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인권 유린 위에 이룩된 경제 발전
우리는 흔히 지난 30년, 즉 1961년 5 16 쿠데타부터 93년 문민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30여 년을 군사 정권 시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물론 이 시기가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경제 발전을 이룩한 시대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오늘도 많은 이의 기억 속에 아직도 아픔으로 남아 있을 만큼 독재 정권의 압제가 격심하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나라가 빈곤을 극복하고 경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 치러야만 했던 부득이한 희생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 치른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막강한 권력에 의한 강요된 희생이었고 많은 경우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부당하고 불법적이기까지 한 인권 유린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오히려 국민의 참여 의욕은 감소되고 특히 인권 유린과 사회 정의 부재는 너무나 많은 이의 삶을 고통 속에 좌절하게 하였고 권력형 부정 부패를 만연시켰습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를 연일 들끓게 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의 어마어마한 액수의 비자금 사건이 이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간의 빈부의 격차, 도농의 격차, 지역간의 격차를 낳고 그것은 오늘까지도 국민적 단합을 해치고 정치의 안정과 국가의 경제 발전에도 큰 지장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물질 위주, 황금 만능주의의 전도된 가치관은 성수 대교 붕괴, 도시 가스 폭발,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같은 수많은 목숨을 잃은 참극을 초래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분명히 이런 가운데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하지만 외화 내빈(外華內貧)과 물신주의의 전도된 가치관으로 인간과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뿐 아니라 교육계,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으로 타락시키는 병균을 우리는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밝은 미래를 위해 건전한 삶을 살려면 우리 자신의 오늘의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 진단과 치료가 필요합니다. 인권과 사회 정의 문제는 70년대에서 87년 6 29 선언까지 근 20년 동안이 가장 심각하였다고 생각합니다. 7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김지하 시인의 시 `오적(五賊)'(재벌, 정치인,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과 `비어(蜚語)'가 잘 말합니다. 시 `오적'은 70년에 사상계에 게재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김지하 시인은 이로써 구속되었고 몇 달 후에 보석되긴 하였으나 이 시를 실었던 사상계는 폐간되었습니다. `비어'는 가톨릭에서 발간한 월간지 `창조'의 72년 4월호에 실었던 시입니다. 이 시로 인해 김지하 시인은 수배되었다가 다시 구속되고 `창조'는 얼마 후 휴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당시는 언론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었고 언론계와 학원, 노동계와 종교계가 정보 사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당국, 특히 중앙 정보부에 의해 임의 연행되어서 감옥살이까지 하는 고초를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또한 70년 10월에 있었던 노동자 전태일 군의 분신 자살 사건은 이 시대의 노동자들의 처우가 얼마나 열악하였는지, 노동 3권이 얼마나 침해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급기야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유신이 선포되었고 11월 21일에는 소위 유신 헌법을 만들어 통일 주체 국민 회의 박정희 대통령이 제 8대 장기 집권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이 전에 비상 보위법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유신으로써 절대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생살 여탈을 가진 공포 정치 74년 1월부터는 대통령 긴급 조치령의 발동으로 힘의 통치 공포 통치를 자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상황은 무릎을 꿇고 순응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꼿꼿이 서서 항거함으로써 퇴학, 퇴직, 또는 구속으로 감옥살이 또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삶과 죽음 중 양자 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공포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수많은 인권 유린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저항하는 인권 수호와 사회 정의를 외치는 소리가 대학에서, 언론계에서 또는 노동계와 재야 정치인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때 교회도 그냥 방관자로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대체로 전통을 존중하는 편이고 현실 정치에의 참여는 극히 제한된 예외의 경우 외에는 피하는 보수적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인권과 사회 정의 구현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예민한 사회 문제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발언한 것은 1967년도에 강화도 심도 직물 사건 때였습니다. 