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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
김 학 철
1
누런 털이 보스스 난 송아지가 온몸에 하나 가뜩 따스한 햇빛을 받고 누워가지고 등어리에서 아지랑이가 몽개몽개 피어오르는 것도 모르고 까무룩 까무룩 졸고 있다.
못[池]은 말간 하늘과 솜과자보다도 더 하얗고 더 가벼워 보이는 구름을 반영(反映)하고 그리고 고요하다.
저쪽 밭 사이 길을 괭이를 메고 건드적건드적 걷고 있는 농부의 그림자가 아주 짧다.
언덕 밑 집에서 닭이 울었다.
기지개를 쓰고 하품을 하고 싶은 것을 그렇게 하는 것조차도 노력이 들어서 못하겠다는 듯싶은 게슴츠레한 눈을 반쯤이나 감은 게으름보 머슴이 양지바른 돌각담 밑에 기직*을 펴놓고 앉아서 이를 잡다 말고 끄떡끄떡하면서 고무풍선 같은 콧방울을 불었다 쭈그렸다 하고 있다.
바람은 없다. 그러나 복숭아 꽃이파리는 파릇파릇한 잔디 위에 소리도 없이 지고 있다.
그 분홍색 꽃이파리가 아까운 기색도 없이 담뿍 뿌려진 못가 잔디밭에 정성들여 깨끗이 빤 빨래를 널어놓고 그것이 마르는 동안, 여기저기서 여러 가지 빛의 꽃을 꺾어다가 그 옷 임자에게 주고 싶은 꽃다발을 만들고 있는 처녀는, 얼마 전에 친(琴)이라고 부르라고 그 옷 임자(김학천 조선의용군 제 × 지대 제 × 대 대장)에게 말한 일이었다.
꽃다발을 다 만들어가지고 들었다 놨다 하면서 모로 옆으로 위로 아래로 앞으로 뒤로 고개를 갸웃갸웃 해가며 보고 난 친의 두 뺨에는 방싯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꽃다발을 잔디 위에 살며시 내려놓고 일어나, 가서 널어논 빨래를 만져보았다. 옷은 아직 채 마르지 않았다. 그는 도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고는 꽃다발을 만들고 남은 꽃 가운데서 손 닿는 대로 한 송이를 집어서 못 푸른 물 위에 던져주었다.
못은 가느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수면에 비친 하늘도 구름도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잡혔다. 꽃을 동동 띄우고 못은 잠깐 동요하다가 도로 조용해졌다.
친은 또 한 송이 꽃을 던져주었다.
그 순간 ‘쿵 우르릉’ 하고 지진같이 땅을 흔들며 멀지 않은 곳에 포탄(砲彈)이 날아와 터졌다.
가지가 흔들려서 복숭아꽃이 한꺼번에 담뿍 떨어져서 팔팔 날려 흩어졌다.
못은 커단 파문을 일으키며 떨었다.
졸고 있던 송아지가 놀라서 ‘메―’ 하고 울며 뛰어 일어났다.
친은 두 손바닥으로 귀를 가리고 잔디 위에 폭 엎드렸다.
‘쿵 우르릉’ 또 터졌다.
못의 물이 출렁하고 파도를 일으키고 동동 떠 있던 두 송이의 빨간꽃이 그 위를 떼굴떼굴 굴렀다.
송아지가 ‘메―’ 소리를 지르며 밭 가운데로 뛰어 달아났다.
그러고는 그만 조용해졌다.
벌이 한 마리 윙 하고 가는 날개 소리를 내어 날아와서 꽃다발 위에 앉았다가 그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친은 살며시 일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파란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복숭아 꽃이파리가 또 팔팔 날아와 흩어졌다.
친은 꽃을 또 한 송이 집어서 못 위에 던졌다.
그때 누가 발자취도 없이 살짝 뒤로 와서 그의 두 눈을 꼭 가렸다.
친은 조용히 두 손으로 자기의 눈을 가린 손을 만져보았다. 그것은 꺼칠꺼칠한 나무 끌거리* 같은 손이었다.
“알었어요, 누군지…….”
친은 그 눈 가린 두 팔목을 꼭 잡으며 낮게 말했다.
“……”
등 뒤에서는 말이 없다. 그러나 숨소리가 들렸다.
“학천.”
친의 입 가장자리에 웃음이 스쳐갔다.
“아냐.”
등 뒤의 사나이가 말했다.
“그럼 누구?”
“맞춰봐 어디.”
“맞췄는데 뭘.”
“정말?”
“정말.”
“틀리문 어떡 헐 테?”
“안 틀려.”
“그래두 틀렸으문.”
“그럼 맘대루 해요.”
“정말 내 맘대루 해?”
하고 사나이가 다짐을 받았다.
“아.”
하고 친이 승낙을 하니까 그제서야 눈을 가렸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친이 돌아다보았다. 거기에는 회색 군복의 청년 사관(士官)이 눈에 가득히 웃음을 띠고 말없이 내려다보고 서 있다. 김학천이었다.
