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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사액서원 (賜額書院) 소수서원 [紹修書院]
사적 제55호
경북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내죽리(內竹里)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원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현(儒賢) 안향(安珦)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1543년(중종 38)에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그후 1544년 여기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소수서원 강학당
소수서원 경렴정
소수서원 광풍정
소수서원 성생단
소수서원 지락재
소수서원 일신재와 직방재
소수서원 학구재
소수서원 숙수사지 당간지주
소수서원 취한대
소수서원 경자 바위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
그 뒤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의 영정(影幀:국보 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485)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소수서원의 역사는 1543년(중종36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회헌의 사당을 지으면서 시작됐다.
신라의 대찰 숙수사의 터였다. 당시 이름은 백운동서원. 이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교육기관으로서
나라의 합법적인 인정을 명종 임금에 청했다. 1550년 명종은 친히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란 편액을 써서
하사했다.
'소수'란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의미.
이렇듯 소수서원은 '학문의 중흥'이란 큰 임무를 띠고 탄생했다. 그리고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나갔다.
조선의 인물 절반은 영남 출신이고, 영남 인물의 절반은 퇴계의 문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사액서원 (賜額書院)
조선시대에 왕으로부터 서원명의 현판과 노비·서적 등을 받은 서원.
서원의 건립은 본래 향촌유림들에 의하여 사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서원이 지닌 교육 및 향사적(享祀的) 기능이
국가의 인재양성과 교화정책에 깊이 연관되어, 조정에서 특별히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그에 따른
서적·노비 등을 내린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특전을 부여받은 국가공인의 서원을 사액서원이라 하였다.
1550년(명종 5)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으로, 명종이 <백운동서원>에 대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어필(御筆) 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노비를 부여하여 그 효시가 되었다.
서원은 크지 않다. 정문을 들어서면 백운동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 강의실 강학당이 있고 왼쪽에 문성공묘와
전사청이 자리하나. 강학당은 지금 대대적인 보수공사 중이다. 그 뒤에는 스승들의 거처인 일신재와 직방재,
우측으로 기숙사인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다. 기타 서재와 선현들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 문 바깥의 휴식처인
경렴정과 취한대 등. 이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건물 배치의 자유스러움과 자연스러움에서 당시 학자들의 기품을 느끼게 된다.
서원 입구에는 숙수사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우뚝 서 있다. 유생의 터에 보존돼 있는 불교의 상징에서
당시 학자들의 너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모든 건물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4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예 자연속에 포함된 느낌이다.
서원 옆에는 낙동강의 작은 줄기인 죽계수가 흐른다.
개울 건너편 아담한 바위에 경(敬)자 가 붉게 새겨져 있다. 주세붕이 직접 쓴 글자이다.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의 첫 글자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다.
소수서원의 교훈이자 학문의 목표이기도 하다.
당간지주 [幢竿支柱]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세운 두 개의 받침대로,
그 대강의 형태는 지주(支柱) 밑에
사각형의 대석(臺石)이 마련되고
지주 사이에 원형 간대(竿臺)를 놓아
지주를 고정시킨 것이며,
대표적으로 분황사(芬皇寺)의 당간지주가 있다.
* 소수서원(紹修書院)에는 비극적인 속설이 전합니다.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로 알 수 있듯이
이 곳엔 숙수사(宿水寺)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관군(官軍)의 방화로
절은 폐허가 됐고, 그 자리에 서원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세조 3년(1457년) 10월, 단종 복위 거사가 실패하자
본거지였던 순흥도호부 사람들이 토벌군에 떼죽음을 당한
사건을 역사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고 부릅니다.
소수서원의 지척에 당시 화를 입은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을 제사지내는 금성단(錦城壇)이 있으니
그럴싸한 추측입니다.
하지만 소수서원에서 발굴된 불상들은 ‘숙수사의 참화’가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