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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길
-정의의 실천과 조상 받들기-
@세상에 절대적인 정의란 게 있는가?
세상의 구조적 모순과 불합리한 인간관계의 높은 벽에 부딪히거나 타인의 그런 모습을 볼 때, 세상에 대해 그리고 알 수 없는 절대자에 대해 ‘이 세상에 진정 정의란 게 있습니까?’라고 절규하거나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심정들이 참으로 그럴 만 하다고 느껴진다.
언젠가 증산도 신앙하는 직장 동료와 신앙하지 않는 그 부인과 여러 사람들이 모여 도담을 나눈 적이 있다. 그 때 그 부인이 ‘이 세상의 모든 행위에 대한 잘잘못의 기준은 그 사람이 속한 조직의 기준에 따라 상대적이지 절대적인 건 없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를 하였다. 얼핏 보기에는 진정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는 종교마다 나라마다 다른, 상대적인 윤리가 있을 뿐 절대적인 정의란 없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증산도를 깊이 신앙하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은혜에 대한 보답(보은; 報恩)
몇 년 전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의 첫 편 <에피소드Ⅰ>의 한 토막을 보자.
‘나부’라는 행성의 바닷속 용궁에는 개구리를 닮은 종족이 살고 있다. 그 종족의 ‘자자빙커스’라는 자는, 자기 나라에서 큰 잘못을 저지르고 지상으로 도망을 친 상태다. 그는 나부행성을 침공한 로봇병사들에 의해 갑작스런 죽음의 위험에 놓인다. 이 때 그는 제다이 기사 두 사람에 의해 두 번이나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런 후 제다이 기사는 자기들의 할 바를 했을 뿐이라고 그에게 갈 길을 가라고 하지만, 자자빙커스는 제다이 기사들을 쫒아가며 말한다. “이제 나는 당신 종이야.”
그리하여 그는 목숨을 빚진 보은(報恩;은혜에 보답하는 것)줄에 매여, 도망 나온 자신의 나라로 그 두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안내를 하게 된다. 용궁 나라에 들어간 후 제다이 기사 두 사람은 그 나라의 왕을 만나 도움을 받고 떠나게 된다. 이 상황에서 제다이 기사는 자신들이 통과할 위험한 길에 대한 안내를 받기 위해 다시 그를 데려가고자 한다. 그러나 왕은 그가 자기 나라에서 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남아서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이 때 제다이 기사가, 그가 자신에게 두 번이나 목숨을 빚졌다고 말하자, 왕은 자자빙커스에게 진실을 확인 후 짜증스럽게 화를 내지만 그를 순순히 보내준다.
이 용궁 나라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경우라도 (그 사람의 종이 되어서라도)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장 큰 정의이자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물어보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이 덕목은 우리나라에 적용이 되는가?
“그렇다.”
저 서양 사람들에게도 적용이 되는가?
“그렇다.”
아프리카의 미개한 종족들에게도 적용이 되는가?
“물론이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도움을 준 사람)에게 그 보답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에 대해 누가 동의를 하지 않겠는가? 반면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거나 자신의 생명의 성숙을 위해 도와준 사람을 없이 여기고, 그를 가해한다면, 그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그는 불의한 사람이다. 배은망덕한 사람이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효(孝)에 대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다.
“바로 ‘나 자신의 생명’이다.”
나란 존재가 없으면, 이 세상의 존재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현실적으로 나를 낳아준 존재는 누구인가?
“바로 나의 어머니 아버지다.”
그럼 나의 어머니 아버지를 낳아준 존재는 누구인가?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 바로 조상님이다.”
자, 생각해보자.
나를 낳아준 어머니 아버지를 잘 받들어야 한다는 게 우리나라에만 적용이 되겠는가, 아니면 다른 나라에도 적용이 되겠는가?
“물론 어느 나라에나 적용이 될 것이다.”
그러면, 낳아준 어머니 아버지를 패고, 가난해서 모시기 어렵다고 귀찮다고 내버리는 것은 정의로운 행동인가 불의한 행동인가?
“당연히 불의한 행동이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적용이 되는가?
“그렇다.”
자신의 여건이 허락지 않아 잘 모시지 못할지언정 그렇게 모셔야 한다는 것은 어느 나라 어느 종족이나 동의할 것이다.
