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뾰족뾰족 새 순이 돋았네요. 사람들 손길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일까요?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했습니다.
ⓒ 이승숙
더덕 심자 내려준 비, 고맙기도 해라
어제 아침 식전에 더덕 모종을 심었는데 고맙게도 오늘(9일)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맞으면서 여리디 여린 더덕 모종들이 빳빳하게 키를 돋우고 있다.
더덕은 올해 들어 다섯 번째로 심은 작물이다. 상추와 치커리 씨앗을 4월 초에 뿌렸고 지난 주 초엔 고추 모종을 열대 포기 심었다. 고랑을 타서 감자도 좀 묻었고 옥수수도 드문드문 심었다. 그리고 다섯번 째로 심은 게 더덕이다.
8년 전에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왔다. 텃밭이 딸린 집을 구하자 우린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온갖 것들을 심고 뿌렸다. 이사 온 첫 해에 심고 뿌린 것들을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우리 부부 양 손을 다 합해도 모자랄 정도로 많다. 농사라면 부모님들이 짓는 걸 어깨 너머로 본 게 다였던 우리 부부인데 무슨 욕심이 그리도 많았는지 깨에다 콩에다 팥에다 하여튼 없는 것 없이 다 심었다.
그 해 한 해 딱 그렇게 원 없이 농사 지어보고 그 다음 해부터는 그렇게 온갖 것들을 심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손이 많이 안 가는 것들을 골라서 심었다. 봄이면 감자를 최우선 순위로 심었고 가을 곡식으론 고구마를 최고로 쳤다. 고구마와 감자를 선택한 이유는 우선 손이 많이 가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두 가지 다 심어만 두면 캘 때까지 별다르게 돌보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니 우리 같은 반거들충이 농사꾼에게는 딱 맞는 작물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시들해졌다. 그까짓 거 그냥 한 박스 사먹고 말지 하는 깜냥으로 올해는 묵밭으로 땅을 그냥 놀려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봄이 오자 다시 경작 본능이 꿈틀댔다. 그래서 이거 저거 또 심고 뿌리고 있다.
▲ 제피 새순입니다. 날을 며칠 늦췄더니 순이 조금 억세졌네요.
물괴기국에는 반드시 제피 가루가 들어가야
지난 연초에 중국을 여행한 일이 있었다. 중국여행 다녀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중국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못 먹겠다는 것이다. 이상한 향 때문에 도저히 입에 안 맞더란다. 그래서 나도 내심 걱정했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중국에 가니 여기가 바로 요리의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는 음식마다 입에 딱딱 맞았다. 남들이 이상해서 못 먹겠다고 한 향들은 우리가 좋아하던 바로 그 향들이었다.
우리는 고수 나물을 좋아한다. 고수는 강화도에 와서 처음 먹어본 야채인데 특이한 향이 나는 야채다. 중국 요리에는 고수가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고수를 안 먹어본 사람들은 그 향 때문에 음식이 입에 안 맞았던 거다.
우리도 처음에는 고수를 먹지 못했다. 삼겹살을 상추에 싸 먹을 때 강화 사람들은 꼭 고수를 한두 줄기 넣어서 같이 쌈을 싼다. 빨래비누향 같기도 한 그 이상한 냄새 때문에 타지 사람들은 고수를 외면한다. 하지만 한번 맛 들이면 그 향 때문에 또 찾게 되는 게 바로 고수 나물이다.
강화도에 '고수'가 있다면 경북 청도에는 '제피'가 있다. 다른 지방에서도 제피를 요리에 이용하겠지만 청도 사람들만큼은 제피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청도에서는 물괴기국(민물고기국)에는 반드시 제피가루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피가루를 치지 않은 물괴기 국은 국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제피가루를 좋아한다.
그리고 김치를 담글 때나 겉절이를 할 때도 제피가루를 살짝 넣기도 한다. 또 봄에 나오는 어린 제피 순을 따서 장아찌를 만들기도 한다. 제피이파리 장아찌는 청도가 고향인 사람들이 오매불망 그리워하고 흠모해 마지않는 음식인 것이다.
▲ 안개 낀 이른 아침에 제피 순을 땄습니다.
새로 돋은 새순으로 장아찌 담아볼까?
청도 여자를 마누라로 둔 덕분에 남편도 이제 제피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 되었다. 남편은 제피를 처음 만나던 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지금은 되레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결혼한 그 해 겨울이었다. 친정에 다니러 갔더니 작은 집에서 초대를 했다. 새로 맞은 질서에게 밥 한 끼 해먹이고 싶었던 작은 엄마는 물고기국을 끓여서 우리를 불렀다. 청도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소괴기국을 끓여주는 게 아니라 물괴기국을 끓여준다. 그것이 가장 큰 환대인 것이다.