조선의용군 제 × 지대가 주방(駐防)하고 있는 난링(南嶺)은 적진을 떨어지기 5킬로 약(弱), 산지와 평야가 많다는 곳이다.
적아(敵我)의 진지 사이에 전답이 있고 거기에서는 역시 농부들의 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농민들은 포탄 같은 것에는 무관심하게 되어버렸다. 그것은 뉘 집 어린아이가 유리병을 깨뜨린 것만큼도 자극을 주지 못했다. 참혹한 전쟁은 그들의 정상적 신경과 평상 상태의 심리를 마비시켰던 것이다.
항일전쟁은 지구전 e寺久草肋의 양상을 그대로 드러 냈다.
이따금 포탄이 날아와 터져서 여기저기 밭 가운데 커단 구덩이를 파놓고는 했다. 그러면 구덩이는 처음에는 우물을 갓 판 때같이 흐린 물이 고였다가 그것이 맑아지면 거머리도 생겼고 물맴*도 떠돌아다녔다. 밤이 되면 달도 비치고 더운 때가 되면 개구리도 울었다.
학천이 숙영(宿營)하고 있는 조그만 농가의 주인 로양(老楊)은 귀밑에 흰머리터럭이 드문드문하고 허리가 급은 순박한 농부였다. 그는 자기 집에 들어 있는 이 외국 사람 군대의 젊은 사관에게 모든 일에 있어서 거짓 없는 친절을 보여주었다. 그 딸 친도 그랬다.
전장(戰場)은 이따금씩 날아오고 날아가고 하는 포탄과 부분적 극히 작은 충돌을 제외하면 이렇듯 평화스러워 보였다.
2
정면 적의 거점에 병력이 집결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전선은 갑자기 긴장했다.
비상경계가 발령되고 좌우 양익(兩翼)의 우군 진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해놓고 지대부(支隊部)에서는 작전회의가 렸다.
적이 말하는 춘계공세(春季攻勢)가 막 시작되려는 것이었다.
우군은 만반의 반격 준비를 다 갖추고 대기했다.
적진을 정찰하고 돌아오는 정찰대는 시시각각으로 익어가는 전기(戰機)를 알리었다.
이리하여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공격이 개시되리라고 추단(推斷)을 내린 날 밤, 캄캄하고 흐린 하늘에는 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전 영시 오분이 조금 지났을 즈음. 우군 경계구역을 순찰하고 있던 이동보초가 작전지휘부 뒷산 서낭당(城隍堂)에서 훅 하고 별안간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적에게 포격목표를 줄 것을 염려해서 담뱃불 한 꼬투리 얼씬 못하는 긴장된 전선의 밤이었다.
깜짝 놀란 이동보초가 멈칫 서서 바라보려니까 불은 또 이어서 훅훅 하고 타올랐다. 이동보초는 당장에 그 불길이 솟아오르는 현장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그곳에 가 닿기도 전에 적의 포탄이 날아와 터졌다.
우레 같은 포성과 함께 검붉은 화약연기를 안은 화광이 번뜩하고 일어서 어둠 속에 잠겼던 진지를 불꽃으로 물들여서 눈앞에 드러냈다.
한 발 또 한 발. 육십 초씩의 정확한 사이를 두고 열두 발의 포탄이 그 부근에 날아와 터졌다. 그리고 약 오 분의 사이를 두고 또 십이 분 동안을 이어서 열두 발의 포탄이 날아와 터졌다.
이 적의 포격은 우군 진지에 적지 않은 손실을 주었다.
포격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서낭당으로 쫓아간 이동보초는 거기에 얼빠진 사람같이 멍하니 뻗지르고 서 있는 늙은 농부 하나를 발견했다. 그의 주위에는 타다 남은 지푸라기가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것은 친의 아버지 로양이었다.
이동보초는 이 군령의 위반자를 체포해가지고 끌고 내려왔다.
다음 날 작전지휘부에서 로양은
“……그래 그 밀정도 다 불었으니까 똑바른 대로 숨김없이 자세하게 다 말을 해봐. 어디 어떻게 된 일이야? 대체……”
하는 심문에 대해서
“네, 숨기다니요. 온 무슨 말씀입니까. 죄다 말씀디립죠.”
하고 머리를 숙이고 한숨을 섞어가며 토막토막 끊어서 이야기 했다.
