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향기/서울대교구 성산동성당 민병순 제노베파
봉사는 주님의 은총
박연근 아오스딩 서울 Se. 명예기자
“저희 어머니는 집에 있을 때 항상 기도하시고, 주변에 누가 힘들면 내 일처럼 먼저 나서서 도와주십니다. 몸이 불편하셔서 말리는데도 1시간 이상 걸리는 먼 곳의 상가(喪家)에도 꼭 가셔야 한다며 집을 나서십니다.”라며 협조단원인 딸 막달레나는 큰 존경심을 드러낸다.
올해 83세인 민병순 제노베파 자매는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주름이 많은 얼굴이지만 동네 할머니처럼 편안함을 줄뿐 아니라 신앙에 대한 뚜렷한 주관도 있다. 제노베파 자매는 레지오 마리애 주회합과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푸른군대) 셀 모임뿐 아니라 구역 반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석한다. 더불어 재속 프란치스코회 월례회의와 구역모임도 빠지지 않는다. 제노베파는 성경필사를 두 번했으며, 최근에는 매일 인터넷 성경쓰기를 한다.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세를 받은 후 지금까지 약 70년간 매일 미사를 거의 거르지 않고 있다.
제노베파가 처음 레지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88년 대전에 사는 동생 집 축성 때이다. 조카들이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카세트를 틀었다. 처음 듣는 아름다운 성가에 매료되었는데, “…금쌀 같은 시간 짜…”라는 부분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이런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호감이 채 식기 전에 겸손하신 모후 Pr. 단원들이 입단을 권했다. 그녀가 입단하여 까떼나를 바칠 때 갑자기 군화발자국 같은 소리가 크게 들리면서 뗏세라 표지 그림의 군대가 움직이는 것 같은 체험을 했다. 그래서 결혼하면서 남편을 따라 가입한 푸른군대만 성모님 공경을 하는 것으로 알았으나 레지오는 성모님 공경 뿐 아니라 활동도 하는 단체라서 더 좋았다. 그러나 그녀를 레지오를 이끈 활동가를 주회합 때 부르지 않아 매우 섭섭했다. 그 뒤 간부가 되어서 꾸리아에서 활동가를 듣고는 정말 기뻤다고 하니, 그녀에게 레지오는 천생연분인 듯하다.
그 당시는 활동으로 둘씩 짝지어 가가호호 방문하며 입교권면, 환자돌보기를 하고, 교우상가 등에도 모두 함께 했다. 그리고 재속 프란치스코회도 가입하여 노숙자를 위한 베들레헴의 집과 제기동 프란치스코의 집에서 매월 봉사를 빠지지 않았다. 또한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는 매주 빨래를 하고, 가끔 타우 십자가와 묵주를 만들기도 했다.
제노베파는 봉사가 주님의 은총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래서 성당에서 주어지는 모든 일은 은총이라며 감사하게 받고, 스스로 찾아서 봉사하기도 한다. 후배들도 이런 은총을 풍성히 받을 수 있도록 몇 년 전 반장을 그만둘 때는 가장 먼저 대녀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봉사를 통해 주님이 건강과 가정의 평화뿐 아니라 끼니까지 책임져 주셨다”고 하면서 이것만 해도 주님이 주신 큰 축복이라고 했다.
강한 반대에도 결핵환자였던 남편과 결혼
제노베파는 신자였던 어머니 김 마리아의 권유로 다섯 명의 동생들과 함께 입교하여 1949년 성탄 전날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는 성당에 가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어머니의 지혜로 신앙생활을 삶의 최우선으로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병이 든 아버지가 꿈에서 화려한 꽃들과 촛불로 환한 성전 같은 것을 본 후 몸이 나아지자 가족들이 성당에 다니도록 허락하고, 완쾌된 후에는 요셉이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제노베파는 충남 홍성에서 결핵환자인 분도를 소개 받았다. 비록 투병 중이었으나 신앙심 깊은 이 청년이 좋아서 결혼을 원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어머니는 죽을병에 걸린 청년과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제노베파는 주님께 의탁하며 한 사람을 살린다는 믿음으로 분도와 결혼했다. 결국 혼배미사에 동생들만 참석하고,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 후 한동안 냉담했다. 그 당시 국민 병(病)이었던 결핵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주위사람들에게도 공포를 주었다. 신혼 때 시고종사촌 아주버니 집에 인사를 갔을 때 결핵환자라며 집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신론자인 아주버니는 분도의 병이 났게 되면 하느님의 존재를 믿겠다고 말했다. 분도가 완치 판정을 받자 아주버니와 그 가족들 모두 입교했고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
제노베파는 신혼 때부터 분도를 간호하며 생활을 위해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모든 것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았다. 4평쯤 되는 좁은 단칸방에서 아이가 둘이 생기자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서산에 사는 어머니에게 부탁드리자, 모든 일을 제쳐놓고 달려왔다. 용산터미널에서 어머니 손에 아이들을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앞을 가려서 버스를 잘못 탄 줄도 몰랐다. 몇 년 뒤 그녀가 아파서 병원에 있을 때 어머니가 아이들을 데려왔으나 아이들은 부모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함께 온 친척 아이를 따라서 분도를 고모부라고 부르는 소리에 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빚을 내어 8평쯤 되는 조금 넒은 집으로 옮겨 불편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모든 일에 적극적이며 순명이 몸에 배
비록 생활이 힘들지만 분도와 제노베파는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특히 분도는 투병 중에도 매일 4시경 깨어 누운 상태로 묵주기도를 비롯한 여러 기도를 바쳤다. 이 기도는 그와 가족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 평생 그렇게 했다고 한다. 분도는 병 완치 판정은 받고 완전히 회복한 뒤부터 약 15년간 직장생활로 가장의 역할을 다하고, 2008년 하느님 품안으로 편안하게 갔다. “뜻이 맞는 협조자요 의지할 기둥이 되는 아내를 얻는 것은 행운”이란 집회서의 말씀처럼, 분도는 제노베파라는 행운을 만나 행복한 삶을 누렸다.
김용현 율리안나 평화의 모후 Pr. 단장은 5년 전 꾸리아 단장 때 폐단위기의 이 쁘레시디움을 살리기 위해 평화의 모후 Pr.으로 옮기는데 아무런 불평 없이 기꺼이 함께해 준 제노베파라고 칭찬하면서, “혼자서라도 꼭 상가방문을 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며 순명이 몸에 배인 레지오 정신이 투철한 단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