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24.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마 21:6~9
*제목; 종려주일, 알면서도 가는 길, 십자가의 길
우리의 삶이 마치 ‘어항속의 물고기’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도 서로 잡아먹기도 하고, 서열을 나누며, 뭔가 된 듯이 살고 있지만, 주인이 먹이와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바로 죽어버리는 물고기처럼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도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곧 죽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를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내가 열심히 살고 내가 뭔가를 이루어가는 것 같지만, 모두 주님이 도우셔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도우심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방해하고 우리가 누리는 것을 막는 것들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 은혜를 막는 것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공평하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고 있는데, 휴대폰 SNS에 댓글을 다느라 그 경치를 놓쳐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은혜가 문제가 아니라,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 문제인 것입니다.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의 단비를 부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은혜를 누리지 못할까요?
첫 번째는 “욕심”이(결국 죄가 되고 사망에 이르는) 은혜와 우리를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욕심이란 무엇입니까?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바로 욕심입니다.그리고 한계가 있는 인간이 이것도 가지고, 저것도 가지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인간은 결코 이것을 가지면 저것을 가질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가질 지를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고, 이것도 저것도 다 놓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결국 이것도 놓치고 저것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누리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은혜를 은혜답게 누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진짜 은혜를 막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은혜의 그릇입니다.
은혜를 담으려고 만든 은혜의 그릇들이 우리의 은혜를 막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령님이 이 은혜를 세상에 전하라고 만드신 하나님의 선교센터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이 역할보다는 자신을 지키는 역할(건물, 조직, 회원을 모으는 일 등)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그래서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일들을 버젓이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사람들이 은혜를 받게 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음은 “목사”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말씀으로 섬기라고 보낸 종입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섬기지 않고, 군림하고, 예수의 사명을 지키기보다는 예수의 덕을 보려고 애를 씁니다. 자신을 따르는 양들을 목양하기보다는 목축하여 자신의 부와 권력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한 사람의 목사가 실수해서 한 번에 수 천 수 만 명의 은혜 대상자들이 낙오합니다.
또한 열심히 사역한다고 해도역시 연약한 인간인지라 부족함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족함이 은혜를 막아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말씀”입니다.
이해되지 않고, 지키기도 힘든 말씀 자체가 은혜의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말씀의 “겉 뜻”만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 그렇습니다. 말씀은 “속 뜻”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그 말씀의 진정한 “정신”을 지키지 못하고, 율법적인 항목만 늘어놓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철저히 미워하셨던 것입니다.
율법(말씀)의 진짜 속뜻은 “네가 행복하길 바라고, 너를 통해 다른 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너를 사랑하고 아끼고, 다른 이를 사랑하고 아끼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이었던 톨스토이가 무교회주의자로 취급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존의 교회와 신앙의 틀은 모두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를 잘못 오해한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주장한 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따르자는 것입니다. 형식이나 틀에 매이지 말고 “속 마음”을 알고 이를 실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은 “교회”도 “목사”도 “말씀”도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이 은혜를 도무지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막고, 입을 막고, 마음을 막고, 손과 발을 묶고 있으니 그 은혜를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빈약한 은혜는 바로 당신 자신이 이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귀를 여십시오. 그리고 눈을 열어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마음을 열어 모든 것을 받아보십시오. 손과 발을 풀어서 그 뜻을 향해 나아가서 그 뜻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십시오. 그러면 은혜가 무엇인지를 단번에 알게 될 것입니다.
2. 은혜를 막는 것은 하나님의 부재 경험입니다.
은혜를 막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의 마음이 꽉 막혀버립니다.
오늘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골고다의 길(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죽음의 길)” 앞에서 그는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아버지여, 이 방법이 아니면 안 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묵묵부답하셨습니다. 철저히 예수님을 홀로 둔 것입니다.
밤새 자기 자신과 씨름하던 예수님을 결국 하나님의 뜻을 좇기로 하셨습니다. 바로 “알면서도 그 길을 가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얼마나 수치스러울지, 또 얼마나 절망스러울지를 아시지만 가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단지 “사랑”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살아날 수 있다고 하니, 이해되지 않지만, 내키지도 않지만 그렇게 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일을 감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날, “종려주일”입니다.
3.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에 해야 할 일
그러므로 오늘은 그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날입니다. 나 하나 살리시겠다고 고통과 수치와 죽음의 길인 것을 알면서도 가신 그 마음을 헤아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고난주간은 그 마음으로 나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주간입니다. 아끼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그처럼 소중히 여기셨던 나를 함부로 굴리지 않는 주간입니다. 소중히 소중히 여기고, 나의 행복의 길을 안내해주는 주간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그/녀도 소중히 여기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나 뿐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 이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은 사랑하는 주간,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주간입니다.
저와 함께 이렇게 살아보시겠어요? 나를 사랑하는 방법,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봅시다.
첫댓글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우리는 '어항의 물고기'같은 존재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것을 제거해 갑시다. 가장 내가 은혜받는 것을 막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영을 열어 주님을 받아들여야 우리 안에 은혜가 자리하게 됩니다. 종려주일 이 크신 은혜를 주셨으니, 이 은혜를 누리는 방법은 바로 주님이 핏값으로 사신 '나 자신과 함께 하는 자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