“이 늙은 놈이 아마 죽을 때가 됐나봅니다. 그렇잖구야 어디 이런…… 아니 그런데 어제 저녁때 말씀입니다. 제가 밭에서 일을 마치구 집으루 돌아오려니까 저 건넛마을에 살던 그 노름꾼 아 이름이 뭐랬더라요. 도무지 생각이 나야죠. 여하튼 그 곰보녀석 말씀입니다. 아 그 녀석이 저를 붙잡구 제 어머니가 병환이 중한데 복술(卜術)에게 물어보니까 저 그 산 서낭당에 밤중 자정 때 가서 앓는 사람의 손톱허구 머리카락을 백지에 꼭꼭 싸서 볏짚단 속에 넣어 살르문 병이 낫는다구 해서 지금 이렇게 영감님을 찾어왔는데, 단 두 식구에 제가 밤중에 없으면 누가 앓는 이의 병구완을 할 사람이 있어야죠. 그러니 어려우신 대루 영감님께서 오늘밤 좀 수구를 해주시우. 이건 변변치 못한 겁니다만 허멘서 양(洋)비단으루 만든 담배쌈지를 하나 내주겠죠. 그래 저는 그 효성이 하두 기특해서 아니 이건 뭘 이러시우, 그렇게 자당께서 병환이라시니 사람의 정으루 으레껏 도와디려야 헐 건데. 어서 그걸랑 염려 말구 돌아가서 병구완이나 잘허시우. 내 오늘 밤 자정 매 꼭 정성을 디려서 그렇게 해올리리다, 허구 사양을 했습니다만 하두 그러기에 정 그렇다면 허구 그만 그 담배쌈지를 받었습니다그려. 온 천만 뜻밖에 이런 일을 저질러놀 줄야 어떻게 알었겠습니까. 그만 깜빡 그눔헌테 속았습니다그려. 그눔이 일본눔허구 내통을 헌 줄 알기만 했더문야 어디 그냥…… 온 이 일을 어찝니까?”
하고 이 선량하고도 어리석은 농부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며
“이게 그 담배쌈집니다.”
하고 자줏빛 양비단으로 만든 예쁘장스러운 담배쌈지를 꺼내서 원망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이리하여 이 사건은 즉시 임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3
“……아니 이것은 일종의 과실입니다. 과실과 고의와 그 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지한 농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이번 사건은 관대한 조처를 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학천은 말을 끊었다.
“농민들의 그 무지가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입니다. 나는 아까도 말한 것 같이 학천 동지의 의견과는 정 반대의 의견을 가졌습니다.”
하고 김시광(제 × 대 대장)이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임시 군법 회의는 이 두 개 정 반대의 주장이 대립되어서 끌어내려갔다.
간부들은 묵묵히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불꽃이 툭툭 튀는 듯한 논쟁을 듣고 있었다.
학천이 주장하는 것은 고의가 아니고 모르고 한 것이니까 관대한 처분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시광이 주장하는 것은 모르고 한 것이라고 해서 관대한 처단을 내린다면 이 모르는 것뿐만인 농민들 틈에서 군대가 그 작전임무를 다 할 수 없다는 것이며, 또 이 사건의 결과의 막대한 피해로 보아서나 민중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아서나 엄중한 처치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회의를 하는 동안 학천의 머릿속에는 불쌍한 늙은 위법자의 실신한 것 같은 쭈글쭈글한 얼굴과 친이 애타게 옷자락을 쥐어뜯으며 울던, 눈물에 어지러워진 얼굴이 겹쳐서 나타나서 사라지지 않고 핑글핑글 돌았다.
학천은 열(熱)에 떴다. 시광의 이지(理智)는 점점 더 싸늘하게 식어갔다.
“학천 동무의 주장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자본계급적 감상(感傷)에서 오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철두철미 소부르적 인도주의며 극히 값싼 동정인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부정한다고 하면 그럼 그 밖에 반드시 또 다른 어떤 원인이, 즉 사적 감정 같은 것이 그 이면에 잠재해서 활동하고 있지나 않은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시광의 이 한마디는 상대자를 침묵시키기 충분했다.
회의는 급전직하로 위법자의 사형을 결정하고 그리고 끝이 났다.
회의실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학천의 눈은 빨갛게 충혈했다.
시광이 그 늘씬한 몸집에 긴 다리로 침착하게 저벅저벅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학천은 뚫어지게 그 뒷모양을 쏘아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외 쳤다.
‘이 냉혈의 짐승. 말뚝. 제국주의 관료. 공식주의자.’
4
여름이 왔다. 우거진 녹음이 방어공사(防禦工事)를 뒤덮었다.
적의 정찰기는 우군 진지 상공을 헛되이 ‘비잉잉 비잉잉’ 선회하다가는 얻는 것 없이 그냥 날아 달아나버리거나, 혹 그렇잖으면 이따금씩 시탐(試探)의 폭탄을 얼토당토않은 곳에 두어 개씩 던져보기도 하고 기관총을 소사(掃射)해보기도 하고 했다.
군복저고리를 벗어서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새파란 이파리가 겹치고 겹치고 해서 뜨거운 광선을 가리고 있는 그 나무 그늘에 비스듬히 누워서 오카리나*를 불고 있는 것은 학천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속삭이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나뭇잎이 흔들리고 가지에 걸린 군복저고리가 펄렁했다. 그림자도 따라서 움직였다.
회오리바람 소리 같은 오카리나가 엘레지의 애조(哀調)를 연거푸 두 번 불었다.
