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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國 佛敎 聖地巡禮 -
*9월25일 53선지식 명찰 순례단 해외 성지순례 40여명 계획 하였으나 포교사단행사 팔재계 및 신규 포교사 품수식 관계로 인하여 최종 17명이 참석하였다.
대구공항에서 10시에 만나 뉴월드관광 배병모회장님과 미팅 후 설레는 마음으로 12시30분 이륙, 서해 상공을 비행 기내 식사 후 14시쯤 북경공항에 도착 한국보다 1시간이 늦은 관계로 스마트 폰을 켜는 순간 자동로밍 되었다.
북경(北京)공항은 국제선과 국내선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입국 절차를 마치고 나오니 현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북경대학 사학과 출신 연변이 고향인 교포3세 27살의 미남 청년가이드는 불교와 중국 역사 풍습 등을 재미있게 설명 해 주었다.
북경에서 산서성 대동(大同)으로 가는데 태항산을 기점으로 동쪽은 산동성, 서쪽은 산서성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였다.
여객버스로 이동 중 배회장님 과 단장님 인사 일정을 소개하고 도심지는 혼잡하였으나 고속도로 외곽지는 화물차 운행, 승용차는 거의 볼 수가 없었으며 달리는 창 밖에 만리장성이 보였다.
고속도로변 가로수는 어린 나무들이 많았으며 산에는 소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광활한 벌판에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 밭 이것은 사료용으로 아직 수확을 하지 않았으며, 수확 후 보리나 밀을 심는다 하였다.
13∼4억 중국 인구의 농가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으며 차창을 보며 펄벅의 대지(大地) 소설 내용이 생각났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우리나라 작은 슈퍼 같고, 화장실은 우리나라 80년대초 화장실처럼 길게 늘어진 공동변소 악취가 많이 났으며 우리나라 화장실문화는 1등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가이드가 주는 대추, 돌배,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대동은 석탄 생산지로써 진상(晋商) ‘진짜 장사를 잘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명· 청시대에 신안 상인(商人)과 더불어 중국 상업계의 양대 세력을 이룩한 이들이 바로 산시상인(山西商人)으로, 중국 최초의 은행(銀行)을 세운 곳이라 했다.
우리가 대동 호해(浩海)국제주점에 도착한 시간은 5시간30분를 달려, 거의 9시경 2일1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였다.
호텔의 규모는 5성급이지만 대구의 모텔 수준급으로 룸에는 전등이 적게 설치되어 있어 어두운 편이었고 매립전등과 침대 옆에 전등이 설치되어 있어 절전(節電)을 잘하는 나라구나 싶었다.
타국(他國)에서 첫 밤, 단잠을 자고 나니 더 이상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호텔 창호가 이중창이 아닌 관계로 거리의 자동차 경적 등의 소음이 심해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이른 아침 호텔 로비에 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9월26일 운강석굴(雲岡石窟)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 운강(雲岡 구름이 피어나는 언덕)석굴은 중국3대 석굴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며 육조시대 5세기 산시성(山西省) 북부 부근에 축조 되어 있으며 석굴 암벽은 부드러운 사암(풍화 작용에 약함)으로 이루어져 있어 무수히 많은 석굴로 조성되어 있고, 초기의 5개 석굴은 1500년전인 460년 서역에서 초빙된 담요(曇曜)스님의 지휘아래 조성하기 시작하여 그 뒤 494년 약 34년간 석공들의 정과 망치로 돌 부수는 소리가 끊임 없이 이어졌다 하였다.
입구 담요(曇曜)스님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 후 불광대도(佛光大道:중생을 깨우치는 부처님의 광명길)를 걸어 조형물 보리수나무와 석교를 지나 영암사와 대웅보전 주위에 배를 띄워 놓았고 전동차를 타고 들어가니 낮은 절벽 돌산에 석굴과 건축물이 보였다.
석굴 조성 배경은 위진 남북조시대 북위의 문성제란 황제가 통치할 때 초기에는 불교를 숭상 불교 발전에 노력 승려들 우대로 서로 승려가 되려 함을 보고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는데, 진실로 불교를 믿는 승려들이 탄압을 받게 됨을 뒤늦게 문성제가 알고, 다시 불교 발전에 노력할 때 담요(曇曜)란 승려가 나타나 문성제에게 보고하고 조성하기 시작하여 이룩된 석굴이었다.
