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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문협 원주 토지문학 공원 및 문화 유적지 탐방
2007년 10월 26일 금요일
토지 문학공원, 송강 훈민가 시비, 관란 원호 문학비, 치악 예술관, 운곡 원천석 시비, 토지 문화관,박경리 선생의 집, 김동인 묘비, 남한강 섬강, 임경업 장군 출생비, 손곡 이달 시비
* 서울 교대역 출발
오전 8시 30분에 서울 교대역을 출발했다. 이른 아침 공기가 차가운데 모든 회원들이 일찍 모였다. 우리 부부는 같은 서초문협 회원이라서 함께 갔다. 40명이 차 안을 가득 메워 훈훈하다. 신길우 회장님과 임윤식 총무님이 앞에서 우리들을 따스히 돌보아 주심에 흐뭇하다.
준비해 온 떡과 귤, 물, 사탕을 나누어 주어 아침 식사로 맛있게 먹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오느라 챙겨 먹지 못하여 허전했는데 배부른 시간이다. 어젯밤 비가 오고 지금은 그친 하늘로 상쾌하다. 일정을 잘 잡아 오늘의 문학탐방 행사가 참 좋겠노라고 모두들 즐거운 표정이다. 버스는 원주로 힘차게 달린다.
* 문막 휴게소
문막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하여 휴식했다. 가을이라서 나들이 가는 많은 차량이 즐비하다. 선선한 바람과 가을 하늘, 맑은 공기가 산뜻하여 가슴이 후련하다. 어느 곳의 휴게소든 깨끗하지만 문막 휴게소 역시 깨끗하다.
이제 원주 쪽에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차가 출발하자 회원들이 각자 자리에서 자기 소개를 했다. 다 알지는 못하므로 좀더 다정한 인사의 나눔이다. 나는 지난 10월 13~14일에 다녀온 하동 토지문학제 이야기와 오늘 박경리 문학공원을 가는 기쁨을 중심으로 인사했다. 행복한 시간이다.
*원주 도착
원주가 상당히 큰 도시다. 나는 강원도의 한 도시라서 작을 줄 알았는데 아니다. 예상을 벗어난 아주 우람하고 넓은 도시다. 치악산을 중심으로 거대한 산줄기가 둘러 병풍을 치고 있지만 멀리 있어 도시는 마음껏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도 신도시가 있어 지금 보는 곳은 서남 쪽의 새로 개발된 신도시다. 높은 건물과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아파트도 많고, 인구 30만명으로 강원도에서는 춘천 다음으로 큰 도시다. 원주천이 도심을 흐르고 원주 체육공원 등 잘 꾸며 놓았다.
치악산에서 까치와 구렁이의 동화가 탄생했다. 그래서 도로변에 까치종을 세워놓았다. 선비가 한양 갈 때 일어난 그날밤의 무서운 일화는 그 만큼 치악산이 깊고 험준한 산임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야 그 동화의 탄생지를 알게 되어 기뻤다.
국화도 곱고, 단풍도 곱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원주에는 박경리 문학공원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 유적지가 있다. 신길우 회장님이 이곳 상지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오래 재직하셔서 원주에 대하여는 아주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이제부터 우리는 원주 문학탐방을 보람되게 시작할 것이다.
* 토지문학 공원
이곳은 박경리 소설가가 16년간 머무르며 집필하신 집이 있는 곳이다. 강원도 원주 시내에 있다. 그 집을 중심으로 문학관이 세워져 있고 공원을 조성했다. 입구에 여러 시화 액자가 우리 문인들을 반가이 맞이한다. 잔디와 뽀얀 길, 깨끗한 공원이다.
먼저 박경리의 집필실로 갔다. 박경리 선생 옛집이라는 문패와 함께 아담한 2층집이다. 안으로 들어가 살아온 흔적이 그대로 담긴 마루에 앉아 관리인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4분짜리 영상을 보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모든 것이 토지에서 시작한다는 애틋함이다. 액자 속에 '문학보다 아름다운 것이 고추를 따는 손끝'이라는 문구가 가슴을 뜨겁게 한다. 그 만큼 선생은 토지를 사랑해 왔다.