그러나 주위의 생물이 모두 다 그 슬픈 곡조에 취해서 잠잠해진 것 같던 그것도 잠시, 별안간 가까운 곳에서 수풍금(手風琴)이 베이스를 넣어서 「대군행 진곡(그레 이트 솔저스 마치)」을 소란하게 떠 댔다.
학천은 입에서 악기를 뚝 떼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소리나는 곳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보지 않아도 시광일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난봄, 군법회의에서 충돌한 이래 두 사람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대립과 마찰이 그들 사이에 끊임없이 계속됐다.
시광은 학천의 오카리나를 귀신 우는 소리, 계집아이 취미, 소극적, 감상적, 이런 말로 배격했다.
학천은 시광의 수풍금을 질그릇 깨지는 소리, 마차가 자갈밭을 가는 소리, 미친놈 취미, 저돌적, 이런 문구로 비난했다.:
시광이 오리알을 맛있다고 하면 학천은
“그것도 입이냐? 저급 취미.”
이렇게 타기(唾棄) 했고羊 학천이 자장변이 맛있다고 하면
“그것도 입이냐? 이단경향(異端傾向).”
하고 시광이 반격했다.
변증유물적 세계관만을 제외하면 기타의 것은 모조리 정반대의 대립 상태였다.
대장들의 사이가 그러니까 그 부하들도 자연히 그것을 본받아서 매사에 대립 형세를 이루었다.
제 × 대와 제 × 대는 부득이한 공사(公事)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절교 상태가 되어버렸다.
딴 지대(支隊)에서는 이 지대를 불러서 ‘대립물의 통일 지대’ 라고 했다.
그래서 이것이 지대 내의 합동동작과 단결에 지장이 될까 염려한 간부들은 여러 번 중간에 나서서 두 대립된 대(隊) 사이의 협조를 알선했다. 그러나 두 대는 동시에 똑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대립 상태는 사사(私事)에 한해서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사에는 그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 이상의 이유로서 우리는 중간에 제3자가 출마해서 협조전선을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각 대 대항의 실탄사격, 총검술, 풋볼 기타의 운동경기 같은 것이 있을 때마다 그 대립은 점점 더 격화해갔다.
각 대의 대원들은 그 음악에 대한 취미도 자기 대 대장의 그것에 공명했다. 시광이 거느린 대의 대원들은 수풍금이 아니면 악기가 아니라고까지 극언했고 학천의 부하들은 오카리나밖에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악기가 없다고 절찬했다.
반목 대립한 두 대는 서로 상대편을 곯려주려고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터럭 만한 기회라도 있기만 있으면 서슴지 않고 진공(進攻)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성공하면 쾌재를 불렀다. 그러면 패배한 편은 후일의 보복을 맹세했다. 곯리고 곯고 하면서도 그들은 공동의 적 일본 군대와 항쟁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그날 밤, 학천은 기회를 엿보고 몰래 시광의 침실에 들어가서 테이블 위에 치장삼아 놓여 있는, 시광이 나의 ‘유일한 애인’ 이라고 이름 지은 수풍금을 단도로 푹푹 찢어서 완전히 못쓰게 만들어놓고 살짝 자기 침실로 돌아와서 너털웃음을 웃으며 혼자서 한참 동안 엉덩춤을 추고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날
“이번에야 어디 맘 푹 놓고 한번 본때있게 불어봐야지.”
하고 싱긋 웃으며 오카리나가 들어 있는 상자갑을 연 그는 ‘앗’ 소리를 지르고는 그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자갑 속에서 그 보중(寶重)한 악기는 산산이 조각이 나서 가루가 되다시피 돼 있었다.
시광도 수풍금에 대해서는 입을 봉하고 말이 없었다.
학천도 가루가 돼버린 오카리나에 관해서는 아무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5
8월 15일 상해사변 기념일 오전 영시 삼십분을 기해서 항일군의 전 전선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게 되어 있었다.
그 바로 전날 제 × 지대 최부지대장(崔副支隊長)이 말에서 떨어져서 팔을 다치고 후방 의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석차(席次)대로 노간부(老幹部)인 제 × 대 대장 김시광이 그 뒤를 이어 승급해서 부지대장의 직권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부의 결원(缺員)으로 원래의 제 × 대 대장을 당분간은 겸임하게 되었다.
진지에서는 비밀리에 그러나 아무래도 어딘지 좀 어수선하게 모두들 공격준비에 바빴다. 이럴 때면 언제나 이발병이 제일로 녹아났다.
“내일 아침엔 시체가 돼서 적의 진지에 가 드러누워 있을런지두 모르니까 예쁘게 수염이나 좀 깎구.”
하는 것을
“이 녀석, 죽을 눔이 얼굴 단장은 웬 얼굴 단장이야.”
하고 옆에 섰던 딴 한 병정이 가로막으니까
“내버려둬, 지옥에 가서나 한번 연애를 해보려나봐. 그렇지?”
하고 또 딴 병정이 말리니까
“하하하하……”
“허허허……”
면도칼을 든 채 이발병까지도 따라서 웃었다.
