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매천사 황현 오동나무
황현(1855∼1910)은 조선 말기의 선비이다. 본관은 장수, 자는 운경. 호는 매천이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익혔으며 과거 응시차 상경한 서울에서 강위, 이건창, 김택영 등과 교우했고, 이들을 한말 한문학의 4대 문장가라 부른다.
무엇보다 황현은 1910년 경술국치에 왜인이 국권을 침탈하자 자결했다. ‘나라가 망한 날 선비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나 위로는 한결같은 마음의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평소 읽은 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을 뿐이다. 아득히 오랜 잠에서 깨어나 참으로 통쾌함을 깨달으니 너희는 너무 슬퍼하지 말지어다.’ 이때 황현이 동생에게 남긴 ‘유자제서’의 일부이다.
또 다음은 황현이 남긴 ‘절명시’ 4수의 일부이다. ‘고국강산 찌그러져 짐승도 슬피 울고 나는 새도 슬피우니/ 무궁화 이 강산은 가라앉아 사라지고/ 세월의 등잔불 아래 천고의 한 덮어두니/ 참다운 지식인 되어 인간답기 어렵도다.’
어디 생목숨을 끊기가 쉬울까? 이날 황현은 아편 약사발을 세 번이나 입술에서 떼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세상 가장 고결한 죽음이었다.
황현이 오동나무 아래에서 썼다는 오하기문은 개항 무렵부터 1907년 12월까지 편년체를 중심으로 엮은 사서이다.
‘아! 재앙과 변괴가 일어나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국가정치의 순탄함이나 혼란에는 나름대로 주어진 운수가 있고 일이 꼬이거나 풀리는 것은 순환되기 마련이다. 이런 일들은 당시의 운세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결정된 것이라 바꿀 수는 없다고 하나 더러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의 잘잘못에 기인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오랫동안 누적된 추세로 그렇게 된 것이지 일조일석에 조성된 것은 아니다.’ 이는 오하기문 머리글 중 일부이고 이를 더 보완한 7권의 책이 매천야록이다.
황현이 오하기문을 쓴 오동나무가 구례 매천사 뜨락 담장 가에 있다. 이 오동나무는 벽오동이다. 오동과 벽오동은 이름이 비슷하나 오동은 현삼과, 벽오동은 벽오동과로 다른 나무이다.
‘장자’는 봉황이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예천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예천은 태평성대에 솟는 단물샘이니 그곳은 낙원이다.
오동은 목재가 희어 백동이라 하고, 벽오동은 줄기가 푸르러 청동이라 한다. ‘오(梧)’는 벽오동, ‘동(桐)’은 오동나무이니 봉황이 깃드는 오동은 모두 벽오동이다. 또 한 해에 한 마디씩 자라는 벽오동은 평생 푸르러 불로의 상징이다. 여름 시작 무렵 작은 꽃무리를 가지 끝에 피워 가을이면 다소곳이 오므린 잎가에 오순도순 매달린 완두콩 같은 열매는 먹을 만하다.
황현은 서울에서 사귄 세 살 아래 벗 정만조가 진도로 유배당하자, 구례에서 먼 길을 걸었다. ‘물속의 달 같은 깨끗한 님’이라 칭찬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시까지 남겼다.
오하기문에 나오는 그 정만조는 명문가에 태어난 개화사상의 지식인이다. 당시 여흥 민씨 일파와 맞서다가 진도에서 10년 넘게 유배를 살았다. 1907년 고종의 퇴위 뒤 사면 되어 관계로 복귀했으나, 변절하여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의 대표적인 친일매국노, 사학자가 되었다.
매천사 벽오동의 봉황이었을 황현이 오하기문을 다시 쓴다면 정만조를 어떻게 평가할까? 아직도 푸르른 매천사 오동나무를 보며 생각한다. 오하기문은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보며 지배세력의 잘못을 질타했던 지난날의 역사서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직시할 현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