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 2015-08-23 [제2958호, 16면]
■ 돌아온 선비
모름지기 지난 호의 주인공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수축이 빛을 발한 것은 전적으로 에즈라 대사제의 활약과 꿍짝이 맞았기 때문일 터다. 느헤미야와 에즈라! 동시대의 민족적 과제를 예리하게 직시한 두 인물. 사실 성경의 순서로 보나 역할의 질적 비중으로 보나 에즈라가 ‘먼저’다. 하지만 우선권을 부여하는 배려보다 ‘대미’를 장식하는 영예를 돌려주는 것이 더 마땅한 예의일 듯싶어, 한 차례 늦게 에즈라를 배워본다.
에즈라 역시 느헤미야처럼 바빌론으로 끌려간 포로의 후예로서 어느덧 타향살이 네댓 세대쯤에 해당하는 인재였다. 그는 대사제 아론의 후예로, 모세의 법에 능통한 학자였다. 그에게는 불같은 민족혼이 살아있었으니, 학자도 그냥 학자가 아니라 우리식 표현으로 꼿꼿한 ‘선비’였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그는 야훼의 법을 깨쳐 몸소 실천할 뿐 아니라, 그 법령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하느님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던 에즈라를 도와 소청을 아뢸 기회를 허락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다스린 지 7년째 되던 해에, 그의 칙령을 받들고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에즈 7,8 참조).
왕에게서 받은 칙령은 다음과 같았다.
“이제 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이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의 모든 재무관에게 명령을 내린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내리신 법의 학자인 에즈라 사제가 그대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김없이 해 주어라… 하늘의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의 하느님 집을 위해 빈틈없이 수행하여, 임금의 왕국과 왕자들에게 진노가 내리는 일이 없게 하여라”(에즈 7,21-23).
키루스 왕의 자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이런 신앙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주변의 종교적 정황으로 보건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법에 관한 전권을 에즈라에게 맡겼다(에즈 7,25-26 참조).
에즈라 일행은 무사도착을 기원하며 아하와 강가에서 다함께 단식기도를 한 후 출발하여, 예루살렘에 도착 후 감사의 번제를 올린다. 이는 그가 얼마나 율법을 충실히 준행하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바로 뒤이어 귀국한 느헤미야 총독이 성전 성벽을 수축하고 있는 동안, 에즈라는 흐트러진 율법을 집대성하며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일에 전념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 작업을 ‘유다이즘의 출발’로 보기도 한다.
■ 말씀으로 민족혼을 재건하다
느헤미야 주도하에 성벽 수축이 끝난 뒤, 백성들은 대사제 에즈라에게 모세의 율법서를 낭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들은 수문(“물 문”) 앞 광장에 모여들었다(느헤 8,1-2 참조). 때는 정확히 기원전 444년 화해의 날이었다.
“그는 ‘물 문’ 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느헤 8,3).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 이렇게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독해 주는 것은 일생 처음 있을까말까 하는 행운이었다. 요시야가 백성들 앞에서 율법을 낭독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 이후 종적을 감췄다. 그런데 이제 에즈라가 율법을 준비해서 ‘아침에서 저녁까지’,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백성들에게 낭독해 주었던 것이다.
에즈라가 모두 쳐다볼 수 있도록 높은 자리에서 책을 펴들자 온 백성은 일어섰다. 에즈라가 높으신 하느님 야훼를 칭송하자 백성도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보조 역할을 맡은 레위인들이 율법을 풀이하며 가르쳐주었다. 백성들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주었다. 백성들은 알아들었다(느헤 8,4-8 참조).
말씀의 은혜에 벅차,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다. 이에 에즈라와 레위인들이 백성을 다독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느헤 8,9).
과연 백성들은 눈물을 그쳤을까.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내린 말씀이 고마웠던 것이다. 이는 누구도 대사제 에즈라에게서 박탈할 수 없는 공적이었다.
이렇게 에즈라는 율법을 새로 교육하면서, 유다인의 종교적 절기와 국가 기강을 다시 세우는 일에도 앞장선다. 그는 당시 암묵적 관행이었던 통혼과 혼혈 문제를 율법에 의거하여 원칙대로 단호하게 처리한다. 그는 사제, 레위인들, 지도자들과 관리까지 통혼하여 혼혈을 조장한다는 보고를 받고서, “의복과 겉옷까지 찢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뜯고는 넋을 잃고 앉아” 있다가(에즈 9,3 참조) 먼저 하느님의 전 앞에 쓰러져 죄를 고백하고 울며 기도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다(에즈 10,1 참조). 이어 그는 외국 여자와 그 몸에서 얻은 자식들을 다 내보내는 결정을 하도록 백성들과 원로들을 설득한다(에즈 10,3 참조).
대사제 에즈라는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유다인의 민족혼을 재건하였다. 그는 아모스 예언자를 상기시킨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에즈라는 적어도 수백 년 지속되었을 이 말씀의 가뭄을 종식시킨, 세기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를 묵상하자니 저 역사적 ‘화해의 날’ 저녁 그가 홀로 바쳤을 기도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보았습니다,
굶주림의 본색.
일찍이 아모스가 미리 봤던 그대로,
양식이나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이 끊겨
드러난 벌거숭이 몰골들을
목도했습니다.
인파 북적대는 저잣거리,
먹거리 놀거리로 흥청거려도
휑한 마음의 빈자리 메울 길 없어
바쁜 척 비틀거리는 허무의 군상들!
그 회칠한 결핍, 부족, 고갈의 잔해들은
차라리 초라·초췌했습니다.
또 보았습니다,
말씀 기근의 민낯.
양심의 씨줄 날줄 흐트러진 들쭉날쭉의 난장판에서
법석대는 짝퉁들의 향연을
목격했습니다.
비(非)인간, 비(非)이성, 비(非)진리가
백주대낮에 버젓이
‘휴머니즘’, ‘인권’, ‘종교’의 이름으로 둔갑하여
순진한 영혼들을 등쳐먹는 악독한 음모들!
그 얄팍한 꼼수에 휘둘리는 선량들의 어리석음은
이 못난 사제(司祭)의 장탄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보았습니다.
해원(解寃)의 감격.
기록적 100년 기근 끝자락에 내린 말씀 소나기에
두 손 높이 쳐든 채 부동의 온 몸으로
한 방울 한 마디까지 빨아들이려는 몰입을
공감했습니다.
소리로도 허기가 채워지고,
의미로 진기가 충전되고,
깨달음으로 존재가 각성됨에,
서로 얼싸안고 한 골육의 혼을 입맞춤하는 생명 의식(儀式)!
흐르는 눈물 속에서는 세 가닥 빛줄기
환희, 위로, 희망이 번득이고 있었습니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