이 사건은 전형적인 노동 운동 탄압으로서 야기된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마산 교구 주교였던 저는 노동 청년회 지도 주교도 겸하게 되어 직접 현장에 가 본 일이 있었고 자세한 이야기를 현장에서 들은 다음 억압받고 부당 해고된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교회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인천 교구장 나 주교님과 함께 주교 회의에 이를 건의하였고 주교 회의는 68년 2월 9일부로 공식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성명서는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 발표한 최초의 성명서로서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문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71년 10월에 원주 교구에서 교구장 지학순 주교를 비롯하여 교구 사제 전원이 여러 날에 걸친 현실 분석 끝에 부정 부패를 규탄한다는 시위를 하였는데 이것은 가톨릭 교회로서는 과거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 후 제가 71년 성탄 미사 강론을 통하여 또한 72년 8월 15일에 시국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날로 더욱 1인 독재로 가고 있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일이 있고 이 때문에 성모 병원이 세무 사찰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인권과 사회 정의 구현에 참여하게 된 것은 원주 교구장 지학순 주교님이 74년 7월 6일 민청련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으로써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신 시대와 그 후에도 사회 정의 구현에 있어서 때로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 정의 구현 사제단이 뜻 있는 사제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건이나 문제들에 사제단이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른바 시국 기도회도 자주 개최되었고 또 여러 경우에 제가 부득이 강론을 할 수밖에 없어서 천주교회가 인권과 정의 구현, 우리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서 어떤 이들에게는 구심점처럼 비쳐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87년 6 10 항거의 승리로써 6 29 선언이 나올 때까지 명동 성당과 지방의 여러 성당에서는 수없이 많은 시국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지학순 주교님의 석방을 위해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인권과 사회 정의, 언론 자유 회복(동아, 조선 일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 농민의 권익 옹호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하여 기도회가 연이어 일어났고 76년 3월 1일에는 명동 3 1절 기도회가 초교파적으로 열렸었는데 이 때 윤보선 전직 대통령과 함석헌 선생, 김대중 씨를 비롯한 재야 지도자들(정일형, 이태영 박사 내외분)과 개신교 목사님들, 천주교 신부들 등 뜻을 함께 한 이들이 서명한 `민주 구국 선언'이 발표되어 이른바 3 1절 명동 기도회 사건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로써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더 크게 우리 사회 안에서뿐 아니라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명동에서 있은 시국 기도회 가운데는 75년에는 서울 농대 학생으로서 `대통령께 드리는 글'과 `유서: 양심 선언'을 남기고 자결한 김상진 군을 위한 추도식도 있었고, 고(故) 장준하 선생 추도 미사도 있었습니다. 그 밖에 인혁당 사건과 관계되는 기도회,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적극 노력하다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추방된 시노트 신부(오걸 목사님은 그전에 추방됨)를 위한 미사가 있었고 78년에는 동일 방직 사건이 일어나서 이를 위한 기도회가 크게 있었습니다.
오원춘 사건으로 정부와 교회가 대결 이 무렵 가톨릭 농민 운동도 농민의 권익 옹호를 위해 어려움 속에서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전남 함평 고구마 사건에 이어 79년에는 오원춘 사건1이 일어났습니다. 안동 교구 영양군 춘기면에 가톨릭 농민회 지부장이던 오원춘이라는 한 농부가 당국에 의해 납치를 당한 사건이었는데 그 납치의 진실 여부를 두고 교회와 정부와의 긴장 관계는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르러, 오원춘 사건이 일어난 천주교 안동 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두봉 주교는 추방될 위험에 있었고, 전주 교구 김재덕 주교는 전주에서 있은 기도회 중에 "현 정권(즉 유신 정권)의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을 주장하여 당국으로부터 즉시 입건되었고 구속될 위험에 놓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두 경우에 다 당시 주교 회의 의장인 광주 윤공희 대주교와 제가 관여하게 되었는데, 두봉 주교를 위해서는 로마에 계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불림을 받아 가서 소상히 설명을 드림으로써(로마는 당시 우리 정부로부터 두봉 주교의 교구장직 해임 압력을 받고 있었다.) 문제 해결을 보았고 김재덕 주교의 경우에는, 전주까지 가서 함께 상경하여 대책을 숙의하였는데 우리는 구속이 되었을 때 강력히 대처하겠다는 각오로 임하였습니다. 우리의 이런 자세를 알게 된 당국은 김재덕 주교를 구속할 경우 명실 공히 교회와의 정면 대결을 면치 못할 것이고 그것은 정부에 도움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서인지 구속 방침을 취소함으로써 해결되었습니다. 79년 10 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 시대가 끝나고, 12 12와 80년 5 18 광주 민주화 운동 강경 진압으로써 등장한 이른바 신군부의 집권 시대(특히 5공 시대)에도 인권과 사회 정의, 노동자와 농민, 도시 철거민들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의 관련 피의자 김현장과 문부식을 은닉시켜 주었다는 이유로 원주 교구 최기식 신부를 구속하고 (피의자들을 권유하여 당국에 자수케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매스컴을 동원하여 약 1주일간 가톨릭 교회가 마치 좌익, 반국가 범죄의 소굴인 것 같은 인상을 갖도록 당국이 오도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강력히 여기에 대하여 항의하였으나 언론에서는 이것을 제대로 반영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1981년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이어서 1984년 한국 교회 200주년 기념과 교황 방문 등으로 교회 자체의 내적 쇄신을 위해 더 노력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87년 1월 박종철 군의 고문 치사 사건이 정의 구현 사제단에 의해 밝혀졌고 민주화 운동은 다시 열기를 띠었습니다. 