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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사찰 소개
네팔과 다람살라의 규토사원 전통을 이어가는
북가주 규토재단 방문
라마 툽텐 된요 Ven. Thupten Donyo
글 제니 김 (본지 취재기자)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30마일 떨어진
리치먼드 하이츠(Richmond Heights)에 있는
규토재단의 창건주 라마 툽텐 된요
된요스님Venerable Thupten Donyo)를 만났다.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다리를 지나 I-80동쪽 방향 새크라멘토와 버클리 방향으로 해안을 따라 달리다가 17번 출구로 빠져나와 약간의 언덕길로 올라간다. 예정된 시간은 오전 11시, 스님의 이전 약속이 늦어진 관계로 30분후인 11시 반에 인터뷰차례가 왔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사원의 둘레를 돌았다. 법당 입구의 대형 마니차(윤장대) 그리고 185개의 작은 마니차. 수미산 코라 (Kailash Kora)를 생각하며, 사원 오른쪽으로 한바퀴 돌았다. 좌우 마니차 배열 중 긴 배열-입구에서 왼쪽- 앞에 피크닉 밴치와 어린이 놀이 기구가 있다. 거기에 앉아서, 인터뷰내용에 대해 상의하고 있는데, 그때 한 쌍의 남녀가 코라를 돌며 지나가고 있었다. 11시 반이 되어 법당이 있는 건물로 들어서니 된요스님이 반갑게 인사하며 사무실로 안내한다. 우리와의 인터뷰후에 연이어 다른 미팅이 있다고 하여, 곧바로 소개에 이어 한 시간 반동안 진행된 인터뷰에 들어갔다.
기 자 인터뷰 시간을 내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먼저 동석한 미주현대불교의 김형근 발행인을 소개합니다. 이어서 된요스님의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된요 스님 “이렇게 찾아 주셔서 반갑습니다. 저의 이름은 된(Don), ‘의미있는, 뜻’이며, Yo는 ‘~하다’는 뜻으로 합하여 ‘Meaningful’로 ‘의미심장한, 중요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저는 전혀 의미있는 라마가 아닙니다. 린포체(Rinpoche)나 툴쿠(Tulku)라는 경칭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일반 승려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티벳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셨으며, 저는 네팔에서 태어났습니다.
열두살 되던 1973년, 50년 전이네요.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신 링 린포체(Ling Rinpoche)아래에서 출가를 하였고,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 14세로부터 구족계를 받은지 23년이 되었습니다.”
기 자 스님께서는 언제 미국에 오시게 되었는지요?
된요 스님 “미국에 처음 발을 디디게 된것은 1988년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유명한 록 밴드, 그레이트 풀데드(Grateful Dead)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그룹이 저희들을 초대했어요. 1965년에 결성된 이 밴드는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완성하게 음반을 내고 콘서트를 열었는데, 1980년-여덟 스님,1985년-열두 스님, 1988년-수물 두 명의 스님들을 미국투어에 초대하였습니다. 저는 3번째 그인 22명 속에 들어 있었으며, 3~4개월 간 체류했습니다. 그들이 규토라마들을 초대한 이유는 티베트문화에 관심이 있었는데, 특별히 규토사원의 ‘딥트로트 챈팅(Deep Throat Chanting)’에 더 깊은 흥미를 나타냈습니다.
투어를 끝내고 인도에 돌아가 학교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기 자 저에게 오래전에 구입한 콤팩트 디스크(CD)가 있는데, 규토스님들의 챈팅이 들어있습니다.
‘Deep Throat chanting’에 어떠한 신비한 에너지가 있는지요, 예를 들어 부정적인 업을 정화하는 에너지에 대해 궁금합니다.
된요 스님 “부정적 카르마를 정화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규토사원은 탄트라 수행(Tantric Practice)으로도 유명합니다. 탄트라는 밀어(密語)의 의미인데 ‘리듬안에 말의 의도를 숨긴다’는 뜻으로 주요한 비밀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밀교수행전에 입문의례인 관정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그 절차없이 밀교수행을 한다고 할 때에는 구루(스승/지도자)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관상 후에도 어떤 언어나 단어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역시 비밀입니다.”
