 중광단은 나철의 조천을 기리는 이름이었으며, 대종교 교인들로 구성된 항일무장단체였다.
중광단은 1919년 '대한정의단'으로 확대 개편됐다가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됐다.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이장녕, 연성대장 이범석. 이들이 1920년 10월 화룡현 청산리에서 일본군 동지대를 상대로 거둔 승리가 청산리 대첩이다.
당시 청산리 독립군의 병력은 1천여 명 남짓이었고, 일본군은 5천여 명이었다. 그럼에도 독립군이 이길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이범석은 뒷날 이렇게 증언했다. "청산리 전쟁의 승리는 대종교적 신앙의 힘과 민족의식으로 무장된 신념의 결과였다."
최남선 역시 나철의 조천을 '육신제(肉身祭)'라고 표현하면서 "이로 인해 지리멸렬하던 민족전선이 비로소 통일된 정신적 지주와 구심점을 갖게 됐다"고 평했다.
청산리 승전 이후 일제의 보복은 가혹했다. '경신참변(庚申慘變)'으로 수천 명의 교도와 민간인이 학살됐다. 서일 총재는 이 소식에 통분해 자결했다. 김교헌도 병을 얻어 사망했다.
1942년 일제는 마지막 총공세를 펼쳤다. '임오교변(壬午敎變)'이다. 11월 19일 도사교 윤세복 이하 25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라는 죄목으로 일거에 검거됐다. 나철의 두 아들 나정련·나정문도 그 속에 있었다. 간부 10명이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 순국했다.
대종교의 독립운동사는 이처럼 피로 쓰인 역사였다.
11. 일제가 대종교를 두려워한 진짜 이유 - 일본 기원절을 겨냥한 반격
대종교가 개천절을 복원한 것은 단순한 종교 의례의 회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의 '기원절(紀元節)'에 대한 직접적 반격이었다.
일본은 '일본서기'의 건국신화를 근거로 기원전 660년 신무천황이 야마토국을 건국했다고 주장하며, 음력 정월 초하루를 환산한 2월 11일을 기원절로 제정했다. 이 날짜를 근거로 "신라 기원전 57년, 고구려 기원전 37년, 백제 기원전 18년보다 500년 이상 앞선 우리가 아시아를 이끌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었다.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명분도 여기서 나왔다.
이에 맞서 대종교가 내세운 것이 바로 '단기 4천 년 이상의 역사'였다. 기원전 2333년 단군의 고조선 건국은 일본의 기원 연도보다 1600여 년 이상 앞선다. 개천절은 이 역사의 출발을 기리는 날이었고, 동시에 일제의 역사 왜곡에 대한 민족적 거부 선언이었다.
12. 대종교가 남긴 것들 - 우리가 매일 만나는 유산
나철과 대종교의 흔적은 오늘날 우리 생활 곳곳에 살아있다.
홍익인간 교육이념 :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교육기본법 제2조에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라는 조항이 들어갔다. 단군이 고조선 개국 이념으로 내세운 '홍익인간 이화세계'가 현대 국가의 교육이념이 된 것이다.
개천절 : 10월 3일 개천절은 나철이 1910년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명명하고 경축 의식을 거행하면서 본격화됐다. 임시정부도 발족 첫해부터 음력 10월 3일을 '대황조성탄 및 건국기원절'로 공식 경축했다.
한글운동 : 대종교의 '봉교과규'에는 "봉교인은 남녀를 막론하고 문자를 알지 못하는 자는 마땅히 먼저 국문을 익혀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한자보다 한글을 앞세운 선언이었다. 주시경이 대종교로 개종하고 한글 연구에 헌신한 것도, 김두봉이 '조선말본'을 쓴 것도 이 흐름 안에 있었다.
민족사학 : 박은식의 '국혼(國魂)' 개념, 신채호의 '아와 비아의 투쟁' 역사관 형성에 김교헌의 '신단실기'·'신단민사'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단군→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사 정통론, '우리 역사는 4천 년이다'라는 역사 인식은 대종교에서 출발했다.
단기(檀紀) : 1905년 무렵부터 황성신문 등 언론이 단군기원을 표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대종교 중광과 함께 단군 역사의식이 대중화된 결과였다.
대학 설립 : 홍익대·단국대·경희대 등은 대종교 교인이나 그 정신적 영향을 받은 인물들에 의해 설립됐다.
13. 나철의 죽음, 그 역사적 성격
나철의 조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자살인가, 순교인가, 순국인가.
나는 셋 다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으로는 순교(殉敎),
민족적으로는 순국(殉國),
그리고 하늘에 스스로 바친 희생제의.
종교학자 노길명은 "나철의 순명은 단순히 한 개인의 죽음이나 자살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교와 순국의 의미를 갖는 것이며, 자신의 목숨을 제물로 바친 종교의식이다"라고 평가했다.
종교학자 박광수 역시 나철의 희생이 '대속적 희생제의'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고 분석했다. 천하 동포의 죄를 대신 받겠다는 선언은, 기독교 신학의 대속 논리와 구조적으로 유사한 것을 우리 민족의 언어로 구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역사적 결과로 판단해도 마찬가지다. 나철이 죽기 전보다 죽은 뒤에 대종교의 항일 투쟁은 더 치열해졌다. 중광단, 북로군정서, 청산리 대첩, 그리고 임오교변에서 열 명의 순국. 이 모든 것이 나철이 씨를 뿌린 역사였다.
14.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
나철이 구월산에서 문을 잠그던 그 새벽,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는 유학자로 태어났다가 구국 활동가가 됐고, 비폭력 외교가로 살다가 의혈 결사대원이 됐으며, 마침내 민족 종교의 지도자가 됐다. 그리고 그 마지막 8년의 결산이 구월산 수도실의 고요한 죽음이었다.
그가 남긴 대종교는 일제에 의해 '종교를 가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됐다. 그 말이 맞다. 대종교는 처음부터 그것이었다. 나라가 망하자 새 종교를 창교한 것이 아니라, 망한 나라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고유 신앙을 중광한 것이었다. '국망도존(國亡道存)'이라는 경구 그대로였다.
그런데 아직도 대종교는 역사 교과서의 각주에 머물러 있다. 홍암 나철의 이름은 낯설다. 1863년에 태어나 1916년 죽은 이 인물이, 오늘날 우리가 쓰는 교육이념을 남기고, 한글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제공하고, 청산리 대첩의 불꽃을 키웠다는 사실이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그 기억의 빈자리에 '홍암 나철'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