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간정사 : 대전 동구 가양동에 있는 남간정사(南澗精舍)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이
1683년, 나이 77세에 지은 별서(別墅)정원으로 송시열이 후학을 가르치고 학문을 완성 했다는 곳입니다..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장판각과 전시관, 서원 등 16동의 건물을 복원해 우암사적공원으로 조성되었습니다..
남간정사로 들어가는대문은 잠겨있어 담너머로 감상하며 힘겹게 찍었습니다..
봄과가을의 경치가 아주뛰어나 가족과연인들이 많이오고 운동과산책을 하러오는 사람들이 아주많네요...
우암 송시열이 말년에 제자를 가르치던 남간정사가 정면으로 눈에 들어옵니다...
꽃길사이로 힘겹게올라가는 할머니의 등굽은허리가 애잔하게 보입니다..
활짝핀벛꽃과 고택의지붕이 묘하게 어울립니다...
남간정사 오른쪽에는 일제시대에 소제동에서 옮겨 지은 건축미가 뛰어난 기국정이 자리잡고있습니다..
남간정사 바깥의 모습입니다...
송시열은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율곡(李栗谷)의 학풍을 계승한 노론의 영수이자 조선 인조에서 숙종 대까지의 문신이며 성리학자이며
본관은 은진, 호는 우암(尤庵)으로 충청도 옥천에서 출생하여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27세 되던 인조 11년(1633)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고, 2년 뒤인 1635년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들어갔는데 이때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훗날 효종으로 등극하는 봉림대군과 특별한 교분을 쌓아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다.
특히 효종의 북벌정책을 지지하며 사림(士林)을 대표하는 중심인물로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송시열의 성격은 직설적이고 솔직담백하여 뒤에서 남의 흉보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특히 최고의 스승으로 여긴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언동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단호히 비판하여 정적을 많이 만들었다.
이쯤 되면 일반인들에게 무척 두려운 존재였을 텐데 자신을 찾아오거나 학문을 배우려는 이에게는 누구나 깎듯이 열린 자세로,
편견없이 대하였다. 여성에게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자신의 며느리와 딸에게 당시 천대받았던 언문(言文, 한글)으로 된
간찰과 서책을 보내 읽도록 하였고, 한자를 모르는 아녀자를 위해 『사서삼경』과 『주자가례』를 언문으로 번역하여 집필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우암 송시열
16대 인조부터 17대 효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등 4임금을 섬긴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한 사람의 이름이 3000번 이상
나오는 것은 오직 그 뿐이고, 전국 42개 서원에서 그를 배향하고 있다는 사실 등으로 그의 존재를 평가할 수 있다 <퍼옴>
괴산화양동에도 우암송시열의유적지인 암서재와 읍궁암이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