기 자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그럼 언제 다시 미국에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된요 스님 “1997년에 미국에 들어왔지만, 그 전에 호주에서 약 7-8년간 머물렀습니다. 멜본에서 영어를 배우며 지냈으며, 호주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지요.
호주 이전에 20여년간 인도에서 수도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에 미국에 들어왔는데, 돈은 없고 아이디어만 있었지요. 그래서 일하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인의 셔츠와 바지를 입고, 첫번째로 샌프란시스코에서 프랑스음식을 제공하는 식당(French Restaurant) 이었지요. 사람들이 “왜 머리를 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짧은 머리를 좋아한다’고 말했죠. 굳이 스님이다 라고 말하면, 다음 질문이 복잡하게 전개되니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수입이 별로 많지를 않아 그곳을 그만 두고, 친구에게 돈을 빌려 차를 하나 장만하여, 두번째 직장으로 배달직을 시작 했습니다. 자동차 부품 배달서비스를 했지요. 그러면서 돈을 저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주권도 없이, 호주 시민권자가 받는 관광비자만 있어서 비자를 연장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던차에 로스 엔젤레스 지역의 친구 연락으로 ‘롱 비치 다르마센터 Long Beach Dharma Center’ 에서 5년 짜리 종교 교역자 비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곳의 주지스님이 ‘규토 겔룩 센터 Gyuto Gelug Center’와 연결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쌓아 논 신용(credit)이 없었고, 직업등 이력이 부족하여 방이나 집을 구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두 세명의 스님들이 티벳인 친구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기 자 어떠한 인연으로 산호세에서 템플(사찰)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요?
된요 스님 “당시에 여러 조건이 미비하여 세를 얻기가 어려웠는데, 산호세의 한 베트남 신자가 티벳스님이 집을 구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집을 세 주었습니다. 당시에 한 달 월세가 천 칠백불이었습니다. 1997년에 첫번째 하우스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들어가 개조를 하고, 새로 페인트를 칠하고 프로그램을 시작하였습니다. 좌선과 기도등… 당시에 아직 템플허가를 받지 않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2000년에 정식 허가를 받았지요. 내년이 2025년인데, 정식으로 25주년, 큰 기념 행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하우스는 5년후에 ‘프리몬트 Fremont’북쪽 근처에 새집을 사서 두번쭻 템플을 세우게 됩니다.
그 후 10년간 멤버들이 늘어나고, 산세가 있는 곳에 전통적인 사원을 원하는 신자들이 많아져 부동산을 통해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기 자 어떻게 하여 현재의 ‘규토 사원 Gyuto Monastery’ 건물을 발견하게 되었는지요?
된요 스님 “새로운 부지에 새건물을 지을 자금이 넉넉치 않아 2010년부터 기존 매매물을 검색해가는 과정에서 이 건물을 찾게 되었습니다. 2010-2013년까지 부동산시장에 나와 있었고, 가격은 약 일백삼십만불($1.3Million) 이었으며, 폐가처럼 창문은 밧줄이 걸쳐져 있었지요. 대지 3 에이커(acre), 건평 7000평방피트(square feet)로 이미 종교법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건물이었습니다. 이 건물의 역사를 보자면 1960년에 처음에는 침례교회 건물이었다가, 1980-2013년까지 힌두 요가난다 그룹인 자아실현공동체(Self-Realization Fellowship)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네 명의 구매자가 오퍼를 넣은 상태였는데, 제게 거래협상에 대한 어떤 예감이 들어왔습니다.
건물주에게 구십구만(990,000)달러를 제안했지요. 왜냐면 4명이 오퍼를 넣었는데, 한 명은 아파트개발업자, 두 사람은 미국인, 그리고 저인데, 종교단체로는 제가 유일했던 거죠. 개발업자는 빌딩을 헐고 새로 짓는다는 계획으로 돈을 더 얹어 주겠다 했지만, 원래 종교단체자리가 상업적 주거단지가 될 경우 다시 공청회를 열어야 하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건물주는 빨리 매매를 성사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강력했다고 봅니다. 이미 3년이나 매물로 나와 있었고, 그 안에 무슨 하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라 건물주는 백만불까지 역 제안을 내렸지만, 저는 처음 오퍼가격인 구백구십만 달러에서 물러서지 않았죠. 그런데 낙찰이 된것입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올렸죠. What a blessing!”
