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도 39번도로 벽제 장묘사업장에서 고양시청 원당역 방향으로 가다보면 왕릉골이 있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릉이 있는 곳이다. 왕비 順妃 盧氏가 합장 되어있다.처음에는 1394년 태조 3년, 고릉(高陵)이라고 하였다. 조선이 역성혁명으로 왕조가 멸하자 공양왕이 군으로 강등되어 그리 불렀다. 조선태조는 민심을 우려 공양왕을 살려 두었으나 가시같아서 기회를 두고 처치 하려고,뒤를 몇년동안 밟았다. 34대 고려왕이 심복신하와 같이 거지처럼 행세, 눈치를 보며 살해 위혐을 안고, 고양시 현 동국대 한방병원 근처 견달산 주변을 배회 중 (길상사)吉祥寺에 은신 하게되니, 스님들이 공양하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게 되었다. 성씨를 전(田), 전(全),옥(玉), 용(龍)으로 바꿔가며 살기를 여러번 하여왔으나 소용 없었다. 그래도 스님은 극진하였다. 심복신하와 스님들은 마다하고 공양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왕이 보이질 않았다. 스님이 계속 찾았는데 며칠 후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여 가보니 그개는 왕이 데리고 다니던 개였다.
★주변을 살피니 연못에 왕과 왕비가 나란히 누워 죽어 있었다. 심복과 스님들은 위험을 의식하고 조용히 견달산 기슭 양지바른 곳에 일반인처럼 묻었다. 후일 나리에서 발굴하여 현자리에 있다고 한다. 한편 조선의 정식 기록에는 조선태조 3년 1394년 강원도 상척 유배지 근덕면 궁촌리에서 살해 그 곳에 묻었으니, 여기도 공양왕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스님의 입장에 신빙성을 두어 고양시 원당동 왕릉골에 유해를 발굴하여 사적191호로 관리하고 있다. 한편 역사에는, 얼마 후 시신을 확인 하기위해 한양으로 가져와 원당동 현지점에 묻었다고 하나, 그 먼곳에서 한양까지 가지고 와 시신 확인을 하였다는 것은 의아 하다고 한다.
스님이 식사릉 공양한 절이 있는 마을로 지명을 食事洞이 아니고, 食寺洞으로 명명 되였다.
★ 서울 은평구 역촌동을 지나 용두동 서오릉을 지나 구 원당역과 벽제역인 교외선을 만나 건너 벽제 초등학교 방면 구길로 들어서 얼마 아니가서 좌회전 하여 2 km 정도 달리면 나타난다.
공양왕릉 주변에는 영일정씨 감무공파 후손 9세조 판결사공파(諱 自源)의 동생들 3분, 自洋, 自濟. 自淑의 묘가 주면에 가까이 다 있다. 단 판결사공의 묘는 파주 통일초교 부근에서 개발로 인천 연수구 청량산하에 있다.
공양왕의 부마 아들이 외손부로 연일 정씨를 들였으나 때가 때인지라 잘 알려지지 아니 하였다 한다.
첫댓글 종친들이 돈들여 가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