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지나번에 실었던 타력신앙과는 정반대인 자력 수행의 길인 선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저는 현재는 간화선 수행을
하고 있고 간화선 프로그램을 개발중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타력신앙이, 정토수행이 불교의 수행은 아니라고 보지 않습니다.
같은 타력 신앙이라 하더라고 불교와 기독교의 구조는 다릅니다. 여하튼 이에 대해서는 시간 있을 때 글을 올리겠습니다.
선이란
가을
밤 깊은 산속, 암자의 뜨락에는 달빛만 고요한데 창호지문으로 비친 가부좌를 튼 스님은 깊은 삼매에 잠긴 듯, 달 그림자 대나무 숲을 스쳐도
흔적조차 묘연하다.
우리
산하의 절이며 암자에는 이렇게 면벽한 납자들이 태산 같은 모습으로 좌선에 들고 있으며 도심 속 여러 선방에도 선禪에 든 선남선녀들의 모습이
오롯하다. 도대체 선禪이 무엇이관데 이제는 서구의 엘리트들도 관심을 기울이며 선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출가조차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선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āna에서 나온 말로, 인도의 고전 속어인 팔리어로는 쟌나jhāna라고 하는데 그것을 한문으로 소리번역한 것이 선나禪那요
선禪이다. 최근 들어 일본의 선이 미국 및 유럽에 영향력을 미치면서 서양세계에 널리 소개되었다.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서방세계에 일본어 발음
‘젠’이 받아들여져 영어권에서는 선을 ‘젠Zen’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그 영어식 표기를 ‘선Seon’으로 하고
있다.
선의
산스크리트 원어 드야나는 ‘고요히 사유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 말을 ‘사유수思惟修’라고 뜻번역하기도 하였다. 마음을 어느 대상에
집중한 상태에서 고요히 사유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유는 사유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것저것 이성적으로 따져서 들어가는 가치판단이
개입된 사유가 아닌 고요히 자기 자신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마음 작용이라고 보면 좋다.
하나하나
주의깊게 관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유의 과정이 깊어지다 보면 마음이 한 가지에 집중되어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안과 밖이 전일한
상태가 유지된다. 그것을 산스크리트어로 사마디samādhi라 하며, 한자로 소리번역한 말이 삼매三昧요 그 뜻번역은 정定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선은 선과 정의 합성어인 선정禪定이라 해야 하나 보통은 선이라 한다. 선사들은 한 점 미동도 없는 이 선정의 힘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지혜를 돈발시켜 사물의 실상을 올바로 보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에 이른다. 그래서 옛날 중국의 한 선사는 “선정의 힘이 없다면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눈이 어두워지고 허무에 떨어져 생사의 세계에 유랑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좀더
쉽게 말해 보겠다. 이것을 필자의 체험에서 나온 얘기다. 선정의 힘은 심신을 평정한 상태에 이르게 해 동요됨이 없이 사태를 바로 보게 해준다.
심신이 동요되면 우리는 절대로 나에게 직면한 현실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마음이 들떠있기에 헐떡거리기 다반사이며 그럴수록 우리는 문제의 본질에
저 만치 미끄러지기 마련이다. 급하고, 거칠며, 화를 내고, 원망한다. 그러다 보면 일그러져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참 보기 싫은
모습이다. 선정은 적어도 이렇게 우리의 몸과 마음이 동요되는 것을 막아준다. 동요됨이 없으면 우리는 현실에 바로 깨어 있게 된다. 현실에 깨어
있음,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순간적인 깨달음이라 할지라도 그때 느끼는 리얼리티는 분명 자기화된 깨달음이다. 리얼리티가 내 몸과 마음속에서
리얼라이제이션한 것이다. 깨달음이 저 멀리, 저 동구밖 어디에, 저 하늘 저편에 있는 것을 절대 아니다. 깨달음은 내 속에, 이 현실
속에 있다. 아니 삼라만상은 모두 깨닫고 있다. 우리가 바로 깨어 있지 못해 그것을 못 볼 뿐이다. 선사들은 이러한 도리를 어록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그 깨달음이, 그 주인공이 우리 눈앞에, 면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보지 못한다. 왜? 착각과 망상, 시비와 조작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허물이 씌어 있기 때문이다. 그 허물을 벗어버리려면 선정의
힘이 필요하다. 심신이 일여한 상태에서 맑은 물처럼 고요해 져야 한다. 그 고요한 맑은 물 속에 모든 것이 역력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여하튼
선정의 힘이 생기면 호흡도 안정되어 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온 몸에 따스한 온기가 흐른다. 자연히 건강해 진다. 몸속에 생명의
흐름을 느낀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추위와 더위에 대해서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다.
선정에
들어가는 방법에 따라 선은 여러 가지 갈래로 나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한번 언급할 것이다. 단 오늘날 한국불교가 간화선을
전통적이면서도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간화선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아주 간단히 말해 보련다. 그것은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긴
화두를 들고 깊이 사유해 들어가는 것이다. 생각이 끊긴 그 자리에서 생각하기다. 사유가 끊어진 자리에서 사유하기다. 일단 이 정도로
그치겠다.
이러한
간화선은 조사선에서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다음번에는 이 조사선, 즉 선종에 대해서 말해 보겠다.
첫댓글 제가 올리고 있는 초심자를 위한 교리해설은 고명석 선생님이 붓다와 떠나는 책여행에 연재하시는 글을 옮겨온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