기 자 정말 하나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전혀 돈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매입가격을 제안 하셨는데, 그 경위가 궁금합니다.
된요 스님 “건물주는 30일 에스크로 기간을 정하고 어떻게 그 돈을 마련할지 보여 달라고 했지요. 제게는 단지 삼백불($300.00)이 전부였지요. 은행에서는 제게 돈을 빌려 주지 않았죠. 제가 이미 개인 부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요. 지금은 모두 컴퓨터로 주소록이 되어있지만, 에전에는 주소록(address book-직접 그것을 보여주신다)에 모든 멤버들의 리스트들이 들어있는데, 한분 한분 전화를 하기로 했습니다. 매우 어려운 순간이었지요. 망설여지기도 하고... 어떤 분은 ‘예’ 할 수도 있지만, 어떤 분은 ‘아니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분 한 분께 전화 하 여 , 적 게 는 오 천 불 ($5,000)에 서 십 만 불($100,000)까지 2년간 무이자로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보시가 아닌 융자로… 전부하여 이백만불($2Million)이 필요했습니다. 당장은 건물값 백만불 그리고 수리및 리모델링으로 백만불. 어떤 분들은 ‘스님, 어떻게 우리들에게 다시 갚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지요.”
기 자 스님께서는 마치 회계사가 미리 재정계획을 마련하여 대비하듯이 거래를 하셨네요. 다시 갚을 방법으로 어떤 구상이 있었는지요?
된요 스님 “저에게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먼저 산호세의 첫번쭻 집을 매각하는 것입니다. 그 집은 모기지가 없었지요. 그동안 열심히 일하여 융자금을 다 갚아서 팔기로 하고 백만불에 시장에 내 놓았습니다. 모퉁이에 있는 0.5 에이커 땅에 3개의 방과 2개의 화장실이 있는 주택가의 집이었습니다. 10년전에 구입했던 것으로 약 50년된 건물이었죠. 특별히 대리석으로 장식된 근사한 집도 아니고, 안방도 없었지만, 특별히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현상태 그대로 (AS IS) 팔기로 했습니다. 마침 리치몬드 근처에 살고 있는 이사중의 한명인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그 집을 보자고 하더니 백만불보다 조금 하향조정하면 어떻겠느냐고 했죠. 하지만 저는 약간 고집을 부렸습니다. 왜냐면 저는 새 건물을 사기 위해 그 돈이 필요했고, 믿는 바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묘한 신비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승려나 비구니스님들이 살았던 장소에는 영적인 가치가 스며있다.’는..그래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가 않아서 자신을 믿었고, 에스크로 30일 기간 안에 구십구만불에 매각할 수 가 있었습니다. 인수금을 마련하여 은행에 넣었고, 구십구만불로 협상한
것에 대해 일말의 후회도 없이 모든 거래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두번째로는, 2년안에 갚기로한 빚을 갚는 방법이었어요. 1년 후에 멤버들에게 빌린 돈을 다 갚을 수 있었는데, 빌려준 신자들이 대부분 반만 돌려 받고, 나머지는 사원에 보시를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3만불 빌려준 사람은 1만 5천만 받고, 10만불 빌려준 사람은 5만불만 받고, 1만불 빌려준 사람은 전체를 보시로 주었습니다. 건물을 살 당시에는 보시를 받지 못했지만, 1년 후에는 보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진솔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변호사가 물었습니다. ‘된요, 어떻게 그렇게 빨리 할 수 있었어요? 예, 그것은 저의 빚이 바로 기부금입니다’. 빚과 그것을 갚는 과정- 거기에 저의 어려움이 있었지요. 저는 유명한 스님이 아닙니다. 그냥 보통 승려입니다. 화려한 삶을 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매우 성실하게 일하고; 식당에서 버스보이(웨이터의 조수)로 시작하여, 자동차부품 배달을 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그들에게 해줄수 있을지를…
저는 베이 지역인들에게 ‘훌륭한 다르마 센터’를 제공해주고 싶었습니다.”