손수 마련했다는 공기 잘 통하는 책장과 주방, 서재, 집필실 등을 둘러보았다. 낮은 책상과 방석, 책상의 책과 원고지와 펜이 햇살에 화사하게 조명된다. 벽에는 이곳에서 집필하시던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다. 금방이라도 나오실 것 같은 반가운 표정이다.
정원에는 연못과 나무가 있고, 연못에는 손수 잡아다 기르시던 미꾸라지가 산다. 곁의 텃밭에는 무, 배추가 여물어 가고 있다. 님은 연로하시어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살지만 여전히 봄빛으로 화사하다. 집을 빙 둘러 나왔다. 우물도 있고, 예쁘게 핀 가을꽃들이 담장을 감싼다. 대문이 고즈넉히 열려 있다.
토지 문학관 아카데미 하우스에 들러 문학의 향기에 젖었다. 항상 고고한 문학이지만 박경리 선생의 대작 토지가 우리에게는 큰 교훈으로 다가온다. 그의 출생연보와 원주의 생활상이 전시되어 있다. 지난 주에 다녀온 하동 토지문학제에서는 그의 고명 딸인 김영주 여사를 만났는데 다시 이곳에서 그의 생애를 접하니 흐뭇하다. 또다른 일정이 많아 집필실 뒷모습을 보며 아쉽게 떠나왔다.
*토지의 빛
토지문학 공원의 박경리 선생 집필실 뜨락에서 보고 느낀 시심을 담은 시다. 이 시는 서초문인협회에서 발간하는 2007년도 문학서초 책에 원주 문학탐방 후기 특별기고란에 게재된 원고다.
토지의 빛
-원주 토지문학공원에서
김윤자
님의 빛이 겨울이라 해도
토지의 빛은 봄빛입니다.
그 찬연한 얼이
뜨락에 가득하여
연못에는 꾸라지가
텃밭에는 무, 배추가
통통하게 여물어 가고 있습니다.
문학보다 아름다운 것이
고추를 따는 손끝이라 하신
액자 속 님의 문구가
토지의 땀방울로, 토지의 빛으로
가슴 속에 각인됩니다.
살다가 목숨이 가늘어질 때
토지를 부여안고
굵은 획으로 살아오신 님을 회억하며
뿌리 깊은 토지
제 마음 속에도 심어, 그 빛으로
또 하나의 화사한 길을 열겠습니다.
*송강 정철 훈민가 시비
송강은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판서와 대사간을 지내다가 선조 13년 1580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원주와 인연을 맺었다. 정치가지만 문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바른 말을 잘하여 귀양살이도 살았지만 곳곳에 남의 그의 시비와 유적비는 우리에게 큰 훈시다.
전남 담양 식영정에서 본 님의 그림자가 이곳에서도 서성인다.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1년도 안되는 동안에 훈민가 16수와 관동별곡을 지었다. 원주 명륜동 치악 예술관 오른쪽 입구 나무 정원 사이에 세워져 있다. 지금 그 시비 곁에서 님을 만나고 있다. 학의 형상을 한 화강암에 시가 새겨지 있고, 위에는 치악산을 비롯한 세개의 산봉우리가 조각되어 있다. 가슴을 울리는 시다.
어버이 살아실 때 섬길 일이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프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총 3편의 훈민가가 새겨져 잇는데 이것은 첫번 째 위치에 새겨진 시다. 시가 구어체로 되어 있어 내가 현대어로 고쳐 썼다. 그외 2편의 훈민가가 더 있다. 학창시절에 배운 시인데 오늘 이곳에 와서 읽으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관란 원호 문학비
수양대군이 중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집현전 직제학을 사직하고 원주로 낙향한 생육신이다. 단종임금이 영월로 유배되자 영월 서쪽 제천시 송학면에 동산에 가서 살고,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3년상을 지낸 사람이다. 원주로 돌아와서는 앉으나 서나 단종능이 있는 영월을 향해 동편으로 머리를 두었다.