이 힘이 6 10 항거로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좌익, 반국가 단체로 몰려 이상으로 보듯이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동안 또는 1987년 6 29 선언이 있을 때까지 교회는 인권과 사회 정의,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깊이 참여할 뿐 아니라 때로는 선도적 역할을 하고 가톨릭 교회 또는 명동은 민주화의 구심점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명동 성당은 오늘까지 마치 누구나 와서 시위를 할 수 있는 장소처럼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수없이 많은 이익 집단에 의해 때로는 몇 달씩 점거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여러 사건과 사태의 와중에서 제가 어떤 심경이었는지는 표현하기 힘듭니다. 참으로 단순하지 않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암담한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의 체험에서는 많은 이들로부터의 격려와 위로도 없지 않았지만, 정부나 교회 밖으로부터의 압력은 물론이요 교회 안에서 적지 않은 반대와 비판의 화살 앞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는 이렇게까지 깊이 정치 문제에 개입하느냐? 이로써 교회가 입는 손해는 얼마나 큰지 아느냐? 정부 공직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 예수님과 복음을 빙자하여 말하지 말라!" 등등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분들도 다 교회를 걱정한 데서 이런 비판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몹시 괴로웠고 고독하였습니다. 이럴 때 외람되지만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가 4, 24)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가끔 생각하였습니다. 지학순 주교의 구속 같은 큰 사건이 터졌을 때 그것은 한국 교회로서는 처음 당하는 큰 충격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의견의 차이 없이 모두가 함께 대처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의 구현 사제단이 생기고 이분들이 거의 모든 시국 사건에 개입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들을 두고 찬반 의견은 교회 밖에서도 적지 않았으나 교회 내부의 상층부에서부터 심각하게 갈라졌고 때로는 서로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처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참여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 모든 일의 탓이 교회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저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로마 교황청으로 저를 고발하는 편지를 많은 이들의 이름으로 보내기도 하고, 정부 당국에서도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저에 대한 견책 또는 그 이상의 무엇을 상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은 로마에서 저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런 때 구국 사제단, 평신도 공화 당원으로 이루어진 대건회가 있었습니다. 또 국제 문화 교류 협력회라는 데서는 Hapsburg 왕가의 왕자 되는 사람을 초대하여 그로 하여금 저를 권력욕과 허영으로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으로 유럽 신문에 글을 싣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 시기에 안팎으로 여러 가지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압력과 비판 아래 제가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심적 고충, 그것을 지금 글로나 말로써 표현하기는 힘듭니다.2 단지 대부분의 경우 소수이지만 이해하는 이들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 앞에서의 기도로써 지탱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입니다만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하느님께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여야 합니까?" 하는 기도를 자주 바치기도 하였고 이제 더 이상 정치적 문제 때문에 기도회나 강론을 해야 하는 일이 없을 만큼 사회가 빨리 민주화되기를 갈망하는 마음도, 그래서 좀 쉬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였습니다. 그럼 교회는 왜 그렇게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하였는가? 그 물음에 답을 드리는 뜻에서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1974년 7월 지학순 주교님이 민청련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당시 중앙 정보부에 의해 구속되었을 때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이 만남은 중정 차장 김재규 씨의 권고를 제가 받아들임으로써였습니다. 1시간 반 정도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통령과의 대화 중에서 이 대화가 가장 대화다운 대화였다고 기억합니다. 이 때 박정희 대통령은 시국에 관하여 그분 나름대로 저에게 당신 생각을 이야기하고 저는 저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 분위기 속에서 주고받는 대화였습니다. 박 대통령이 문제로 삼은 것은 세 가지 점이었습니다. 1) 종교 또는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냐? 2) 언론 자유 3) 그리고 노동 문제에 교회가 왜 관여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가톨릭에는 노동 청년회가 있었고 개신교에는 도시 산업 선교회가 있었는데 통칭으로 `도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산'이 노동 문제에 개입하면 기업이 도산한다고 (가톨릭 노동 청년회 활동을 포함하여) 도시 산업 선교 활동을 비난하는 여론이 많았습니다.
