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야 할 숙제
임병식 rbs1144@hanmail.net
한 지역에 터 잡고 살면서 지역의 전통과 내력을 모르고 산다는 건 잘못된 일이다. 더구나 글을 쓰는 작가 입장에서 보면 사는 고장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구석구석에 쌓인 발자취를 모른다는 건 영혼이 깃들지 않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흔히 “역사현장을 보지 않으면 기억하기 어렵고, 기억하지 못하면 그것은 사라 진다”라고 하는데 그러한 것을 모르고 글을 쓴다면 남에게 감동을 줄 리가 만무하다.
다른 예술분야가 아니, 문학 중에서 소설이나 시는 설령 그런 걸 모른다 해도 넘어갈 수 있지만 특히 수필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 지역의 자양분을 받고 사색하며 회고하면서 글을 쓰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향토색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써 내는 글은 부평초와도 같이 뿌리가 없고 메아리가 없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예전, 직장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평소 넉살좋기로 소문난 어떤 직원이 하루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한 간부가 자기 딴에는 반갑다고 불러 세우더니 “어이 자네 고향이 도둑 골이라면서?” 하더라는 것이다. 어찌나 불쾌한지 "저런 무식한 사람이 간부인가" 싶더라 했다.
그가 한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고을 이름이 도둑골이 아닌 도독 골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시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제독이 그곳에 진을 친 일이 있는데 그래서 도독 골이 되었고, 이후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일컽다 보니 더러 도둑 골로 부르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아마도 그 간부도 깊이 생각한 바가 없이 누가 그리 말하니 우습기도 하고 이상한 기분도 들어서 그리 말을 했을 터이다.
그러나 아무튼 고향을 그곳에 두고 있는 그는 불쾌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해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지역에 살면서 나는 무엇이 의문이 생기고 궁금하면 그 내력을 찾아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 일환으로 내가 여순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피해상황이 궁금하여 발로 뛰고 자료를 모아 소책자를 펴낸 것도 실은 그런 성벽의 결과물이었다.
그런 바탕위에서 나는 나름대로는 지역에 거주하며 당시 일어난 임란의 역사를 심도 있게 살펴왔다. 그러면서 충무공대첩비가 일제 때 경찰서장 마쓰키에 의해 경복궁 뒤뜰에 묻혔다가 되돌아 온 사연이며, 진남관 건축 목재을 멀리 남면에서 수로로 운반한 역사, 그리고 순천왜성이 인근 백성들의 처참한 체벌이 가해지는 가운데 강제노역으로 쌓여진 사연 등을 파악했다.
한데 몇 가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겨져서 혼란을 겪는 것이 있다. 거북선의 구조문제와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된 명확한 연대이다. 첫째 거북선의 경우는 그 구조가 2층인가 3층인가 하는 것이다. 경남에서 건조한 거북선은 일부 교수와 해군사관학교 자문을 받아 3층 구조의 거북선을 만들어 놓았다.
이에 반하여 여수는 일부 향토사가의 주장에 따라 2층 구조의 거북선을 건조하여 전시를 해놓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결론을 내야할 문제로 그대로 방치할 일이 아니다. 이것을 관광자원화 하여 홍보가 이루어지면 많이 구경을 올 것인데 각지 주장이 다르면 어찌하겠는가.
거북선의 척수도 문제이다. 여수 향도사학자들의 주장은 중앙동 농구정 앞에서 1척과 돌산군내에서 1척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나, 완도문화원의 주장은 완도(기라포)에 당시 5척의 거북선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숫자가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또 다른 것으로는 충청 경상 전라를 통합한 삼도수군 통제영이 언제 어디에 설치된 것이 맞느냐는 것이다. 경남에서는 일찍이 이를 두고 자기 고유의 브랜드라며 다른 지역에서의 사용을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순신장군이 1592년 5월4일, 첫 출전하여 옥포해전, 6월 당황포 해전, 7월 한산도 대첩을 차례로 거두면서 한산도에 머물면서(1593. 8,15) 통제사에 임명은 되었으나 그 직첩을 받은 것은 두 달 후인 10월 초순으로 여수로 돌아 와서였다.