다음은 옛 이야기를 한 토막 떠올려 보자. 우리는 이런 효자의 일화를 알고 있다.
@노모가 발을 씻어주는 것을 즐기는 아들
산속을 지나가던 어느 선비가 잠시 쉬어가려고 한 초가집을 들렀다. 그 집엔 젊은 아들 하나와 늙은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는 양반이라는 자신의 가치관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광경을 본다. 아들은 마루에 걸터앉아 있고, 늙은 어머니는 밑에 쪼그려 앉아 아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다. 더욱더 가관인 것은 그 모습을 아들이 즐기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선비는 그 아들에게 ‘세상에 늙은 노모를 그렇게 부려먹는 법이 어디 있냐’고 야단을 친다. 그러자 그 아들의 말이, ‘늙은 어머니가 아들인 자신의 발을 씻어주는 것을 너무 좋아하고 즐거워하시기에 어머니가 하는 대로 놔둔다’는 것이다.
그렇다.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것은 외형적인 받듦만이 아니라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기쁘게 해드린다는 내면적 측면이 더 핵심인 것이다―효냐 불효냐를 판단하는 주체는 행동하는 내가 아니라 받는 ‘부모님의 마음’인 것이다. 즉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된다는 것은 아들의 마음이나 그 나그네의 마음이나 다 동일하다. 그러나 그 행위에 있어서 드러나는 모습(외형)은 각각 다를 수 있다.
왜냐? 각자가 처한 환경적 삶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외형적으로 드러난 행위의 측면은 상대적이지만,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린다 은혜에 보답한다는 본질적인 내면의 측면은 동일한 것이다.
자, 이제 정리를 해보자. 나를 낳아준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보답한다는 것, 이것은 절대적인 정의(正義)인가 상대적인 정의(正義)인가?
@정의가 행해지는 실천상의 문제
그렇다. ‘이 세상에 정의가 어디 있냐’고 따지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어가 보면, ‘정의(正義)’라는 절대적인 도덕률이 없다는 게 아니라, ‘나도 정의로워야 한다고 배웠는데, 그래서 나도 그렇게 살려고 했는데, 왜 사회가 나라가, 그런 나를 그런 사람들을 못살게 구느냐? 왜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정의롭게 사는 사람보다 더 잘 사느냐?’ 이런 뜻일 거다.
이는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빈익빈 부익부의 자본주의 환경에서는 너무나 흔하게 고민하게 되는 부분들이다. 즉 ‘정의가 행해지는 실천상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증산도를 신앙하다 보면, 증산도 안운산 종도사님 말씀처럼, ‘세상은 본질적으로 정의로운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증산도가 다른 어떤 종교와도 구분되는 특징을 논할 때, 그 중 하나가 바로 철저한 ‘신도(神道) 원리―영혼세계의 법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세상사를 물질적인 육체로 이루어진 세계로만 파악하려 한다면 영원히 그 의문을 풀 수 없다. 그것은 반쪼가리진리밖에 되지 않는다.
@선천적 후천적 심한 장애를 겪는 사람들
여기 한 여인을 보자.
예전에 장애자 올림픽에 참여한 장애자 국가대표선수들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무관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TV프로를 본 적 있다. 거기서 국가에서 정규 올림픽 대표선수들에 비해, 숙소와 식사, 차량 지원, 상위권 수상시의 보상금 등 너무나 터무니없는 대접에 대해 분개하며 체념하는 장애 여성을 보여줬었다. 우리는 이런 사회 고발 프로를 보며, ‘세상이 힘없고 약한 사람들에게는 너무 불공평하구나, 공무원들 정치하는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좁구나.’ 등의 비판을 하곤 한다. 그래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이런 쪽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미국의 유명한 기자이자 작가 출신으로서, 영혼과 의사소통을 하고 외계인과도 대화를 하며, 지금은 예언가로 더욱 알려진 ‘루스 몽고메리’의 책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초롱>의 한 부분을 보자. 루스 몽고메리가 자신의 지도령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나는(루스 몽고메리) 어린이나 젊은이의 심각한 사고나 상처에 대해서 알고자 했고, 아서(그녀의 지도령)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때때로 그런 사고는 전혀 예상 밖이며 미리 방지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지구상의 환경은 물질적 육체 속의 영혼의 통제 권한 밖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 영혼은 ‘무의식적으로 속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허용’한다. 이렇게 해서 ‘과거의 카르마 빚(악업)을 청산’할 수 있게 된다.”》(p94)
《다음에 나는 선천적이거나 아니면 어린 아기일 때부터 시작된 정신적 질병에 대해서 물었고,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런 경우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불행한 상황이다. 이 영혼들은 그들을 뒤로 잡아끄는 카르마 빚(악업)을 청산하려고 필사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으로 진보하기 위해서 그러한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것이다.