기 자 매우 훌륭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전에 다큐를 만들었다거나, 만들 생각이 있으신가요?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것 같습니다.
된요 스님 “저의 승려생활의 배경은 규토사원입니다. 하지만 규토 본원으로부터는 일전도 받지 않고 불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규토사원은 모든 명예와 정기적으로 스님들을 보내주고, 여러 학자스님들이 오고가며 가르침을 전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작부터 깊이 숙고하여 경제적인 것은 제가 책임을 진다고 하나 그 외의 다른 것은 규토사원의 이름하에 하게 된것입니다. 만일 내 이름으로 이 사원을 세워서 경영하다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운영할 수 없을때, 과연 어느 누구가 이 사원을 계속해서 책임을 질 것인가? ‘개인의 명의로 되어 있을 경우와 큐토의 이름으로 되어 있을 경우를 생각해 보니, 규토사원에는 수많은 라마와 린포체, 게쉐들이 있어서 그들이 방문을 올 수 있고, 가르침을 펼 수 있지만, 내 개인으로 고집하여 하다가 죽어서 가고난 뒤에는 끝나는 일이 되고 말것이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의 가족도 여기에는 전혀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오직 규토사원의 이름아래 모든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구상과 아이디어 입니다.”
또한 스님에게는 세 가지 꿈이 있었다.
“첫째는 20년도 전에 산호세에서 처음으로 세들어 살때입니다. 작은집이라 오피스와 식당, 응접실(visitor room)을 차고에 만들고, 거실을 탬플로 사용하였는데, 10~15명이 앉을 수 있었습니다. 작은 부엌이 있고, 게스트룸을 침실로 쓁지요. 차고 천장이 단열재가 없이 지어져서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얼마나 추었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합판으로 천장을 덮었습니다. 그 때,
제가 다른 스님께 말하기를 ‘조만간 집을 살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믿지를 못하고, ‘돈도 없으면서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라고 말했죠. 그리고 ‘나는 머지않아 달라이 라마 존자를 이곳 베이지역에 모실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웃으며’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이어서 제가 말하길,’ 나는 제대로 된 진짜 사원을 지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웃기만 했지요. 우리의 현제 경제적 능력을 근거로 본다면, 어떤 자금 한푼도 없이 단지 한 생각(idea)일 뿐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1. 집을 구입한다(Buy a house) 2. 강연을 위한 달라이 라마 존자를 초청한다(Invite Dalai Lama for teaching) 3. 전통적인사원을 건립한다 (Build a real temple)에 대해서 말했죠. 그들은 믿지 않았지만…”
기 자 스님께서는 진정으로 구체적인 열망, 발원이 있으셨군요.
된요 스님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사람들이 뒤 따라 옵니다. 그러면 그들이 경제적 지원도 하고 필요한 돈도 빌려줍니다. 그러면 약속을 지켜야합니다. 이제 당신들께 말할 수 있어요. 우리는 빚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융자금은 다 갚았고, 더 이상 지불해야 할 대출금이 없습니다. 제가 죽음을 맞이 하더라도 더 이상 시장에 이 건물을 내 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두번째로는 달라이 라마 존자님을 2번 초청을 하여 이 지역에 모셨습니다. 세 번 초청을 하였는데 두번 성사되었습니다. 한번은 산호세에서 2007년에, 그 다음은 201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강연회를 가졌습니다. 2015년에도 초청을 하였지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세번째로 제대로 된 전통사원을 짓는 일입니다. 이미 설명을 했다시피, 건물을 빚없이 사고 고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곳에는 많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을 비롯하여 여러 보살상들, 마니차(Prayer Wheel)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이 상들을 조성하기 위해 기금마련을 시작했지요. 금박을 입힌 붓다상은 오만 달러, 관세음보살상 삼만달러, 작은 붓다상 만 오천 달러, 타라보살, 만 오천 달러 등, 네팔에서 오는 운송비만 해도 오천 달러가 들고, 작은상들을 위해 비행기 운송비만 해도 이만 달러가 들었습니다. 사원 주위에 185개의 마니차가 돌고 있는데, 각각이 오백십불($510.00)의 보시금으로 이루어졌으며, 한 마니차 아래에 네 명의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습니다.