학천이 군수처에 갔다 오다가 이 부하들의 웃고 지껄이고 하는 소리를 듣고 혼자 비죽이 웃으며 발걸음을 돌리려 할 때
“보고! 김 대장 동지¸.”
전령병이 거수경례를 하고
“지대부에서 곧 오시랍니다.”
했다.
“나를?”
하고 학천이 물었다.
“옛.”
“무슨 일야?”
“모르겠습니다.”
“?……”
학천은 전령병을 따라서 지대부로 갔다.
그러나 거기에는 빨간 연필자국이 헝클어진 실뭉텅이같이 얽혀져 있는 군용지도를 펴놓고 시광이 기다리고 있었다.
“?”
“앉우.”
거기에는 응하지 않고 학천은 선 채
“지대장 동무는?”
하고 물었다.
“진지 시찰.”
하고 시광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나를 오란 것은?”
하고 학천이 또 물었다.
시광이 대답했다.
“작전 임무 전달.”
“어떤?”
“김학천 대장은 제 × 대를 인솔하고 선발하야 적진 좌익 소고지(小高地)를 기습공격 할 것.”
“?”
“출발시각은 오늘 밤 열한시 정각. 이 작전의 임무는 적의 주의를 한곳에 집중시키기 위한 양동전 (陽動戰).”
“께 꼬우 츠디 (給狗吃的, 개나 물어가라)!”
학천은 이렇게 외치며 구듯발로 ‘탁’ 걸상을 걷어찼다. 걸상이 나가떨어지며 들창 옆에 놓여 있는 조그만 탁자를 쓰러뜨렸다. 탁자 위의, 근무병이 꽃을 꺾어다 꽂아논 꽃병이 마릇바닥에 ‘철컥’ 하고 떨어져 깨져서 물이 좌르르 쏟아지고 그 위에 꽃잎이 뜨고 버물리고 했다.
시광이 벌떡 일어나며
“무슨 폭행야?”
했다.
“어 쨌든.”
학천은 손바닥으로 군용지도를 ‘탁’ 때리며
“난 안 간다.”
하고 잘라서 말했다.
적진의 좌익 소고지는 적의 포병진지였다. 그것은 막기는 쉽고 뺏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자연의 지형도 그렇고 방어공사도 그랬다. 그것은 제일 뚫기 어려운 요점(要點)이었다.
학천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더구나 양동전이라는 것은 적에게 우군의 정말 기도(企圖)하는 공격목표를 알리지 않기 위해서 딴 곳으로 그 주의를 끌어모으는 작전이다. 양동하는 부대는 전 작전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되는 부대다.
시광이 지금 자기에게 그 희생의 임무를 둘러씌우려는 데 대해서 학천은 이렇게 반항했다.
“안 가?”
시광은 물었다.
“그래 안 가!”
학천은 대답했다.
“왜?”
시광이 또 물었다.
“왜?”
하고 학천이 반문했다.
“왜 안 가?”
“그렇게 가구 싶거던 네가 가라!”
“내가?”
“그래.”
“안된다. 그건 네가, 반드시 네가 가야 헌다.”
“뭐야? 건방지게 네가 뭔데 날더러.”
하고 학천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시광이 천천히 말했다.
“나는 너의 상사다.”
학천이 주춤했다.
“나는.”
하고 시광이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부지대장 김시광, 그리고 아까 전달한 것은 상사의 명령.”
학천은 하는 수 없이 발뒤꿈치를 모아서 억지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시광이 위엄있게 불렀다.
“김대장.”
“넷.”
이렇게 대답한 학천의 가슴속에서는 이글이글하는 시삘건 분노의 불덩어리가 쿡 치밀어 올라왔다.
‘이놈의 자식 어디 두고 보자.’
그는 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전달한 명령을 충실히 집행할 것. 그만 물러가.”
하고 시광이 의자에 가 걸터앉았다.
“넷.”
학천이 경례를 했다. 그러나 시광은 고개만 끄덕해 보이고는 테이블 위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학천은 한참 그 옆얼굴을 노려보다가 그만 돌아서 나가버렸다. 학천의 ‘저벅저벅’ 하는 성난 구두 소리가 차차 멀어져서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흥.”
하고 시광은 코웃음을 치고 의자 등받이에 번듯이 나자빠져 기대고 두 다리를 들어서 테이블 위에 얹고는 군복바지 주머니에서 화셩탕(花生糖)*을 한 조각 꺼내서 입에 넣고' ‘와지직’ 소리를 내며 깨물었다. 그리고 만족한 듯이 또 웃었다.
6
총공격 이 개시되었다.
적은 중포(重砲)의 일제사격으로 이것을 맞이했다.
적과 우군 사이에 서로 주고받고 하는 중포탄이 공기를 가르고 지나갈 때는 마치 기차가 지나갈 때 내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기관총이 매초 열한 발 이상의 속도로 간단(間斷)없이 불을 뿜었다. 총구에서는 독사의 혓바닥 같은 불길이 날름거렸다.