때때로 그들은 ‘과거 생에서 저지른 죄를 속죄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런 병든 몸을 일부러 떠맡게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이 과거 생의 심각한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후회하는 경우에 자발적으로 그런 육체를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의 ‘대부분은 고차원의 힘이 그 영혼에게 부여한 임무’다. 고차원의 힘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병든 육체를 지정하여 주고 그 영혼이 ‘과거의 잘못을 속죄할 수 있도록 고통과 고난을 겪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그 영혼에게는 선택권이 없다’.》(p93)
@인과응보의 천리-남에게 원한을 사지 말라
증산 상제님은 “천리가 있다면 공(功)은 닦은 데로 돌아가고, 화(禍)는 지은 데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셨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생에서 타인의 생명을 심각하게 해한 사람이 돈과 빽을 써서 사회의 법집행을 받지 않고 저승으로 갔다고 하자. 이 경우 우리는 사회의 정의가 아직 요원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죽어 저승에 가게 되면, 자연의 힘에 의해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고, 다음 생에 태어날 때는 그 죄값을 청산하기에 용이한―현실적으로는 불행한 환경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에게 원한을 사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또 하나의 변수, 조상
그리고 증산 상제님의 부인이자 종통을 이으신 태모님께서는 한 발 더 나아가 “이 세상 인류가 죄 없는 사람이 없나니, 그러므로 대죄(大罪)는 천지에서도 용서치 않으므로 불원간 제 몸으로 받으나, 소소한 죄는 차차로 전하여져 그 과보(果報)가 자손에게까지 전하여지니라.”고도 하셨다. 부모는 자녀의 뿌리요, 자녀는 부모의 열매다. 즉 하나로 이루어진 나무와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부모 조상의 행위―과보가 자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내 인생의 희비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변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선령의 음덕(蔭德)으로 나를 믿게 되나니, 음덕이 있는 자는 들어왔다가 나가려 하면 신명들이 등을 쳐들이며 ‘이 곳을 벗어나면 죽으리라.’ 이르고, 음덕이 없는 자는 설혹 들어왔을지라도 이마를 쳐 내치며 ‘이 곳은 네가 못 있을 곳이라.’ 이르느니라.” (道典 2:78:3∼5)
이 말씀은 증산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준이 아니냐고 치부할 수 있다. 사실 이 말씀은 증산도 신앙인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게 사실이다. 나의 선대 조상님들이 세상에 악보다는 덕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그 덕으로 인해 내가 이 세상의 참 하나님이신 증산 상제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증산도를 만나 잘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이것이 증산도인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일까?
두 가지의 예를 들어 보자. 먼저 한 가지의 실화를 소개한다.
@사육신 하위지와 한명회의 후손
대구의 한 증산도 도장에서 신앙하시는 성도님들의 체험이다.
어느 날 도장에서 철야수도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도장엔 증산도 태을주 수행을 통해 신명(영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분들이 있었다. 그 중 장정화라는 성도님이 수행 중에 한○○이란 성도님 뒤에 저승사자 모습을 한 까만 신명이 서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광경을 보고는 마음이 불편하여 성전에서 나와 도장책임자인 포정님과 상의를 한 후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땐 한○○ 성도님이 주문을 읽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후 장성도님은 다시 수행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수행하면서 보니 그 신명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떠보니 그 한 성도님도 자리를 벗어나 성전 밖으로 나가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다시 들어오신 한성도님이 다시 수행에 임했다. 한데 이번은 더욱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그 까만 신명이 한성도님의 얼굴과 목에다 빨간 천을 감아서 휙 잡아당겼더니 그 성도님이 기침을 하는 거였다. 그 신명이 그 행동을 자꾸 하니 그럴 때마다 주문을 읽던 성도님은 자꾸 기침을 하는 거였다. 그 모습을 보고는 수행중인 한성도님에게 가서 악귀를 쫒아낼 수 있는 ‘관운장주’ 주문을 읽어라고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신명은 더 이상 한 성도님께 범접을 하지 못했다.