오랜 세월 속에 풍화가 많이 되어 있었는데 석굴의 불상과 보살상은 당나라 후반에 조성한 것으로 굴 내부가 어둡고 사진촬영을 금지하는 곳이 많았다.
북위의 황제들이 불교 탄압에 대한 속죄의 뜻으로 행한 사업으로 석굴마다 거대한 불상은 북위 초기 황제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는데 조정에서 불교를 정치에 이용했다고 하였다.
장장 1Km나 뻗은 예술의 걸작품으로 굴속에 크고 작은 불상과 보살상 호법 신장상 채색 등 석각예술은 극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최대 불상은 17m, 노천대불은 14m 높이에 풍만한 몸매를 하고 약간 들린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듯 자애로움과 위엄을 보이는 불상(佛像)을 정과 망치로 이렇게 잘 조성 하였을까?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석굴은 45개이고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운강석굴은 중국 불교 석굴예술을 대표하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 했다” 일부는 보수 중이라 관람을 못하였다.
곳곳을 자세히 돌아보고 싶었지만, 굳은 날씨에 비가 내리기 시작 시간관계로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입구 쪽으로 나왔다.
☆응현목탑(應縣木塔)까지의 거리는 약 80km로 2시간여 거리로 동문 법우님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정종국 단장이 주도하여 자신의 삶, 자랑거리와 유머 등으로 시간은 어느새 흘러 응현목탑에 도착하였다. 멀리서 보는 응현목탑은 웅장하고 멋있었다.
응현목탑의 정식명칭은 불궁사(佛宮寺) 석가탑(釋迦塔)으로 산서성 삭주시(朔州市) 응현(應縣)에 위치, 중국 현존 목탑 중 가장 오래 되었고 가장 높은 목탑으로 중국 국보중 국보(國寶)라 하였다.
불궁사(佛宮寺)의 원래 명칭은 보궁선사(寶宮禪寺) 사원 내부에 사리를 보관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936년에 건설, 사원이 가장 번성했을 때에는 400여명의 승려가 있었으나 원나라 말기 전란(戰亂)에 휩싸여 그 규모가 작아졌으며, 후에 다시 확대되기는 했지만 명. 청 시대의 규모 그대로 유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일반 사원은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산문, 대전 등의 부속 건물들로 갖추어져 있는 반면, 불궁사는 중앙에 불탑 위주로 산문 대전을 남북으로 배치 건설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산문 앞에 포대화상과 탑 앞에 붉은 천을 두른 백의 보살상(菩薩像)이 우리일행을 반겨주었다.
이 석가탑은 요(遼) 청녕 2년(1056년) 11세기 초 응주인 곽씨가 북송 인종황후에 봉해졌고, 거의 같은 시기에 응주인 소씨는 요(遼) 흥종의 황후가 되었다.
한 지역에서 두 국가의 황후가 나온 것은 전례 없이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두 황후는 고향생각이 각별하였으며, 특히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영향을 받아 응현에 목탑이 세워졌다 하였다.
목탑의 높이는 67.31m이며 기단부의 직경은 30.27m로 정 팔각형으로 단 한 개 못도 사용하지 않고, 목재로 연결 제작 되었다 하니 건축기술이 신공(神工)이라 했다.
수많은 목재를 사용, 4m의 석재 기단부 위에 5층으로 건설되어 있는 이 목탑에 1323년 영종황제가 방문하였고, 1423년 성조황제는 목탑을 시찰하고, 준극신공(峻極神工)이라 손수 편액을 써서 기증(寄贈)한 현판을 보았다.
1508년에는 무종황제 주후가 이곳을 찾아 탑을 둘러 본 후에 천하기관(天下奇觀)이라는 편액을 쓰기도 했다 하며 내부에 불보살상을 모셔 놓았다.
*응현목탑이 조성된 후 3가지 미스터리
1. 낙뢰(落雷)를 맞은 목탑이 어떻게 무사할까?
목조건물은 화재에도 취약하지만 낙뢰야 말로 치명적이다.
기록을 보면 중국의 수많은 건물들이 벼락을 맞아 파괴되었고 석가탑 역시 1000년을 지내오면서 무수히 많은 낙뢰를 맞았으나 그때마다 무사하였다.