건물의 크기는 법당과 대식당, 부엌과 대중 화장실이 있는 중심건물과 이 건물뒤에 주택이 있습니다. 이 요사채는 방 세개와 화장실 세개가 딸려 있으며, 방문온 스님들을 위해 사용합니다. 주 건물은 7000평방피트로 화장실 11개, 그리고 세탁장이 있으며, 대법당은 200명 또는 300명까지 수용가능합니다.
파킹장은 약 55대까지 기능하며 건물 앞쪽(20)과 뒤쪽(35-40)에 있습니다.
기 자 현재 등록된 신도들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된요 스님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 그룹, 아메리칸, 백인 그룹으로 기도나 예불의식보다는 명상이나 연구를 위한 불교철학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언제라도 그들이 오고 갈 때 어떤 참가비를 내야 하는 것은 없으며 법당에서 나갈 때 보시금을 넣습니다.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지요. 수표를 쓴다며는 알 수 가 있겠지만 거의 사용을 하지 않기 때문에 누가 내고 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아시아인들로 중국인, 베트남계, 그리고 한국인입니다. 아시아인들은 대부분 큰스님들이 방문하여, 입문식이나 관정을 주는 큰 행사를 할 때 주로 참여합니다. 중국인들은 산호세에서 대부분 거주하여 이 지역에는 많지 않습니다. 몇몇의 한국인이 있기는 합니다. 3년전 산호세에 절을 운영할 때, 김 비서가 한국인이었는데, 너무 멀어 여기에 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백인 남성이 비서로 일하고 있지요. 아시아인들은 주로 큰스님의 행사에 주로 참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르파(Sherpa): 티베트, 네팔, 부탄등 히말라야 지역으로 몽고인들도 여기에 포함합니다. 이들은 년중 네번의 큰 축제일에 모입니다. 네 번의 축제일은 새해맞이, 부처님 탄신일 (Saga Dawa Festival), 달라이 라마 탄신일, 그리고 라마 쫑카파 열반일(겔룩파 창시자)에 방문합니다. 또한 가족중 누군가 임종을 맞이 할 때, 또는 아프거나 할 때도 방문을 요청합니다. 그럴 때에도 어떤 보시금이나 회비를 받지 않습니다.
기 자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과 운영기금은 어떻게 수립되어 있는지요?
된요 스님 “규토재단의 좋은 점은 회원제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멤버라고 부릅니다 (음…). 지불하거나 하지 않거나, 요금제가 없습니다. 모든 프로그램은 무료이며, 회비가 없으니, 법문강의, 명상, 예불의식, 특별기도등 모두가 무료입니다. 신도들은 자발적으로 보시를 합니다. 이 주소록 (보여 주며)에 이름들이 있지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진행중인 프로그램이라 한다면, 혼합된 여러 민족 그룹이 있어서 가족단위, 각 가정, 소수민족 공동체 또는 사적인 개별 예식을 베풀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는 필요에 따라 소액의 보시금을 받으나 액수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도들이 요청하면 기부금을 받으며, 사원내에서나 외부에 나가서나 매 한가지입니다. 두번째로는 신도들이 사원을 방문할 때 소액의 보시금을 내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온라인으로 성금을 내는데, 한달에 삼십불($30.00) 정도 정기적으로 내는데, 15명 미만입니다. 네번째는 월급 지출이 없습니다. 자원봉사제도 역시 없습니다. 다섯번째는 단 한사람의 고용된 직원이 있는데, 숙식을 제공하며, 최저임금이 책정되어 있습니다.
여섯번째는 대청소가 필요할 때 가끔 자원봉사자를 부르지만, 힘들거나 막일을 해야할 경우에는 대부분 일꾼들을 고용하여 씁니다.
기 자 이 사원을 위해 어떤 큰 후원자가 있는지요?
