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훈크럽(총무 고정애)회원 100여명은 10월 27일 철원 최전방 백골부대 멸공 OP, 범종각, 금강산 철길, 철원평화전망대, 월정역사를 돌아보는 하반기 문화유적 답사행사를 가졌다. 철의삼각지대로 잘 알려진 철원지역은 특히 '피의능선'등 6.25당시 격전지로 유명하며 백골부대가 대승을 거둔기록이 있다. 필자의 경우 때마침 6.25 참전영웅들의 수기를 모아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를 출판하고 증조부 진재 정혼공이 고종조 김화현감 겸 철원진관을 지낸 분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참고로 이날 답사한 안보현장 몇곳을 소개한다.
* 멸공 OP
멸공OP는 우리나라 최전방 OP. 녹슨 철조망 너머 실개천처럼 흐르는 한탄강을 건너면 그리 높지 않은 산등성이에 우리 군 GP가 있다. 외형상 보기에는 평온한 듯 해 보이지만 남방 한계선 2km, 북방한계선 2km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처하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곳이다.
“멸공OP”에서는 북한군의 움직임을 “일거수일투족” 까지 관찰할수 있고 이곳 인근에서는 몇해전 영화 “고지전”과 “진짜 사나이”를 촬영 한 곳이기도하다.’
* 멸공 OP에서 관훈크럽 회원들
*멸공 OP 범종각 앞에서 필자
*백골부대의 상징 백골상을 뒤로하고 필자
* 금강산전기철도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정연리에 위치한 “끊어진 금강산전기철도” 는 6‧25이전에는 철원 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동철원, 동송, 양지, 이길리역)을 지나 6번째 “정연역”에 있는 구간. 철원에서 정연리 까지는 18km인데 오랜 세월 사용을 안 해 철도가 녹슬어 있다. 철빔에는 다리 전체 구간에 걸쳐 “끊어진 철길! 금강산 90킬로”라 흰 글씨가 씌어져 있다.
* 백골부대(제3보병사단)
백골 부대의 전신은 서북청년단인데. 그들은 북 쪽에서 공산세력에 의해 재산과 가족을 잔혹하게 잃거나 탄압당하여 남한으로 넘어온 극단적 반공주의 단체였다.
1947년 12월 1일에 부산에서 조선경비대 3여단으로 창설되었다. 사단으로 승격 된 것은 1949년 5월 12일이다. 애칭은 원래 사자부대였다가 백골부대로 변경이 되었는데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공산당의 만행에 참고 견디다 못해 월남한 서북청년회 출신 청년들이 자진 입대하여 주축을 이룬 당시 수도사단 소속 제18연대 병사들이 죽어서 백골이 되더라도 공산당과 싸워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의미로 철모에 백골을 그려넣었고 이 제18연대를 백골부대로 불렀다. 그러다 1950년 12월 제18연대가 흥남 철수 작전 때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서 3사단으로 배속되었고 6.25 전쟁이 끝나고 아예 사단 애칭을 사자부대에서 더 전투적인 이미지의 백골부대로 변경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18연대는 1948년 11월 20일 3여단 예하부대로 포항에서 창설되어 활동을 하다가 1949년 8월 수도사단으로 예속이 변경되었다가 원산 탈환 이후 1950년 12월 15일 수도사단(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예하의 제26연대와 임무 교대를 하면서 현재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한국 전쟁때는 서울과 대전 방어선에서 주로 공병 여단을 끼고 사수전을 벌였다. 22연대는 한만국경선인 혜산진을 최선봉으로 입성하였고, 23연대 3대대 10중대 3소대 2번 기준병이 38선을 전군 최초로 돌파하였으며, 이날을 기념하여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다.
당시 6.25시절 서북청년단은 18연대로 참전하여 자신들의 전투모에 '죽어 백골이 될지라도 고향을 되찾겠다'라는 의미에 백골을 새겼으며 이후 백골부대의 전신이 되었다고 한다.
* 제3보병사단(第三步兵師團, The 3rd Infantry Division):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에 위치한 대한민국 육군의 보병사단 중 하나. 이 사단의 상징이자 애칭은 백골부대(白骨部隊)이며, 경례구호는 백골이다. 이 부대 또한 삼청교육대로도 사용되었다. 2020년 12월 종전 연대급 부대는 여단급으로 승격했다
* 철원평화전망대
철원평화전망대는 강원 철원군 동송읍 중강리에 위치해 있는 대한민국의 전망대로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중부전선의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며 제2땅굴 등 한국 전쟁과 관련된 전시물과 비무장지대 사진, 모노레일 등이 갖춰져 있다.
* 피의능선
김화, 양양, 춘천 사이에 위치한 피의 능선은 'xx의 능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부분의 고지처럼 미국인 종군기자들에 의해 붙은 이름으로 당시 피의 능선에서 죽어나가던 국군, 미군 병사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싸우는 곳의 이름을 모른 채 죽어갔다. 피의 능선은 미 8군 입장에서 그리 중요한 위치는 아니었지만 공산군에게 아군의 측면을 노출시킬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미군은 국군 제5보병사단, 미 육군 제2보병사단을 동원해 공격에 나섰고 지옥도가 펼쳐졌다.
1951년 8월 17일에 국군 5사단을 선봉으로 시작된 피의 능선을 향한 공격은 몇 번이나 북한군의 끈질긴 방어에 격퇴당하면서도 8월 25일, 기여코 고지를 확보했으나 북한군의 역습에 다시 고지를 빼앗겼다.