이 상황을 한○○ 성도님과 장정화 성도님, 그리고 포정님이 모여 얘기를 나누었는데, 포정님은 한성도님께 이제는 배례를 해보라고 했다. 그리하여 한성도님은 다시 성전에 들어가서 증산 상제님과 태모님께 배례를 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 한성도님 주변에서 괴롭히던 신명이 당황해 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그 까만 신명이 수행을 하고 있는 장정화 성도님께 다가와서는 말을 거는 거였다. “너는 내 말이 들리지?” 하고. 성도님은 놀라면서도 그에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주문을 읽었다. 그러자 그 신명이 반말에서 존대말로 바꾸면서 장성도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울면서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 그 신명의 모습은 옛날 양반들이 입는 도포로 단정하게 바뀐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하위지’라고 소개를 했다. 그리고는 자기는 억울하게 죽은 것이 한이 되어 이 한씨 집안의 씨를 말리려고 지금까지 때를 기다려 왔는데, 한성도님이 증산 상제님 신앙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한을 풀 수가 없게 되어 너무 억울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안은 한씨로 인해 씨가 말랐는데 한씨는 씨가 남아 있다. 거기다 죄를 지은 쪽은 자손으로 인해 후천으로 넘어가는데 우리 집안은 자손이 없어 한을 품은 채 이대로 없어지게 되었다.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딨냐.”며 한탄을 했다. 그 말을 듣고 장정화 성도님도 너무 슬퍼 눈물을 흘렸다.
장성도님은 포정님과 하위지란 인물을 사전에서 찾아보고는 한명회란 사람과 하위지 두 사람 사이에 맺힌 그 원한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조선 초기 세종 단종 세조 때의 사람들로, 한명회는 수양대군(세조)을 왕으로 옹립하는 데 1등으로 기여했던 사람이며, 하위지는 이를 반대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고 한명회의 주도하에 역적으로 몰려 죽은 사육신(死六臣)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성도님은 한명회의 후손이었다.
장성도님은 하위지 신명과 계속 대화를 나누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당신의 한이 풀리겠냐’고 했더니, 도장에서 자신과 자신의 자손을 위해 증산 상제님 전에 정성을 드려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개벽이 지난 후 후천의 새 세상으로 같이 넘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한○○ 성도님께 말씀을 드리니, 역시 자기 집안에 여태까지 손이 무척 귀했고, 일도 잘 안 되었으며, 조카 중에 빙의(귀신들림)가 되었던 사람도 있었다고 얘기를 해주었다.
위에 적은 이야기는 증산도 신도들의 신앙체험 수기로 <대원출판>에서 발행된 ꡔ태을주로 개벽된 나의 생명 나의 인생ꡕ 138쪽에 실려 있는 내용의 일부를 요약 소개한 것이다.
어떤가? 조상과 자손과의 관계가 손에 잡히지 않는가? 조상이 과거에 다른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친 것이 있다면, 당대에 그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한 체 죽은 신명은 그 가해자의 자손에게까지 저렇게 수백 년이 넘도록 그 원한을 갚고자 달라붙는 것이다.
다음은 일상적인 상황을 가정해 보자.
윗대 조상들이 불우한 사람들을 많이 돕고, 세상에 공덕을 많이 끼친 사람이라고 하자. 그리하여 과거에 그 조상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서 당대에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을 다 못하고 죽었다고 하자.―대부분이 다 보답을 못하고 죽는다. 그러면 그 은혜를 받은 신명은 자신에게 베풀어준 그 사람의 자손들이 잘 되도록 신명세계에서나마 힘껏 도와주는 것이다.