교회는 사회의 윤리 도덕의 파수꾼 1. 박 대통령은 먼저 종교 또는 교회의 역할을 말하면서 종교란 마음의 정화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정치 문제, 경제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종교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고 정교(政敎) 분리 원칙에도 위배되는 것이 아니냐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박 대통령의 이 말씀은 사실 그 시대에 교회 안팎에서 계속적으로 제기된 근본 문제였습니다. 그 때 저는 그 물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대통령께서 종교의 역할을 그렇게 보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 안에서 신자들 중에서는 물론이요 저와 같은 성직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는데 각하께서 그렇게 보시는 것은 이해할 뿐 아니라 당연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각하, 한번 달리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종교나 교회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이 첫째로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개개인 사람 마음을 위로하는 것뿐입니까? 종교나 교회는 그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구실을 다해 줄 것을 바라고 있고 개개인의 마음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분위기도 도덕과 윤리로써 정화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 교회가 만일 사회가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정 부패로 썩어 가고 있는 데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직무 유기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한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파수꾼도 되어야 하고 그것의 향상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정치, 경제도 포함되지 않겠습니까? 국민 생활의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정치와 경제는 윤리, 도덕의 범주 밖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저도 각하께서 지적하신 정교 분리의 원칙을 교회도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가 정부의 인사나 경제 정책 등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 성직자가 정치 활동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도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그 나름의 인생관, 사회관, 세계관이 있고 그 원리에 따라야 인간과 사회 또는 세계의 발전과 구원이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정치, 경제가 여기에 위배될 때에는 발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다음은 언론 자유와 관련된 정부의 언론 정책에 대해서였습니다. 대통령은 그 당시 서울서 인쇄되는 일간 신문이 그 날로 평양에 간다면서 남북 분단과 공산주의 혁명 침투의 위험 등에 비추어 볼 때 국가 안보의 절대적인 요청에 따라 현재의 언론 정책은 불가피한 것이고 여기에 비추어 언론 자유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저 역시 일간 신문이 그 날로 평양에 간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되묻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한편 대통령이 보는 국가 안보의 필요성에 동감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한 국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강한 국력이란 단지 무력에 의존된 것이 아니고 모든 국민이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과 국민의 단결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무기가 있고 잘 훈련된 군대가 있어도 나라를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국민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신뢰는 신문을 믿을 수 있을 때 가능하고 그것은 언론 자유가 있음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국민은 모든 신문을 시시비비를 잘 가릴 줄 아는 신문으로 알려진 동아 일보까지 서울 신문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렇게 신문을 믿지 않는 것은 신문이 써야 할 것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고 그만큼 언론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문을 믿지 않는 것은 곧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국민이 정부를 믿지 않을 때 거기에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는 없고 국력은 그만큼 약화됩니다. 따라서 언론 자유를 정부가 권력의 힘으로 제한하는 것은 오히려 국가 안보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봅니다. 각하께서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 나라의 실정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약자인 노동자의 편은 아무도 없기에 3. 그 다음 주제는 노동 문제였습니다. 대통령은 "종교계가 왜 노동 문제에 개입하느냐? 도산(都産)이 개입하면 `도산(倒産)'된다고 기업에서 말하고 있는데 사실 그렇다."면서 여러 사례를 댔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답변했습니다. "각하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삼는 것은 결코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용주와 노동자의 노사 관계는 서로 맞서기 쉽습니다. 한 쪽은 되도록 헐한 임금이기를 바라고 한 쪽은 적어도 최저 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은 물론이요 한 푼이라도 더 받고 싶어하니 이해 관계가 상반되어 갈등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서로 문제를 대화로 푸는 노사 화합입니다. 