27일부로 완전히 전력이 소진된 제5사단과 임무를 교대한 미 육군 제2사단 9연대는 4일간 별다른 소득 없이 소모전을 벌이다가 게일롤 비숍 중령 휘하 1대대를 투입해 최후의 공격을 준비했다. 1대대는 공격 전에 충분한 휴식과 정비를 취한 뒤 목표인 773고지와 940고지로 행군했고 비숍 중령은 38연대가 며칠 전에 점령한 고지에 대대 지휘고와 관측소를, 관측소와 773고지 중간 지점에 대대가 보유한 박격포를 방렬시켜뒀다.
1대대의 선두에 선 찰리 중대는 773고지 200m 전방에서 기습적인 북한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았고 이 공격으로 중대장 올랜도 캠피시 대위와 소대장 1명이 부상당해 공세 시작과 동시에 지휘 공백이 생겨버렸다. 재빨리 다른 소대장이 지휘권을 인계받았지만 찰리 중대는 중대 전체가 고지 정상에서 자신들을 빤히 내려다보는 위치에 단단히 구축된 벙커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중대원들의 소총과 기관총 벙커에 별 위협이 될 수 없었으며 총류탄도 튼튼한 벙커를 부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찰리 중대가 멈춰서자 비숍 중령은 찰리 중대의 후방에 있던 베이커 중대에게 곧바로 찰리를 초월해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대대 지휘소에 있던 정보장교 찰스 말라드 중위에게 찰리 중대를 지휘하라면서 그를 773고지로 보냈다.
거기에 사계가 제한되어 효과적이지 못하던 기관총, 무반동총 사격을 개선하고자 비숍은 거의 모든 기관총과 무반동총을 전방으로 추진시켜 사격지원진지에서 사격을 가하도록 했고 이 덕분에 다수의 북한군 벙커가 무력화되면서 미군의 공격은 다시 진행될 수 있었다. 찰리 중대를 초월한 베이커 중대는 이제 773 고지의 정상을 눈 앞에 뒀고 북한군과의 백병전에 대비한 1소대장 조 버켓 중위는 부소대장과 분대장들을 모아 명령을 하달한 뒤 조심스럽게 고지 정상을 향해 접근했다.
버켓 중위는 자신의 부하 22명 중 16명이 신병이라는 점 때문에 직접 북한군 참호로 접근해 수류탄을 던지는 등 소대를 전두지휘했지만 어느새 곧 문제가 발생했다. 계속 점검해온 워키토키가 갑자기 고장나는 바람에 버켓은 이제 본대와 연락을 할 수도 없었고 어물쩡거리던 신병 몇 명이 북한군이 던지는 수류탄에 부상당한데다가 우회해온 버켓 특공조의 존재를 파악한 북한군이 되려 공격해오자 꼼짝도 못한 채 전멸당할 위기에 처했다.
통신이 전혀 안 되는 상황이었으나 버켓 중위의 위기를 용케 눈치챈 베이커 중대장 에드워드 클지조위스키 대위는 중대의 자동소총수 3명을 버켓 중위의 위치로 올려보내 이들의 지원을 받은 버켓 소대는 북한군의 역습을 물리쳤다.
* 월정역
월정역(月井驛)은 서울에서 원산까지 가던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다. 현재 월정역은 남한에서는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는 역이다. 남방한계선에 근접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철원안보관광의 대표적인 경유지이다. 현재는 객차 잔해 일부분만 남아 있는데, 열차의 앞부분은 6.25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후퇴할 때 가져가고, 남아있는 것은 뒷부분의 객차와 화차의 일부이다. 이곳에 가면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염원을 담은 팻말과 함께 분단된 민족의 한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경원선의 건립은 아주 특별하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주민들을 강제동원하고 당시 러시아(구소련)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인을 고용하여 건설하였다. 개통일자는 1914년 8월 16일이다. 이 철도는 강원도 내에서 제일 먼저 부설되었는데 서울 ↔ 원산간 221.4km를 연결한 산업 철도였다. 철원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원산의 해산물, 서울에서 생필품 등을 수송하는 역할을 했다. 현재의 월정역사는 철원안보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복원하였다
* 죽어 밤하늘의 달이 된 효녀 동상
월정(月井)은 달 월(月)자에 우물 정(井)자를 쓴다. 우리말로 하면 ‘달우물’이 된다. 밤하늘을 밝히는 달과 우물이라는 생명수가 만났다. 또 달은 풍요를 뜻하니 그보다 더 나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달우물 전설에는 아주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아주 먼 옛날 월정리 어느 산골에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홀아비와 그를 지성으로 봉양하는 딸아이가 살고 있었다. 딸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병이 깊어지자 병을 낫게 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노력하였지만 모두 허사였다. 첩첩산중에서 오로지 아버지에게 의지하여 살던 처녀는 앞길이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처녀는 예전에 정월 대보름날이나 한가위 때 아버지가 달을 향해 두 손 모아 빌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딸아이가 곱게 커서 좋은 남편을 만나서 잘살기를 매번 빌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녀는 마지막으로 밤하늘을 밝히는 달님께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빌기로 했다. 처녀는 지극 정성으로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밤마다 달님께 빌었다. 월정리 역전엔 그 효녀 동상이 있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