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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의 여행 크로아티아, 발칸을 걷다]
Bosnia And Herzegovina
12 평화와 공존을 향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의 상징인 “스타리 모스트”는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다. 30미터의 이슬람식 다리, 1,088개의 하얀색 돌, 이 다리가 상징하는 것은 가톨릭 문명과 이슬람 문명을 이어 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거이다. 모스타르와 함께 스타리 모스트는 200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모스타르
모스타르는 헤르체고비나의 옛 수도이며 네레트바주의 주도이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그곳은 200년의 역사와 함께 네레트바 강이 흐르고 있다. 크로아티아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해 역사 속에서 많은 아픔을 갖게 된 도시이다.
엘레나와 나는 모스타르로 가기 위해 고민을 하였다. 왜냐하면 스플리트에서 바로 가게 되면 모스타르가 가가웠다. 하지만 크로기르, 플리트비체를 보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다시 올라가야 했다. 나는 엘레나에게 우선 문화적인 트로기르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플리트비체를 보고 모스타르로 이동하자고 하였다.
차는 출발하였다. 엘레나와 원래는 9시에 출발하기로 하였었으나 시간을 바꾸어 8시에 출발하였다. 국도를 따라 달리는 차들은 일렬로 나란히 달렸다. 어떤 추월도 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엘레나에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국명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엘레나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현재 국가는 하나이지만 두 개의 체제로 되어 있습니다. 스르프스카 공화국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죠. 스르프스카 공화국은 동방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로 이루어져 있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은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 무슬림과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스르프스카 공화국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은 각각 별도의 정부와 의회를 두고 있으며 대통령도 따로 선출한다고 합니다.”
“국명이 재미있지 않나요?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하고 나는 말하였다.
엘레나는 나에게 “그 국명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아세요?”하고 물었다.
“보스니아는 보스나 강 에서 유래한 명칭이고 헤르체고비나는 헤르체크 대공 가문에서 유래한 것입니다”하고 나는 엘레나에게 대답하였다.
엘레나는 갑자기 차창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가 휘날렸다. 그리고는 시간이 좀 지나 다시 차창을 닫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엘레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하고 중얼거리더니 “이 나라에 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어요?” 하고 나에게 말하였다.
“네, 우선 나라의 크기를 보면 남한 면적의 반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수도는 사라예보고 국토는 아드리아 해 동쪽에 위치해 있는 데 총 21.2킬로미터의 짧은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죠. 우리가 지나왔던 네움 휴게소는 두 개의 국경선이 접하고 있는 지점에 있습니다만 바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있습니다.” 하고 나는 엘레나에게 대답하였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디나르 알프스 산맥이 위치해 있고 북부는 평원지대, 남부는 산악지대이며 짧은 해안지대가 바로 서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날씨는 지중해성 기후와 내륙성 기후가 나타나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눈비가 많이 옵니다. 그리고 인구는 약 400만 명 정도 되는데 보스니아 내전 이후 세르비아인은 약 7퍼센트, 무슬림은 7.5퍼센트 정도 줄었다고 합니다. 통용되는 공식화폐는 마르크(Mark)인데 지역마다 음성적으로 여러 가지 화폐가 유통된답니다. 세르비아 디나르(Dinar), 크로아티아 쿠나(Kuna)가 사용되기도 한다는군요. 1유로가 약 2마르크 정도 된다고 합니다. GDP는 1인당 5,000달러가 조금 안되고 공용어는 세르비아 어와 크로아티아 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세르비아 어는 키릴 문자를 쓰고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은 라틴 문자를 사용합니다. 이들 민족의 구성은 비율을 보면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 40퍼센트,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이 22퍼센트,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이 38퍼센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문화는 아주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산악지대가 많아 풍부한 산림자원과 경제적 가치가 높은 철광석, 크롬, 석탄, 망간, 은, 동이 매장되어 있습니다. 참 특이한 것은 정부 형태를 보면 공화적으로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각각의 세 명의 대통령이 있습니다. 이들은 8개월 단위로 번갈아 가며 순번제로 의장직을 맡는다고 합니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말하였다.
“그러 보스니아 내전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 우선 이러한 내전이 발생하게 되는 역사적, 지정학적인 배경을 먼저 이해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몇 가지로 구분해 이야기하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군요.”
나는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풍경은 아름다웄다.