이렇게 조상의 과거의 삶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 영향은 그 과보의 정도에 따라, 그렇게 힘들이지 않게 살아도 집안이 흥하도록 해주기도 하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집안이 안 되는 그런 삶을 연출하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조상에 대한 얘기는, 나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주어지는 신도세계의 힘에 대한 얘기였다. 그러면, 나의 노력으로서 이런 조상님의 음덕을 더욱 확대시키고, 아니면 설사 내가 그런 척을 많이 지은 조상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다고 가정할 때, 어떻게 하면 내가 현세의 삶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첫째, 나의 조상을 잘 모시는 것
일차적으로 나의 조상님들로부터 보호의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조상님에 대한 봉제사와 함께 조상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이 나를 성공의 길로 이끄는 첩경이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조상의 음덕으로 당신을 믿게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부모를 경애하지 않으면 천지를 섬기기 어려우니라. 천지는 억조창생의 부모요, 부모는 자녀의 천지니라. 자손이 선령(先靈)을 박대하면 선영도 자손을 박대하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자손이 조상을 잘 받들면 직접적으로 내 눈에 쉽게 보이진 않지만, 자손을 잘 되게 해주려는, 조상으로부터의 도움을 받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집안이 잘 풀리게도 되는 것이다.
반면 죽으면 끝이지 영혼이 어디 있냐는 식의 의식을 갖고, 제사를 지내도 형식적으로 공경하는 마음도 없이 지내고, 아예 제사조차 안 지내고 조상을 무시한다면, 그 자손에게는 조상의 보호막이 걷히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조상이 그 자손의 그런 심법, 잘못된 의식을 깨주기 위해 일부러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렇게 자손의 집안을 흔들어서는 자손이 스스로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내가 열심히 했는데도 나의 집안이 이렇게 깨지고 있는데 무슨 이유에서 그럴까?’ 하고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경우는 흔하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 상당수가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꼭 그 점쟁이는 조상 얘기를 꺼집어낸다. 가깝게는 조상의 묘가 잘못되었다느니, 조상 제사를 제대로 안 모셔서 조상이 굶고 있다느니, 아니면 그 조상들이 자신들을 잘 받드는 다른 형제에게 가 있어 그 집안만 보살펴 주고 있기 때문이라느니 하면서. 그런 얘기를 듣고 난 자손은 그제서야 조상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태도를 바꿔 조상을 잘 받들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상께 해원굿(치성)을 해 드렸더니, 모든 일들이 쉽게 잘 풀려나가더라’는 얘기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조상과 자손의 안정을 도모하는 대표적인 의식, 천도식
이런 조상을 잘 모시는 방법 중 구체적인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천도식’이다. 평시의 제사에서 한 단계 나아간 것으로, 조상님을 참 하나님이 계신 천상의 문화권으로 안내해드리는 것이다.
조상이 자손에게 큰 기운을 내려주기 위해서는 천상에서의 그 위치, 그 격이 높아야 한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선영신이 짱짱해야 나를 따르게 된다’고 하시어 선영신이 과거에 쌓은 공덕으로 인해 저승세계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어야 자손들이 잘된다고 하셨다.
우리는 친구 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생일이나, 특별한 날을 마련하여 친구들을 초대하여 음식 대접을 하곤 한다. 그러고 나면 서먹하던 친구들과도 더 친해지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가 있다. 이것은 저 신명세계의 천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천도식을 할 때는 음식을 차리게 된다. 그런데 그 음식을 조상님께만 차리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이신 증산 상제님께도 차리며, 우리 민족의 국조이신 환인 환웅 단군 성조께, 그리고 이미 도장에 모셔진 다른 성도들의 조상님들께도 차려 드린다. 그리고 그 천도식의 장에는 나의 조상님들께서 당신의 천상에서의 친지들은 물론 친구들까지 데려온다. 거기에 천상의 많은 천지신명들과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그 음식을 먹고 흠향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조상님 이름을 빌어 자손이 대신 그렇게 차려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대접을 받은 상제님, 단군할아버지, 그 외 많은 신명들이 얼마나 나의 조상님들을 잘 대해주겠는가? 속된 얘기가 되겠지만, 사회에서도 사업의 상대이건, 국가기관의 상대이건 뇌물을 먹이고 나면 그 태도가 달라지지 않던가?
자, 지금 자신의 삶이 헤어나기 어려운 고난 속에 처해 있다면, 이렇게 내가 조상님을 제대로 공경하고 있는지 없는지 그것부터 먼저 살펴볼 일이다.
@둘째, 척을 짓지 않고, 선행을 베푸는 것
증산 상제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신 바 있다.