선생의 문학비가 치악예술관 왼쪽에 세워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生六臣觀瀾元昊先生 文學碑'라 되어 있고, 뒷면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1997년에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에서 세웠는데 비문은 이상보 박사가 썼다.
간밤의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내여라.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스러 흐르고저, 나도 울어옘이라
단종이 유배되었을 때 상류 강가인 관란정에 올라 그리워 하며 부른 시조다. 단종 승하 3년상을 치르고 원주로 돌아와 토굴에서 살았다. <원생몽유록>은 그가 꿈속에서 단종을 모신 이야기로 최초의 한문소설로 인정받고 있다.
송강 시비와 함께 치악예술관 정문 양쪽에 있다. 울창한 나무와 함께 이제는 편히 휴식하시는듯 고요하다. 단종의에 대한 애달픈 시조에 나도 가슴이 아파온다.
*치악 예술관
원주의 대표적 명산이 치악산이다. 드높고 장엄하게 원주를 감싸고 있다. 그래서 원주에는 '치악'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들이 많다. 치악 예술관은 아주 크고 우람하다. 정원도 넓게 자리하고 건물도 최신형으로 아름답다. 원주 예술제와 피아노 독주회가 열린다는 안내문이 크게 걸려 있다.
원주에도 이런 예술관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산 깊고 물 깊어 살기에 급급할거라 생각했는데 풍요로운 삶의 흔적이 곳곳에 흐르고 여유로운 낭만의 예술이 전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 만큼 우리나라의 드높은 위상이며 강원도 원주의 한차원 높은 위상이다.
*운곡 원천석 시비
조선 태종의 스승인데 임금이 된 뒤에 찾아온 태종을 만나지 않고 피해버린 절의 선비다. 충신은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고려의 국자진사였으나 치악산에 은거하며 원주에 묻혔다. 많은 시문을 지었으나 시조 몇수와 한시집이 전해졌다. 야사도 6권이나 썼는데 후손이 보고 화를 입을까하여 불살라 버렸다. 올곧은 길로 걸어온 깨끗한 선비다.
가을 은행잎 노랗게 물든 산자락에 시비가 있다. 붓 모양의 조각 안에 '耘谷 元天錫 先生 詩碑'라고 적혀있고, 곁에는 시조 4편이 새겨져 있다 그 중에서 두번째 시조를 그의 후손되시는 분이 읽고 해석해 주었더.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던고
굽을 節이면 눈 속에 푸르르랴
아마도 歲寒高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운곡 선생, 자신을 노래한 시조다. 높은 지조와 절개가 돋보인다. 푸른 잔디 위에 오롯한 시비가 선생의 정신을 그대로 드러낸 듯하다.
시비에서 조금 떨어진 아래에 그분의 사당이 있다. '節義門'이라는 글이 문위에 붙여 있고 세개의 문 중에서 맨 끝문으로 들어 갔다. 중앙에 영정을 모신 방과 생시에 즐겨 드셨다는 잡곡을 담은 그릇 등이 있다. 방명록에 다녀간 기록을 하고 나왔다.
동산에는 묘소가 있다. 가을 햇살이 잘 조명되어 더욱 찬연하다. 봉분이 높지 않고, 묘비와 상석이 소박해서 선생의 삶을 담은 듯하다.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그 몸이 욕되지 않았다. 백대의 스승이라 일컬을 수 있다.' 고 적혀 있다.
대단한 분이시다. 임금의 스승이라면 훌륭한 벼슬자리를 얻을 수 있으련만 다 마다하고 피신하며 의롭게, 올곧게 살아온 그분의 생애는 후손들에게 큰 교훈으로 길이 남을 훌륭한 유산이다.