한 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탑 정상부에 있는 금속 탑찰이 피뢰침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데, 사실은 탑찰에서 땅으로 연결된 도선이 있어야만 피뢰침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석가탑 어디에도 도선 역할을 하는 피뢰침설비가 없다는 것이다.
2. 큰 지진(地震)에도 왜 쓰러지지 않았을까?
기록에 의하면 석가탑을 세운 이후 진도 5이상 지진이 십여 차례 발생하였다. <응주지(應州志)>에 1305년 큰 지진이 발생하여 5800여 칸의 건물이 무너지고 1400여 명이 사망하였는데도 석가탑은 전혀 피해가 없었다.
원나라 때 응주에 7일 동안 지진이 발생하여 불궁사의 다른 건물들은 모두 무너졌는데 이 석가탑은 무사하였다 한다.
건축가들은 석가탑의 구조자체가 내진능력을 가진 것으로 분석하고는 있지만, 그 원리는 아직까지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3. 목조건물에 왜 벌레가 없을까?
석가탑에 사용된 주요 목재는 소나무이다. 여름이 되면 나무에는 벌레가 생기기 마련이지만 석가탑은 벌레가 좀 먹는 일이 없다.
이것은 석가탑에 머무는 마연(麻燕)이라고 하는 제비 때문이라는데 이 제비들은 여름이 시작되면 찾아와 가을이 깊어지면 떠나가는데, 탑 주변의 모기와 벌레들을 잡아먹어 불궁사 주변에는 모기와 석가탑을 좀 먹는 벌레들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제비들이 왜 하필 석가탑에만 찾아오는 지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다 한다.
중국은 전탑(塼塔)으로 유명한데 거대한 목탑에 대한 많은 의문을 가지며, 주위 게시판에는 중국 저명인사들이 이곳을 방문한 사진이 즐비하게 게시되어 있었다.
☆현공사(懸空寺)는 중국 5악중 북악인 항산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2,016m로 신비로운 사찰 현공사는 절벽 한가운데에 지름 10
cm 남짓한 기둥 18개가 건물을 받치고 선 모습이 아찔하기만 한 이름 그대로 “하늘에 걸려 있는 사찰” 달(걸)"현(懸)" 빈"공(空)" 절"사(寺)"의 한자로 원명(原名)은 현공사(玄空寺)로 세계 8대불가사의(不可思議) 건축물이라 했다.
주차장 입구에서 순례 오신 마곡사 스님 일행을 만나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1500년전 북위의 도사(道師) 후겸지는 그의 제자 이교(李皎)에게 공중(空中)에 사원(寺院)을 건립하라는 유언(遺言)을 남겼는데, 이교는 북위 태화 15년 서기491년에 현공사를 지은 것이 지금의 현공사이며, 3대종교 불교, 도교, 유교가 함께 있는 유일한 사찰로, 불상(佛像) 외에 노자, 공자의 도상(道像)이 함께 안치 중국3대 사상이 함께 함축하고 있었으며, 좁은 공간에 40여칸의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는 목조건물로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절벽을 깎아 만든 가파른 계단 길을 조심하여 누각에 올라 층층이 작은 공간속에 모셔진 불, 보살님 참배와 도상을 관람하면서 화려하게 단장되어 있는 우리나라 사찰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낭떠러지 암벽에 구멍을 뚫어 나무를 박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후 하중을 견디기 위해서 나무기둥 받침대 위에 세운 절묘한 사찰 모습은 우리들로 하여금 입이 저절로 벌어지게 만들었다.
어떻게 저 절벽에 이런 사찰을 만들 수 있었을까?
감탄과 더불어 한걸음을 옮겨 놓을 때 마다 전율을 느끼며 한사람이 겨우 지나 갈수 있는 비좁은 통로로 3층 누각에서 계곡을 바라보는 마음은 무위(無爲)속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신선(神仙)처럼 광활(廣闊)한 하늘을 바라보며 홀로 서 있는 현공사의 오묘한 공백(空白)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적막한 산속 깎아지른 절벽에서 15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비바람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불심(佛心)으로 이룩한 것이라 생각하며 일조량(日照量)은 3시간 정도 된다 하였다.
