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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2월 14일 토요일
[(백)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1542년 무렵 에스파냐 아빌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매우 가난하였던 그는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그 뒤 요한은 ‘아빌라의 성녀’로 잘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영성 생활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1591년 세상을 떠난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가르멜의 산길』,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은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말씀의 초대
집회서는, 엘리야 예언자는 불 마차를 타고 하느님께 올라갔는데, 이것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부활의 희망이라고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고 제자들에게 알리신다(복음).
제1독서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48,1-4.9-11
그 무렵 1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2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3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
4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9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10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0-13
산에서 내려올 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2,1-10ㄱ)와 복음(루카 14,25-33)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집회 48,10)라는 말씀이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그가 구세주 예수님을 준비시키고자 왔다는 사실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 또한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세례자 요한처럼 다루어질 것입니다. 죄인들이 그분께 돌아와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도, 그분의 말씀과 기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나도,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원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카야파라는 대사제의 저택에 모여,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하였다”(26,3-4).
정작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던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던 사람들’, ‘하느님과 아주 가까워 보이는 이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늘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성체 앞에 머물며 기도하는 삶,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삶 안에서 믿음은 자라고 커 나갑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면 좋겠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1542~1591)이 살았던 중세 시대는 수도 생활의 부흥기를 지나 쇠락기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더 이상 수도자들에게 있어 완덕에 대한 열망이나 하느님 중심의 삶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타성에 빠진 수도자들의 얼굴은 냉랭했고, 게을러빠진 수도자들은 자꾸만 회칙을 완화시켰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충실하고 올곧은 가르멜 수도자 요한은 원칙대로! 를 강조하며 고난과 형극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안토니오 수사를 비롯한 마음이 맞는 수도자 몇 명과 더불어 엄격한 금욕과 극기,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안락하고 쾌적한 대 수도원 건물을 뒤로하고 다리를 뻗기도 힘들고 서 있기도 힘든 작은 방에서 함께 생활했는데, 여기저기 비가 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외출을 할때는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이러한 쇄신된 삶을 살아가면서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동료 수도자들을 회개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자연스레 얼굴과 뱃속에 기름이 가득한 게을러빠진 동료 수도자들에게 미운털이 깊이 박혔습니다. 자신들의 비행이나 과오는 덮어둔 채, 갖은 방법으로 요한 사제를 괴롭혔습니다.
총회가 개최되자 요한 사제를 오해한 총장은 그를 톨레도 수도원의 깊은 지하 감방에 가두었습니다. 그가 총회에 나타나서 어떤 행패를 부릴지 몰라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사제는 갖은 학대와 모욕을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사악하고 매정한 동료 수도자들을 향해 일언반구도 항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바꾸었습니다. 부족한 내게 겸손의 덕을 쌓게 하는 은인!
이토록 탁월한 성덕은 오래가지 않아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머지않아 요한 사제의 결백과 인품이 알려졌고, 비오 5세 교황과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은 그의 이상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특수한 가르멜회를 정식으로 인준했습니다.
혹독한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요한은 항상 초긍정 마인드로 일관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십자가를 꼭 끌어안았으며, 십자가 안에 유일한 구원의 길이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은혜롭고 신비스러운 성인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며,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보다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인도하는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의 유력 정치인이며, 차기 대통령 후보 지지율이 가장 높은 야당 대표에게 범죄 혐의가 있다고 기소되어서 재판받고 있습니다. 2024년 6월 12일 기준으로, 총 7개의 사건에서 11개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주요 혐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위증교사 혐의가 있습니다. 2018년 자신의 재판에서 증인에게 거짓 증언을 요구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검찰은 징역 3년을 구형했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2002년이니 22년 전의 사건입니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있습니다. 2024년 11월 1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전직 대통령 후보였고, 현직 대통령과 근사한 표 차이로 낙선했습니다. 낙선한 후보에 대해서 공직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미 패했기 때문입니다.