*토지 문화관
원주시 외곽, 치악산 줄기의 산자락 조금 높은 위치에 2층 건물로 서 있다. 박경리 선생이 현재 사시는 집 바로 곁에 있다. 이곳에서 문학에 대한 행사와 문학강연이 열리고 토지문학에 대하여 조명하기도 한다. 깨끗한 곳에 깨끗하게 지은 새 건물이다. 곁에 박경리 선생이 살고 있어 이곳은 그야말로 박경리 선생의 체취와 토지의 향기로 가득하다.
안에 들어가서 둘러보며 안내원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따스한 차 한잔을 마셨다. 입구에 커다란 북이 덩그러니 있다. 한국의 얼이 담겨 있다. 여러 개의 방이 있는데, 모두 문인들을 이해 마련해 놓은 것이다. 작품 집핍실, 세미나실 등등 후학 양성을 위해 마련한 의미 깊은 곳이다.
*박경리 선생의 집
토지 문화관 곁에 있는 박경리 선생님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많이 편찮으셔서 나오시지 못했다. 80세가 넘은 고령으로 고명딸 김영주 여사의 보살핌으로 함께 사는 집인데, 철창대문이 소슬하다. 겨우 열린 문으로 들어가 배추와 고추밭을 보고, 장독대와 선생님이 계신 집의 외형만 보았다. 땅을 많이도 사랑하시는 흔적이 집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넓은 텃밭이 흙으로 빛난다. 배추가 잘 자라고 있다. 님은 겨울이어도, 토지는 여전히 봄인양 화사하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살아온 그의 불우한 삶, 결혼 4년만에 남편을 떠나 보내고 아들과 딸을 얻었으나 남편 사별 후 아들도 죽고, 겨우 김영주 외동딸과 함께 고독하게 살아온 분이다. 어머니로부터 딸까지 3대의 여자가 살며 그 삶이 소설 속에 녹아 있다. 대부분 그의 작품은 여성 위주, 여성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강인함이 드러나 있다. 토지, 김약국의 딸들...등의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모두 여자다. 남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여자가 우위에 있다.
치악산 깊은 뚝심이, 드높은 기상이 선생의 깊은 문학의 열정을 보듬고 있다. 하루 속히 쾌차 하셔서 여러 문인들을 맞아 훌륭한 말씀을 나누어 주시길 빌었다. 떠나오는 걸음이 무거웠지만 담장 너머로, 지붕 아래로 님의 자취를 본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김동인 묘비
소설가 김동인은 최초의 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했다. 사실주의 작가로 배따라기, 발가락이 닮았다, , 감자, 붉은 산 , 광화사, 광염 쏘나타, 등의 단편소설로 현대문학의 기초를 딲은 빛나는 공적을 이루어냈다. 1900년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하며 작품을 쓰다가 1951년에 동맥경화로 작고 했다.
원주시 귀래면 산 전체가 공동묘역인 곳에 그분의 묘가 있다. 아름다운 저수지를 바라보며 한참을 걸어서 올라가 만났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어 어렵게 찾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묘비 뒷면에는 배따라기 소설의 끝부분이 새겨져 있고 옆면에는 東里金始鐘이 썼다는 기록이 있다.
중앙에는 묘소가 있고 왼편에는 엽서비가 있다. 평양의 서울 병원에서 서울 본집으로 보낸 엽서로 어머니의 임종 직전 상황과 심정이 절절히 적혀 있다. 다급함이 서려 있다. 님은 갔어도 님의 친필 서한의 엽서가 앞, 뒤면 모두 조각되어 그대로 전수된다. 문인의 아름다운 삶을 보며 고고하게 남은 자취를 본다.
묘소가 있는 곳은 산정이다. 그래서 두 그루 소나무가 정상이라는 표징으로 서 있고 산아래에는 수많은 묘가 있다. 노르웨이 혹은 뉴질랜드, 등의 외국에서나 보았던 장면이다. 우리나라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공동묘지가 있었던가. 죽어서 가는 길이 이리 고우면 슬프지 않으리라.