방어군의 진지 위에, 공격군의 머리 위에, 곳을 가리지 않고 날아와 터지는 포탄의 화광, 번쩍할 때마다 굵게 높게 자줏빛 섞인 검붉은 연기와 불길이 맹렬한 속도로 솟아오르고는 했다.
연기와 불길은 방어공사의 부서진 조각과 파손된 무기와 찢겨진 사람의 몸뚱이의 각 부분을 안고 올라갔다가 공중에서 흩어버렸다.
전장은 초연(硝煙)이 자욱하게 끼어서 호흡이 곤란해졌다. 달도 흐려졌다.
오전 네시. 전장은 혼란 상태에 빠졌다.
적진의 몇 부분이 돌파되어 공격군이 그 돌파구로 조수같이 밀려들어간 것이다.
우군이 적을 포위하면 또 딴 적이 우군을 포위했다. 서로 에워싸고 에워싸이고 앞에도 적, 뒤에도 적, 갈피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어두운 전야(戰野)에는 혼전난투(混戰亂鬪)가 벌어 졌다. 도처에서 처참한 백병전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날샐 녘까지 맹렬한 싸움은 계속되었다.
동이 텄다. 포성이 차츰 자고 기관총이 입을 다물었다.
격전이 끝났다. 여기저기서 부상한 전사들의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상처의 고통을 못 이겨서인지 우는 소리도 들리었다.
아직도 채 개지 않고 낮게 전장 위에 떠돌고 있는 초연을 뚫고 햇발이 뻗쳐왔다.
검붉은 피에 끈적끈적하게 젖은 풀잎에 메뚜기가 툭툭 튀어 다녔다. 땅이 여기저기 거북잔등같이 금이 가서 쩍쩍 갈라져 있다. 마치 맹렬한 지진이 지나간 때와 같았다. 중포탄이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가서 터질 때 생기는 균열(龜裂)이었다. 그것은 임시 참호 대신으로도 쓸수 있는 것이고 교통호(交通壕) 대신으로도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학천은 난투 속에서 전부 흩어져버리고 겨우 여섯 명밖에 남지 않은 부하를 데리고 있던 균열 속으로 적의 눈을 피해서 기어들어갔다. 거기에는 벌써 칠괄 명의 군인이 들어 있었다. 우군의 병정들이다. 그러나 선두의 학천은 주춤했다. 그것은 그 병정들이 제 × 대의, 즉 시광의 부하들이었던 것이며 또 현재 거기에 그 대대장 시광이 섞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대장의 시선이 부딪쳤다. 잠시 그렇게 서로 마주 쳐다보고 있다가 시광이 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학천은 말없이 기어들어갔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기관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서로 노리고 있는 이러한 경우에는 날이 밝아서 시야가 열리면 목표가 드러나서 꼼짝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학천은 옆의 부하가 가진 총을 달래서 받아가지고 그 총끝에 자기가 쓰고 있는 강모(鋼帽)를 벗어서 씌웠다. 그리고 그것을 삐죽 균열 위로 내밀었다.
‘뺑’ 하고, 내밀기가 무섭게 어데서 탄환이 날아와서 강모에 들어맞았다.
“이크.”
그는 목을 움츠러뜨리고 궁둥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강모를 조사해보았다.
구멍이 하나 빼꼼하게 뚫려져 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당최 어림도 없다.”
하고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학천은 시광과 같이 한곳에 있기는 무엇보다도 싫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시광도 학천과 같이 있기 싫은 것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하들끼리도 서로 말없이 노려보고 있다. 그 좁은 균열 속에서도 두 대 사이의 간격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도의 공간을 이루었다.
오월동주(吳越同舟). 머리 위로는 탄환이 ‘위잉 위잉’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며 지나갔다. 균열 밖에 나가볼 수가 없으니 적정(敵情)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우군도 그랬고 적도 그랬고 서로 구멍 속에들 처박혀서 날이 어두워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때는 해가 땅 위에서 겨우 한 뼘이나 기어올라 왔을까 말까 할 때였다.
대륙의 살인적 혹서(酷暑), 해가 하늘 복판에 거의 오니까 그러지 않아도 채 식지 않았던 땅이 후끈후끈 화덕같이 달기 시작했다.
풀 한 포기의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서 군인들은 마치 뭍에 끌려나온 메기 모양으로 늘어져서 헐떡거렸다. 땅 갈라진 좁은 틈바구니에 여럿이 겹쳐서 쪼그라뜨리고 있으니까 땀냄새 흙냄새가 질식 할 지경으로 호흡을 압박했다. 강모 속의 머리는 흡사 뜨끈뜨끈한 떡시루를 둘러쓴 것 같았다. 입술이 바작바작 탔다. 그러나 바람은 없다.
그때 정면의 적이 어떠한 기도(企圖) 밑에서인지 갑자기 이 균열을 향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균열 속의 열세 명은 즉시 화망(火網)을 구성하고 그것에 응전했다.