제삼자 뇌물 혐의가 있습니다. 쌍방울 그룹의 대북 송금 과정에서 제삼자 뇌물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배임 혐의가 있습니다. 대장동 개발사업 과정에서 약 4,895억 원의 배임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백현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 성남FC 후원금 의혹 등 여러 사건으로 기소 되어 재판받고 있습니다. 대부분 혐의는 10년 가까이 된 일들입니다. 야당에서는 유력 정치인에 대한 무리한 기소와 탄압이라고 합니다. 여당에서는 그런 사람은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검찰이 무능하거나, 유력 정치인에 대한 탄압이라고 여당의 정치인이 이야기했습니다. 300번 넘게 압수수색 했으면 결과를 가지고 빨리 결론 내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재판을 끌어오니 탄압이란 명분을 준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2019년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예술이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강은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정치도 민생과 국가를 위해 여당과 야당이 협치하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습니다. 이번 비상 계엄 파동도 잘 마무리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참된 신앙의 길을 걸었던 ‘엘리야’를 칭송합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놓고 대결하였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그 수가 많았지만 패하였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느님께 청하여 비가 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봉헌을 칭찬하며 하느님께 청하여 가뭄이 끝날 때까지 기름과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보는 중에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삶은, 엘리야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엘리야가 다시 돌아왔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돌아온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점점 작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알렐루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우리는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헤로데는 많은 정보와 권력을 가졌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았지만,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율법과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는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선과 교만으로 눈이 멀어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없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왔던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고 경배하였습니다. 가난한 목동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들판을 달려 예수님께 경배드렸습니다.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메온과 한나도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오직 다만 끝까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17,12)
오직 믿음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믿기 때문에
불신이 비난할지라도
끝까지 믿을 수 있기를
오직 희망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희망하기 때문에
체념이 붙잡을지라도
끝까지 희망할 수 있기를
오직 사랑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사랑하기 때문에
무관심이 유혹할지라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오직 진실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진실하기 때문에
거짓이 가릴지라도
끝까지 진실할 수 있기를
오직 정의가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정의롭기 때문에
불의가 더럽힐지라도
끝까지 정의로울 수 있기를
오직 자유가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자유이기 때문에
억압이 짓밟을지라도
끝까지 자유일 수 있기를
오직 평화가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평화이기 때문에
폭력이 할퀼지라도
끝까지 평화일 수 있기를
오직 품음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품기 때문에
내침이 거부할지라도
끝까지 품을 수 있기를
오직 돌봄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돌보기 때문에
버림이 팽개칠지라도
끝까지 돌볼 수 있기를
오직 베풂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베풀기 때문에
탐욕이 움켜쥘지라도
끝까지 베풀 수 있기를
오직 섬김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섬기기 때문에
폭정이 삼킬지라도
끝까지 섬길 수 있기를
오직 살림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살리기 때문에
죽임이 덤빌지라도
끝까지 살릴 수 있기를
오늘의 성인
성 요한(십자가의)(John of the Cross)
신분 : 신비가, 교회학자
활동연도 : 1542-1591년
같은이름 :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은 1542년 6월 24일 에스파냐의 아빌라(Avila) 근교 폰티베로스(Fontiveros)에서 직조공이었던 곤살로 데 예페스(Gonzalo de Yepes)와 카탈리나(Catalina Alvarez) 사이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극심한 빈곤과 궁핍 속에서 생활하였고 아버지와 형 루이스(Luis)는 요한이 어릴 때 사망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어머니와 함께 메디나 델 캄포(Medina del Campo)에 정착해 살며 교육을 받았고, 17세 때에는 그곳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메디나 병원장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1563년 그는 메디나 델 캄포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이듬해에 성 마티아의 요한(Juan de Santo Matia)이라는 수도명으로 서원을 하였다. 1564년부터 4년간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567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성 요한은 고향집을 찾았을 때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를 만났다. 그 당시 카르멜회의 환경과 생활 방식에 만족하지 못해 더 고적하고 깊은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카르투지오회로 옮기고 싶다는 뜻을 성 요한이 피력하자, 성녀 테레사는 그를 설득하여 카르멜회에 남아 함께 개혁운동을 하자고 권유하였다.