“세상의 모든 참사(慘事)가 척신이 행하는 바이니라. 삼가 척을 짓지 말라. 만일 척을 지은 것이 있으면 낱낱이 풀고 화해를 구하라.” (道典 3:188:10∼11)
척이란 사람 간에 혹은 사람과 신명 간에 얽힌 원한의 힘을 말한다. 악척을 많이 지은 조상님을 뒀다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건 조상이 지은 악행보다 자신이 더 많은 선행을 행하는 것이다. 아무리 조상으로부터 원한을 산 신명들이 자신에게 해꼬지를 할려고 하더라도 나란 사람이 세상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고, 정의로운 일을 하고 선행을 베풀면, 그런 악척을 품은 신명들도 감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건 이와 같다. 자신이 잘못을 범했을 때, 죄를 지었을 때 스스로 자수하여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절대자, 신 앞에 나아가 참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히려 선행을 한다는 것은 잘못을 빈 다음 행동으로 옮겨간 것이니, 신께 참회만 하고 그냥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사람이 의로운 말을 하고 의로운 행동을 하면 천지도 감동하느니라.”고 하셨다. 이렇게 의로운 선행을 통해 천지를 감동시키면 아무리 조상 복을 잘 못 타고 났다고 해도 그 굴레를 벗어날 방법이 생기는 것이다.
@셋째, 언덕(言德)과 심덕(心德)을 잘 갖는 것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속담이긴 하지만, 실제도 이렇게 가능하리라 느껴질 것이다. 돈에 대한 빚이건, 자신의 잘못으로 그 사람을 가해해서 생긴 빚이건 정말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그 말 한 마디로 상대를 감동시키게 되면 그 빚을 갚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말의 중요성에 대한 증산 상제님의 말씀을 몇 가지 보자.
너희들은 베풀 것이 없으니 오직 언덕(言德)을 잘 가지라. 덕 중에는 언덕이 제일이니라. 남의 말을 좋게 하면 그에게 덕이 되어 잘되고, 그 남은 덕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고, 남의 말을 나쁘게 하면 그에게 해가 되어 망치고, 그 남은 해가 밀려서 점점 큰 재앙이 되어 내 몸에 이르느니라. 뱀도 인표(人票)를 얻어야 용이 되나니, 남의 말을 좋게 하면 덕이 되느니라. 평생 선(善)을 행하다가도 한마디 말로써 부서지나니 부디 말조심하라. (道典 8:28:2∼6)
이 세상 모든 불행의 씨앗은 사실 이 말 한마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간에건 국가간에건 상대와 육체적인 물리적인 충돌이나 전쟁이 생기는 그 근원에는 말 한마디를 잘못하여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함으로써 벌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번 잘 생각해보라.
같은 조직 사회에서도, 개인적인 관계에서 평소에 상대에게 다정하지 않고, 상대의 잘못만 집어 얘기하길 잘하고, 상대의 좋은 점은 칭찬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고 하자. 그 경우, 당장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그것이 별스레 자신에게 해가 되진 않는다. 그러나 막상 그 당사자에게 부탁해야할 경우가 생길 때, 혹은 자신에게 잘못한 바가 있을 때, 그럴 경우 내게 돌아오는 것은 그 사람의 쌀쌀한 말, 안된다는 말, 못 도와준다는 말,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듣기 일수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듯이 평소 나의 언행의 잘잘못에 따라 나에게 인과응보로서 같은 반응이 오는 것이다.
국가간의 전쟁을 한 예로 들어보자. 국가간의 외교는 동등한 위치에서 진행이 되는 것인데, 자신의 국가가 영토가 넓다거나 잘 산다거나 하여 상대 국가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자기 나라의 우월성을 내비치고 반면 상대 국가를 깔보는 듯한 문구로 문서를 작성했다고 하자. 그러면 인간이란 게 꼭 이성적으로만 행동하는 게 아니다보니, 그 외교문서를 보고 분노한 한 나라의 지도자가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는 중요하지도 않은 한 건수를 트집 잡아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언설에 대한 상제님의 말씀들을 몇 가지 더 살펴보자.