실상 이 균열은 적의 연락선을 차단하는 위치에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적은 이 지점을 탈회(奪回)하려고 맹렬한 공격을 반복한 것이었으나 균열 속에서는 시광도 학천도 그 부하들도 그 당시에는 자기네가 점령하고 있는 위치가 그런 중요한, 그리고 그렇게 위험한 곳인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적의 공격은 기관총의 엄호사격을 받아가지고 돌격으로 옮겨졌다.
눈이 부신 여름 한낮 햇볕 아래 총칼이 번쩍번쩍 빛났다. 위협하는 고함소리가 이어서 일어났다.
한 줄로 가로 흩어져서 엎드렸다가는 일어나서 뛰고 엎드렸다가는 일어나서 뛰고 하며 적이 점점 가까이 몰려들어왔다.
균열 속의 열세 사람은 기관총콰 소총과 권총으로 전력을 다해서 적의 돌격을 저지하려 했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사람은 엄숙해지고 진지해지는 것이다. 그들은 더운 것과 목마른 것을 잊어버렸다. 두 대 사이의 공간이 어느 틈에 메워졌는지 알지도 못했다.
적의 잔인스러운 눈깔과 이빨이 눈앞에 다닥쳤다. 고함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균열 속에서 기관총수가
“앗!”
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적탄을 맞은 두 눈 사이에서 시커먼 피가 쏟아져 나왔다. 즉사였다.
“오.”
하고 시광이 사수가 없어진 기관총으로 달려들었다.
“아니 그건 내가.”
하고 학천이 손에 들었던 권총을 집어던지고 그것을 뺏으며
“동무는 전체의 지휘를…….”
하고는 일 초의 지체도 없이 몰려드는 적에게 탄환의 우박을 퍼부었다.
시광은 원래 위치에 돌아가자마자 벽력같은 소리를 질러서 호령했다.
“제일 기관총, 목표 좌전방(左前方).”
비록 적은 병력이지만 통일된 지휘 아래 쇳덩어리같이 뭉쳐진 그 힘은 무서운 것이었다.
적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 지점을 탈회할 가능성이 없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달아나는 놈의 뒷잔등은 좋은 과녘이었다. 꽁무니를 쫓아가는 탄환에 픽픽 나가 쓰러지는 것이 마치 활동사진을 보는 것 같다.
단결, 단결이 적을 물리쳤다.
초약(硝藥)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균열 속에서 사람들은 ‘후유’ 하고 숨을 내뿜었다. 그리고 땀과 흙에 짓이겨져서 새까맣게 된 얼굴을 서로들 서로들 쳐다보고 빙그레 웃었다.
학천과 시광도 서로 쳐다보고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부하들은 그 대장들의 웃는 것을 보고 따라서 또 한번 서로들 마주 쳐다보고 웃었다.
시광이 허리에 찼던 수건을 뽑아서 전사자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머 리를 숙이고 묵도(默禱)를 했다.
학천도 병정들도 따라서 머리를 숙였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은 없다. 머리 위에는 싸움터에 늘비한 시체를 파먹으려는 까마귀떼가 날아가고 날아오고 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한낮 조금 지난 해가 이글이글 타고 있다.
누가 ‘후’ 하고 한숨을 쉬고 입맛을 쩍쩍 다시었다.
사람들은 펄썩펄썩 주저앉아버렸다. 잊어버렸던 기갈(飢渴)이 또 다시 더욱 맹렬하게 목구멍을 조이고 찌르고 했다.
7
적의 공격은 또 언제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균열 속의 열두 사람은 다 쓰러져서 헐떡헐떡하고 있다.
물은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목구멍은 화젓가락으로 쑤시는 것같이 아프다.
해는 쨍쨍 내리쪼인다.
학천이 문득 죽은 사람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물통을 생각했다. 그는 슬그머니 기어가서 시체의 허리를 더듬어서 물통을 찾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흔들어보았다. ‘찰랑찰랑’ 소리가 났다.
“오! 물, 물이다.”
하고 그는 기쁨에 넘치는 소리를 쳤다. 누웠던 사람들이 벌떡벌떡 일어났다.
“물?”
“어? 물.”
“어디?”
“여기!”
하고 학천이 눈앞에 물통을 내둘렀다. 통 속에서 ‘촐랑촐랑’ 소리가 났다.
“오!”
열한 사람이 감격에 넘치는 소리를 질렀다.
“자, 돌려가며 한 모금씩.”
하며 학천이 물통의 마개를 ‘퐁’ 하고 잡아뽑았다.
목젖을 울리고 입술을 핥으며 열한 사람이 그리로 시선을 집중했다.
물통 아가리에 입을 대고 물을 들이켜려던 학천이 멈칫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반통도 못 되는 물. 혼자다 마셔도 시원치 않을 것을, 열두 사람이……’
그러나 목젖은 타는 것같이 아프다.
‘그래도 나는 참을 수 있다.’