노사간은 서로의 이해 관계가 깊은 그만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기업은 노동자 없이는 기업이 안 되고 노동자는 기업이 없이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서로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아직 실업자가 많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제대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사를 당하고 사용주 임의로 해고될 수도 있는 등 전혀 보장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질은 공장에 들어가면 좋은 상품이 되어 나오는데 사람이 공장에 들어가면 폐품이 되어 나옵니다. 이것이 오늘의 노동 현장의 현실입니다. 그리하여 노사간에는 잦은 갈등과 분규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대립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는 힘이 센 편이 결국 이기게 마련인데 그것은 언제나 사용주입니다. 왜냐하면 사용주는 본래 개개인 노동자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강자인데 거기다 중앙 정보부, 경찰 심지어 노동자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만들어진 노동청까지 기업주 편입니다. 노동자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대통령 각하께서 2년 전에 저를 진해 여행에 초대하셨을 때3 고향 구미를 지나시면서 옛날 가난한 시절에 그곳에 초등 학교를 다니실 적에 고무신이 닳는다고 신지 않고 들고서 철도길을 따라 통학하셨다는 회고담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자라신 분이 후에 5 16 군사 혁명을 할 때에는 그 목적이 이 땅에 가난을 없애야 한다는 빈곤 퇴치의 결의가 거기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런 뜻을 지니신 대통령께서 노사 분규의 현장에 나가신다면 저는 반드시 노동자 편을 들고 그들의 고충을 들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저의 교회가 하는 것은 바로 대통령께서 하실 그 일입니다."
민청년 학생들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 대체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대화하였습니다. 그 밖에는 지학순 주교님을 그 밤으로 석방시켜 주실 것과 또 당시 보통 군법 회의에서 민청련 학생 사건으로 사형 언도를 받고 있었던 이철 씨(현 국회 의원)를 비롯한 다섯 명의 학생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지 주교님은 그 날 저녁으로 석방되시어 제가 직접 중정에 가서 모시고 나왔고 이철 씨와 다른 학생들은 며칠 후 국방부 장관 이름으로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습니다. 저의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그러나 이 만남이 가장 뜻 깊은 것이었고 여기서 제가 그분에게 말씀드린 것이 저 자신의 생각일 뿐 아니라 당시 교회의 뜻 있는 분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본 정신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현실 참여를 하게 되는 이유는 1960-1965년에 있은 가톨릭 교회의 최고 종교 회의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있습니다. 이 공의회는 요한 23세 교황이 교회의 쇄신, 현대화를 부르짖으면서 개최하였고 그 다음에 이분이 작고하신 다음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4년간에 이어진 회의였습니다. 공의회의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교회는 비록 그 기원이 세상에 있지 않다 할지라도 세상 안에, 세상을 위해서, 즉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있고 따라서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는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의회의 이 정신은 공의회가 발표한 많은 문헌에서 드러납니다. 그중에서도 이 정신을 가장 잘 밝히고 있는 것이 `현대 세계 속의 교회의 사목 헌장'이라는 문헌입니다. 여기에는 인간과 사회, 국가의 개념과 역할, 정치, 경제, 문화 등 현대 세계의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문헌은 시작의 말로서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듯이 세상과 인간의 모든 문제, 특히 가난과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의 문제에서 그리스도인은 결코 무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마치 자신의 문제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교회가 왜 지난 세월, 군사 독재 정권 아래서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사회 참여의 근원적 이유는 이미 말씀드린 데서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만 그것은 결국 인간을 위해서입니다. 앞에 인용한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에서도 천명하고 있듯이 "인간은 구원되고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물질 위주 속에 인간 발전 제자리 교회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우주 만물 가운데서 가장 존귀하며 따라서 세상 모든 것이, 정치, 경제, 학문과 과학 발전 등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때문에 이 인간은 정치나 경제의 주체여야 합니다. 결코 그 객체나 도구로 전락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인간을 소중히 인식하는 이유는 물론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에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구원하십니다.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인간입니다.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는 무엇이냐?" 역시 인간입니다. 이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죽고 망하는 것이 아니요 인간이 살고 당신과 같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 존엄성과 인간 평등의 근본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아버지이시요 모든 인간은 그 자녀로서 서로 형제 자매 됩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 속에 살며 서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 인류가 민족, 인종, 피부색, 그 모든 차별을 넘어서 하나의 사랑의 공동체, 인류 가족을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런 인간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에 위배되고 인간의 삶의 목적에 위배되는 반인간적, 반인륜적인 모든 것을 배척합니다. 