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게에 가끔씩 들르는 사장님 한분이 있는데
그분은 일본을 대상으로 무역업을 수십년째 하고 있다고 한다.
자주 뵙는 분이기에 어느날 술자석에 잠깐 합석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장님 왈
지난번 일본에서 사업 파트너란 일본 고급 술집에 갔더란다.
이런곳은 꼭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 술 시중을 드는데 술맛이 입에 딱따다 따봉이고
사르르 한다 뭔다 한다....
최대 접대좌석은 꼭 일본 전통의상 기모노 차림의 여성이 술 시중을 든다고 한다.
한국 요정에서도 한복차림의 여성들이 시중을 들 듯이 말이다.
나도 예전에 일본 10여차례 이상 왔다갔다 하면서, 고놈의 쩐이 딸리다보니 동경시내
신주쿠거리 제일 허름한 구석에서 민생고는 해결하고,
잠은 전철 한시간 정도타고 나가 동경시내 외곽에서 싼곳을 찾아 자곤 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사실 일본인 조차도)은 기모노가 일본여성의 전통의상이라고
알고 있는데 내가 알기론 좀 다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일본사에 관한 몇가지 문헌만 봐도 말이다.
일본 여성들도 우리 삼국시대에 비유되는 에도시대나 그이후 헤이안 시대에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복장과 엇 비슷한 것 같다.
이 시대 일본의 각종 삽화나 민화 그림을 보자면 통이 긴 치마는 우리 고구려 여성들의
의상과 흡사하다.
물론 여성들의 작업복은 이보다 더 단순하지만....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기모노 복장은 기존의 에도시대나 헤이안시대
때보다 특이한 것이 허리에 담요나 베게같은 것을 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괴상스런 복장은 언제부터 생겨 났을까????
그리고 이것의 용도는 뭘까 ??
혹자는 베게라고도 하지만..................
일본은 우리와는 달리 전체적인 통일국가가 대단히 늦은 편이다.
지방단위 쇼군이라 부르는 토호 군주들이 나름대로 자기지역을 지배하다보니
이웃과 늘쌍 싸우고 가뭄이나 먹고살기 힘들면 지방단위 전쟁이 끊이지 않다보니
나들이 할때나 심지어 잠 잘때도 칼을 차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사무라이 문화가 형성된 이유이기도 한다.
최초의 일본 전체통일은 우리에게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이다.
물론 오늘날 일본열도 전체는 아니지만 동북부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오랜 전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을 완성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완성했다고 하나 사실은 오다 노부나가가 90%이상
통일을 해놓고 갑자기 죽는 바람에 이 토요토미가 바통을 이어받아 나머지 지역을
평정했던 것 뿐이다.
어찌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란 녀석은 손도 안대고 코 풀어 일본을 얻은 꼴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법..
토요토미가 이제 일본전역을 통일했다고는 하나 지난 100여간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인구는 많이 줄었고, 특히 남자들이 많이 죽어 마을마다 과부가 넘처났다고 한다.
토요토미는 인구증가가 최대 과제라 뭐 묘책이 없고 해서
전국에 특별명령을 내렸다는 데...
그 내용이 참 걸짝이다..
“오늘부터 짐이 일본의 모든 과부와 처녀들에게 명령하노라...
모든 과부나 시집안간 처녀는 외간 남자들이 한번 하자고 하면, 낮이곤 밤이곤 어느때나
반드시 아랫도리를 대 주어 반드시 애기 만드는 일에 협조해야 한다.
이것은 곧 애국하는 길이며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니
이를 어길 경우 참수형에 처하노라... 이 것은 짐의 명령이도다...“
이리하여 전쟁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남자들은 여복은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이러다보니 기혼자를 제외한 여성들은 외출할 때 남자들이 하자면 아무데서나
그 짓거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사업할 때 아무 땅바닥에나 누울려다 보니 외출할 때 등에다 담요하나씩 차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고, 아에 속옷 빤스까지 안 입고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기모노 유래이며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도 기모노를 입을 땐
빤스는 안 입는다고 한단다..
이러다보니
여인네들은 애가 서너명씩 태아나면 아비성씨를 붙여 주어야 하겠는데
애비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어,
충성사업 하면서 애기 만들 때 그 장소 기억을 더듬어
나무 밑에서 만들었으면 木下(기노시타)
산 속에서 만났으면 山本(야마모토), 대나무 밭이면 竹田(다케다)
큰 대나무 밑이라면 大竹(오타케), 콩밭이면 太田(오타)
동네 우물가라면 村井(무라이), 산인지 들판인지 가물가물하면 山野(야마노)
끝내고 보니 개천이 보인 것 같으면 川邊(가와베)
숲속에서 만난 것 같으면 森永(모리나가), 보리밭이면 麥田(무기타)
도랑옆이면 池尻(이케지리), 시장통이면 市場(이치바),
밭 가운데이면 田中(다나까), 가까운 바다이면 內海(우츠미)
절간구석이면 奧寺(오쿠테라), 측백나무 아래면 柏木(카시와키),
오동나무 아래면 桐本(키리모토), 작은섬 이면 小島(코지마),
작은 숲속덤불이면 小林(코바야시), 버드나무 아래면 高柳(타카야기),
개천가 이면 皆川(미나가와), 시냇가 물위면 水上(미나카미).....등등
이렇게 지난 기억을 더듬어 애비 성씨를 붙이다 보니
형님 동생간 성씨도 다 다르고, 고놈의 현재 일본 성씨만 해도 10만개가 넘는 다고 하니
그당시 머슴아들 연장 지독히도 질러댄 것 같다.
이러다 보니 어찌 촌수또한 시골동네 똥개 판 촌수보다
더 개판이 아니될 수밖에...
그중 특히 밭 전(田)자가 유난히 많은 데, 아마 논에서는 곤란하니
주로 밭에서 많이 애국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시기 개같이 사정없이 태어난 녀석들 팔자를 쪼까 보아 할것 같으면
20년후 커서 임진왜란 당시 주력병사로 참전하여, 우리 이순신 장군한테 한산섬 노량앞바다
그리고 진도 울돌목에서 거의가 남해안 바다속에 수장되어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으니...
애 고오~~~통재라..
이 자식들 또한 출생도 이렇게 참 더럽다 보니 팔자또한 참 기구하게도 보신탕집 개 팔자
꼬락서니로 생을 마감한걸 누 누구를 탓 하리라.............
이리하야 오늘날 보는 일본의 기모노와 성씨에 얽힌 전설이올시다..
일본의 기모노는 탄생자체가 이렇게 요상스럽다 보니
어찌 자태가 곱디고운 우리 고유의 한복과 쨉이 되겠냐 말이다.
나도 소시적에는 아랫도리 연장이 짱짱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 일본 그 시절에 태어났더라면.. 아이고오~~
100명 이상은 만들었을까 ????
하기야 우리나라 변 서방이(변강쇠) 그때 일본에 있었다면
과부고 뭐고 다 죽었을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