뿐만 아니라 장군은 늘 여수를 본영으로 여기고 지칭했다. 그렇다면 본 주둔지는 여수가 아니던가. 통제영 설치도 다른 설이 대립된다. 1601년 이서언통제사가 경남 통영(현재의 가배량(加背良)으로 거제시 동부면 가배리)로 옮겼다는 설과, 1602년 5대 경상우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인 유형이 경남 고성현 춘원포( 통영 강도면 안진만)에 자리 잡았다는 설이다.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한편, 생각해 볼 적에 통제영의 규정에 대해서는 해석을 달리해볼 필요도 있지 않는가 한다. 흔히 사단장이나 군단장이 어느 곳에 지휘소를 구축하면 바로 그곳에 장군기가 오르지 않던가. 그렇다고 보면 여수나 통영, 완도 고금도등이 두루 통제영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은 여수 인근 바다에서 대치중인 해로가 왜 쉽게 뚫렸느냐는 것이다. 당시는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가 순천 해룡에 왜성을 쌓고 1만4천명으로 버티고는 있었으나, 그때는 이미 명군 유정의 군대와 등자룡의 군대 2-3만 명이 후방에 집결하고 , 권률 장군은 육지를 지켰으며 이순신장군과 진린 도독은 수군 1만여 명으로 각각 장도와 도독 골을 지키지 않았던가.
한데도 허망하게 뚫리고 말았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그곳은 수로도 아주 협소한 곳이 아닌가.
들리는 말로는 유정과 진린 제독이 이미 적에게 뇌물을 받고 매수되어 이순신장군이 퇴로를 막으려 들자 매질까지 하려고 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우군이며 전쟁을 도왔다고 할 수 있을까.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진린 제독이 함께 싸우고 장군이 전사하자 통곡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그 밖의 다른 장수인 유정이 보인 반응은 그 어디에도 기록이 전해오지 않는다. 오히려 갖은 횡포와 수탈을 감행했다는 씁쓸한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몇 가지 점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닌가 한다. 잘못된 주장과 억측은 혼란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교훈을 도출하는데도 지장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실을 규명하여 바른 역사를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가 한다.(2017)
첫댓글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고, 5관(순천, 흥양, 광양, 낙안, 보성), 5포(사도, 여도, 녹도, 방답, 발포)를 둔 작은 수군기지였지만 이순신장군이 연전연승을 하고, 통제사를 겸하게 되면서 통제영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순신장군 후임인 이시언 수사까지는 여수가 통제영 역할을 수행했으니 여수가 본영입니다. 충무공 사후 경상도 세력이 크니 1603년 류형이 신임 통제사로 부임한 이후에는 경상우수영에 그 지위를 넘겨주게 되었으니 임진왜란 7년 전쟁과 이순신장군은 오로지 여수를 근거지로 해서 연전연승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가지 점은 반드시 정리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장르의 사람은 모르지만 지역에서 수필을 쓰는 사람은 지역의 역사도 남보다는 조금은 더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이웃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옆 동네들이 삼도수군통제영을 두고 억지 주장을 해대는 꼴을 봅니다 진남관 이전에 진해루가 있었고 오죽하면 당신의 자당님까지도 여수에 모셔 살게 하셨고 웅천 정씨가문은 공과 함께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나아가 거북선을 건조한 선소가 여수에 있었건만 통제영이다 거북선이다 하며 나팔을 불어대고 있으니 이건 뭐 역사를 왜곡하겠다는 심뽀인지 뭔지 참 한심스럽습니다 대체 어느 고장 장졸들이 충무공과 함께 나가 싸웠는지요 통영 사람과 한산도 사람들이 나가 이룬 공이었을까요 조금만 생각하고 돌아다보면 빤한 일을 왜곡하니 어이가 없군요 꼽사리나 끼면 또 모를까
그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당초에는 구국의 문 대신 통제영 조형물을 새우려고 읬는데 의의를 제기하는 바랍에 바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기가 사는 고장의 역사와 유래는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저도 공부 좀 해야할 거 같습니다.
글은 결국 그 지역에 살면서 그 지역의 자양분을 받아 쓰는 것인만큼 자기가 살고 있는 역사는 꿰뚫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기 정체성이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