*삼성전(三聖殿)에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님을 모셔 놓음
*삼교전(三敎殿)에 불교의 석가모니불, 도교의 비조(鼻祖) 노자 (老子), 유가((儒家)의 공자(孔子)상을 모셔 놓음
*삼궁전(三宮殿)에 수궁(水宮),천궁(天宮),지궁(地宮)을 공양하는 곳.
삼교(三敎)의 조화를 이룬 현공사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주변의 암벽 계곡이 정말 경관(景觀)이었다.
이 경관을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함이 안타가울 뿐이며, 이태백(李太白)의 장관(壯觀)이란 붉은 글씨로 새겨 놓은 큰 돌을 보며 저 멀리 댐의 보가 보였다.
오대산(五台山)을 향하는 길은 높아 구불구불한 험한 산길을 들어서니 어둠이 내리는 산 중턱 청량승지(淸涼勝地)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사진 촬영 후, 내일 오대산 정상을 한 번 가보자는 제의가 있어 가보자는 결론을 내리고 검문소 통과시 버스에서 내려 여권 검사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오대산 화훼산장에 짐을 옮기고 여장을 풀었다.
*9월27일 아침 주차장 큰 돌에 춘화추실((春華秋實) 붉은 글씨를 보고 오대산(五台山)정상에는 5월까지 눈이 있다 하여 옷 단속을 하고 나서 승합차는 우리 일행을 태우고 달렸다.
어제 저녁에 왔던 도로를 달려 청량승지(淸涼勝地) 갈림길에서 정상을 향하는 길은 S코스로 포장도로가 아닌 보도블록을 깔아 놓은 길이었는데 여러 곳의 블록이 튀어 나와 있어 위험한 길을 곡예운전하며 올라갔다.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에 5개의 평평한 봉우리(취암봉, 망해봉, 계수봉, 계월봉, 엽두봉)가 있다 해서 오대산이라 하며, 우리 일행이 도착 하차한 곳은 북대 엽두봉(葉斗峰) 고산지대라 바람이 세차게 불고 땅바닥에 얼음이 얼어 있어 추위를 느끼며, 주위에 나무 한그루 없고 마른 풀 만 있는 삭막한 곳에 2채의 사찰과 방목하는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북대 영흥사에 들렀는데 이렇게 높은 정상에 물이 샘솟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으며 물이 있으니 사람이 살수 있구나 하며 오대산 북대 정상에서 다섯분 문수보살님께 참배기도를 올렸다.
무구문수전에 東대 총명문수보살, 西대 사자후문수보살, 中대 유동문수보살, 南대 지혜문수보살, 北대 무구문수보살님을 한 자리에 모셔 놓았다.
용왕전에 가니 장군상을 모셔 놓고 옴 마니 반메훔 진언만 계속 염송하고 있었으며 소원지(所願紙)를 적어 바람에 날려 보내는 것을 보았다.
북대 정상 표지석(해발 3061.1m)에서 사진 촬영 후 하산 승합차에 몸을 싣고 내려오는 도중 산행(山行)을 하는 사람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중국 불교 4대 성지(聖地) 보현보살의 아미산, 관음보살의 보타산, 지장보살의 구화산, 문수보살의 성지 오대산 문수보살 도량은 한나라 명제가 천축국(天竺國)에서 불경(佛經)을 가져오게 한 후 사원(寺院)을 조성 3백여 사찰이 있었으나 현재는 50여 사찰로 남아 있다 하였다.
☆대라정은 사찰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내부 구조가 치밀한 편이고 산모퉁이가 소라 고동 형태로 되어 있는 이곳은 명나라 1465년부터 1487년 사이에 창건 후 명· 청시대를 거치면서 중수되었고 석사자와 중전· 배전· 정전 등이 있으며 전내에는 부처님과 문수보살님이 모셔져 있어 ‘소조대’(작은 참배)라 불린다 하였다.
주차장에서 일행을 만나 2인용 삭도을 타고 올라간 대라정은 대회진 동쪽의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기서 내려다보면 탑원사와 현통사가 조그맣게 보이고 방금 다녀온 북대의 엽두봉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케이블을 타고 대라정으로 오르는 그 길을 말을 타거나, 걸어서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가 부처님과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참배(參拜)하기 위해서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과거 신도님들은 오대산의 다섯 산봉우리에 올라가 참배를 해야만 오대산 순례를 마쳤다고 했으나, 산이 가파르고 기후가 변덕스러워 그 소망(所望)을 이루지 못하는 신도들이 많아 그 뒤 언덕에 대라정을 짓고 다섯 산봉우리의 오방 문수보살님을 한 곳에 모셔 놓아 이 절에 이르면 다섯 산봉우리에 올랐음을 대신함으로 대라정에는 항상 신도들이 많다 했다.