남이 힘들여 말할 때에는 설혹 그릇된 점이 있을지라도 일에 낭패만 없으면 반박하지 말라. 그도 또한 척이 되느니라. (道典 2:104:3)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먼저 바른 말을 하고 바르게 살아야 하느니라. (道典 1:39:6)
김갑칠이 늘 상제님께 응석과 고집을 부리되 상제님께서는 잘 달래어 일깨우실 뿐 한 번도 꾸짖지 않으시니 갑칠이 더욱 심해지는지라. 하루는 형렬이 몹시 화가 나서 “저런 못된 놈이 어디 있느냐.” 하며 꾸짖거늘, 상제님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아직 언행이 덜 풀려서 말에 독기(毒氣)가 있도다.”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惡將除去無非草(오장제거무비초)요 好取看來總是花(호취간래총시화)니라-밉다고 베어 버리면 풀 아닌 게 없고, 좋다고 취하려 들면 모두가 꽃이니라.” 하시니라.
이어 말씀하시기를 “말은 마음의 소리요, 행동은 마음의 자취라. 말을 좋게 하면 복이 되어 점점 큰 복을 이루어 내 몸에 이르고, 말을 나쁘게 하면 화가 되어 점점 큰 재앙을 이루어 내 몸에 이르느니라.” 하시니라. (道典 3:97:1∼6)
전쟁사(戰爭史)를 읽지 말라.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신명은 춤을 추되 패한 자의 신명은 이를 가나니 도가(道家)에서 글 읽는 소리에 신명이 응하는 까닭이니라. (道典 4:122:3∼5)
증산도에서는 ‘신도(神道)의 원리’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다. 말이라는 게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욕하든 어떤 말을 해도 관계없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전쟁사를 소리 내서 읽는 것을 예로 들어, 과거에 전쟁에서 패하여 불운하게 죽어간 영혼(신명)이 그 소리를 듣고 싫어하게 된다고 하신다. 얼핏 생각하면 황당한 가당치도 않은 말이라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 영혼 신명들이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어느 정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말이 튀어나오기 전단계인 그 마음씀씀이의 단계에서도 그것이 척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신다.
남을 미워하지 말라. 그의 신명(神明)이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느니라. (道典 2:103:3)
증산 상제님께서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신의 기국과 임무를 감당할 만한 신명들이 호위하여 있다고 하신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도 모두 신명의 조화로 되는 것이다. 지금도 네 양쪽 어깨에 신명이 없으면 기운 없어서 말도 못 혀. 눈에 동자가 있어야 보이듯이 살아 있어도 신명 없이는 못 댕기고, 신명이 안 가르치면 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여. 신명이 있으니 이 모든 지킴이 있는 것이다. (道典 2:61:2∼5)
이런 신명들을 보호신명 혹은 지도령이라고 한다. 이것은 육체를 가진 그 당사자는 영혼을 볼 수 없기에 금방 알지 못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신명이 있어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무의식을 통해 가르침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 신명들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 자신이 감싸고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조차도.
무당을 하는 사람 중에 아이가 죽어서 된 동자신이 붙어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어린 동자신조차 사람들의 현재나 미래의 모습을 가르쳐주는 것을 보라. 그렇게 영혼들은 상당부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들의 내면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지 않는가? ‘사람은 속여도 신명은 못 속인다’고. 그래서 그 신명들은 내가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 나쁜 마음을 품는 것조차 금방 다 알아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신명이 먼저 상대편을 쳐버리는 것이다.
다음 몇 말씀을 더 살펴보자.
사람마다 그 닦은 바와 기국(器局)에 따라서 그 임무를 감당할 만한 신명(神明)이 호위하여 있나니, 만일 남의 자격과 공부만 추앙하고 부러워하여 제 일에 게으른 마음을 품으면 신명들이 그에게로 옮겨 가느니라. (道典 4:154:1∼3)
못났다고 자포자기하지 말라. 보호신도 떠나가느니라.
이 경우는 참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경우의 말씀이다. 내가 남을 싫어하고 없이 여기는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품을 경우, 자신의 보호신이 실망을 하고는 자신을 떠나간다는 말씀이다.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다 보면 거기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상담 받는 사람에게 ‘자존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사소한 것이라도 자기의 장점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내가 그렇게 못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런 사소한 것 하나로도 뭔가 세상에 기여를 할 수가 있구나’ 하는 자기에 대한 존재가치를 스스로 높이는 것.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신뢰감을 가지도록 해서 뭐든 할 수 있는 자신감을 고양시켜 주는 것이다. 그런 자신감은 어지간한 외부의 충격에도 스스로 당당하게 서 있도록 해준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거나 정신이상을 일으키는 것은 외부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부족한 데 기인하는 것이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이런 심리현상의 내면에도 이와 같은 영혼세계의 원리가 존재함을 가르쳐 주신다.