그는 목이 말라서 헐떡이고 있는 전우들의 얼굴을 또 한번 다시 쳐다보았다. 그는 눈을 딱 감고 그리고 슬며시 물통을 옆에 있는 부하에게 내주었다.
물통은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한 모금씩 돌아서 마지막으로 시광에게까지 갔다. 그리고 시광의 손에서 다시 학천에게로 돌아왔다. 학천이 그 물통을 받았다.
햇볕은 점점 더 뜨겁게 내리쪼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이 없다. 헐떡거리지도 않았다. 쓰러지지도 않았다.
학천의 손에서 텅 비었을 물통이 ‘촐랑촐랑’ 소리를 냈다. 물통 속의 물은 단 한 모금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머리 위에서는 까마귀떼가 시끄럽게 ‘까욱까욱’거리며 몰려서 날고 있다.
이런 채로 밤이 되었다.
우군이 엊저녁에 하다가 날이 밝아서 중단했던 공격을 다시 계속했다.
전장은 다시 혼란을 일으켰다. :
균열 속의 열두 사람도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리하여 그 지점까지 진출한 우군 부대에 합류하려 했다.
벌써 어떤 곳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앗.”
하고 앞서서 총을 놓으며 뛰어가던 학천이 활같이 휘어지며 쓰러졌다.
“여.”
하고 시광이 쫓아가서 안아 일으키며 급하게 물었다.
“어디야?”
“다리 대퇴부.”
학천이 대답했다.
“좀 참어, 아퍼두.”
하고 시광이 부상자를 어깨에 둘러멨다.
“아! 으음.”
학천이 고통을 참느라고 이를 악물며
“가만, 좀 가만있어.”
했다.
“뭐야?”
“좀 가만, 음, 난 괜찮으니 내버려두구 동무나 어서 무사히……”
“무슨 미친 소리야. 좀 참어, 아퍼두.”
이렇게 말하고 학천을 둘러업은 채 몇 걸음 앞으로 걸어나가던 시광이
“앗, 응.”
하고 왼팔을 내려뜨리었다.
누릇누릇하게 마른 잔디 위에 빨갛고 노랗고 한 나뭇잎들이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날아와 떨어졌다.
해 말간 하늘은 무던히도 높아 보였다.
소리개가 한 마리 유유히 공중에 커단 원을 그리며 떠돌고 있다.
봄볕같이 따뜻한 햇볕이 내리쪼이는 잔디 위에 두 젊은 사람이 비스듬히 누워 있다. 한 사람은 다리가 하나 없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팔이 하나 없었다.
“여, 이럴 때 수풍금이 있었으면 좋겠는걸.”
이렇게 말을 건넨 것은 다리가 없어진 학천이었다.
“음 그렇지, 오카리나가 더 좋지.”
이렇게 대답한 것은 팔이 떨어진 시광이었다.
“허, 내가 잘못헌걸.”
학천이 탄식하며 사죄하듯 말했다.
“뭘 피차 일반이야.”
시광이 뉘우치듯이 말을 받았다.
두 사람은 잠잠했다. 생각하면 감회가 깊은 일이었다.
“여, 인젠 이인삼각(脚) 일세.”
하고 학천이 또 말을 건넸다.
“아니, 이인삼완(腕)일세.”
하고 시광이 받았다.'
“삼각이지.”
“삼완이래두.”
“허, 이 사람 또 우기나?”
하고 학천이 옆에 놓여 있는 지팡막대(松葉杖)를 끌어 잡아당기니까
“임자 고집은?”
하고 시광이 막는 형용을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하하……”
“어허허……”
하고 한바탕 크게 웃었다.
공중에서 ‘빙빙’ 떠돌고 있던 소리개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갑자기 홱 하고 몸을 잦히더니 쏜살같이 저편 숲속으로 떨어져갔다.
“여, 시광. 아니 김시광 동지, 우리 불구자동맹을 결성하는 게 어떻소? 단, 이것은 정식으로 제의함이오.”
하고 학천이 제의했다.
“좋지. 김학천 동지 제의에 정식으로 찬동함. 어때?”
하고 시광이 찬동했다.
“하하하……”
“허허허……”
두 사람은 마주 쳐다보고 소리를 높이어 또 한바탕 웃어젖혔다.
그들의 가슴은 희망으로 불룩해졌다.
등어리에 내리쪼이는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다.
『신문학』 1호(1946. 4)
김 학 철
본명이 홍성걸(洪性杰)인 김학철(金擧鐵)은 1916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보 재학중 샹하이로 건너가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의용대에 입대했다. 일본군과 교전중 부상으로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945년 『주보건설』 에 「지네」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월북하여 『로동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했고, 문화혁명 와중에 필화사건으로 10년간 옥살이를 했다. 1980년 복권되어 창작활동을 재개하였고, 중국 옌지(延吉)에서 거주하다가 2001년 사망했다. 『격정시대』 『20세기의 신화』 『해란강아 말하라』 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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