밥상을 두 개나 펴고 우리 친정집 식구랑 작은 집 식구가 모두 둘러앉았다. 차린 음식은 많지 않았지만 한 가지 한 가지가 다 정성을 들인 것들이었다. 물고기국이 그렇고 물고기 조림이 또 그랬다.
처음 보는 물고기국이라 남편은 조심스런 마음으로 윗사람들 하는 거를 눈치껏 보면서 따라했다 한다. 다들 무슨 가루를 한 숟갈씩 떠서 국에 넣더란다. 그래서 남편도 따라서 한 숟가락 푹 퍼서 국에 넣었다고 한다. 그때 우리 작은 엄마가 약간 염려스러운 눈길로 질서가 될 사람을 쳐다보더란다. 하지만 남편은 그 눈길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물고기국에 가루를 넣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서 한 숟갈 입에 넣었는데 입 안에 폭탄이 터졌다고 한다. 입안이 마치 불이 난 듯 화하게 타오르더란다. 눈물이 쑥 빠지게 화한 그 맛에 진짜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한다.
"김서방, 잡숫겠능교? 국그릇 이리 주보이소오 다른 거로 바꿔 주께."
작은 엄마가 우리 남편의 국그릇을 받아서 새 국으로 떠주더란다. 그래서 난처한 순간을 넘겼다고 한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그때 도저히 못 먹겠던 그 제피가루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입에 살살 배어오더란다. 화~하던 그 맛이 자꾸 생각이 나더란다. 그 이후로 남편은 제피 마니아가 되어버렸다. 깊고 오묘한 제피의 세계에 빠져 버린 것이다.
▲ 간간한 소금물에 두어 시간 동안 담가뒀다가 건져서 살짝 씻어줍니다. 그리고 물기를 뺀 다음에 고추장에 박아두면 장아찌가 됩니다.
흰 밥 위에 얹어먹는 제피잎 장아찌
해마다 가을이면 남편은 제피열매 얻는 걸 우선순위 일위로 해놓는다. 그렇게 매년 처가에서 제피열매를 얻어 나르더니 종래에는 제피 나무를 캐 와서 마당 여기저기에 심어두기까지 했다. 청도에서는 그렇게 향이 강하고 화하게 맵던 그 제피가 이상하게 강화도 우리 집에 와서는 제 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애지중지하며 제피 나무 돌보기를 애첩 다루듯 한다.
봄이 되자 제피 나무에도 새 순이 돋았다. 남편은 새 순을 보자 벌써 입맛을 다신다.
"여보, 올해는 제피 이파리 따서 장아찌 한 번 담아보자. 제피 열매야 처갓집에서 얻어오면 되지 뭐. 우리는 순 따서 장아찌나 실컷 먹자."
그래서 안개가 낀 어느 날 아침에 제피 순을 따기 시작했다. 며칠 안 살펴본 사이에 잎이 많이 자라 있었다. 연한 잎과 순으로 해야 맛이 있는데, 그래도 이게 어디냐 하면서 우리 부부는 괜히 신이 났다.
제피 순을 그냥 고추장에 박아 두어도 장아찌가 되지만 우리는 조금 짭짤하게 했다. 일단 제피 순을 간간한 소금물에 두어 시간 정도 담아 두었다. 그 다음에 건져서 슬쩍 씻은 다음에 물기가 다 빠지도록 한 나절 정도 햇빛에 말렸다.
▲ 제피잎으로 담은 장아찌 한 접시
물기가 다 빠진 제피 이파리를 고추장에 박아 둔다. 고추장이 좀 되다 싶으면 매실 효소를 조금 섞어줘도 좋다. 그러면 고추장 양념이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난다. 달콤하면서도 매콤하고 또 짭짤하면서도 개운하다. 그리고 입 안에 화~하게 제피향이 피어난다.
제 철에 나오는 순들을 따서 장아찌를 만들어 두었다. 두릅도 고추장에 박아두었고 참죽나무 순과 개두릅으로 불리는 엄나무순도 고추장에 박아 두었다. 비 오자 막 나오기 시작하는 표고버섯도 이 참에 장아찌로 한 번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다 든다. 그냥 고추장에 박아 두기만 하면 개운한 맛을 자랑하는 장아찌가 되는 것이다.
술자리가 있어서 늦게 퇴근한 남편은 집에 들어서자말자 제피 장아찌부터 찾는다.
"여보, 밥 조금하고 장아찌 조금만 주라. 맛만 한 번 보자."
흰 쌀밥 한 술에 얹어먹는 제피 장아찌, 텁텁하던 입안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듯 하단다.
색다른 입맛이 궁금해질 때면 갈무리해둔 장아찌들을 내놓으리라. 참죽에 두릅에 엄나무잎에 제피 이파리(잎) 장아찌까지 있으니 유명 한정식 집 밥상이 부럽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