된요 스님 “단지 소규모의 그룹이 있는데, 마하깔라 그룹(Mahakala group)이라는 기부기금 그룹으로 10~11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일회 기부금 일만 달러을 함께 모아 ‘긴급자금’ 용도로 쓰입니다. 이 기금은 까르마파 존자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구상을 했던 것으로 일회 기부금자 백명을 목표로 세웠지요. 아직까지 달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기부자에게는 간덴 트리파* (Ganden TripaSpiritual leader of Gelug school, 영적스승, 쫑카파대사로 부터 이어져오는 계보) 상을 줍니다. 감사하는 의미로 큰스님이 방문할 때, 기부자에게 인증하는 뜻에서 수여합니다.
*.(/1st GT-Je Tsongkhapa(1357-1419), founder of Gelug, now 104th-lineage /must enter either Gyuto or Gyume Tantric College, 7yr tenureGeshe)
저는 평범한 승려이지요. 린포체나 툴쿠라면 백만불 보시받는 것은 매우 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을 해야했지요. 사람들이 저를 믿어 주어야 하니까요.”
기 자 20여년간 불사를 계속 해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었나요?
된요 스님 “먼저 교대로 미국에 비자를 받아 들어오는 규토사원의 라마들의 이민국 스토리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매 2년마다 한 두명의 라마들이 교대해서 인도로 부터 들어오는데, 지금까지 5분의 라마들이 왔습니다. 한 분의 비자가 끝나면 다른 분이 들어오는 거죠.
그때마다 이민국과 줄다리기를 합니다. 이민국 직원은 신청서에 따라 종교비자를 주기에 적법한 기관인지를 조사하는 거죠. ‘초청받은 이들의 경비를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규토재단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습니까? 회원들은 얼마나 되며, 기부금은 얼마나 됩니까? 은행거래 내역서를 보여 주세요. 제가 모두가 회원이라고 하니까,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지금 그 신청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만나봐야겠습니다. 그래서 달력에 표시되어 있는 내근/외근표시를 보여주며, 지금 그는 오늘 아침 산타크루즈에 있는 신도집에 예불의식을 봉행하러 나가 있다고 그의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했지요. 진솔하게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은행거래내역서와 사실을 밝혀주니 비자를 승인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려웠던 일은 사실은 미국생활의 기본 살림살이에 적응하는 일입니다. 미국에 들어와 30여년을 사는동안 수많은 기계들을 만져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배우면서 사용법을 익혔는데, 그것은 마치 정글에서 살던 타잔이 도시로 나와 사는 것과 같았지요. 산골 수도원에서 살다가 도심속의 사원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나 인도에서 새로 라마들을 초청할 때마다 그 분들을 기계다루는 방법부터 훈련을 시켜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원에 진공청소기(Vacuum Cleaner)가 열 한대가 있는데, 여섯대 만 제대로 작동합니다.
법당이나 복도의 카펫을 청소하는데, 핀이나 어떤 유리나 금속 조각이 있어도 미리 집어내지 않고 청소기를 들이대고, 카펫 술의 높이에 따라 조절을 하지 않고 쓰다 보니 쉽게 망가집니다. 부엌의 디스포저(음식 찌꺼기 처리기)에다 아무 음식이나 넣고 돌리니 쉽게 고장이 나고, 전자레인지에다가 스푼(숫가락)을 넣어 돌린 바람에 웃지 못할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특히 세탁기를 돌리는 데는 세제의 종류와 락스(Clorox)를 잘 구별해서 넣어야 하는데, 영어를 모르니 대충하다가 법복의 색깔이나 모양새를 다 망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원 잔디깍기기계도 정기적으로 오는 정원사가 잘 다루고 있으나, 부지가 넓다보니 직접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자그마한 일에도 시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부르거나 그때 마다 봉사자를 부른다는 것은 비효율적이어서 제가 직접 기계를 다루며 일을 합니다. 새로 오는 라마들은 이런 기구들을 전혀 다루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2년마다 반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살림을 어떻게 하는가, 이것이 큰 관건이 되지요. 즉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이것들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하고 실습을 해야하는 부분이지요.