@마무리 하며
자, 이제 정리를 해보자.
지금까지 이 글을 보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먼저 영혼세계에 대한 얘기가 많기 때문에 금방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영혼세계에 대해 체험을 해봤거나, 과거 TV속에서 방영했던 《전설의 고향》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 등을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그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 또 이렇게 반발심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제목부터 ‘나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거창하게 달았는데, 그러면 조상님 잘 받들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바른 마음 갖고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푼다면 뭐든 다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냐고.
시중 서점을 나가보면,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13가지 방법, 리더십의 21가지 불변의 법칙, 리더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골드칼라로 가는 길, 일 잘하는 사람 일 못하는 사람, 나의 몸값을 10배 높이는 6가지 방법, 당당하게 돈 빌리는 기술, 합법적으로 세금 안내는 110가지 방법, 부자들의 돈버는 습관, 한국에서 돈 버는 100가지 방법, 금융지식이 돈이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등등 자기를 계발하여 회사에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회사원, 조직을 잘 관리하여 인정받는 리더가 되고 그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 그리고 돈을 잘 벌어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한 책들이 고르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처럼 요즘은 개인의 성공과 조직의 성공을 위해 시테크 재테크를 말하면서 시간과 돈, 조직경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런 능력을 잘 개발할 수 있는 갖가지 방법들을 논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자기를 계발하고, 세상에 대해 금융지식이나 조직사회의 원리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그런 구체적인 공부 없이 지금까지 제시한 효도, 봉제사, 선행, 마음 바르게 먹기 등만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필자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을 하겠다. 위에서 각종 서적의 제목을 나열하였는데, 사실 저러한 각종 지식을 가진다면 좀더 돈을 많이 벌고, 조직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효율적인 역할을 하는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식과 기능만으로는 성공을 못해도, 효도, 봉제사, 선행, 마음 바르게 먹기로는 성공을 할 수 있다.
왜냐? 저런 지식과 기능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도리적인 면을 발전시키는 데로 나아가기엔 쉽지 않다. 반면, 나의 선한 행위, 예를 들어 ‘효’ 하나만을 두고 생각해보자. 효란 모든 인륜의 근본이라고 한다. 자기 부모에게 진정으로 효를 다하는 사람은, 남의 부모와 사회의 어른들도 공경할 수 있고, 그런 자기 부모를 봉양하려는 지극한 마음을 먹은 사람은, 그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면서 위에서 제시한 그런 지식과 기능을 배우는 데 나아가기가 용이한 것이다.
그리고 설사 마음은 선하되 배운 것이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라도,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높은 지위나 잘사는 넉넉한 환경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그만큼 자기에게 다가오는 ‘화(禍)’가 적기 때문에 그래도 잘 살 수가 있다. 아니, 자기 대에는 성공적인 삶을 못 살더라도 자식농사를 잘 지어 자식 대에라도 성공할 수가 있다. 반면 지식과 기능에 몰두하는 사람은 그것을 더욱 확대하여 생활에서 실천해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타인에게 원한을 사는 행위에 더 근접해 가기 쉽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당분간은 성공하는 듯이 보이고 높은 지위와 부가 보장될지라도, 인간에 대한 좁은 마음 씀씀이, 조상의 척, 그리고 사회 속에서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되는 부정한 행위 등으로 인해 언젠가는 그 화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성경에 보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는 말이 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더 나아가 “오직 어리석고 가난하고 천하고 약한 것을 편히 하여, 마음과 입과 뜻으로부터 일어나는 죄를 조심하고 남에게 척을 짓지 말라. 부하고 귀하고 지혜롭고 강권을 가진 자는 모든 척에 걸려 콩나물 뽑히듯 하리니, 이는 묵은 기운이 채워 있는 곳에서는 큰 운수를 감당키 어려운 까닭이니라. 부자의 집 마루와 방과 곳간에는 살기와 재앙이 가득히 채워져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렇다. 현재의 자신의, 가난하고 못 배우고 못난 모습을 보고 실망하지 말라.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사에 있어 절대 변하지 않는 정의, 효와 조상 받들기, 그리고 남에게 원한을 사지 않고 선행을 베풀려는 사람에게는 하늘도 감동하여 그 결말엔 반드시 성공의 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