교회가 인간의 기본 권리와 사회 정의를 위해서 나름대로 희생을 치러 가면서도 노력하는 근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먼저 이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본래 하느님의 아들이시요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신데 인간을 위해서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사람이 되어 오셨고 죄에 물든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곧 인간이요 인간은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우리가 복음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와 병자들, 죄인으로 천대받던 모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모든 이를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병고에 신음하는 이들을 다 고쳐 주었습니다. 그 치유의 힘은 마술과 같은 것이 아니었고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병자와 하나 되어 그의 고통을 나누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구원자'라는 그의 교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아무런 예외 없이 누구나 그리스도께 구속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을 아무런 예외 없이 누구나, 심지어 본인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당신에게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전적으로 인간을 위해 자신의 삶, 전 존재를 바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인간은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교회의 길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회 참여의 근본적 이유입니다. 이 물질 만능의 시대에 참으로 요긴한 것은 인간 존중입니다. 인간 존중, 인간에 대한 참사랑이 모든 면에 걸쳐 요구됩니다. 저는 1972년 3월 `창조'지에 평화를 위한 기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그 전해 성탄날 대연각의 큰 불이 있고 그 때문에 백수십 명이 희생되었으며 그중에서 몇 십 명이 대낮에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죽는 처참한 광경을 보았을 때 그것은 근대화의 상징처럼 솟아 있는 고층 건물, 문명의 탑 위에서 떨어지는 인간 추락사같이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인간 실존이라면 과장인가?"라고 물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있고 경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경제가 있고 인간이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경제 발전이 신앙처럼 숭상되고 있다. 건물만이 아니라 저 길, 저 건널목, 저 언덕, 저 강, 저 다리… 어느 것 하나도 인간 생명 존중의 손길이 조금만 더 닿았더라면 그런 사고, 그런 참사는 미연에 방지될 수 있었으리라는 한이 너무나 크다. 더 나아가 우리의 정치 체질과 사회 구조가 전근대적 폐쇄성을 탈피하고 혁신된다면 오늘과 같이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서 참된 인간 구제가 시작될 텐데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크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물질 우위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다." 이 글을 쓴 지 23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지난 23년간 물질적 발전은 크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발전은 거의 제자리걸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은 생명이 희생된 도시 가스 폭발 사고 성수 대교 붕괴, 삼풍 백화점 붕괴 등의 사고를 보고 이를 더욱 실감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물질에 사로잡혔는가는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디서 찾을 것인지 함께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1995. 11. 23. 서울대 국제 세미나실)
1) 이 무렵 가톨릭 농민회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함평 고구마 사건이 일어났고 79년에는 당시 큰 사건으로 부각된 오원춘 사건이 안동 교구 영양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은 가톨릭 농민회 영양 청기 분회장이었던 오원춘 씨가 당국이 권한 감자를 심었기 때문에 780여 만 원의 손해를 보게 된 것을 많은 농민들은 처음에는 항의하다가 당국의 회유에 넘어 가서 청구 소송을 포기하였고 오원춘 씨만은 이를 기어이 관철하여 150만 원의 피해 보상을 받아 내는 데 성공하였고 이것을 가톨릭 농민회 기관지 `파종'에 글을 써 발표했고 사제들의 모임에서도 그 내용을 발표하여 당국의 미움을 크게 사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979년 5월 5일에 오원춘 씨는 괴한들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 납치되어 울릉도까지 끌려가게 되었다. 이것이 사건화되었는데 당국은 오원춘 씨가 여자 문제도 있고 해서 울릉도로 휴가 갔다 온 것이라고 하고 사제단이 오원춘 씨로부터 직접 들은 것으로는 분명히 납치였고 또 이 내용을 오원춘 씨는 `양심 선언'으로써 납치된 것이 진실임을 고백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의 진실 여부를 두고 처음에는 지역적으로만 알려진 문제가 삽시간에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어서 어느 것이 진실이냐, 납치냐 아니냐를 가리는 법정 투쟁으로까지 옮겨졌고, 교회와 정부 당국은 정면으로 대결하는 양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런데 오원춘 씨는 양심 선언과 사제들의 면담 또는 변호사와의 면담에서는 분명히 납치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만큼 거짓 없는 고백을 하였는데, 법정에 서면 완전히 정반대로 검사의 말에 "네", "네"로 순응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법적으로는 지고 말았다. 오늘까지도 어느 편이 진실이냐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원춘이라는 이는 무슨 연고인지 내적으로는 납치가 진실이라고 하면서 이를 밖으로 확실하게 증언하지 않았다.