더군다나 그들이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식료품점(Grocery), 홈디포(Home-Depot), 코스트코(Costco)에 가야 할 때도 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더하여 사무실 업무도 직접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미국인 관리자를 고용할 경우, 월금을 많이 주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스님들은 거덜이 나지요. 그들은 마치 사업체 운영하듯이 하며, 아끼는 것이 몸에 베어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저의 첫번째 지부인 ‘미네소타Minnesota’의 Gyuto Wheel of Dharma Monastery(1992년 호주에 머무를 때 세움)에 미국인 관리자를 두었지요. 당시 2천불을 매달 지불하였는데, 거의 사원이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어느 곳에도 관리자를 두지 않습니다. 이유로는 미국인 관리자는 최고 품질의 설비나 기계를 구입하고, 고급생활을 원하며, 밖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모든 아이디어가 다 나오며, 백만불에 대해 쉽게 멋지게 말하나 실제적으로 백만불을 만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유기농 식품을 먹기 때문에 모든 것을 비싸게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명상프로그램이나 안거프로그램은 비쌀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직원과 관리자의 임금과 그들의 상류층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기 때문에 비싸게 책정이 되고 참가자는 그것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저는 모든 장비나 기구들을 크랙 리스트(craig’s list)나 굳윌(Goodwill)에서 구입합니다.
중고의 물품이라해도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이곳에 상주하는 스님들이 직접 일을 합니다. 검소하고 겸허한 생활을 실천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큰 월급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할 수 있습니다. 티벳불교 방식과 미국식 프로그램운영의 차이점입니다.
유명한 티벳불교 센터가 미국인 관리자를 두었다가 과다소비를 하여 거의 파산지경까지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만일 미국인 관리자를 두었다면 그 지경까지 갔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에게는 직장이지 어떠한 발원이 있어서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시작부터 이 사원을 세우고 유지를 할 것인가에 대한 발원이 있었습니다.”
마치 한 전설적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던 대화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기 자 바쁘신대도 짧은 시간에 불사를 이끌어간 자세한 내용과 좌충우돌 ‘산골 티벳스님의 도시생활 적응이야기’까지 친절과 열정을 다해 나누어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된요 스님 기자분의 훌륭한 질문에 제가 옛날 이야기까지 쏟아내었습니다. 멀리 동부에서 이곳까지 찾아와 주시어 그 또한 감사드립니다. Tashi Delek!
**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단체로 3가지 불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원운영, 자선사업, 불교성지방문
** 규토재단의 지부들
(The Branches of Gyuto Foundation)
1. 1992 1st Minneapolis, MN Branch, 리치먼드 규토재단 의 절 반 규 모 / Gyuto Wheel of Dharma Monastery-호주에 상주할 때 세운 지사.
2. 1997 2nd Richmond Heights, CA (규토 재단 본원 Gyuto Foundation)
3. 2000 3rd 타이페이, 타이완-세들어 있는 작은 집
** 자선사업재단( Delek Children’s Foundation)
2007년 샌프란시스코에 달라이 라마 존자께서 2번째로 방문 하셨을 때, “자선활동을 해보세요. Do something Charity Work”을 언급하며, 히말라야 지역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찾아 보라’는 권유를 받고 한 재단이다. 2009에 시작하였으나 2015년에야 정식 자선사업체로 등록을 하였다. 히말라야 산중에 있는 시골마을에 의료캠프를 차려, 음식과 의류들을 함께 제공하고 있다. 특히 안과의사들이 나서서 백내장 수술을 제공하고 있다. 2025년 5월에는 네팔의 쭘과 누브리 계곡에서 아이 캠프(Eye Camp)를 연다.
** 불교 성지순례 프로그램(Buddhist Holy Site Tour Program: 매년 실시하고 있으며, 올해에는 스리랑카 순례가 예정되어 있다. 자선투어로 올해 2024년 11월 10-22일, 내년2025년에는 동남아의 베트남, 타이랜드, 인도네시아 투어계획이 잡혀있다.
연락처: Website: gyutofoundation.org
자선사업: delekchildrensfoundation.org
주소 : 6402 Bernhard Ave. Richmond Heights,
CA 94805.
전화 : (510)0926-3969
이메일: info@gyutofoundation.org
인터뷰날짜: 2024.09.04
장소: 큐토 재단 리치먼드 수도원장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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