중국인들은 향공양(香供養)을 올릴 때 한 다발씩 올려 향연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며, 토요일이라 신도와 여행객들로 법석이었으며 일행 중 한분이 오대산 다녀 온 후 고산증세를 보이는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조금 있으니 괜찮아졌다.
신라 자장율사께서 교통도 불편한 그 시절 이 오대산에 오셔서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하시고 진수 받아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에 봉안(奉安)하신 불심(佛心)을 상기하면서 문수보살을 마음속 깊이 다시 한 번 새겨 보며 문수보살을 염송하며 기도 드렸다.
계곡 전체가 사찰로 형성되었고 라마교 사찰 라후사를 관람 하였는데 티베트인들이 엎드려 5체투지로 절하는 모습을 보았다.
☆현통사(顯通寺)는 오대산에 지어진 최초의 불교사찰중 역사가 가장 유구하고 규모가 가장 큰 절로 400여칸 이라 하였다.
대현통사(大顯通寺)는 남향으로 전체 면적은 43,700㎡로 천왕문, 대웅보전, 문수전, 무량전, 등으로 웅장하였으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참배하였고 절 위쪽 저 멀리 보살정이 보였다.
현통사와 탑원사는 하나의 가람이 두개의 가람으로 갈라지게 된 연유(緣由)는 이렇게 전(傳)해지고 있다.
당시 명(明)나라에 불교가 융성하자 서역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보내 명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는데 이에 크게 기뻐한 명나라 황제는 현통사에 높이 50m가 넘는 대형 불사리 탑을 조성하게 된다.
불사를 마치고 나서 황제는 부처님 진신사리와 본존불(本尊佛)을 함께 모실 수는 없기에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황제가 깊은 시름에 젖어 있을 때 현통사의 한 스님이 보다 못해 해법(解法)을 제시했는데 현통사를 둘로 나누자고 하였다.
황제는 결국 스님의 뜻을 받아들여 불사리 탑을 기준으로 앞쪽은 탑원사로, 뒤쪽은 현통사로 구분 나누게 된 것이라 했다.
☆탑원사(塔院寺)의 백탑(白塔)은 서기 1302년에 네팔의 장인(匠人)이 세운 것으로 멀리서 보면 높은 줄 모르나 가까이 다가가면 탑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부처님 진신 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백색의 거대한 대탑은 오대산의 상징으로 몇 해 전부터 중국정부는 탑원사의 보수 작업과 함께 백색의 탑에 황금을 입히는 개금불사(改金佛事)를 진행하고 있다 하였다.
쇠로 만든 법륜이 벽 주위에 설치되어 있어 일행을 따라 3바퀴 돌고 윤장대를 한 바퀴 돌렸다.
점심 식사 시간 중 남여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주고 돈을 받는 2팀이 찾아와 왔는데 일행 중 성안 최재학씨가 기타를 빌려 노래를 구성지고 멋있게 불렀다.
☆수상사(殊像寺) 오대산 사찰중 규모가 가장 큰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음으로 중국인들이 문수성지로 추앙하는 사찰이다.
사찰명을 문수보살상의 수(殊)와 상(像)자를 따 수상사라 불리게 되었고, 문수보살상 조성(造成)시 그 누구도 문수보살 상호를 본적이 없어 주지스님은 고민하고 있는 어느 날, 공양주보살이 메밀로 점심을 하려든 중 문수보살님이 나타나 그 모습을 보고 메밀로 상호를 만들었는데 그 상호를 보고 조각하여 여러 번 올려도 바로 서지를 않아 공양주(供養主)가 만든 상호를 올려 조성(造成) 아직도 두상에 메밀가루가 있다는 일설이 있다.