2) 아주 괴로웠던 경우 중 하나를 말씀드리면 지학순 주교님이 처음에 구속되었다가 제가 대통령과 면담을 하고 그 날 저녁으로 풀려 나셨는데 며칠 후 당국이 지 주교님을 다시 가택 연금 아래 두었고 이것이 그분을 자극하였습니다. 이 때 어떤 젊은 변호사가 지 주교님을 좀 부추겨서 군사 재판을 거부하고 `양심 선언'을 발표하여 정면 대결할 것을 강력히 권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지 주교님으로부터 상의를 받고 분열을 초래할 염려가 있어서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변호사가 지 주교님을 민주화의 투사로 내세워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분에게 정면 대결을 강력히 권하는 그 말씀에 지 주교님은 더 기울어져 있고 저는 그것이 지 주교님의 수감은 물론이요 교회 안팎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자제하여 줄 것을 요청하다가(그럴 때에 중앙 정보부는 어떻게 나올지, 그들은 그들의 두뇌와 장비 모든 것을 동원하여 교회를 괴롭힐 텐데 우리는 가진 것이라고는 양심밖에 없는 것을 생각하다가) 결국 지 주교님한테 양심대로 하십시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5 18 광주 항쟁 때가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87년 6 10 항거 때는 농성 중인 학생들을 구금 또는 해산시키기 위해 공권력 투입이 확정된 것을 정부 고위 관리가 제게 전하러 왔을 때, 그렇게 한다면 맨 먼저 내가 거기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신부님들이, 그 뒤에는 수녀님들이 있을 것이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 때문에 공권력 투입이 철회되고 수일 후 학생들은 무사히 자진 해산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6월 19일 우리는 감사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3) 제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것은 이보다 앞서서 청와대 식사 초대로 한 번 만났고 다음은 진해 해사 졸업식에 초대되어 함께 기차로 진해까지 간 것 두 번이었고 그 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이고 대화다운 대화는 없었습니다. 특히 72년 봄 진해 갔을 때에는 기차 안과 진해 공관에서 함께 식사한 시간 등 무려 11시간을 마주 앉아 있었지만 제게 말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았고 혼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처음에는 기회를 주면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을 속으로 취소하고 오늘은 듣자 그리고 이분이 어떤 분인지 성격과 함께 통치 이념이 무엇인지 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주로 듣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 때 그분 말씀, 태도, 그분이 개진하는 경제 발전의 구상, 그 때 막 시작한 새마을 운동, 4대 강 개발 계획 등을 들으면서 이분은 스스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즉 장기 집권을 하리라는 것을 나름대로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제가 이분으로부터 받은 인상은 그것이 식목일 다음날이어서 헐벗은 산에 대한 이분의 남다른 관심을 볼 수 있었고 또 한 역을 지날 때 플라타너스나무가 전지된 것에 대하여 이분이 일으킨 강한 반응을 보고 이분은 좋게 말해서 우국지사이고 이 강산 구석구석,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까지 관심이 안 간 데가 없으며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자신이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집착이 강한 분이 아닌가, 그래서 더욱 이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를 이루기까지 물러날 사람이 아니다라는 나름의 판단이 섰습니다. 다음날 저는 진해를 떠나 혼자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런 생각 때문에 걱정스럽고 대단히 우울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