1568년 11월 28일에 그는 두루엘로(Duruelo)에서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도움으로 개혁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성 요한은 카르멜회의 최초 규칙으로 돌아가 실천하겠다는 서약을 하였으며, 이때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으로 바꾸었다. 그는 열렬한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하면서 인근 마을들에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년 뒤 두루엘로에 최초의 맨발의 카르멜회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개혁 카르멜회의 보급을 위하여 진력을 다하던 중, 1577년 10월 2일 수도회 개혁을 반대하던 완화 카르멜회 수도자들에 의해 납치되어 톨레도(Toledo)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1578년 8월까지 9개월간 ‘어두운 밤’을 체험하였다. 이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신비적, 영성적, 문학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감옥 안에서 그는 몇 편의 시를 썼다. 9개월 만에 감옥에서 탈출한 그는 개혁 카르멜회의 여러 직책을 맡아 활동하는 한편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1579년 맨발의 카르멜회는 인정을 받았고 수도원도 세웠다. 그는 바에사에 개혁 카르멜회 대학을 세우고 학장이 되었으며, 1582년에는 그라나다(Granada)의 로스 마르티레스 수도원의 원장을, 1585년에는 안달루시아(Andalucia) 관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1590년 카르멜회의 분쟁이 재현되었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요한은 1591년 6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병에 걸려 그대로 에스파냐에 남게 된 그는 그 해 9월 말 우베다(Ubeda) 수도원으로 옮긴 후 병고와 정신적 고통을 겪은 후 12월 13일 밤 자정이 지난 무렵에 사망하였다.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중 한 명이며, 그의 저서들은 가장 유명한 영성신학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카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 등이 가장 유명하다. 요한은 1675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교회학자로,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에스파냐 언어권의 모든 시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아넬로 (Agnellus)
활동년도 : +596년
신분 : 수도원장
지역 : 나폴리(Napoli)
같은이름 : 아그넬로, 아그넬루스, 아넬루스, 아녤로, 아녤루스, 앙넬로
성 아넬루스(또는 아넬로)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부근에서 은수자로서 종교적인 생활을 시작하였고, 그 후 나폴리 인근 산 가우디오소(San Gaudioso)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사라센의 침입 때 기적으로 나폴리를 지킨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 아넬루스는 나폴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니마툴라 카삽 알하르디니(Nimatullah Kassab Al-Hardini)
활동년도 : 1808-1858년
신분 : 신부, 수도승
지역 : 레바논(Lebanon)
같은이름 : 니마뚤라, 유세프
성 니마툴라 유세프 카삽 알하르디니(Nimatullah Youssef Kassab Al-Hardini, 또는 니마툴라 카삽 알하르디니)는 1808년 레바논의 하르딘(Hardin)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동방 가톨릭 교회들 가운데 하나인 마로니트(Maronite) 전례의 수도원 전통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의 형제들 중 네 명이 사제나 수도승이 되었고, 니마툴라 역시 1828년 많은 수도승들이 모여 있는 카디샤(Qadisha, 일명 신성한 계곡 Holy Valley) 부근 퀘자야(Qozhaya)에 있는 성 안토니우스(Antonius)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수련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2년간 머물렀고 니마툴라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수련기 중에 그의 개인적 · 공동체적 기도생활은 더욱 깊어졌고, 직접 노동에 헌신하며 동시에 책을 제본하는 방법도 배웠다. 그는 특히 성체성사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유 시간에, 때로는 잠자는 시간을 희생하면서도 종종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팔은 십자가 형태로 들어 올린 채 눈은 성체를 모신 성합에 고정시킨 모습으로 발견되곤 하였다. 1830년 11월 14일 첫 서원을 한 니마툴라는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도록 레바논 북부 크피판(Kfifan)에 있는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와 유스티나(Justina)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1833년 12월 25일 그는 사제품을 받고 수련소의 책임자이자 교수가 임명되었다.
1840년과 1845년의 두 번의 내전 동안 그는 백성들과 함께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그의 형제인 엘리샤(Elisha) 신부가 그에게 은둔소로 들어갈 것을 제의했을 때 그는 공동생활 속에서 덕을 쌓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과를 준수하며 매일의 시간을 순교자다운 자세로 살았다. 수도승은 언제나 동료 수도승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며 온갖 추문의 여지로부터도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반면 은수자들은 홀로 살며 모든 외부적인 유혹으로부터도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이 기간은 그의 영성생활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고, 그는 레바논과 그의 수도회를 위해 하느님께 스스로를 봉헌하며 살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가장 위대하다’는 모토를 갖고 살았으며, 종종 동료 수도승들에게 이를 반복해 말하곤 하였다.
니마툴라 신부는 때때로 상급 책임자들로부터 스스로에게는 너무 혹독하고 다른 수도승들에게는 너무 자애롭고 관대하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는 친교와 형제애라는 단어 안에서 성성(聖性)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수도승의 첫 번째 관심은 밤이든 낮이든 형제 수도승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라는 주목할 만한 말을 했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그의 강인함의 원천인 동정 성모 마리아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성모님의 거룩한 이름을 반복해 부르는데 있어 결코 지치지 않았고, 1854년 교회에 의해 믿을 교리로 선포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의 신비를 그의 마음 속 아주 특별한 곳에 간직해 두었다. 삼종기도 후에 그는 종종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는 축복받으소서.”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1845년에 그는 교황청에 의해 수도회의 부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니마툴라 신부는 총원장에게 수도승들이 그들의 학문에서 더욱 진보할 수 있도록 예수회에 의해 그하지르(Ghazir)에 새로 설립된 대학에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부원장으로서 두 번 이상의 임기를 봉사했지만 총원장 아빠스로 지명되는 것에 대해서는 완곡히 거절하였다. 그가 수도원의 책임 있는 직책을 맡는데 있어 주저한 것은 그의 깊은 겸손과 수도승과 수도원의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만남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멀어지게 한다는 그의 진지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부원장으로 재임하는 중에도 늘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수도원의 관습에 따라 그의 개인적인 용무를 돌보아 주는 특별한 보조자를 두는 것조차 거부하였다.
1858년 12월 크피판의 수도원에서 수도승들을 지도하던 그는 그 지방에 퍼진 독감에 걸려 위중한 병에 걸렸고,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12월 14일 50세의 나이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동정 성모 마리아의 이콘을 손에 쥐고 “오, 성모님, 당신께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는 말을 남기고 선종하였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레바논의 고통의 시간과 수도회 내의 어려움 중에 그의 동료 수도승들과 이웃들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어 ‘크피판의 성인’으로 알려졌었다. 그는 1998년 5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4년 5월 16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