1200여년전 당나라 때 황실에서 오대산에 가장 큰 청사자를 타고 계시는 문수보살 조성 시도는 백성들의 신심(信心)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였다 하였으며, 문수보살님을 참배하고 나와 면산(綿山)을 향하는 버스 내에서 어제 이어 각자 발표 시간을 보내며 어두운 저녁 면산 관광 매표소에 도착 관람증을 받은 후 통과, 밤이라 볼 수는 없지만 내일 면산의 협곡 산세의 신비와 절벽위에 세워진 불교 도교 사원과 중국의 절개(節槪)라 불리는 진국(晋國)의 충신(忠臣) 개공(介公)사당(祠堂), 한식(寒食)의 유래를 들으며 면산호텔에 도착 EV를 타고 운봉서원에서 여장을 풀고 식사 중 점원들이 산수화, 매화, 목단화, 호랑이 등의 족자그림을 판매 하였다.
식사 후 먼 여정에 쌓인 피로가 밀려 와 잠을 청(請)하였는데 추억(追憶)의 1박 면산 새벽에 일어나 보니 비가 내리고 있어 오늘 일정이 걱정이 되었다.
*9월28일 면산(綿山)은 10년전 개방되었으며 천상의 도시 '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린다 하였고, 해발 2500m 위에 길이 25km에 달하는 기막힌 협곡(峽谷) 이곳에 중국 불교, 도교 사원과 개공사당이 절벽에 세워져 있었고 비경(秘境)만큼이나 독특한 절벽 위의 호텔도 멀리서 보면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았고 우중(雨中)에 운무(雲霧) 낀 협곡(峽谷) 풍경은 환상적(幻想的)이었다.
☆운봉사(云峰寺)는 면산(綿山)의 대표적인 천년고찰로 예전에는 암자였는데 중창 불사(佛事)를 하여 현재의 사찰로 있게 되었다.
암벽동굴 속 운봉사는 바위가 만들어낸 동굴이 마치 어머니 속과 같다고 해서 예전엔 포복사라 불렸으며, 호텔과 가까운 운봉사 암벽에 매달린 등과 작은 종을 매달아 놓은 것은 소원을 빌며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기다릴 등(等)과 발음이 같은 등(燈)을 달고 그 등(燈) 옆에 종(鐘)은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다시 이곳을 찾아와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으로, 영험할 영(靈)과 발음이 같은 방울 영(鈴)을 단다고 하였다.
운봉사는 당태종 이세민과 지초스님 일화로 1300년 전 큰 가뭄이 들었는데 면산에만 비바람이 순조로워 고승 지초스님께 기우제(祈雨祭)를 부탁했더니 장안일대에 단비가 내렸다.
그 후 1년이 지나 지초스님은 원적에 들었으며 원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태종이 고마움을 표시하려 군신을 이끌고 면산에 도착했으나, 스님의 원적을 듣고 이를 탄식하며 “이번 행차는 공염불(空念佛)이다”.라 했을 때 하늘에는 공왕고불(空王古佛)이라는 네 글자와 지초스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당태종은 이를 보고 지초스님을 공왕불(空王佛)에 봉하고, 조서를 내려 운봉사를 짓게 했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운봉사는 절벽 바로 밑 곳곳에 암벽을 파서 건립한 사찰이라 과거 중일전쟁시 폭격하여도 파괴 되지 않는 곳이었다.
정과사로 향하 길은 비가 와서 절벽에 만든 계단 밑에서 위로 쳐다보니 절벽을 오르는 것이 위험한 고공잔도의 계단 길을 올라 암벽 속 EV를 타고 석굴을 지나 오솔길이 구불구불 이어진 계곡 위를 걸어 정과사 협곡(峽谷)에 운무 낀 무릉도원(武陵桃源)은 한 폭의 산수화였다. 계곡 저 멀리 폭포를 보며 걸어가니 영응탑이 보이는 곳이 정과사로 이탑은 담란스님을 추모하여 세워졌다 했다.
☆정과사(正果寺)에는 불교 고승과 도교 사제 12등신불(고승 8인과 도교 도인 4인)이 모셔져 있는 사찰로 중국에서 가장 많은 등신불이 안치 되어 있었다.
사리를 친견하고 암굴에서 수행을 마감 열반에 들면 100일를 그대로 두어 넘어지지 않는 열반 고승대덕만 등신불로 모시고 입적한 몸에 진흙을 발라 굳혀 보존하고 있다 한다.