“첫 번째로 이곳은 아주 오래전 고대에는 동서로마의 분기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로마는 기원전 3세기에 철, 구리, 농산물 등을 얻기 위해 이곳에 처음 진출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드리아해의 해상권 장악을 위해 들어오게 되죠. 이들은 기원전에 일리리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장악하고 500년간 이곳 발칸 반도를 다스리게 됩니다.
두번째로 로마가 멸망하고 나서 이곳은 치열한 종교 간 각축장으로 전락합니다. 왜냐하면 보스니아의 서쪽은 서로마 중심의 가톨릭이, 보스니아 동쪽은 동로마 중심의 정교가 번성하였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두 종교의 접점이 되는 곳이 되었습니다. 동서로마의 분리는 지금까지 보스니아의 역사와 사회,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현재에 와서도 민족 갈등 문제의 연원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곳에는 6세기에 슬라브 민족이 이주해 와 정착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로마 문화와 비잔틴 문화가 혼재하고 문자도 라틴 문자와 키릴 문자가 혼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슬라브 민족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정치와 종교의 일치를 추구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정교를 받아들인 슬라브족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고 13세기에는 보스니아 중세 왕국을 건설합니다.
네 번째는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15세기 이후 오스만 투르크가 보스니아 지역을 장악합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서유럽 원정의 전략적 요충지인 보스니아를 점령하는데 이곳 보스니아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경계선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바 강은 218킬로미터 길이의 강인데, 이 강은 동서로마의 경계로서 가톨릭과 동방정교를 나누는 경계선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와 함께 이슬람교 전파와 개방적 종교정책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보스니아인, 가톨릭의 크로아티아인, 정교의 세르비아인이 어우러져 살게 됩니다.
다섯 번째, 민족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19세기에 들어서자 종교에 의한 구분을 강요받게 됩니다. 이전에는 단순한 종교 집단이었던 보스니아 무슬림은 남 슬라브족처럼 하나의 민족 집단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국가 명칭 대신에 보스니아인이라는 인종적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으로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민족 정체성이 형성, 확대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유고슬라비아 시절 즉 1945년부터 1991년까지는 티토의 정책에 의해 종교나 민족이 아닌 국민 사이의 문화와 종교의 조화를 강조하고 추진해 나갔으나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면서 민족주의도 되살아납니다.
일곱 번째는 1,2차 발칸 전쟁의 승리로 발칸 지역의 모든 세르비아인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세르비아 국가를 연결하자는 의지가 강해지는 시기입니다. 이때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특히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세르비아 왕국으로 편입되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의 보스니아 민족주의의 목표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보스니아 통치가 확정되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의 반 오스만 독립운동은 곧바로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으로 변모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것들을 배경으로 1890년대 이후로 보스니아 내에는 1차 2차 세계 대전까지 민족 간 경쟁과 갈등이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고 잔을 들었으나 언제 다 마셨는지 커피가 없었다. 엘레나에게 커피 한 잔 더 마시자고 하였다. 그리고 휴게소에 잠깐 들렀다.
커피르 ㄹ한 잔 사가지고 나무로 된 의자에 걸터앉았다.
엘레나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인종 청소라는 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아세요?”
“글쎄요, 보스니아 내전 때부터 사용한 게 아닌가요?”
“아뇨, 2차 세계 대전 중 크로아티아 극우 민족주의 정권이 크로아티아 본토와 더불어 보스니아 지역을 장악합니다. 그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명분하에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수십만 명을 학살하거나 강제 이주시키면서 ‘인종 청소’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나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이야기하였다.
“보스니아 내전은 참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내전은 1992년 4월부터 1995년 12월까지 일어났습니다. 이 내전에 참가한 나라는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보스니야 세르비아, 보스니야 크로아티아, 스르프스카 공화국, 헤르체크 보스아니아이며 외부 국가로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공화국, 크로아티아입니다.”
“이것은 내전이 아니네요. 어찌 보면 여러 나라가 참가한 전쟁이라고 봐야 되지 않을까요?”하고 엘레나는 말하였다.
“어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그러한 내전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이죠?”하고 엘레나는 나를 보며 물어보았다.