*남한강 섬강
노을진 남한강 지류 섬강은 찬란한 물빛으로 흐르고 있다. 강원도의 곡물과 한양의 공산품을 이곳에서 교환하며 살아온 것이다. 물결이 잔잔하여 배가 드나들기에 아주 좋은 물목이다. 굽어 휘어지며 비경을 낳는다.
건너편은 충북, 옆은 경기도, 우리가 선 곳은 강원도, 삼개의 도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산과 강이 이루어내는 풍경이 명화다. 외국 어느 명소에 온 느낌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 조국에도 이리 아름다운 절경이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언덕에는 그 옛날 창고 자리였던 곳에 '흥창원'이라는 돌비가 있다. 주위가 모두 곡창지대로 많은 곡식이 생산되면 이곳 창고에 저장했다가 배가 들어오면 필요한 곳으로 보낸 유적지다. 고운 풍경을 가슴에 담고 걸음을 돌렸다.
*임경업 장군 추모비
단풍잎 고운 치악산을 넘고 나니 어둠이 내린다. 아름다운 원주에는 국보급 보물도 많이 있다. 이작 발굴 진행 중으로 천막을 덮어 놓은 곳도 있다. 산 전체가 유물 발굴지다. 들판을 지나 마을을 지나 부지런히 달려간 곳에 임경업 장군 추모비가 있다.
이미 짙어진 밤 기이 서려 글씨가 잘 보이지 않지만 '임경업장군추모비'라고 돌기둥에 새겨 세워 두었다. 원주에서 임경업 장군이 출생하였다는 것도 알게 되고 보람된 여정이다.
*손곡 이달 시비
임경업 장군 추모비에서 조금 떨어진 곁에 있다. 나무 사이로 어둠 속에서도 시비문이 빛나고 있다. 손곡 이달은 삼당시인이었는데, 즉 우리나라에서 당나라의 시에 관심을 갖었던 세 사람 중 한 분이란 뜻이다. 조선 선조 때 시인으로 충남 홍성 출생이며, 이곳 원주 부론면 손곡리에서 살았다. 평생 시를 읊고 지으며, 허균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비에는 한시 1편과 번역 글씨가 있다.
시골 밭집 젊은 아낙네
저녁 거리 떨어져서
비 맞으며 보리 베어
숲 속으로 돌아오네.
생나무에 습기 짙어
불길마저 꺼지도다.
문에 들자 어린 아이들
옷자락 잡아다리며 울부짖네.
그 당시 삶의 애환을 적은 시로 눈시울을 적신다. 이것으로 문화 유적지 탐방은 마쳤지만 그외 여러가지 보물이 많이 묻혀있는 원주다. 그런 사실을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는 사실이 더욱 기쁘다. 마을 전체가 보물단지로 지정된 곳도 있고, 마을 이름이 보물 유적지 이름을 따서 지은 곳도 있다. 여러가지로 유익한 문학 유적지 탐방이다.
* 서울 도착
출발 했던 그 자리 서울 교대역 부근에 하차했다. 저녁 8시 30분, 신길우 회장님께서 저녁식사를 하자고 차안에서 전화로 이미 자리를 예약해둔 식당으로 갔다. 서초문협 시낭송 행사에도 종종 나오는 음악인의 집이다.
설렁탕 한그릇이 문우의 정을 돈독히 이어주고, 몸을 따스히 더워준다. 아름 가을 날의 문학 나들이였다고 다들 기뻐한다. 청명한 날씨로 브람되고, 즐겁게 목표했던 곳곳을 다 돌아볼 수 있어 큰 소득이다. 서초문인협회의 더 큰 발전과 문인들의 더 큰 문운을 빌며 악수로 이별하고 아쉽게 헤어져 집으로 걸음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