등신불(等身佛)중 일부는 진흙이 손실되어 입적 시 입었던 옷깃, 손가락 손톱, 발바닥뼈 신체일부가 드러나는 것을 보며 1000년 세월이 무상하게 느껴졌고, 입적 당시의 표정까지 생생한 신비로움에 감탄하며 스님과 함께 나무 아미타불을 염송 향공양을 올렸다.
☆개공사당(介公祠堂) 중국의 충신(忠臣) 개자추(介子推)公과 한식(寒食)의 고사(古史)로 유명한 사당은 중국 춘추시대 진나라 문공의 부왕(父王)이 상처(喪妻)를 하여 계모 왕비를 얻었는데, 계모가 자기 아들 왕위 계승을 위해 전처소생인 문공을 죽이려 계책을 세우자, 개자추가 문공을 구해 19년간 망명생활 할 때 개자추가 자기 허벅지 살을 떼어 봉양(奉養)하는 등 충심(忠心)으로 보좌하였으나, 문공이 왕위에 오른 후 간신(姦臣)들로 인해 그를 등용하지 않으므로 실망하여 개자추는 어머니와 면산에 은거(隱居)했다.
뒤늦게 문공이 잘못을 뉘우치고 벼슬을 주려하나 나오지 않자 왕은 그를 부르기 위해 면산에 불을 질렀는데, 개자추가 효자(孝子)라 불을 내면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뛰쳐나올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죽었다.
문왕은 그의 정절(旌節)을 기려 개자추가 죽은 후 3일간 불(火)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으며 애도(哀悼)했다. 이것이 한식의 기원이다.
개공사당 중앙에 개자추상 오른쪽에 어머니상 왼쪽에 아버지상 혹은 장군상이 모셔져 있고, 개자추공의 효심과 충성심의 교훈 등 그의 일대기를 입체적으로 그려 놓은 석굴묘(石窟廟)는 해발2,07 2m에 암벽을 뚫어 집을 지은 것이며 외부에 큰 향로와 사각 기둥탑 8개에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道理) 충(忠) 효(孝) 인(仁)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를 새겨 놓았다.
청명절(淸明節)은 황제가 개자추공 집 앞 버드나무를 베어다가 나막신을 만들어 신었는데 후에 가보니 버드나무에 파랗게 싹이 나 살아 있음에 청명(淸明)이라 했다는데 이 유래는 맑고 밝은 정치(政治)를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절기 ‘한식’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이 되었으며, 인걸(人傑)은 가고 없어도 개공(介公)의 충절(忠節)은 천추에 남아 사표(師表)로 삼고 있었다.
☆대라궁은 중국 최대 도교(道敎)사원으로 신전(神殿)에 무형신선, 무명신선, 무상원군 신선상(神仙像) 문양 괘을 관람 불교, 도교 민간신앙과 관련된 수많은 절과 사당에 삼국지에 유명한 관우(關羽)장군상(將軍像)을 곳곳에 모셔 놓았다.
신라시대 유학하신 고운 최치원선생님 사진 한폭이 전시 되어 있었고 늦은 중식 시간이지만 한식집으로 가자하여 우중에 도착 돼지 삼겹살과 상추, 김치, 더덕, 목이버섯으로 여행 기간중 제일 맛있는 식사를 하였다.
태원(太原)까지 버스는 2시간정도 소요, 발마사지를 받고 석식 후 태원역에 고속열차 승차 290㎞/h로 달려 북경에 도착 자정 무렵 호선원 호텔에 도착 여장을 풀었다.
*9월29일 새벽 5시30분 모닝 콜 짐을 챙겨 버스를 타고 북경공항으로 이동 가방탁송 출국 수속 후 면세점을 잠시 둘러보고 8시20분에 모여 항공기 탑승 기내에서 간단한 식사 후 대구공항에 11시35분경 도착 다선단장님과 혜공 배회장님에 해단 인사, 4박5일 중국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치게 됨을 부처님께 감사드리며 뜻 깊은 성지순례에 좋은 인연으로 함께 한 동문법우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무 마하 반야 바라밀. 48(야) 우담 이경태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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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정리 했네요
수고 했습니다
야~~~~ 정말 대단하시네요?
장편의 소설을 쓰셧네요 수고하셧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