“티토가 사망한 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의 독립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이름 아래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내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곳에는 아주 다양한 인종들이 거주하였습니다. 가장 큰 비율을 가진 보스니아 무슬림 그리고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내전의 결과는 한마디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91년에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독립하였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독립을 위한 국민 투표를 실시합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잔류하기를 원하였던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은 투표를 원하지 않았고 이를 방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이 투표에 참가해 투표율 64퍼센트에 98퍼센트의 찬성으로 독립이 결정됩니다. 그러자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는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내란의 문제는 1989년 세르비아의 권좌에 오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대 세르아주의’의 기치를 내걸면서 더욱 격화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후원을 받은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의 무장 세력과 유고슬라비아 군은 세르비아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공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보스니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동부 보스니아 전역에서 인종 청소가 자행되었던 것입니다. 내전으로 인해 27만 명이라는 엄청난 사망자와 2백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발칸 반도의 역사가 함축된 도시 모스타르
출발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엘레나와 나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엘레나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오늘 여행길은 마음이 짠하네요.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모스타르인데 모스타르의 뜻이 무엇인지 아세요?”
“모스타르, 네레트바 강의 다리를 지켰던 다리 파수꾼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단어 자체가 슬픈 느낌이 드네요.”하고 엘레나는 차창 밖을 보며 말했다.
모스타르는 헤르체고비나의 옛 수도이며 네레트바 주의 주도이고 보스니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그곳은 2000년 역사와 함께 네레트바 강이 흐르고 있다. 크로아티아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유로 역사의 굴절 속에서 많은 아픔을 간직해야 햇던 도시이다.
나는 엘레나에게 이곳에 크로아티아 이주민들이 정착하게 되는 과정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이곳도 내전의 피해를 입었겠죠. 하지만 이전에 이곳 주민들은 서로 화합하며 평화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15세기 오스만 투르크가 발칸 반도를 침략했을 때 종교 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고국과 가까운 이곳에 정착을 합니다.
그들은 종교화 상관없이 평화롭게 수백 년 동안 살아왔습니다 .네레트바 강을 사이에 두고 말입니다. 그곳에 있는 ‘스타리 모스트’ 다리를 통해 서로 교류하고 화합하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스니아 내전이 일어나면서 이들의 평화가 깨졌던 것입니다.”
“사라예보에서의 내전은 이슬람과 정교의 충돌이었던 반면에 모스타르의 내전은 정교와 이슬람 그리고 가톨릭이 뒤엉킨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됩니다.”
“다시 모스타르 내전에 관해 이야기하면 처음부터 이들 가톨릭과 이슬람교가 싸운 것은 아닙니다. 당초 모스타르의 이슬람과 가톨릭은 세르비아의 정교 세력을 막기 이해 같은 편이 되어 싸웠습니다. 사라예보를 거쳐 모스타르까지 진격해온 세르비아 군과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반군을 막기 위해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의 가톨릭계는 힘을 합쳐 싸우게 됩니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세르비아계 군이 물러나자 대 크로아티아를 내세운 크로아티아가 모스타르에 정책해 살고 있는 무슬림들을 공격합니다. 무슬림 원주민들은 9개월 동안 포위당해 크로아티아군에게 3천 명이 학살되는 ‘인종 청소’를 당하게 됩니다. 가톨릭 지역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은 다리 건너 이슬람 지역으로 추방됩니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네레트바 강을 마주보고 대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탄 차는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달렸다. 모스타르에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벽에 남아 있는 전쟁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무수한 총탄 자국, 이것은 유럽의 어느 여행지를 가도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아주 오래전 우리가 알 수 없는 아픔을 우리의 부모님들도 겪었을 것이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다른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것일 것이다. 발칸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차는 빨리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 없었다. 좁은 국도를 따라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는 꼬불꼬불한 도로를 내려와 모스타르에 들어왔다. 스타리 모스트가 가까이 있는 곳까지 왔다. 가톨릭 성당이 보이는 곳 앞의 주차장에 주차하였다. 한참을 달려온 터라 갈증이 났다. 나는 엘레나에게 이곳이 터키는 아니지만 식사는 모스타르에서 케밥으로 하자고 하였다. 엘레나도 그 말에 동의하였다. 차에서 내려 가톨릭 성당을 지나 신호등 앞에 섰다. 신호등을 건너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네레트바 강이 흐르고 스타리 모스트 다리가 있다.
신호등 앞에서 엘레나에게 물었다.
“스타리 모스트의 의미를 아세요?”
그녀는 “글쎄요.”하고 대답하였다.
“스타리 모스트는 오래된 다리라는 뜻입니다.”
신호등이 바뀌고 엘레나와 나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모스타르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네레트바 강이 흐르는 곳 스타리 모스트 다리가 있는 곳에 가까이 온 것 같았다. 사람들의 복장도 무슬림 복장이었다. 유럽이 아닌 이슬람 국가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30미터의 이슬람식 다리, 1088개의 하얀색 돌, 스타리 모스트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이 다리가 가지는 의미는 가톨릭 문명과 이슬람 문명을 이어주는 곳입니다. 이것은 평화와 공존의 의미가 아닐까요? 엣날에 이 다리는 가톨릭 마을과 이슬람 마을을 연결해 주던 나무다리였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이곳을 지배하면서 16세기에 석조 다리를 놓는데 이곳을 이슬람 전파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타리 모스트와 함께 이곳 모스타르는 200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하지만 다리는 1993년 11월 9일 10시 15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전동안 크로아티아 군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유네스코는 내전이 끝난 후 당면 과제로 이 다리의 재건축을 지원하였습니다. 세계은행이 재정과 기술을 지원하고 유럽 각국이 성금을 보내와 붕괴된지 4년 후인 1997년 나토 평화유지군이 강에서 부서진 다리 조각을 찾아내면서 다리의 재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강에 수장된 다리의 파편들을 건져 올려 건축가들에 의해 1,088개의 돌을 고증에 의해 다시 재배치하였습니다. 고고학적 연구와 원작품을 토대로 하여 수집된 파편들로 8년 만에 다리를 완벽히 복원해내게 됩니다. 지금 스타리 모스트는 종교와 문화, 인종의 연결고리이자 평화의 상징입니다.”
다리의 중간쯤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곳의 전통인 다이빙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이 다리에서 젊은이들이 여름이면 하루에 여러 차례 네레트바 강에 다이빙 하는 게 이곳의 전통입니다. 이곳에서의 이러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7세기 후반부터인데 공식적으로 경기가 시작된 것은 1968년부터라고 합니다.”
무슨 이유로 이 강에서 다이빙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엘레나와 나는 스타리 모스트 다리를 천천히 걸었다. 다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걸어 들어온 방향의 가톨릭 지역에 서 있는 고딕 양식 성당의 첨탑과 십자가가 보였다. 그러나 지금 엘레나와 함께 서 있는 다리 앞에는 또 다른 모습인 이슬람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모스크가 보이고 다리 앞에는 이슬람 문양으로 만들어진 여러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보였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이는 두 가지 아주 다른 풍경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들려오는 아잔 소리는 이곳이 터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햇다. 천천히 다리를 거닐며 건너갔다. 다리 양쪽에는 망루 겸 초소가 잇었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서 간 그곳에는 모스타르 박물관이 있었다. 나는 엘레나에게 들어가보자고 하였다. 박물관은 5층으로 되어 있었다. 이 박물관은 2006년에 문을 열었다고 하였다. 입장료는 약 2유로가 조금 넘는 가격이었다.
박물관에 들어서서 천천히 돌아보았다. 1층은 석조 다리가 만들어지기 전 나무 다리의 역사에 관한 것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2층은 작업에 쓰였던 도구를 전시해 놓았다. 4층에는 군인들이 사용했던 무기를 전시해 놓았다. 5층은 전망대였다. 엘레나와 나는 박물관을 나와 ‘오네시 쿠코바’라 불리는 거리를 걸었다. 거리에는 기념품 가게들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모스타르에 관계된 기념품들이었다.
내가 엘레나에게 말하엿다.
“이곳의 가톨릭 성당은 네 개이지만 모스크가 약 52개 있다고 합니다. 전쟁 전에는 32개였던 것이 전쟁 후 늘어난 것입니다.”
엘레나와 나는 오네시 쿠코바 거리를 걸었다. 거리의 끝에 있는 식당에서 무엇인가를 먹자고 하였다. 우리가 먹은 것은 케밥이엇다. 식당 종업원은 우리를 아래층으로 안내하여 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곳의 풍경은 아름다웠으며 네레트바 강이 옆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곳에서 바라다보는 스타리 모스트의 풍경도 역시 아름다웟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신 다음 다시 반대편으로 걸어 나왔다. 다시 스타리 모스트 다리를 건너 주차장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엘레나와 나는 차를 몰아 사라예보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